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1984년 공연예술 전문지 월간 「객석」의 기자로 공연예술계 현장과 첫 인연을 맺었으니 어언 35년을 훌쩍 지나고 있다. 그 사이에 대한민국의 공연예술계 환경은 많은 변화가 뒤따랐다. 춤계 역시 예외가 아니다.
장애인 무용, 무용영화, 커뮤니티 댄스, 무용치료, 무용복지, 환경무용 등 무용예술의 영역이 확장되었고, 공연장소도 다변화되었으며, 무용 전공생들의 졸업 후 진로도 훨씬 다양해졌다. 춤 국제교류가 활발해졌고 만들어진 작품의 유통 기회도 확산되었다. 이 같은 흐름들은 2019년 춤계가 보여준 변화의 양상이기도 하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 한국의 춤 사회는 훨씬 다양해졌고, 무용예술의 사회적 가치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으며, 전체적으로 그 만큼 비대해졌다.
이 같은 춤 사회의 양적 발전에는 원로 무용가들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무용수 · 안무가 · 무용교육자로, 대표 · 단장 · 교수 · 예술감독 · 회장 · 이사장 등등의 직함과 나이 들어가면서 자연스럽게 뒤따르는 무용 지도자란 꼬리표를 달고 대한민국의 원로 무용가들은, 춤 만들기와 가르치기를 통해 제자들을 배출하고 작품을 남기고, 새 행사들을 만들었다.
오늘날 대한민국 춤계의 각종 지표를 수적으로 늘린 데는 분명 원로 무용가들의 기여가 있었지만, 그 힘을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착각, 부정적으로 행사한 사례는 오늘날 춤계에 팽배한 반목과 대립, 불신 조장과 무용사회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형성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돌이켜보면 지난 35년 동안 춤 계 현장에서 맞닥뜨린 원로 무용가들에 대한 문제는 밝음과 어둠이 공존하는, 뜨거운 감자였던 때가 적지 않았다.
우리나라 전통춤이 오롯이 춤 그 자체로 전승되지 못하고,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 · 전수조교 · 이수자 선정을 둘러싼 부정적인 사태를 야기시킨 책임에서 원로 무용가들은 자유로울 수 없다. 제도권 속 전통춤 교육 과정에서 무형문화재로 지정받은 춤 이외에 다른 훌륭한 우리춤의 자산들이 교육되어지지 못한 책임 역시 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들과 이수자 자격을 가진 대학 무용과 교수들이 저지른 잘못이다.
30년 넘게 국립무용단과 국립발레단의 단장을 역임한 송범 선생, 임성남 선생은 한국적 무용극이란 공연 양식을 정착시키고, 한국 발레 발전의 토대를 만들었지만, 30여 년 장기 재임하면서 변화하는 세계 춤의 흐름을 수용하는 데 소극적이었고, 프로페셔널한 무용단 체재 구축과 단체 운영, 국제 춤 시장에서 경쟁할 만한 레퍼토리의 양산에서는 만족할 만한 성과를 끌어내지 못했다.
그들의 뒤를 이어 국공립무용단의 단장을 맡은 원로 무용가들 역시 재임 기간 동안 거의 모든 정기공연을 자신의 안무 작품으로 채웠고, 이는 수십 년의 역사를 가진 대한민국 국공립무용단들이 대표적인 레퍼토리 정착에서 성과가 빈약해진 요인이 되었다.
국공립 무용단체의 공공성 획득이 양보다는 질 높은 공연에 있음을 그들은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국공립무용단의 단원들 역시 질 높은 춤을 통한 공공성 획득을 위해서는 자신들 스스로가 탄탄한 춤 기량을 갖추어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무장되지 않았고, 그런 책임감을 일깨우는 데 있어 원로 무용가들은 매우 소극적이었다.
대한민국의 무용 콩쿠르는 오래된 것이나 새로 생긴 것이나 그 차별성이 약하고 무엇보다 교육적 기능이 미약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최근 몇몇 원로 무용가들이 새로 시작한 무용 콩쿠르 역시 여타 콩쿠르와의 차별성이 보이지 않는다.
무용 콩쿠르는 참가자들이 무용수로서 기본기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이를 통해 창의력을 배양하고, 결국 뛰어난 무용수로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순수한 교육적 과정이 되어야 한다.
참가자 모두가 입상하는 사이비 무용 콩쿠르가 난무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탈락자가 훨씬 많은 권위 있는 무용 콩쿠르의 경우도 참가자들이 그 과정 자체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교육적 기능의 회복이 다른 무엇보다 급선무이다.
무용수들의 병역특례를 몇몇 콩쿠르 입상자로 한정시키는 제도를 오래 동안 유지시킨 데는 어느 일면 원로 무용가들의 잘못도 있다. 남성 무용수들의 병역특례 제도를 정책적으로 운용하는 외국 사례를 우리나라 춤 계에 적용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관계 기관을 설득했어야 했다. 며칠 전 정부는 부정 운영을 이유로 병역 특례를 적용시키는 무용 콩쿠르와 특례자 수를 대폭 줄였다.
대학무용 교육에서 한국무용 · 현대무용 · 발레라는 삼분법에 고착, 학생들이 한정된 테두리 안에서 춤을 접하도록 교과과정을 운영한 원로 교수들은 무용전공 학생들의 졸업 후 진로 설정과 관련, 무용수와 안무가· 무용 교육자, 그리고 무용 관련 직종으로의 진출 등 그 전문성을 살릴 수 있도록 선택의 폭을 열어주는데도 소극적이었다. 그들은 이 같은 행태가 야기한, 결과적으로 춤 계의 경쟁력을 약화시킨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입시 부정, 학력 위조 등으로 언론에 오르내리며, 사회의 지탄을 받은 일부 원로 무용교육자들이 우리 사회에 끼친 병폐는 두고두고 가슴 아픈 ‘사실’임을 넘어 춤 예술에 대한 사회 통념과 이미지를 부정적으로 형성하는 데 일조했다. 입시와 무용 콩쿠르와 연계된 부정행위로부터 100 퍼센트 자유로운 무용가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적어도 대한민국의 원로 무용가들은 ‘예술’을 갖고, ‘교육’을 갖고 부정을 저지르는 치욕적 과오는 되풀이하지 말았어야 했다.
한국의 지도급 원로 무용가들 중에는 이전에 활발한 창작 작업을 보여준 이들이 적지 않다. 특히 대학에 적을 두고 교수 무용가의 길을 걸어온 분들 대부분은 ‘논문’ 보다는 ‘작품’으로 자신의 연구 성과를 대신했다.
안무가와 무용교육자의 길을 병행해 온 원로 무용가들에게 평생 안무가로서 자신을 대표할 만한 작품을 만들었는가? 또는 대표작으로 꼽은 그 작품이 과연 예술적 완성도에서 평균점을 높이 상회할 정도로 빼어난 작품인가? 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주저 없이 ”그렇다“라고 대답할 만한 이들은 과연 몇이나 될까?
작품마다 편차가 있겠지만, 원로 무용가들이 만든 작품 중에서 세계 춤 시장에서 유통되는 작품이 거의 없음을 볼 때 한국의 원로 안무가들은 질보다는 양을 쫓아갔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대한민국의 원로 무용가들은 결국 세계 춤 시장에서 경쟁할 만한 경쟁력 있는 작품을 만들지 못했고, 세계무대에 내놓을 수 있는 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 안무가도 제대로 길러 내지 못했다. 대한민국의 원로 안무가들은 많은 작품을 창작하기보다는 하나의 작품이라도 재공연을 통해 예술적 완성도를 배가, 경쟁력 있는 레퍼토리로 만들어 가는 작업에 매진했었어야 했다.
춤계 발전을 위한 원로 무용가들의 역할
춤 현장에서 만난 무용가들로부터 ”우리 춤계에는 어른이 없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이는 어른은 많지만 존경할 만한, 진정으로 한국 춤계를 걱정하며 그 방향을 선도해줄 어른이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춤계에 자주 얼굴을 내미는 원로 무용가들은 지금 현시점에서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한국 춤계 발전을 위해 과연 필요한 것인지 겸허하게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제자들에게 또는 후학들에게 물려줄 것은 물려주고, 독려할 것은 독려해 주는 아량과 함께 때론 자신의 희생도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이 그 옛날 가졌던 힘과 영예가 약해지고 엷어지는 것을 체감하기를 스스로 두려워해서도 안 된다. 오래 동안 형성된 인맥과 관계설정에서 야기되는 이해관계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모습이나 행동도 스스로 경계해야 한다.
명예와 권력은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것이지 본인이 억지로 만든다고 해서, 가지려고 해서 갖게 되는 것이 아니다. 설사 그것을 득했다 하더라도 누릴 만한 그릇이 안 되면 그것 자체가 본인에게는 짐이 될 뿐이다. 권력 주변에서 서성이는 중견, 중진 무용가들이 보인다면, 원로 무용가들은 그들에게 예술가 본연의 자존심으로 재무장하도록 따끔하게 충고할 수 있어야 한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춤 사회와 환경을 고려한, 원로 무용가들의 역할에 대한 메모를 정리하면서 일본과 미국, 독일의 무용가들이 떠올랐다.
일본 북서쪽 동해와 접해 있는 작은 도시 아키타(秋田)는 부토의 창시자인 히지카타 타츠미(Hijikata Tatsumi)와 최승희의 스승이기도 한 무용가 이시이 바쿠(Ishii Baku)의 고향이다. ‘Odoru Akita’(춤추는 아키타)는 2015년에 현대무용사에서 큰 족적을 남긴 두 원로 무용가의 이름을 내건 국제 축제로 태동되었다.
2019년 9월 제5회 ‘춤추는 아키타’ 폐막공연 후 로비에서 출연자들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관객들. 일본 아키타에서 매해 개최되는 국제 무용축제 ‘Odoru Akita’(춤추는 아키타)의 정식 명칭은 ‘International Dance Festival Baku Ishii & Tatsumi Hijikata memorial’이다. 평생 이룩한 예술적 성취를 기반으로 그들의 이름을 내건 축제가 고향에 만들어져 주민들의 생활 속에서 숨 쉬도록 하는 것. 원로 무용가들의 춤 유산이 어떻게 활용되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장광열 |
24세 때인 1974년 동양인으로는 처음 세계적인 바르나 콩쿠르에서 우승한 모리시타 요코(Morisita Yoko)는 150㎝의 단신이지만 뛰어난 테크닉과 표현력을 갖추어 루돌프 누레예프의 파트너로 파리오페라발레단과 함께 공연하는 등 ‘동양인에게 발레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편견을 불식시켰다. 그녀는 도쿄에 마쓰야마발레단을 창단, 71세인 지금도 매년 전막 발레에 출연하는 등 현역 무용수로 활동하고 있다.
자신이 평생 이룩한 예술적 성취를 기반으로 자신의 이름을 내건 축제가 고향에 만들어져 무용이 주민들의 생활 속에서 숨쉬도록 하고, 공공 지원을 받는 무용단체가 없는 나라에서 한 평생 무용수로 교육자로 일본 발레의 활성화를 주도하는 모습은 오랜 시간 춤과 함께 한 원로 무용가들의 아름다운 흔적이 아닐 수 없다.
마사 그레이엄과 엘빈 에일리 사후 그들이 남긴 작품의 저작권 문제로 미국에서는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었다. 머스 커닝햄은 이 같은 문제가 불거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생전에 레거시 플랜(Legacy Plan)을 만들었고, 마크 모리스는 2018년에 레거시 플랜의 하나로 사후에 공연할 작품을 미리 준비하는 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 독일 슈투트가르트발레단의 드라마 발레를 견인했던 존 크랑코의 안무 작품들은 그의 사후 존 크랑코 재단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
대한민국 원로 무용가들은 새 작품을 창작하기보다는 자신이 춤추고 안무한 대표작들을 체계적으로 보존하고 전승시키는 일에 더 공력을 쏟을 필요가 있다. 정부와 관련 기관의 지원이 없더라도 스스로 이 같은 작업을 최우선적으로, 주도적으로 해나가야 한다.
새해 한국의 춤 계가 경쟁력을 갖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1) 무용가들과 춤계 주변인들(비평가, 기획자 등)의 제자리 찾기 2) 춤 교육 아카데미즘의 정상화 3) 춤 저널리즘의 건강성 회복 4) 지원정책의 효율성 배가 5) 공공 직업무용단의 체질 개선 6) 춤 지도자들의 재교육 7) 지도급 무용가들의 공공성 회복 등이 필요하다.
이중 지도급 무용가들의 공공성 회복은 원로 무용가들에게 춤계 전체의 발전을 위한 원로로서의 역할을 주문하는 것이다. 열악한 춤 환경 속에서 일구어 냈던, 상대적으로 춤추고 교육하기 어려웠던 여건 아래서 얻은 경험들을 춤 사회로 건강하게 환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오래 전 무용교과목독립추진위원회(무교추)가 세종문화회관 광장과 컨퍼런스홀에서 `무용 교과목 독립을 위한 전국 무용인 결의대회 및 현장보고 대회`를 개최했을 때 김천흥, 강선영, 김백봉, 조흥동 선생을 비롯한 12명 원로 무용가들의 역할은 지금의 무용교육혁신위원회가 무용교사 자격증 취득이란 성과를 얻게 한 동력이 되었다.
지역 춤계의 어려운 여건을 개선하는 일이나 춤계의 잘못된 관행을 고치기 위한 고언이나 무용 지도자들을 위한 양질의 재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것도 하나의 방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최승희가 만든 ‘조선민족무용기본’이 아시아권을 중심으로 빠르게 보급될 수 있었던 요인은 그가 1958년에 이미 「조선민족무용기본」이란 책을 펴내 자신의 춤 메소드를 정리했고, 이를 비디오로도 제작해 누구든지 손쉽게 배울 수 있도록 했고, 자격증 발급을 통해 이를 가르칠 수 있는 강사들을 체계적으로 배출한데 기인한다. 메소드 개발, 교재 개발, 보급자 개발의 삼박자가 잘 맞아떨어진 것이다.
이제 대한민국의 무용가들은 공연을 하는 것만이, 작품을 안무하는 것만이 자신의 예술성을 인정받는 길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자신이 오랜 동안 개발한 무용수들의 훈련 메소드나 테크닉 등을 이론적으로 정리하고 이를 세계 여러 나라의 무용수들과 움직임을 연구하는 전문가들에게 보급시킬 필요성이 있다. 우리나라 전통춤의 경우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불행하게도 대한민국의 원로 무용가들은 대한민국의 전통춤이 가진 소스(source)를 정리하고 그것을 가르치는 기본 메소드 하나 통일시키지 못했다
한국의 춤은 이제 세계무대에서 논의되고 검증되어야 한다. 한국의 무용예술을 알리는 작업은 국내 무용단체들이 외국을 방문해 공연을 갖도록 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효율성 면에서 보면 인적 교류와 출판물을 통한 교류가 오히려 더 중요할 수 있다.
한국의 춤에 관한 전문가들을 외국에 많이 포진시키는 것도 중요하다. 해외에서 한국무용 전문가를 육성하는 것과 함께 출판물을 통한 한국의 춤을 알리는 사업 역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세계 어느 나라의 유명 서점에 가더라도 한국에 관한 책, 한국의 춤에 관한 책을 발견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위에 열거한 사업들은 상대적으로 경험이 축적되고 시간적인 여유가 많은 원로 무용가들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몫이다. 사업의 효율성을 높이려면 원로 무용가들이 이 같은 활동을 수월하게 행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공공 시스템이 동반된다면, 금상첨화가 될 것이다.
1955년에 생긴, 헌법이 보장한 예술가의 대표 기관. 매달 180만원의 수당을 받는 대한민국 예술원 소속 원로 무용가들은 대한민국 춤 계 발전을 위한 현안들을 챙기는 작업을 통해 ‘예술원 회원’이란 존재감을 인정받도록 해야 한다.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무용가들은 예술원 회원이 되기 위해 그 주변을 서성이는 일부 중진 무용가들을 향한 이해관계보다 예술교과목에 무용이 채택되어 초중등학교 때부터 자연스럽게 무용을 접할 수 있도록 하고, 무용전용극장과 국립무용원(국립댄스하우스)이 만들어져 창작과 교육 등 무용예술 관련 서비스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지도록 하고, 우리 춤을 외국에 보급시킬 교재를 만들어 세계인들이 춤을 통해 한국의 정서를 공유토록 하는 대한민국 춤계의 오랜 숙원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데 더 큰 목소리를 내야 한다.
평자가 지난 35년 동안 춤계 현장에서 만났던 원로 무용가들 중에는 빼어난 춤으로, 실험적이거나 완성도 있는 작품으로, 독창적인 춤 메소드의 정립으로, 곧 무용수· 안무가· 무용 교육자로 대한민국 춤계 발전에 기여한 분들이 분명히 있다.
지역의 터줏대감으로 제자양성과 함께 지역 춤 계 활성화와 발전의 기반을 구축한 것도 원로 무용가들의 공이다. 오늘날 대구가 현대무용, 광주가 발레, 부산이 한국춤을 중심으로 활성화되고 있는 것도 해당 지역을 기반으로 한 원로 무용가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춤계 발전을 견인한 원로 무용가들의 밝은 면면들과 그들의 축적된 경험과 노련함이 이제는 건강한 춤 사회를 만들어가는 양질의 거름이 되기를 희구한다. 이 글을 쓰면서 지난 세월 원로 무용가들이 보여준 면면들은 지금 현재의 젊은 무용가, 중견, 중진 무용가들에게 하나의 시금석으로, 그것 자체가 교훈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자년 새해에 원로무용가들을 향한 이 바람은 곧 대한민국 춤계 구성원 모두를 향한 여망인 셈이다.
2020년 대한민국 춤계는 무용예술이 창작과 교육, 복지의 중요한 수단으로 활용되는, 무용예술의 사회적 가치에 대해서 국가를 상대로 주장하고, 설득하고, 이해시키고, 또 그 실행을 적극적으로 주문해야 한다.
장광열
1984년부터 공연예술전문지 〈객석〉 기자, 편집장으로 20여 년 활동했다. 춤비평집 『변동과 전환』 , 『당신의 발에 입맞추고 싶습니다』 등의 저서가 있으며, 서울국제즉흥춤축제 예술감독 등을 맡아 춤 현장과 소통하고 있다. 한예종·숙명여대 겸임교수로 후학들을 지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