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모방 없는 창작이 있을 수 있을까? 더군다나 요즘처럼 정보를 초스피드로 얻을 수 있는 세상에서 친절한 빅 데이터씨까지 합세해서 손쉽게 우리의 취향저격을 도와주고 있다. 우리는 구글, 페이스북, 유튜브를 통해 원하는 것을 검색하고 전 세계의 공연현장을 동 시간에 살펴볼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타인의 정보를 내 것으로 둔갑시키기가 참 편리한 환경이다. 이미 대중가요, 게임, 영화, 미술, 문학 등 거의 모든 상업 분야에서 제기되는 ‘표절’, ‘복제’는 끊임없이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춤도 이러한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저 장면은 어디서 본 것 같은데…”와 같은 카피(copy)에 대한 심증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지만 이를 확증하기에는 현실적 제약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심지어 영상으로 저장된 기록물이 있더라도 춤 현장에서 순간적으로 생성되는 이미지를 ‘카피’로 평가할 명확한 증거와 규준을 제시하기가 쉽지 않다. 구체적으로 스타일의 차용, 아이디어의 복제, 연출 기법 도용의 경계가 애매해서 그 기준을 세워 판단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수용미학의 관점에서 보면 작품평가가 수용자의 의미 부여에 따라 어떤 것이든 예술품이 될 수 있다. 비록 창작자가 원본을 모방했어도 관객이 그 원본을 모른다면 말이다. 또한 ‘혼성모방(pastich)’ 같이 모방 자체에서 새로운 의미가 형성된다는 현대예술의 한 조류의 측면에서 보면 물론 창작물로서 가치를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적 조류를 차치하고,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창작은 주관이라는 요소가 중요하고, 창작자의 새로운 시각이 보이는 작품을 우리는 ‘창작품’이라 말한다. 모방도 창작자가 취사선택하니 주관적 요소가 있는 것 아니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지만, 이 경우 아주 제한된 가치만이 생산됨을 또한 고려해야 한다.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최근에는 안무가들의 국제교류와 활동이 하나의 트렌드처럼 공식화된 경로로 자리 잡아 탁월한 재능으로 해외단체에서 댄서로 활약하다가 안무가로 전향하는 사례가 빈번해지고 있다. 다시 말해 활동은 해외에서 하고 연례행사로 국내에서 작품을 발표하는 안무가들이 늘어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이 흡수한 타문화에 기인한 새로운 시각을 기대하며 국내 관객들은 그들의 공연에 호기심과 매력을 느끼기 마련이다. 대표적 사례로 김판선은 탁월한 신체조건과 예술적 감각으로 작품을 발표할 때 마다 주목을 받았다. 그는 국내 LDP와 해외 유수의 단체와 교류하는 댄서이자 안무가로, 작년에 가야 댄스 컴퍼니(Gaya Dance Company)를 만들어 본격적 안무 활동을 시작했다.
김판선 〈두려움에 갇혀〉(Caged) ⓒSang Hoon Ok/2019 SPAF |
김판선의 신작 〈두려움에 갇혀〉(Caged)1)(2019,10,15~16.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그가 체화한 유럽적 감성과 세련된 감각이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전부터 간간이 국내에서 선보인 그의 작품들은 흥미를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예를 들면 전작인 〈Eating Spirit〉(2013.9.14. 서강대메리홀)에서도 그는 오브제와 몸의 관계를 촘촘하게 매개하여 생명의 탄생과 소멸이라는 이미지를 강렬하게 각인시켰다. 이처럼 전작에서 보여준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선 자아의 탐구, 연장선상에서 이번 〈두려움에 갇혀〉도 현실과 정신의 경계에서 두려움에 사로잡힌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조명하였다.
비닐에 포장된 침대와 소파가 있는 방으로 설정된 무대는 사람이 편하게 쉴 수 있는 방이 아니라 자의식에 고립된 방이다. 불투명한 비닐로 경계를 그은 벽은 현실과 생각의 접점이자 그 벽 너머는 두려움에 갇힌 여자를 지배하는 정신세계이자 마음을 묘사한 듯하다. 그 벽 뒤에서 남자(김봉수)의 얼굴을 복제하는 연출은 죽음의 두려움을 보여주고, 여자는 사랑의 상처 같은 두려움을, 그리고 피로 벽을 짓이기는 행위는 잔혹한 현실의 두려움을 은유한다. 여자(양지연)의 불안한 스텝과 행동들, 꼭두각시 같이 조정되는 남자의 생기 없는 움직임은 정서적 혼란의 상태를 표상하였다. 가혹한 현실과 상상이 그로테스크 기법을 통해 다양한 정황적 이야기를 채워갔고 이를 신경과민증적 정서로 풀어낸 것이라 해석된다. 여기에 소파와 침대 속으로 침전하듯 댄서의 몸을 흡입하는 설정, 벽 사이로 여자의 얼굴을 데칼코마니 시킨 배치, 피로 물든 무대장치는 현실과 무의식이 뒤죽박죽 얽혀 엽기적 무드를 극대화하였다. 마지막 장면인 여자에게서 태어난(?) 떨고 있는 댄서의 형상을 보며 두려움이 인간의 운명임을 김판선은 말하고 있었다. 작품은 예측할 수 없는 전개와 생경한 오브제 간 관계에서 나름의 의미를 유추할만한 기제들을 풍성하게 보여준다. 추가로 사실성과 추상성을 오가며 공상적이고 잔혹한 이미지들이 불러일으키는 궁금증과 낯선 연출이 신선함을 더하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라이브 음악과 함께 작품 주제인 두려움에 갇힌 인간의 실체를 드라마틱하게 보여주었다고 평가한다.
김판선 〈두려움에 갇혀〉(Caged) ⓒSang Hoon Ok/2019 SPAF |
김판선은 최신 유럽의 한 표현적 경향인 괴기함과 과장된 신체표현, 역설적이며 잔혹한 이미지 연출법에 흠뻑 빠져 있는 듯 보인다. 전반적으로 흥미로운 작품이었지만, 문제는 작품 사이사이 등장하는 오브제나 장면이 다른 작품들에서 봤던 장면들과 오버랩이 되었다는 점은 문제다. 몇 가지만 짚어보면, 작품 후반부에 피가 실제로 나오는 액자, 비닐벽 안에서 피를 바르는 장면, 남자의 늘어진 팔 같은 소재는 피핑톰 무용단의 가브리엘라 카리조(Gabriela Carrizo)의 〈Mother〉(2014)에서 표현된 장면과 유사하다. 〈Mother〉에서도 현실과 기억을 가로지르며 결핍과 부재 같은 내면의 의식을 공포감과 괴기한 연출 및 엽기적인 세트와 설치물로 충격과 시각적 자극을 추구한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퍼포먼스 계열에서도 그로테스크하고 괴기스러운 판타지 영역의 방향성을 선보이는 예술가들2)이 많을 것을 생각하면 김판선이 이런 유럽의 최신 트렌드에 매력을 느껴 이를 흡수하고 영향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김설진 〈MARRAM〉 ⓒBAKI/LG아트센터 |
다른 사례로 최근 관람한 LDP무용단의 〈트리플 빌〉 공연에서 김설진이 선보인 〈MARRAM〉(2019.9.26~29. LG아트센터)은 극적 서사를 담은 공간설정에 그가 오랜 시간 몸담아 왔던 피핑톰 무용단 스타일의 그로테스크 한 무드와 왜곡된 신체 사용이 결합된 작품이었다. 그는 작품에서 기억을 편집하고, 편집된 기억의 오류와 진실의 이미지를 무대에서 콜라주 형식으로 배치하였다. 이 작품에 사용한 가구들은 기억을 왜곡하거나 유지시키는 오브제로 기억의 불안정성을 환기시키는 매개체로 적절했다. 남녀 듀엣은 기억을 변형시키고 재조합하는 과정을 동작의 반복과 변형으로 일괄하였고, 한쪽에서 아슬아슬하게 의자 더미를 쌓아올리는 작업은 불분명한 기억의 현상을 은유하였다. 작품은 파편적인 기억의 조각과 왜곡된 편집이 인간의 관계 규정에 영향을 준다는 내용으로 김설진이 취사선택한 안무 조합이 설득력 있게 읽혔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피나바우쉬의 〈카페 뮐러〉(1978)와 유사한 무드와 기법이 오버랩 되었다. 의자와 테이블이 가득 쌓인 무대에 배치한 의식의 세계라는 설정, 남녀의 같은 패턴의 반복적인 동작과 변형으로 연결되는 기억의 공간 같은 것들이 피나의 작품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 작품에서는 김설진만의 새로운 시각을 찾기가 쉽지 않았고 그의 연출 능력이 우수한 점만 인식되었다.
김설진 〈MARRAM〉 ⓒBAKI/LG아트센터 |
물론 예술가는 자신이 오마쥬 한 안무가의 스타일을 닮아가며 오랜 시간 경험한 단체와 문화에 흡수되어 의도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작품 색깔에 드러날 수밖에 없다. 필자는 김판선과 김설진의 작품을 의심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예술에서 나타날 수밖에 없는 현상을 설명하는 예시로 든 것뿐이고,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지만, 자신들이 안무한 작품들이 자칫 상당히 위험에 노출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타인의 작품 혹은 원작에서 영감받을 수 있고, 재해석해서 차용할 수 있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창작’ 혹은 ‘재창작’이라 부를 수 있으려면, 전작의 위대함을 넘어서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창작과 모방의 아슬아슬한 경계를 안무가들이 민감하게 인지해야 함을 바라는 마음이다.
널리 알려졌듯이 벨라스케스의 그림에 영향을 받은 마네는 벨라스케스의 작품 〈파블로 데 바야돌리드의 초상화(1636~1637)〉를 모방하여 자신의 작품 〈피리부는 소년〉을 창작했다. 마네는 단순히 벨라스케스의 그림의 형태만 모방한 것이 아니라 화가의 통찰력을 본 것이다. 벨라스케스는 당시 17세기의 최하위 계급인 광대를 미화시키지도 비하하지도 않고 그저 광대이지만 자기 삶을 사는 한 인간으로 화폭에 담았다. 세상을 보는 벨라스케스의 날카로운 시각, 다시 말해 마네는 단순히 그림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 시대의 관습과 편견을 넘어선 벨라스케스의 통찰력과 가치관에 매료되었던 것이다. 마네뿐만 아니라 피카소도 수도 없이 벨라스케스의 작품을 리메이크했으며, 제임스 휘슬러도 벨라스케스의 작품을 모방하다 자신만의 그림 〈파블로 데 사라사태의 초상화(1884년)〉를 창작하였다. 이들은 탁월한 화가의 철학과 정신과 기법을 모방했으나 자신들의 독창적인 시각으로 재해석해 낸 것이었다.
디에고 벨라스케스 〈어릿광대 파블로 데 바야돌리드〉, 1636~7년 (왼쪽) |
예술가의 창작과정은 실제적으로 모방의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경험과 교육을 통해 모방 대상을 온전히 흡수한 후 자신만의 주관이 드러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창작 과정은 모방과 변형 그리고 해석과 인식이라는 지난한 자기 인내와 탐색의 시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김설진과 김판선은 충분히 유럽의 최전선을 경험하였고 타고난 예술적 감각으로 유럽의 다양한 긍정적인 요소들을 흡수하였다고 본다. 이제는 재능 있는 이 두 예술가들이 자신들만의 시각이 분명한 춤관(舞踊觀)이 드러나는 작업에 좀 더 고민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마지막으로 꿈을 가진 젊은 댄서들과 안무가들에게 먼저 충분히 경험하고 다양한 것을 모방한 토대 위에서 자신의 춤관과 철학을 쌓아가는 것이 창작임을 인식하고 노력하기를 부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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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작은 불가리아 원댄스위크에서 최초로 선보였고(2019,9.House of Culture Boris History),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에 초청되었다.
2) 클라우디아 보세의 〈the last Ideal Paradise〉, 에스더 살라몬의 〈Monument 0.5: The Valeska Gert Monument〉 (2017 탄츠플랫폼 참조)
김혜라
춤웹진 편집위원. 춤미학과비평전공. 2012년 한국춤비평가협회를 통해 비평가로 등단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평가위원으로 활동했으며 <춤웹진>에 정기적으로 춤비평을 기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