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3·1독립선언 100주년
自主獨立의 춤을 위하여
김채현_〈춤웹진〉 편집장

1919년 3·1만세운동(萬歲運動)이 오는 달에 100주년을 맞는다.

 “吾等은玆에我朝鮮의獨立國임과朝鮮人의自主民임을宣言하노라此로써世界萬邦에告하야人類平等의大義를克明하며此로써子孫萬代에誥하야民族自存의正權을永有케하노라...”(원본)

 “오등은자에아조선의독립국임과조선인의자주민임을선언하노라차로써세계만방에고하야인류평등의대의를극명하며차로써자손만대에고하야민족자존의정권을영유케하노라...”(한글본)

 “우리는 이에 우리 조선이 독립한 나라임과 조선 사람이 자주적인 민족임을 선언한다. 이로써 세계 만국에 알려 인류 평등의 큰 도의를 분명히 하는 바이며, 이로써 자손만대에 깨우쳐 일러서 민족의 독자적 생존의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누려 갖도록 하는 바이다...”(해석본)

 吾等과 玆, 두 글자를 기미독립선언서(삼일독립선언서)에서 난생 처음 보았다. 누구나처럼, 고등학교 때 국어 시간의 일로 기억된다. 역사 시간에는 삼일만세운동 경위를 배우고 국어 시간에는 기미독립선언서를 배웠을 것이다. 50년쯤 전의 일이다. 그때 내용에 앞서 맨 먼저 吾等(나의 복수형 우리)과 玆(이에, 지금)를 접한 것은 잠시 숨이 멈춰질 신선한 경험이었다. 더욱이 이 한자들이나 ‘오등은 자에’ 어구는 쉬우면서도 곧 이어지는 전체 내용을 열어 나갈 첫마디인 데에다 그 전체 내용이란 것이 다름 아니라 민족의 대의를 세계만방에 천명하는 것이어서 자랑스럽게 기억되기 마련이었다. 설득과 호소를 동반한 선언서라는 특성을 고려하더라도, 선언서 전문을 찬찬히 숙독하다보면 가슴 벅찬 감동은 물론 미문(美文)인 것을 직감하려니와 해석본에 비해 원본은 운율감마저 뛰어나다. 한민족이라면 느낌이 아마도 이와 닮을 터여서, 삼일독립선언서는 한국인들이 가슴속으로 가장 많이 기억하는 선언서인 줄로 믿는다.


 

기미독립선언서

 

 

 기미독립선언서, 삼일독립선언서라 하는 이 문건은 원래 ‘선언서’라는 이름으로 인쇄되었다. 모두 1792자에 걸친 선언을 여섯 문단과 공약 3장에 걸쳐 개진하는 선언서는 선언의 핵심(主旨·주지)을 맨 첫 구절에 간명하게 제시한다. ‘我朝鮮의 獨立國임, 朝鮮人의 自主民임’. 1919년 당시 조선의 문맹률을 고려하면 다수 민중이 선뜻 받아들이기에는 문장이 난해했을 듯하다. 이런 당대 여건에 비추어 바로 첫 구절에서 선언의 핵심을 거침없이 단숨에 제시함으로써 선언서는 조선 독립이란 목표와 구호 아래 온 겨레를 뭉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어지는 선언서 내용은 선언의 목적, 선언의 정당성, 일제 강점 10년 동안의 실상, 이전 40년 동안 일본이 저지른 죄상과 강제 합방의 부당성 및 동양 평화의 길, 세계정세의 호전, 선언의 실행 다짐, 선언의 평화적 실행 방안으로 요약된다.

 1910년 일본에 맥없이 점유당해 나라를 잃은 처지에다 언론·집회·결사의 자유를 박탈당하고 수탈마저 겪은 조선인이 감당해야 하는 고초를 일거에 해결하려면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회복하는 길밖에 없었다. 그러나, 일례로 일본인 교사들이 교실에서 군복 같은 제복에다 세이버라고 한 긴 환도(還刀)를 보란 듯이 허리춤에 차고 학생들을 가르쳤듯이, 전국 도처에서 무단(武斷) 정치의 폭압(暴壓)이 자행되는 터에 독립국임과 자주민임을 주창하기가 여의치 않았을 것이다. 

 합방 후 악몽 같은 아홉 해를 속절없이 견뎌가던 무렵 그해 1월 21일 고종이 승하하여 민심이 동요하고 마침 구미(유럽·미국)에서는 민족자결주의가 제창되고 있었다. 한일합방 10년째인 그해 1919년 연초 들어 만주 지역에서 저명인사들의 대한독립선언서, 일본 동경에서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다. 특히 대한독립선언서와는 독립 운동의 방법 면에서 차이를 보였어도 기미독립선언서는 당시 독립에 대한 조선인의 소망을 집약해서 국내에서 발표되어 독립만세운동의 기폭제가 될 수 있었다.

 무단 정치 아래 놓인 조선인들에게 태극기를 들 맨주먹과 독립만세를 선언할 함성 이외에 무슨 저항 수단이 있었겠는가. 평화적 시위의 목적을 달성하기가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 속에서 결행한 기미독립선언은 방방곡곡으로 번졌고, 특히 그해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망명가들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세운 것은 결정적인 일이었다. 제 나라에 정부를 세울 수 없으니 해외에다 세운 ‘임시’ 정부라는 것이요 임시를 벗어나려면 나라를 찾아야 할 것이었다. 올해는 기미삼일운동과 동시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의 해이다. 

 마침내 1945년 일본의 패망으로 나라가 독립하고 1948년 제헌 국회는 개원하면서 국호(國號)를 임시정부에서 채택한 대한민국으로 정하였다. 제헌국회는 헌법 전문에 ‘기미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라고 명시함으로써 1919년 기미독립선언으로 성립된 임시정부에서 민주공화제 정부가 기원하였음을 명문화했다. 즉 미완성이던 임시정부는 1948년 대한민국 정부로 승계되었으며, 강조하건대 오늘의 대한민국 정부뿐 아니라 오늘의 나와 우리는 기미삼일운동과 직결된다. 나라를 잃은 약소민족이 망명지에서 세운 임시정부가 다시 나라를 되찾아 새 정부로 승계되고 실질적으로 지속된 예는 세계사에서 흔치 않으며, 세계사에서 유례가 드문 그 임시정부는 100년 전 기미삼일운동으로 태동하였다. 

 1919년 3~5월 기미삼일운동에 규모 50명 이상의 집회만 1542회 열려 202만명이 참여하였다(당시 조선 인구는 1800만명이었다). 유관순 열사가 서울에서 다니던 학교가 3월 10일 휴교하여 천안 고향으로 내려가 아우내장터에서 만세 시위에 참여한 때는 4월 1일이었다. 일설에 의하면 1년간 2000여회의 삼일운동 집회에 1천만명이 참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 집회에서 7509명의 사망자와 45562명의 부상자가 발생했고, 피검자는 49811명이었다. 이러한 수치는 기미삼일운동이 거족적으로 맨주먹을 움켜쥐어 목숨을 걸고 나선 운동이었음을 역력히 나타낸다. 

 기미삼일운동을 100년 전의 촛불혁명이라지만 그것은 최근의 촛불혁명보다 훨씬 강력하며 결연한 혁명이었다. 희생을 무릅쓰고 어느 계층을 막론하고 능동적으로 앞장서서 독립을 선언한 기미삼일운동 이후 임시정부가 수립되는 데 더하여 국내외에서 자주독립운동이 활성화하고 민족의 자긍심이 되살려졌다. 단적으로 기미삼일운동으로 (민주공화정 정신의) 조선은 기적과도 같이 부활하였던 것이다.  

 근대 세계 체제에서 나라 없이 문화예술이 성립할 수 있었을까. 국경선을 넘나드는 지금도 문화예술은 일단 국가를 단위로 존속한다. 기미삼일운동으로 독립을 쟁취한 것은 아니더라도 독립으로 가는 도정(道程)이 뚫렸고 궁극적으로는 대한민국의 초석이 되었다. 이는 기미삼일운동이 지금의 문화예술에 대해서도 그 근본 토대를 마련해준 것으로 재해석·재평가되어야 할 것임을 뜻한다. 의미심장하게 주목할 점이다.

 이에 따라 기미삼일운동 이래 우리의 춤예술이 축적한 성과가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그 공(功)의 일정 부분은 기미삼일운동에 돌려져야 할 것으로 본다. 기미삼일운동은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성취해낼 길을 열었다. 이제 기미삼일운동 100주년이 춤에서도 독립과 자주가 함축하는 의의를 통찰하고 그 과제를 새삼 의논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김채현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교수. <춤웹진> 편집장. 철학과 미학을 전공했고 춤·예술 분야 비평 수백 편과 저서 『춤과 삶의 문화』, 『춤, 새로 말한다 새로 만든다』를 비롯 다수의 논문, 『춤』 등의 역서 20여권을 발간했다. 지난 30년간 한국의 예술춤과 국내외 축제 현장을 작가주의 시각으로 직접 촬영한 비디오 기록물 수천 편을 소장하고 있다. ​
2019. 02.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