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해외 여행이 보편화되고 어떤 이는 그것이 일상화된 시대를 살고 있다. 외국 여행 중에 현지의 마트나 수퍼 같은 매점에서 어쩌다 한국 상품이 눈에 띈 경험도 흔할 것이다. 개중에서도 인스턴트 식품류는 빨강, 검정, 노랑, 초록 색깔로 포장되어 한국풍을 뽐낸다. 선명한 한글로 개성있게 다듬어진 상품을 만나면 마치 지인을 해외에서 우연찮게 만난 듯 반가운 마음이 들기도 하며 때론 설렘마저 인다. 국내에서 지명도가 꽤 높은 상품 앞에선 그런 반가움이 한층 배가되고, 지명도 낮은 상품에서는 이젠 이런 제품도 해외에 수출되는구나 하는 호기심과 함께 응원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마트에 빼곡히 진열된 그 수많은 상품들 가운데 유독 한국 상품 앞에서 그런 기분이 드는 것은 왜일까? 한국 상품과 나 사이에 마치 전류처럼 통하는 어떤 정체성 같은 것이 일순간 발동한 때문일 것이다. 그런 기분을 일종의 뿌듯한 마음 상태로 읽어낸다면 그저 촌스러울까.
지난 연말 보도에 따르면 2018년도 한국의 해외 수출액이 사상 처음으로 6000억 달러(약 650조원)를 넘어섰고 세계 수출 순위 6위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수출 강국이라 해도 손색없는 나라를 일굴 만큼 밤낮없이 수출에 매진해온 사람들과 기업의 노고는 기억되어야 하고 기억되고 있다.
수출이 국내 경제성장에 기여하는 비중이 2017년도에는 65%였다. 그해 경제성장율 3%의 65% 즉 2%가 수출 덕분이었다는 뜻이다. 그 전에는 수출 상황에 따라 30%대 또는 10%대를 기록하는 등 수출이 국내 경제성장에 기여하는 비중에는 기복이 있다. 특히 인구 5천만의 규모인 한국은 내수 시장이 작고 원천적으로 한계가 있어 대외 수출에 주력해야 할 것은 당연하다. 참고로, 한국 경제의 무역 의존도는 지난 10년 간 90~110%를 기록하였다. 수출이 한국경제에 절대적인지는 다소 판단을 요하는 점이라 해도, 수출이 늘수록 한국 경제가 윤택해질 것은 자명하다.
50여 년 전 동네방네 모발 수집상들이 유료로 수집한 모발을 가공해서 가발로 수출해 한국인의 모발이 우수하다고 호평받는다는 일화는 과거지사가 되었다. 그간 한국의 주요 수출품목은 경공업에서 전자IT산업과 중공업 제품군으로 대대적으로 이동하였고 ‘트럼프 압력’이 대변하듯 언제나 국제 무역 시장은 무기 없는 조용한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수출 의존도가 절대적인 나라가 수출 전략을 다방면으로 세울 것은 불문가지의 일이겠으나, 경제 전문가가 아닌 필자의 눈에도 보이기를 수출 전략은 유동적인 무역 환경에 따라 언제나 새롭게 기획되고 보강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한국 예술인의 해외 활동을 수출 전략 면에서 고려해보기를 권하겠다. 상식적으로 말해서, 해외에서 행해지는 타국의 예술은 먼저 해당 국가에 대한 신인도를 높이고 친화감을 갖도록 하여 우호 관계를 다지는 것은 물론 간접적으로는 해당 국가 제품의 이미지를 업그레이드시키는 효과를 갖는다. 이를 예술의 대외 파급 효과라 부르면 어떨까 싶다. 스포츠와 대중예술뿐 아니라 고급예술도 이른바 국위 선양 효과를 갖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우리 예술인들이 해외 예술인 및 기관, 관객과 접촉하는 빈도를 계량화한 연구가 있는지 모르겠으나 수많은 예술인들이 공연과 전시를 통해 해외에서 그렇게 접촉하고 있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국가 신인도 등의 측면을 중시하여 우리 정부도 부분적이나마 국제 교류를 지원하고 있다.
수출 전략 면에서 예술을 활용한 것으로는 과거부터 주력해온 한국 상품의 디자인 개발·개선이 첫손에 꼽힐 것이고, 근래의 한류 열풍이나 케이팝 열기가 한국의 수출을 크게 도왔을 것은 물론이다. 2017년 한류가 유발한 국내 생산 효과는 무려 18조원이라 한다. 이에 비하여 고급예술이 대외 수출을 도울 것이라는 인식은 우리 사회에서 퍽 미미한 것으로 생각된다. 무엇보다 무역 전쟁이 가중되고 해외 소비자의 안목이 세련되며 높아질수록 한국의 수출 전략은 예술에 정중히 도움을 청해야 할 것이다. 수출 규모가 커지고 나라의 격이 올라가는 데 비례해 당연히 수출 전략도 고도화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 고급예술의 대외적 역량과 파급 효과에 대해 인식의 대전환이 요청된다. 2000년 이후 기업에서 국내 예술 활동에 대해 기울이는 관심도가 상당히 높아진 것으로 관측되는 반면에, 해외 예술 활동(국제 교류)에 대해서는 아직 그렇지 않아 보인다.
지난 12월 하순 문래예술공장(서울 문래동)에서 있은 무용가 김형민의 공연. 김형민은 10년전 독일 베를린으로 가서 현지에서 작품 활동을 해왔다. 이처럼 해외에서 활동하며 국내 무대에 서는 무용인들도 늘고 있다. 김형민이 한국의 이름을 내걸고 한 공연들은 현지의 주목을 받아왔고 현지의 기금지원을 받고 있다. 이날 공연은 퍼포먼스 요소가 두드러진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김채현 |
지난 한 해 해외에서 활동한 우리 무용인들은 얼마나 될까? 무용인들은 해외 현지의 무용단 소속 단원으로서, 국제 교류로 통칭되는 해외 공연의 창작자와 출연자로서, 해외 무용인·무용단체들과의 협력 창작자로서, 해외 경연대회 출전자로서 활동한다. 해외 활동 내역을 일일이 정리할 수 없을 정도로 무용인이 한국의 이름으로 행하는 예술 활동은 짐작보다 훨씬 많다. 그러나 춤계 외부의 일반인들에게 이런 점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름난 발레단, 현대무용단 등 유럽과 미국에서 현지 무용단 소속으로 오랜 기간 활동하는 우리 무용수는 100명을 훌쩍 넘을 것 같고, 해외 유수의 춤 경연대회에서마저 우리 참가자들의 잦은 최상위 입상은 아예 상식처럼 되었다. 아울러 해외의 춤과 공연예술 행사들에서 우리 작품들이 우리 무용인들에 의해 추어지는 것 또한 다반사가 되었다. 어떤 무용인의 경우 연간 절반 이상 기간을 해외에서의 순회 또는 창작에 임하는 탓에 국내에서 정말 얼굴 보기가 힘들다. 이런 사례는 앞으로 빠르게 늘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춤 예술은 넌버벌의 속성을 근본으로 하므로 해외 활동에서 걸림돌이 매우 작은 장르이다.
춤 시장은 해외로 범위를 넓히고 있다. 그러나 춤의 국제 교류에 대해 공공 기금이 지원되는 것은 어쩌다 지원 사업에 선정되면 주어지는 출연자나 창작자의 왕복 항공료 정도인 것이 대종을 이룬다. 국제 교류 당사자의 그 외 여비나 출연료, 저작권료는 스스로 해결해야 하며 해외 초청 측에서 해결해주는 사례는 그리 많지 않다. 저작권료는 대충 생략되기 일쑤다. 가령 다섯 명이 한 팀을 이루어 최소 1주일 간 유럽이나 미국을 다녀올 때 어쩌다 항공료를 지원받고 주최 측으로부터 숙박을 제공받는다 해도 당사자가 짊어져야 할 추가 경비를 생각해 보라. 예술인들의 해외 활동을 기리는 제도나 관행 역시 퍽 미진해 보인다. 이런 환경 탓으로 국제 교류에서는 적자부터 각오해야 하고 역량과 뜻이 있어도 국제 교류를 지레 포기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현장의 현실은 이러하다.
물론 창작자나 출연자 스스로 해외에서 생계비를 확보하는 것이 예술의 대원칙이라 하겠으나, 게다가 스스로 좋아서 하는 것이 예술이므로 웬만한 어려움은 감수해야 한다고 할지 모르겠으나, 오늘날 대중적 인지도가 매우 높은 소수 예술인을 제외하면 소위 선진국의 예술인조차 타국에서 생계비를 확보하며 순회하기 쉽지 않은 탓에 국가적·사회적 지원을 기본 관행으로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순수 고급예술이 겪기 마련인 시장 실패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과 예술의 대외 파급 효과를 고려하여, 필자는 정부와 대기업에 ‘국제예술교류진흥기금’(가칭)을 제안하려고 한다. 우리 예술인들의 해외 활동이 국가 신인도는 물론 궁극에는 한국 제품의 이미지를 업그레이드한다는 점을 수긍한다면, 그 해외 활동의 수혜자로서 해외 수출 기업을 첫 손가락에 꼽을 수 있다. 지금까지는 물론 앞으로도 더욱 더 해외 수출 기업은 그 수혜자가 될 것이다. 그래서 해외 수출 기업 가운데서도 대기업을 대상으로 국제예술교류진흥기금을 모금하는 것을 법제화하거나 아니면 이런 모금 취지를 실현할 규약으로서 정부와 대기업, 예술계가 상생 협약을 맺는 방안을 제안한다.
기금 모금에 호응하려면 우선 기업의 규모부터 그에 합당해야 할 것이므로, 모든 수출 기업·수출 제품을 대상으로 할 순 없다. 필자의 단순한 생각으로는 연 1억 달러 이상 수출 규모 기업이라야 예술의 대외 파급 효과를 실감할 듯하다. 2018년 100만 달러(11억원) 이상 수출 기업 1264곳 가운데 1억 달러(1100억원) 이상 수출 기업은 모두 62곳이었다. 이들 상위 62개 기업의 수출 총액을 추산하면 1500억 달러(165조원) 정도이다. 이를 기준으로 하면, 0.1%는 1650억원, 0.01%는 165억원이다. 0.01~0.1% 사이에서 수출 대기업이 감당할 기금의 적정 수준을 도출하면 어떨까 한다.
과거에 문예진흥기금은 전국의 극장 입장료 가운데 소액을 징수해서 모금한 것과 정부 출연금, 기부금 등을 합해서 운영되었으나, 2004년 극장 입장료 모금 부분은 폐지되었고 지금은 정부출연금, 공익자금, 광고수수료 일부 기금, 기부금 등으로 조성된다. 한국 경제가 그 만큼 커져서 극장 입장하는 시민에게 부담을 지우지 않아도 되었다. 국제예술교류진흥기금이 기업 입장에선 우선 부담스러운 준조세로 받아들여질지 모르겠다. 그러나 1) 예술의 국제 교류 추세 및 파급 효과와 2) 한국 수출 전반의 업그레이드 필요성, 3) 문화적 안목이 높은 소비자를 축으로 빠르게 고급화하는 해외 수출 시장을 한 묶음으로 들여다보면 준조세라는 인식은 사그라들 것으로 믿는다. 이를 위해 특히 대기업은 한국 고급예술인들의 해외 역량에 대해 새롭게 눈을 떠야 할 것이고,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예술경영지원센터는 이를 위한 정지 작업을 추진하기를 제안한다. 그리하여 언젠가 세계 각처에서 국격을 높이며 번져갈 고급예술의 한류 열풍을 꿈꾸고 싶다.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교수. <춤웹진> 편집장. 철학과 미학을 전공했고 춤·예술 분야 비평 수백 편과 저서 『춤과 삶의 문화』, 『춤, 새로 말한다 새로 만든다』를 비롯 다수의 논문, 『춤』 등의 역서 20여권을 발간했다. 지난 30년간 한국의 예술춤과 국내외 축제 현장을 작가주의 시각으로 직접 촬영한 비디오 기록물 수천 편을 소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