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조기숙 〈백조의 호수〉
춤과 소통, 그리고 몸의 발견
이창현_국민대 언론정보학부 교수

춤 비전공인 입장에서나마 우선 박수부터 보낸다. 조기숙의 〈백조의 호수〉가 막을 내렸다(5. 12~13. 이화여대 삼성홀) '사랑에 반(反)하다(2008)', '사랑에 취(醉)하다(2009)', '사랑에 빈(彬)하다(2010)'에 이어 사랑에 통(通)하다(2011)가 연작으로 마무리되었다. 공연 후 신촌역 근처 뒷풀이에서 안무자는 반취빈통(反醉彬通)이라고 건배사를 풀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통통통(通通通)으로 답했다. <백조의 호수>를 사랑으로 표현하고 그 사랑의 4가지 모습을 4자성어로 표현한 것에 동감하며 그렇게 외친 것이다.
 

 
그렇다. 춤은 소통이다. 춤을 통해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표현한다. 원시 부족시대의 춤에서 시작해서 전통적인 무당의 춤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춤을 통해 무엇인가 아우라를 느낀다. 아울러 서구사회의 발레와 탱고를 내면화하기도 하고, 혼종문화로서 비보이의 춤을 창안해내기도 한다. 춤을 통해 우리는 ‘자연과 신의 위대함’을 느끼기도 하고, 춤추는 상대방의 ‘정열적 몸’을 감지하여 사랑에 이르게도 한다. 춤은 이처럼 우리에게 무엇인가와 소통하게 해주는 중요한 도구이다. 그런데 춤이 생명력을 잃고 있는 것 같다. 무당의 춤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서구의 춤도 박제화되어 오늘날 우리 현실을 제대로 담아내고 있지 못하다. 춤이 사회적 기능을 잃어갈수록 춤의 욕구는 더욱 강화된다. 춤추고자 하는 것은 소통하고자 하는 인간의 기본 욕구를 반영하는 것이다. 

 


특히, 자신의 몸과 소통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본질적인 욕구의 이해 과정이다. 프로이트가 인간 성장 단계를 구강기 등으로 분석한 것도 바로 인간 발달이 몸의 욕구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청소년기를 거치면서 몸의 변화를 느끼고 이것에 따라 사랑이 싹트고 가족이 형성된다. 그것처럼 우리는 40대를 넘기며 자연스럽게 갱년기에 따른 몸의 노화에 순응해야 한다. 40이 넘어 20대의 몸의 문법으로 살 수 없는 것이 듯, 20대의 욕망에 사로잡혀 있어도 적절치 않다. 인생의 라이프 사이클에 부합하는 몸의 변화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에 우리의 정신을 맞추어 가야한다.
 

 
그런데 현대에서 몸은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 몸은 단순한 육체 노동을 제공하는 원자재쯤으로 파악한다. 몸과 소통하지 않은 채 몸을 혹사하고 있다. 매일같이 사지 말단부와 섬세한 소통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몸으로부터 단순한 노동력을 얻기 위해 칼로리로 계산된 음식을 투입하고 배설하는 기계적 작업만을 반복한다. 때문에 몸은 병들고 그래서 마음까지 건강함을 잃어버린다. 그러므로 몸의 르네상스가 필요하다. 몸을 재발견해야 한다. 특히 신체의 말단까지 느끼고 움직이고 소통시켜야 한다. 그리고 타인과 교감해야 한다. 불감의 시대에 몸을 통한 소통을 복원해야 한다.
 

 
조기숙의 뉴 발레는 소통을 추구한다. 전통의 각질을 벗겨내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서 발레를 살려낸다. 기존 발레가 귀족적이며 과거의 문법만을 재현하는데 그쳤다면, 조 교수의 뉴 발레는 발레의 핵심적 정신은 유지한 채 새로운 시대의 변화를 적극 수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뉴발레는 2011년을 사는 현대인과 소통하는 새 시도를 보인 것이다. 나는 조 교수의 행위가 현대 지식사회에서 글의 논리 속에 억압된 몸의 논리를 재생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몸을 억압하지 말고 몸을 통해 새로운 소통의 문법을 발견해야 한다. 
 

 
글이 몸을 억압하기보다는 몸의 다양한 의미를 글로 적극 표현해야한다. ‘ 사랑에 통하다’의 첫 장면에 프리마돈나의 뒷모습 날개 짓은 그 대표적인 표현이다. 글로 표현할 수 없는 충격적인 날개짓, 몸짓이었다. 근육 하나 하나가 섬세하게 느껴지는 그러한 비상의 몸짓처럼 조 교수의 노력이 좋은 성과를 맺었으면 한다. 아울러 비즈니스를 하는 기업인(정창권)의 동참의지와 각고의 노력은 융합의 기운을 적극 보여준 사례이다. 나도 춤 한번 추고 싶다. 브라보... 

 

2011. 06.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