시평

소셜테이너와 소셜아티스트
99% 대 1% 사회가 아니더라도
송준호_한국일보 기자

 카메라와 마이크 앞을 떠난 연예인들이 거리로 향하고 있다. 시위 현장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이들은 광우병 파동 때 촛불 집회를 시작으로 홍대 청소노동자 현장, 반값 등록금 투쟁,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파업 현장에 이르기까지 적극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최근 몇 개월간 가장 큰 화두인, 이른바 ‘소셜테이너’들이다.
 ‘소셜(Social)+엔터테이너(Entertainer)’의 합성어 소셜테이너, 사회적 이슈에 관심을 갖고 발언하며 행동하는 연예인을 지칭한다. 유명인으로서 여론에 미치는 영향력 때문에 이들은 대중과 언론의 꾸준한 관심을 받고 있다. 예전이라면 노동계나 시민사회들만의 현안에 그쳤을 문제를, 소셜테이너들은 자신의 영향력을 통해 대중에게 확산시키고 관심과 지지를 촉구한다. 이렇게 되자 한 방송사에서는 소위 ‘소셜테이너 금지법’을 적용시키며 이들에 대한 경계를 시작했다. 하지만 이는 곧 정치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인권침해적 사규라는 비난에 직면하고 있어서, 소셜테이너의 영향력은 앞으로 더 커질 전망이다.
 이에 비하면 문화예술계의 사회참여는 크게 부각되지는 않아도 꾸준하다. 근래만 해도 용산 참사 사태나 4대강 사업 반대,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립, 한진중공업 사태 등 당대의 현안들이 첨예하게 대립각을 이루고 있는 곳에는 많은 문인, 화가, 공연예술인들이 있었다. 단지 ‘소셜테이너’처럼 ‘소셜아티스트’라는 용어가 따로 회자되지 않는 것은 개개인의 인지도 차이보다는 예술이 사회 속에서 작동해왔던 원래 기능과 맞닿아 있다. 예술 자체가 당대의 소산인 만큼, 현실 사회의 가치를 고민하고 이를 어떤 방식으로든 표현하는 것은 특별히 낯선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난 세기에는 ‘민중예술’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면, 이제는 시민사회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대변해주는 사회참여의 매체로 승화되고 있다.
 문제는 이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소셜테이너에 대한 시선이 특정 정치 세력과의 관련성을 의심하는 쪽과 격려하고 지지하는 두 개의 입장으로 갈리듯, 예술가의 사회참여 행위를 부정적으로 보는 세력도 역시 존재한다. 이런 시선은 오히려 예술계 내부에서도 흔치 않게 발견된다. 이는 대부분 예술의 생산과 유통의 당위성이 기존의 공연장이나 전시장에만 있어야 한다는 보수적인 인식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문화예술 활동이 활발해지기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시민사회의 발전이 전제되어야 함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물론 그 반대도 성립 가능하다. 결국 문화예술 활동의 향유자들과 생산자들의 정신적 교감과 연대가 있을 때, 예술계와 시민사회는 상생의 길을 걸을 수 있다. 현재 점점 입지가 좁아지고 있는 일부 기초예술이 어떤 이유로 위기를 자초했는지 생각해보면 이는 더욱 중요한 사실이다.
 그동안 문화예술계 일각에서도 4대강 사업이나 비정규직 노동자 부당해고 등의 거국적 현안에 시국선언 등으로 참여하며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존재감을 드러낸 바 있다. 하지만 최근 예술계가 한 목소리를 가장 크게 냈던 것은 ‘예술인 복지법’ 추진 때였다. 우여곡절 끝에 지난달 28일 국회를 통과하긴 했지만, 아직도 문화예술계 밖에선 ‘밥그릇 싸움’이나 ‘형평성 문제’ 같은 비난이나 지적들이 적지 않다. 이는 결국 ‘예술인 복지’와 같은 당연한 주장이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예술가도 평소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책무를 다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비상식이 활보하는 시대, 경쟁과 결과만이 궁극의 가치가 되는 신자유주의 세상은 사람들을 거리로 내몰고 있다. 월스트리트에서 시작돼 전 세계로 퍼지고 있는 ‘1%에 대한 99%의 투쟁’은 한국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진행 중이다. 거리에서 사람들은 단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고 자신들의 생각을 표현하고 있다. 이 때문에 다시 상상력과 창의력이 요구되는 시대가 되고 있다. ‘상상력이 곧 권력’이라는 구호와 그 흔적들도 속속 나오고 있다. 크레인 위에서, 제주도의 한 마을에서, 희망이라는 이름의 버스에서도 그런 공감의 표현과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요구하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지금이야말로 예술가의 역할이 절실히 요구되는 때라는 것이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이애주 교수의 시국춤을 기억한다. 그때 거리에 모였던 사람들은 거기에서 새로운 사회에 대한 희망과 용기를 얻었다. 지금도 ‘희망버스’, ‘희망비행기’의 작명 센스에서는 희망을 기대하는 사람들의 염원이 엿보인다. 그렇다면 또 다시 시대가 새로운 희망의 글, 희망의 음악, 희망의 그림, 희망의 춤을 계속해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2011. 11.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