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연구
1. 대학 탈춤부흥운동의 고찰 구도
2. 1970, 80년대 대학 탈패 활동의 연대기
3. 대학 탈춤부흥운동 고찰의 열쇠어 제안과 과제
1. 대학 탈춤부흥운동의 고찰 구도
이 글의 성격 혹은 수준을 말한다면 그야말로 시론의 시론이다. 아니 시론을 위한 준비 작업, 메모 나열에 그친다. 그 이유에 대해 상투적인 게으름이나 역량 부족을 말하고 싶지는 않다. 가장 큰 원인은 자료의 부족이다. 자료도 많지 않을뿐더러 있는 자료 역시 필자의 정향 혹은 발표를 의뢰한 이의 의도에 적절하게 들어맞지 않는다. 아직 날 것 그대로의 자료들이 여기저기에 방치된 채로 남아있기도 하다. 이와 관련한 필자의 사정을 이야기해 본다면, 그야말로 고군분투하면서 간직해 온 자료 정리를 시도하다가 중단했다.
1980년대 초반부터 이루어진 기존 논의를 참고할 수 있다. 채희완을 위시하여 여러 대학 탈춤부흥운동, 민중문화운동, 마당극운동 관련 활동가와 전문연구자들이 주목할 만한 성과를 낳았다. 그것들을 참고할 수는 있지만, 썩 마음이 내키는 것은 아니다. 특정 대학 혹은 이른바 ‘메이저 캠’ 중심의 논의, ‘진보적 예술운동 중심의 시각’, ‘대학탈춤패 입장의 배제 혹은 무시’ 등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불만은 더욱 높아지고 예민해져 가서 ‘미당극’이라는 용어 혹은 개념마저도 시비를 걸고 싶어질 정도이다. ‘탈춤반 계통의 마당극’이라는 이상한 용어 역시 마음에 들지 않기는 매한가지이다. ‘관념적’, ‘낭만적’, ‘근본주의적’, ‘본질주의적’, 심지어 ‘불량스럽다’라고 비판받기까지 했던 대학 탈패 혹은 그 출신들의 사유와 실천 양상과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고서는 이 시기를 적절하게 바라볼 수 없다는 생각도 든다.
불만은 많은데, 대안이 없다. 자료의 부족 혹은 미정리 상황은 여전하다. 특히 필자가 주력하고 특별히 주목하고자 하는 80년대 대학 탈패 상황 관련 자료의 열악함은 상상 이상이다. 탈패 특유의 속성인지 아니면 시대의 소산인지 불분명하지만, 당대 관련 자료 정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진도 없다. 탈꾼들이 가면을 쓰는 것은 마땅할 수도 있지만, 가명을 썼던 시기도 있었다. 80년대 중후반 더욱 그러하다. 대학 탈패의 탈꾼들은 가면을 썼고 가명을 썼다. 관련 사진도 없고, 이름도 잘 알지 못하던 시대, 더구나 탈패 이름까지 자주 바뀌던 시대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에 필자는 우회한다. 필자의 우회는 이 글이 본격적인 논의가 아니라 시론, 더 정확히 말한다면 시론을 위한 준비 작업으로 규정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우회를 하기로 한 필자의 논의는 1970년에서 1989년까지의 대학 탈춤부흥운동사 연대기를 작성하는 것과 이 연대기를 읽어낼 몇 가지 열쇠어 제안과 관련 메모를 하는 것으로 구성한다. 이러한 이 글의 구성은 선배를 닮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시대를 닮았던 대학 탈꾼들의 초상을 그리기 위한 스케치임은 물론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21세기에 접어들면서 관련 구술 증언이나 구술 정리가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대학 탈춤부흥운동과 적절하게 맞아떨어지는 것은 흔치 않지만, 그나마 관련 구술과 정리가 이루어졌다는 점이 필자의 이 글을 가능하게 만든다. 그 구술 기록들은 민주화 운동, 제 부분·부문 운동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어서 필자의 욕망을 거의 채워주지는 못한다. 하지만 충분히 참고할 만하다. 필자의 지향과 가장 근접하는 구술 기록과 정리 작업은 이영미의 『구술로 만나는 마당극』 ①~⑤(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2011), 연세대 탈패의 『연세탈패 40년』(연세탈패 40주년 기념 행사준비위원회, 2014), 그리고 2021년부터 현재까지 진행 중인 프레시안의 〉탈춤과 나〉 시리즈 등이다. 그 작업이 선행되지 않았다면, 사실 이 글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설사 글을 썼다고 할지라도, 필자 경험의 주관적 토로의 장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다른 자료들이나 연구 논문들 역시 이 글을 위해 많이 참고했다. 하지만 이 글을 위해 주로 참고한 것은 구술 증언과 그 기록들이다. 물론 구술 증언이 갖는 한계가 있다. 여러 한계가 있지만 핵심은 자기중심적이라는 점이다. 자기 과시 혹은 자기 환멸이 의식적·무의식적으로 나타나 있다. 또한 기억에 많은 부분 의존하는 것이기에 관련 사실의 정확도에서 많이 뒤떨어진다. 특히나 조심스러워야 할 것은 타인이나 타 단체 혹은 자신과 관련이 없는 제반 것들에 대한 기억과 평가 대목이다. 필자 역시 이 글을 위해 관련 증언을 읽으면서 이러한 사례들을 적지 않게 발견했다.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것들이다. 그런데도 필자는 구술 증언을 통해 대학 탈춤부흥운동에 접근하게 된 상황이 그리 싫지는 않다. 그것은 탈춤에 걸맞은 것이기 때문이다. 탈춤 자체가 구술문화 전통에서 배태되고 적층되어 온 것이기에, 그에 걸맞은 기억과 기록 방식을 통해 정리된 이라 할 수 있다. 비록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탈춤다운 생존사였고 기억과 정리 방식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2. 1970, 80년대 대학 탈패 활동의 연대기
1970년에서 1989년까지의 대학 탈춤부흥운동의 양상 파악을 위해서 선차적으로 필요한 작업은 당시 대학 탈패의 활동 양상 정리이다. 1980년에 한 번 그 정리가 부분적으로 이루어졌고, 이후 지역 차원에서 혹은 민주화운동사 정리 차원에서 대학 탈패 활동이 정리되기는 했다. 하지만 아직 만족할 수준은 아니다. 항상 언급되는 것만 언급되어 주목하고, 초기 설정된 틀에 맞춘 정리만이 반복되고 있을 뿐이다.
제대로 된 대학 탈패 활동의 연대기 작성을 위해서는 선차적으로 개별 대학 탈패 차원에서의 정리가 선행되어야 한다. 대학 탈패 차원에서 정리된 것으로는 연세대 탈패와 이대 탈패 정도만이 필자가 접할 수 있는 것이었다. 광주와 대구, 그리고 충남·대전의 경우 전체 민주화운동 차원에서 대학 탈패의 활동에 주목하여 정리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 하지만 대부분은 관련 정리가 거의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이러한 상황에서 1970, 80년대 대학 탈패 활동의 연대기 작성은 요원하다. 그런데도 이 작업을 수행하는 것은 이제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비록 미흡한 것이라 할지라도, 먼저 시작한다면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 믿는다. 필자의 연대기 작성은 대학 탈패를 중심으로 한다. 따라서 대학에서 대학 탈패가 참여한 공연과 그 관련 상황 정리가 중심이 된다. 대학이라는 영역을 벗어난다고 할지라도, 그 활동 주체가 대학 탈패인 경우는 이에 포함했다. 더불어 대학 탈패 활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던 다른 주체나 영역에서의 활동 역시 참고로 함께 포함했다.
대학 탈패 활동의 연대기를 통해 필자가 포착해 보려는 것은, 가장 먼저 ‘대학 탈패의 전생 혹은 일생’이다. 사실 80년대 후반부터 쇠락해 가던 대학 탈패의 상황을 염두에 둘 때, 20년간의 대학 탈패 활동은 곧, 전생이나 일생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학 탈패의 일생에서 나타나는 어떤 특징적 흐름 역시 연대기 작성을 통하여 포착하고 싶은 것이다. 탈패 명칭에서 나타나는 흐름, 공연 형식이나 내용에서 나타나는 흐름 등이 연대기 작성을 통하여 포착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연대기 작성이 가장 큰 목적은 특정 대학들 중심의 흐름이 과연 보편적인 것이었을까 하는 의문을 풀어 보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예상만큼 여러 대학 혹은 사례들이 나타나지 않아서 실망스럽기는 하지만, 지금까지의 일반적 인식과 논의 틀을 달리 볼 수 있는 실마리가 포착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
본 연대기 작성을 위해 필자가 살펴본 것을 실제 관련 자료들과 앞에서 언급한 구술 증언 기록과 서적(이영미, 『구술로 만나는 마당극 ①~⑤』(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2011), 『연세탈패 40년』(연세탈패 40주년 기념 행사준비위원회, 2014), 프레시안의 〈탈춤과 나〉 시리즈(2021~현재), 그리고 『한국의 민중극』(창작과비평사,1980), 『민족극연구회 대본선 1~4』(민족극연구회, 풀빛, 1988), 『전라도 마당굿 대본집』(놀이패 신명 엮음. 들불, 1989), 『영남의 민족극』, 한국기독교민중교육연구소 발간의 「연희연구자료」 시리즈(민주화운동 오픈 아카이브 소장), 『연희대본 자료집』(민주화운동 오픈 아카이브 소장), 『민주화운동 연구보고서 2004 대전•충남 민주화운동 사전편찬 자료집(민주주의연구소, 2004), 『민주화운동 연구보고서 2005 지역 민주화운동 편찬을 위한 기초조사연구 –충북』(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5), 『1980년대, 변혁의 시간 전환이 기록』 1~2(유경순, 봄날의 박씨, 2015) 등이다.
○ 1970~1974: 이 시기에 대학 탈패의 형성과 대학 간 연대가 시작된다. 운동의 핵심인 주체와 일정한 흐름이 형성되기 시작하는 시기이다. 탈춤 자체을 통하여 민중에 대한 관심이 생겨나고, 민중 삶 속에서 공연을 시도하기도 한다. 그리고 진보적, 실험적 예술가들이 대학 사회 안팎에서 행한 연행예술의 실험 성과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김지하의 〈진오귀(청산별곡)〉나 김민기 등의 〈소리굿 아구〉가 그 사례이다.
시기 | 활동 내용 | 비고 |
1969 | 부산대 ‘전통예술연구회’ 창립 | 수영야류 전수 |
1970.09 | 문교부 주최 제1회 전국대학문화예술축전 | 부산대 탈패와 서울대 탈패교류 |
1971.03.15 | 서울대 민속가면극연구회 창립 | 핵심 주체의 외부 지향성 이대, 연대, 서강대 담당자 선정 |
1971.09.15 | 서울대 민속가면극연구회 창립공연 〈봉산탈춤〉 | |
1972 | 서강대 탈패 ‘민속극회’(민속문화연구회) 창립 | |
1972. 가을 | 이대 문리대 연극반 〈봉산탈춤〉 공연 | 서울대 탈패의 지원 |
1972 | 가라주로의 구로텐트 〈두 도시 이야기(二都物語)〉 공연 | 서강대 언덕에서 공연 ‘마당극’ 형성에 영향 |
1972 | 성균관대 극예술연구회 〈양주별산대놀이〉 공연 | |
1973.12.25 | 김지하 작 〈진오귀(청산별곡〉 서울 제일교회에서 공연 | ‘최초의 마당극’ |
1973.05.30 | 이대 탈패 ‘민속극연구회’ 창립. 〈봉산탈춤〉 공연 | |
1973.09.1 | 연세대 탈패 ‘탈춤연구회’ 창립 | |
1973.11 | 연세대 탈패 〈봉산탈춤〉 전과장 공연 | |
1973. 10 | 고려대 국문과 탈패 창립. | 민속 및 극연구회. 이후 ‘민’으로 개칭 |
1974.03 |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소리굿 아구〉 공연 | 김민기·김지하 작 |
1974.01.23 | 연세대 탈패 망원동 판자촌에서 〈봉산탈춤〉 공연 | |
1974.04 | 한두레 창립 | 대학 탈패 졸업생 중심 |
1974.05.10 | 서강대 탈패 〈서강굿〉 공연 ‘가면극연구회’에서 ‘민속문화연구회’로 개칭. | · 탈춤이 존재하는 마을굿의 문맥에 관한 관심 구체화 · 이후 대동제 사유와 직접적 연관성은 없지만 유사 |
1974.09. 05~06 | 연세대 탈패 〈통영오광대〉 공연 | ‘대학 최초 〈통영오광대〉 공연’ |
1974.09 | 서강대 탈패 〈가산오광대놀이〉 복원 공연 | 전통탈춤 복원 공연에 참여 |
1974.09 | 중앙대 탈패 〈민속학연구회〉 창립 | |
1974.10.19 | 4개 대학(연세대, 서울대, 이대, 서강대) 탈춤 발표회 | 양주 유양리 |
1974. 가을 | 경희대 국문과 〈송파산대놀이〉 전수 및 공연 | 하회별신굿탈놀이, 강령탈춤 전수 및 공연(1976)) |
1975 | 3개 대학(연세대, 서울대, 이대) 성산동 판자촌 둑방부락에서 정월대보름 〈봉산탈춤〉 등 공연 | |
○ 1975~1980: 대학 탈패의 전국적 확산이 이루어진다. 전통탈춤마저 외압으로 인하여 공연하지 못하는 상황이 나타나기도 한다. 양반마당을 생략한 체 축소 공연되거나 학생 시위의 매개 혹은 공간을 제공한다는 이유로 공연 자체가 취소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탈패 형성과 활동의 시작점인 전통탈춤 자체에 대하여 ‘불온’이라는 낙인이 찍혀지는 시기이다. 탈패 자신도 자신들의 ‘불온함’을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공연이 시위의 매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공연이 곧 시위이고 시위가 곧 공연인 활동을 하기 시작한다. 〈김상진 추모제〉나 〈관악굿〉이 그 사례이다. 탈꾼들이 공연이 아니라 시위의 중심이 되는 경우 역시 적지 않게 나타나고, 탈패 독자적인 조직화나 실천 활동 역시 나타나는 시기가 이때이다. 기청탈춤반 조직이나 연탈 조직화와 실천 활동이 그 사례가 된다. ‘창작탈춤’, ‘굿’이라는 이름으로 전통탈춤과는 다른 양상의 공연 성과를 낳은 것은 이 시기이다.
시기 | 활동 내용 | 비고 |
1975.03.28 | 〈서울대 이전 대안택 축원 지신제〉 중 〈진동아굿〉 공연과 침묵시위 | 시위와 결합하는 공연 |
1975.05.13 | ‘긴급조치 9호’ | |
1975.05.22 | 〈김상진 추모제〉 | · 탈패 등이 시위 기획 및 주동. · 공연이 곧 시위이고, 시위가 공연 · ‘새로운 시위문화’ |
1975.09 | 연세대 탈패 〈애스더〉 공연 | · 구약성서를 탈춤으로 표현 |
1975 | 홍대 탈패 창립(미등록) / 한신대 탈패 ‘민속학회’ 창립 | |
1975.10 | 한양대 탈패 ‘민속문화연구반’ 탈 제작 전시회 | |
1976.03 | 서울 시립대 탈패 ‘민속탈춤연구회(민속문화연구회)’ 창립. | |
1976 봄 | 서울대 공대 축제 인간문화재 초청 〈봉산탈춤〉 공연에서 양반과장 생략. | 전통탈춤의 일부 내용 ‘불온성’ 낙인 |
1976.7.7. | · 외국어대 탈패 ‘가면극연구회’ 창립 · 〈봉산탈춤〉 공연(09.30). | 〈봉산탈춤〉 목중 사설 한글화 시도 |
1976.09 | 숙명여대 탈패 ‘가면극연구반’ 창립 | 〈강릉관노가면극〉 전수와 공연 |
1976 | 청주사대 탈패 ‘청운가면극회’ 창립 | |
1976 | 기청(기독교장로회청년연합회) 탈춤반 조직 | · 숙명여대, 동덕여대, 서울대 탈꾼들 일부 참여. 연세대 탈꾼들 다수 참여 · 봉산, 양주, 통영 기본춤 중심 전승 |
1976. 가을 | 서울대 총연극회 ‘마당극’ 〈허생전〉 공연 | · 화톳불, 횃불, 원형 판 구성 · 뒤풀이 자리에서 돌발 시위 |
1977.04.19 | 숭전대(현 한남대) 탈패 ‘가면극연구회’ 창립. | · 양주별산대놀이 전수. 대전지역 최초 탈춤반. 80년대 초반까지 원형 탈춤 전승 고수. 국풍 81에 대전보건대 탈반과 함께 참가 |
1977.01 | 기청탈춤반 〈예수뎐〉 서울제일교회에서 초연 | · 1978년 〈예수의 생애〉로 재창작 · 1981년 〈죽은자 가운데 일어나〉라는 제목으로 재각색 공연 · ‘반복 재공연’이라는 양상 |
1977.05 | 연세대 탈패 창작탈춤 〈애순이〉 공연 | · 양주별산대놀이 춤을 바탕으로 ‘창작탈춤’ 공연 |
1977.05.11 | 공주사대 연극반 황토 〈고성오광대〉 공연 | · 대학가 최초의 〈고성오광대〉 공연 |
1977 | 계명대 탈패 ‘민속문화연구반’ 창립(1월) 〈고성오광대〉 공연 | |
1977 | 서울대 공대 탈패 ‘민속극연구회’ 봄축제 〈양주별산대놀이〉 축소 공연 | 외압으로 인하여 축소 공연 |
1977 | 서강대, 서울대, 서울산업대, 이화여대 탈꾼들 〈씻김탈굿〉 대학로 혜명교회에서 공연 | · 〈소리굿 아구〉, 〈진오귀〉 등과 유사한 발상과 형식의 창작탈춤 · 서울대 탈패의 ‘내용주의적’ 경향 비판 |
1977 | · 국민대 탈패 ‘민속문화연구회’ 창립(10월) · 서울여대 탈패 ‘민속연구회’ 발족(10월) · 동덕여대 탈패 ‘민속문화연구회’ 창립 · 아주공대 탈패 ‘민속문화연구회’ 창립 | |
1978.04. | 전남대 탈패 ‘민속문화연구회’ 동아리 등록 | 시위로 3개월 만에 해체 위기. 동아리 등록 취소 |
1978 | 서울대 〈민속제〉 유산 | |
1978 | 〈유랑극단 탈춤 한마당〉 전국 순회공연 | · 서울대·연대·이대 기독교대학청년회, 홍익대 탈패 출신 · 농활, 농민회 투쟁 현장에서 공연 |
1978 | 전남대 탈패, 연극반 〈함평고구마〉 공연 | |
1978 | 〈공장의 불빛〉 공연 | |
1978 | 전북대 탈패 ‘한마당(민속극회)’ 결성. | · 전북대 SCF 학생을 통한 전북대 탈반 결성 지원 |
1978 | · 경북대 탈패 창립(‘민속문화연구회’ 개명) · 인천교대 탈패 ‘민속극연구회’ 창립(봄) · 충남대 탈패 ‘탈춤연구회’ 창립(6월 2일) · 목원대 탈패 창립(가을) · 항공대 탈패 ‘민속문화연구회’ 창립(가을) · 건국대 탈패 ‘민속연구회’ 창립 · 동국대 탈패 ‘민속문화연구회’ 창립 · 세종대 탈패 ‘민속문화연구회’ 창립 · 성신여사대 탈패 ‘민속문화연구회’ 창립 | |
1979.05 | 연세대 탈패 ‘창작탈춤’ 〈쇠뚝이놀이〉 공연 | |
1979 | 목원대 탈패 봉산탈춤 재담 수정한 ‘시대비판극’ 공연 | |
1979 | 홍대 탈패 등록, 창립공연 | · 총장 축사 · 농악도 전수 |
1979 | 전남대 탈패 ‘향토문화연구회’로 개칭하여 등록 | |
1979 | · 공주사대 탈패 ‘한국가면극연구반 한삼’ 창립(5월) · 공주사범대 한국가면극연구회 ‘한삼’ 창립(5월 23일) · 서울교대 탈패 ‘민속극연구회’ 창립(10월) · 대전실업전문대 탈패 ‘탈춤연구반’ 창립(12월) · 청주대 탈패 1기 모집 · 상명여사대 탈패 ‘민속문화연구회’ 창립 · 인하대 탈패 ‘민속문화연구회’ 창립 · 청주대 탈패 ‘민족화연구회’ 창립 · 충북대 탈패 ‘민속연구회’ 창립(농악도 전수) | |
1979. 09 | 〈역사탈: 해방 35년〉 대학탈반연합회(연탈) 워크숍 공연 | · 과천 영보수녀원에서 연탈 1~2백명이 모인 가운데 공연 · 1980년 5월 학별별 상황에 맞게 부분 공연 |
1979.10.25 | 대학탈반연합회(연탈) 공연과 발족식 논의 | · 서울대, 연세대, 서강대, 한양대, 외국어대, 홍익대 등(81년 해산) · 1979년 10월 27일에 국민대에 서 8개 종목의 전통탈춤을 공연하고 말미에 창작탈춤을 공연하는 행사 준비 |
1979.12 (1980.01) | 광주 지역 놀이패 ‘광대’ 창단 | 전남대, 조선대 탈패와 연극반 출신 중심 |
1980.03 | 고려대 탈패 ‘민속학연구회’ 공식 등록 | · 탈패가 언더! · 운동권과의 교감 하에 조직 |
1980.03 | 광주 ‘극단 광대’ 창립 〈돼지풀이〉 공연 | |
1980.04.06 | ‘민중문화협의회’ 창립 | |
1980.04.14 | · 서울대 탈패 〈관악굿〉 공연 · 여기서 〈햇님 달님〉, 〈두한춤〉, 〈소리굿〉, 〈고구마〉 등이 공연 | . 정문, 감골, 탑 아래, 사대, 4.19탑, 본부, 도서관, 식당, 음대 앞, 버들골 등에서 진행. · 황선진, 유인열(유해정) 등의 대동놀이론를 거쳐 대동제의 발상이 구체화됨 · 82년 말 애오개 소극장을 매개로 공유되고, 83년 5월 고려대 대동놀이, 84년 5월 대동제라는 이름으로 대학 축제 전환이 이루어짐 |
1980.04.19 | 경북대 탈패 창작탈춤 〈냄새굿놀이〉 공연 | |
1980. 봄 | 건국대 탈패 창작극 〈상록수〉 공연. | |
1980.05.02 | 연탈 30개대 시위 계획 | |
1980.05.10 | 이대 탈패 〈역사탈: 해방 35년〉 공연 | |
1980 | 연대 탈패 창작탈춤 〈통일무〉, 〈공장의 불빛〉 공연 | 실내에서 촛불 조명 하에서 공연 |
1980 | 서울대 총연극회 〈녹두꽃〉 공연 | |
1980.05 | 청주 지역 3개대와 연우무대 연합 마당극 〈검은산 검은물〉 공연 | |
1980.05 | 고려대 탈패 창립 창작탈춤 〈궁정동 말뚝이〉 공연 | · 연탈 중심으로 배포하여 각 대학의 사정에 맞게 수정한 〈궁정동 말뚝이〉 |
1980 | 충남대 탈패 대전제일감리교회에서 〈민중의 예수〉 공연 | |
1980.05.18직후 | 연탈 조직을 통하여 〈5.18 광주 학살 진상을 알린다〉 전단 배포 | |
1980 | · 『한국의 민중극』 발간 · 걸개그림(김봉준) · 판화(오윤) | 대학 탈패를 위시한 대학 축제나 공연 행사에 강력한 영향을 줌 |
1980 | · 보건전문대 탈패 ‘청운민속탈극연구회’ 창립(5월) · 단국대 탈패 ‘민속문화연구회’ 창립 · 덕성여대 탈패 ‘민속문화연구회’ 창립 | |
○ 1981~1986: 이미 형성이 되었던 대학 탈패가 재등록하는 양상이 나타남. 이는 탈패의 활동 과정에서 나타난 등록 취소에서 기인한 것이다. 탈패 공연이나 구성원의 시위 문제로 동아리 등록이 취소되고, 이를 여러 방식으로 극복하려는 모습이 재등록이라는 양상을 통해 이 시기에 나타난다. 연세대 탈패의 경우 ‘탈춤연구회’, ‘민속문화연구회’, ‘우리문화연구회’ 등으로 동아리 명칭 변화가 나타난다. ‘마당극’, ‘창작 탈놀이’ 등의 이름으로 탈패 공연 양식이 명명되었고, 사전 검열 등의 외압으로 인해 공연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경우도 1983년까지 나타난다. 이를 넘어서기 위하여 ‘연빙고’라는 방식의 공연, 검열 자체를 거부하는 양상도 있었다. 1984년 자율화 이후 공연의 수는 비약적으로 많아졌으며, ‘학생운동 세시력’에 따른 공연과 할동이 나타난다. 3월 신입생 환영회, 4.19 기념제에 맟춘 공연, 5월 대동제와 광주항쟁, 7-8월 농활, 10월 단대별 동아리별 축제 등에 맞춘 공연과 실천 활동이 나타나는 것이다. 1~2세대 탈꾼들이 중심이 된 애오개 문화마당 프로그램의 영향으로 1983년부터 공동체놀이, 4박자춤, 해방춤, 대동놀이 등에 대한 관심과 실천 활동이 대학 사회에서 일어났고, 그 결과물이 1984년 고려대 대동제이다. 이를 기점으로 전국의 대학 축제는 대동제로 그 명칭이 바뀐다.
시기 | 활동 내용 | 비고 |
1981.03 | 고려대 서창 탈패 ‘민속극연구회’ 창립 | · 고대 ‘민속탈춤연구회’로 개칭(1985.02) · 고대 ‘놀이패 탈ᄯᆞ람’ 으로 개칭(1989.04) |
1981.04.13 | 외국어대 탈패 재등록. 봉산탈춤 공연(05.23) | |
1981 | · 숭의여전 탈패 ‘민속예술연구반’ 창립(03) · 배제대 탈패 ‘전통민족예술연구회’ 창립(03) · 강원대 탈패 ‘민속문화연구회’ 창립 | |
1981.04.03 | 연세대 탈패 ‘민속문화연구회’로 등록 | |
1981 | 서울대 탈패 ‘연빙고(연습을 빙자한 공연)’ | 축제 거부 운동의 시발점 |
1981.06 | 전남대 탈패 ‘민속문화연구회’ ‘마당굿’ 〈마당쇠놀이〉 공연 | |
1981.06 | 광주 극단 광대 〈호랑이놀이〉 공연 | |
1981.09.30 | 연대 탈패 〈무악탈놀이〉 공연 | · 공연 후 등록 취소 · ‘우리문화연구회’로 재등록 |
1981 | 연탈 차원의 국풍81 거부 활동 국풍 말뚝이 걸개그림 방화 미수(홍대 탈꾼 김원호) | |
1981 | · 경상전문대 탈패 ‘말뚝이회’ 창립 · 공주교대 탈패 ‘민속문화연구회’ 발족 · 단국대 천안 캠퍼스 탈패 ‘탈춤연구회’ 창립 · 충남경상대 탈패 ‘민속문화연구회’ 발족 | |
1982.05 | 고려대 농악대 ‘마당춤극’ 〈뿌리를 찾는 놀이〉 공연 | |
1982 | 목원대, 충남대, 실업전문대 연합 〈새재〉 | 대전제일감리교회 |
1982.10.29 | 연세대 탈패 마당극 〈무악창작탈놀이〉 공연 | |
1982.12 | 고려대 탈패 마당극 〈서울로 가는 길〉 공연 무산 | |
1982. 겨울 | · 애오개문화마당(애오개소극장)에서 ‘애오개 한마당’ 프로그램 · 전통문화의 재해석, 역할바꾸기(촌극론), 연극, 그림, 노동요, 탈춤, 마당극, 마당굿, 공동체문화, 대동놀이론 | · 전국 탈꾼들, 문화패들 교육 · 4박자춤, 해방춤, 3박자춤, 공동체놀이 등 전파와 확산 |
1983 | 고려대 농악대, 탈패 〈안암대동놀이〉 공연 | |
1983.05 | 고려대 탈패 마당극 〈고길동전〉 공연 | 〈안암대동놀이〉 속에서 공연 |
1983 가을 | 충남대 탈패 〈장산곶매〉 공연 | |
1983.11 | 고려대 탈패 공동체놀이 개발 발표회 및 강습 | |
1983 | · 서울대 탈패 〈어느 여행상의 죽음〉 워크숍 공연. · 서울대 탈패 〈독립무〉 공연 도중 중단(사전 검열로 공연 안 됨) | · 사전 검열로 공연 못 함 · 공연정지 3년 먹음(탈꾼들. 강제징집, 지도 휴학 등을 당함) |
1984.05 | 고려대 축제를 ‘대동제’로 개칭하고 대동놀이형 축제로 전환 | |
1984.05.10 | 연세대 탈패 창작탈놀이 〈오월곡〉 공연 | |
1984.05 | 서울시립대 탈패 창작극 〈씻김탈굿〉 공연 | |
1984.09 | 놀이패 한두레 〈강쟁이 다리쟁이〉 공연 | · ‘깃발춤’ 대학 탈패에 영향 · ‘등에 매는 탈’이라는 새로운 탈 착용법 |
1984 | 민문협(민중문화운동협의회) 창립 | |
1984 | · 서울시립대 탈패 창작극 〈텃굿〉 공연(5월) · 고려대 탈패 〈앞벌이 뒷벌이〉 공연(10월) · 서울대 탈패 〈민중영령추모제〉, 〈5월무〉, 〈산하〉 등 공연 · 고려대 극예술연구회 〈똥〉 공연 · 고려대 국문과 탈패 ‘창작마당굿’ 〈갖은 육갑에 요이샤 둥둥〉 공연(11월) · 전남대 탈패 〈난무하는 사꾸라〉 공연 · 충남대 탈패 〈벙어리 매미〉 공연 · 외대 탈패 창작극 〈동소산 머슴새〉 공연(12월 2일) | |
1985.03 | 고려대 애기능 탈패 ‘민족문화연구회’ 창립 | · 탈패(문화패)의 학내 확산 · 탈패 출신 5명, 농악대 출신 1명 등이 구성 |
1985.05 | 연세대 탈패 등 연합 〈분단이여 한이여, 통일의 꽃이여〉 공연 | 학내 문화패 연합공연 |
| · 외대 탈패 창작극 〈대학이란 무엇인가〉 공연(3월) · 고려대 서창 탈패 〈아! 대한민국〉 공연(3월) · 고려대 탈패 〈들어라! 이 함성을〉 공연 및 공동체놀이 강습(5월) · 고려대 애기능 탈패 촌극 〈해방의 함성으로〉 공연(5월) · 충남대 탈패 〈푸른하늘 은하수〉 공연(5월) · 외대 탈패 5.17 창작 상황극 〈 들어라 양키들아〉 공연(5월) · 서울시립대 탈패 창작극 〈새벌굿〉 공연(5월) · 연세대 탈패 ‘탈놀이’ 〈해방무〉 공연(6월 3일) · 충남대 탈패 〈다시 조선으로〉(가을) · 고려대 탈패 〈쌀풀이〉 공연(10월) · 외국어대 탈패 ‘창작힘굿’ 〈칼바람에 베이거나〉 공연(10월) · 서울시립대 탈패 창작극 〈민〉 공연(10월) · 서울대 탈패 〈불발〉, 〈모듬굿〉 공연. · 서강대 탈패 ‘서강탈’ 〈서강몸짓〉 공연 | |
1986.04 | 서울대 탈패 4월제에서 공연분과 합동공연 | |
| · 덕성여대 국문과 마당극패 〈쟁기〉 공연 · 고려대 탈패 〈통일무〉 공연(5월) · 고대 애기능 탈패 〈사람부터 살고 보자〉 공연(5월) · 고려대 서창 탈패 〈가라! 이방인들아〉 공연(5월) · 연세대 탈패 마당극 〈해방서곡〉 공연(5월) · 외국어대 탈패 〈오월에서 통일로〉 공연(5월) · 덕성여대 탈패 ’솔밭민속극연구회‘ 〈치솟아라, 반도여!〉 공연(5월 13일). · 서울대 탈패 〈2원 집정제에 관하여〉 도서관 철야 농성 중 공연 · 고려대 애기능 탈패 〈망나니〉 공연(10월) · 시립대 탈패 ‘민속탈춤반’ 〈민〉 공연(10월 10일) · 서울대 탈패 〈갯걸바람〉 공연(10월) · 충남대 탈패 〈오북의 함성으로〉 공연(가을) · 외국어대 탈패 전태일 상황극 공연(11월 13일) · 고려대 탈패 〈문좀여소〉 실내 공연(12월) | |
1986.10 | ‘연고전’/‘고연전’이 ‘연고제’/‘고연제’로 개칭 | ·연세대 취타대가 ‘농악’으로 대체됨 |
○ 1987~1989: 탈패의 정체성 모색과 재정립(학생운동권 내에서의 역할, 연행예술패로서의 지향)이 이루어진 시기이다. 이에 따라 탈패 명칭의 변화가 이번에는 내부에서 일어난다. ‘~연구회’ 류의 명칭이 아니라 ‘탈 사랑 우리’(고려대 탈패), ‘탈패 ᄒᆞᄂᆞᄃᆞ래’(고려대 애기능 탈패), ‘놀이패 탈ᄯᆞ람’(고려대 서창 탈패), ‘마당패 탈’(서울대 탈패), ‘춤패 탈’(연세대 탈패) 등으로 변화한다. 학내외 연합 공연과 실천 활동의 활성화 등이 특징적인 양상으로 나타난다. 또한 1981년에 해체된 독립적 탈패 조직이 1986년부터 논의되고, 1987년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 조직화의 선도성은 문화패 연대 조직화는 물론이고, 서대협이나 전대협 논의 보다 앞선다는 점에서도 나타난다.
학내에서 장르 연합 합동공연이 심심치 않게 벌어지고, 대학교 간 연합 공연 역시 많이 벌어진 시기이기도 하다. 공연 형식과 관련해서 대학 외부의 영향을 많이 받은 때가 이 시기이기도 하다. 이애주의 〈바람맞이〉, 민족극운동협의회의 ‘민족극한마당’을 통해 접한 다양한 방식의 민족극들(특히 놀이패 신명의 〈일어서는 사람들〉과 춤패 불림의 〈이땅의 춤을 위하여〉), 민중문화운동연합이나 노동자문화운동연합 등에서의 공연 양상(집체극 등) 역시 대학 탈패의 활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공연 내용상으로 이전에는 나타나지 않았던 제주도 4.3항쟁 관련 공연이 많아진 것 역시 이 시기의 특징이다.
시기 | 활동 내용 | 비고 |
1986.11 | 고대 탈패 ‘민속학연구회’에서 ‘탈 사랑 우리’로 개명 | 대중적 동아리로 전환 지향 |
1987.01 | · 서울지역탈패연합(서탈) 구성 | · 이후 ‘서울지역탈패협의회’로 개칭 · 여름, 겨울 공동전수 시작 · 전국 탈패 연합공연과 실천 활동 · 춤패로서의 지향 표면화(창작춤을 공동전수 내용으로 공식화) |
1987.04 | 고대 애기능탈패 명칭을 ‘민족문화연구회’에서 ‘탈패 ᄒᆞᄂᆞᄃᆞ래’로 개명 | 대중적 동아리로 전환 지향 |
1987.04 | · 서울대 탈패 등 현대 학생 운동사 관련 합동공연 | 대학 내 장르 연합 공연 |
1987 | · 고려대 탈패 〈부서지지 않으리〉 공연(3월) · 건대 탈패 〈오! 어머니!〉 공연(5월) · 고려대 농악대 〈안암대동놀이 –부활하라. 반도여!〉 공연(5월 2일, 5월 5일) · 고려대 탈패 〈하늘-天, 따-地〉 공연(5월 2일) · 고려대 애기능 탈패 〈반역자를 응징하며〉 공연(5월 4일) · 고대 서창 탈패 〈지지않는 꽃〉 공연(5월) · 서울대 탈패 〈어디만치 왔나〉 공연(5월) · 성균관대 탈패 ‘민속연구반’ 〈노동해방굿〉 공연(5월 16일) · 외국어대 탈패 ‘상황극’ 〈곳곳이 일어날제〉 공연(5월 28일) | |
1987.06 | · 이애주 〈바람맞이〉 공연 | 군무 대학 탈패에 영향 |
1987 | · 서울대 탈패 〈전진〉 공연(9월) · 연세대 탈패 ‘탈극’ 〈뭐? 너희가 나라를 판다고?〉(9월 28일) · 고려대 애기능 탈패, 풍물패 ‘마당굿’ 〈가자~ 예서 말순 없다〉 공연(9월 28일) · 고려대 서창 탈패 〈핵무기를 베고 자는 한반도〉 공연(11월) · 서울대 탈패 ‘민속가면극연구회’ 〈톱니바퀴처럼 얽힌 우리를 누가 가르랴〉 공연(11월 4일) · 고대 국문과 민속부 〈실제 상황〉 공연(11월 19일) · 덕성여대 국문과 마당극패 〈땅을 잃어버린 하늘〉 공연(밥 각색) · 고대 탈패 〈또 다시, 들을 빼앗겨〉 공연(9월 26일) · 충남대 탈패 〈찢겨진 산하〉 공연(10월) | |
1987 | · 고려대 문화패연합 〈출정〉 공연 | · 탈, 농악, 노래, 그림 등 동아리 연합 공연 · ‘문화 게릴라’ 논의로 이어짐 |
1988. 03~04 | 제1회 민족극한마당 | · 〈일어서는 사람들〉과 〈이땅의 춤을 위하여〉 탈패에게 영향 |
1988 | · 건대 탈패 〈한라의 넋으로〉 공연(5월) · 고려대 탈패 〈무풍지대〉 공연5.5. · 연세대 마당패 〈태백산맥〉 공연(10월) · 고려대 탈패 〈니들세상〉 공연(10월) · 고려대 서창 탈패 〈설움이 모여 사랑되고 사랑모여 하나가 되고〉 공연(11월) | |
1988 | · 서탈 〈애국의 꽃〉 한양대 평축참가대회, 연대 노동자대회 등에서 연합 공연(6월) · 연세대 탈패 등 〈이한열 추모 합동 마당극〉 공연(6월 8일) · 중앙대 탈패 민속학연구회, 전통예술극회 등 문화패 연합 집체극 〈아! 통일의 땅에 우리 가리라〉 공연(10월 8일) · 건국대 문화패 연합 집체극 〈봇물〉 공연(10.30) | |
1989 | 연대 탈패 ‘우리문화연구회’에서 ‘춤패 탈’로 개명 | 연세탈패 정체성 모색과 재정립 |
1989 | · 고려대 탈패 〈우리 이야기〉 공연(5월 12일) · 고려대 서창 탈패 〈한밤의 꿈은 아니었으리〉 공연(5월) · 연세대 탈패 ‘춤판’ 〈편견을 갖고 돌아오라〉 공연(11월 10일~11일) · 외대 탈패 ‘가면극연구회’ 〈잠들지 않는 남도〉공연 | |
대학 탈패는 90년대 이후 쇠퇴를 거듭한다. 전국 대부분의 대학에 존재하던 탈패들은 해체되고 21세기에 접어들어서는 그 자취를 감추었다. 그래서 1970년대와 1980년대 전후 20여년은 ‘대학 탈패의 전생’이라 할 수 있다. 달리 이를 ‘대학 탈패의 일생’이라 말할 수도 있겠다. 다른 유기체와 유사하게 대학 탈패의 일생은 생성, 성장, 확산, 분열, 쇠퇴 등으로 다시 세분할 수 있다.
○ 대학 탈패의 생성 양상: 위에서 살펴본 바, 대학 탈패의 생성은 대략 ‘자생’, ‘대학 외부의 직접 영향(목적 의식적 전파)’, ‘대학 외부의 간접 영향’, ‘대학 내부 학생운동의 역할 배치’ 등으로 그 양상을 정리할 수 있다. 자생의 양상을 보이는 경우는 부산대 탈패와 서울대 탈패를 예로 들 수 있다. 대학 외부의 직접 영향의 사례로는 서울대 탈패의 외부 지향적 활동의 산물인 연세대 탈패, 이대 탈패 등이 있다. 전남대 탈패나 조선대 탈패의 경우 역시 대학 외부의 직접 영향에 의한 생성이라 할 수 있다. 1970년대 중후반의 탈춤에 대한 사회의 관심. 대학가에서의 주목 분위기에서 생성된 경우가 대학 외부의 간접 영향이다. 그리고 마지막 양상인 대학 내부 학생운동의 역할 배치 차원에서 생성된 사례는 고대 탈패가 해당한다.
각 대학에서 생성된 탈패의 이름은 대부분이 ‘OO연구회’라는 양상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대학 탈패를 보면 그 명칭을 변경한 경우가 적지 않다. 초기 대부분이 대학은 ‘OO연구회’ 류의 이름을 갖고 있었다. 이 이름이 변화가 나타난 이유는 동아리의 등록 취소 혹은 해산에 대처하고자 한 방편이었다. 대학 탈패의 성장 과정에서 대부분의 대학에서 나타난 학생운동 동아리로서의 자기규정은 대학 탈패의 존립에 많은 위기를 가져왔다. 그 구성원이 학교를 떠나고, 대학 탈패 역시 해체되는 경우가 비일 비재했다. 이를 넘어서고자 취한 방편이 이름 변경을 통한 재등록이었다. ‘탈춤연구회’ → ‘민속문화연구회’ → ‘우리문화연구회’로의 변화하는 연세대 탈패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전남대의 ‘민속문화연구회’ → ‘향토문화연구회’ → ‘민속문화연구회’ 경우, 고려대 서창 탈패의 ‘민속극연구회’, → ‘민속탈춤연구회’ 역시 유사한 사례이다.
고려대 서창 탈패는 이후 ‘놀이패 탈ᄯᆞ람’로 한 번 더 변화한다. 위에서 살핀 연세대 탈패 역시 세 번째로 ‘춤패 탈’로 변화한다. 이러한 탈패 명칭 변화는 위의 경우와는 조금 다른 경우이다. 고려대 서창 탈패의 경우는 대중적 동아리로의 전환을 위한 시도이다. 유사한 것이 고려대 탈패의 ‘민속학연구회’에서 ‘탈 사랑 우리’로 개명, 고려대 애기능 탈패의 ‘민족문화연구회’에서 ‘탈패 ᄒᆞᄂᆞᆯᄃᆞ래’로 개명 등에서 나타난다. 연세대 탈패의 마지막 변경 이름인 ‘춤패 탈’은 동아리 정체성의 변화로 인한 결과이다. 이러한 양상은 서울대 탈패의 ‘민속가면극연구회’ → ‘마당패 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각 지역의 대학에서 생성된 탈패는 해당 지역에 인접하여 전승되고 있는 탈춤을 중심으로 그 전승을 이어간다. 인하대 은율탈춤, 아주대 강령탈춤, 부산대 수영야류와 동래야류, 경북대와 계명대 고성오광대, 안동대 하회별신굿탈놀이, 경기대 송파산대놀이, 강원대 강릉관노가면극 등이 그 사례가 된다. 물론 전국 공통의 탈춤 역시 존재했다. 초기에는 봉산탈춤이나 양주별산대놀이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중후반에 접어들면서는 고성오광대가 전국 공통의 전수 탈춤에 자리했다. 연세대 탈패의 통영오광대 전수와 공연, 공주사대의 고성오광대 전수와 공연, 서강대의 가산오광대 복원과 공연, 숙명여대 탈패의 강릉관노가면극 전수 등의 경우 특별한 사례로 주목해볼 만한 것이다.
○ 대학 탈패의 성장과 확산: 대학 탈패가 외화되는 가장 중요한 경로가 공연이다. 생성 초기 대학 탈패의 공연은 전통탈춤이 주를 이루었다. 전통탈춤 공연 그 자체만으로는 대단한 문화적·정서적 충격을 주었음을 여러 사람이 토로하고 있고,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서울대 탈패의 1971년 〈봉산탈춤〉 공연에 대하여 장만철은 여전히 다음과 같이 그 감격을 말하고 있다.
처음 들어보는 풍물소리에 이끌려, 어른거리는 횃불에, 그 불빛 아래 모인 군중들 위로 흐르는 횃불 그을음까지 홀린 듯 보고 있었던 기억만은 지금도 뚜렷하다. 처음 보는 탈, 탈들이 추는 춤사위에 이끌려, 처음 듣는 불림소리에 이끌려, 그 험악하지만 익살스런 가면들은 무엇이고, 그 생동하는 몸짓들은 무엇인가? 그 북소리, 장구소리, 쇳소리는…….
전통탈춤 공연이 아니라 창작 탈춤 혹은 마당극 등으로 공연이 전환된 이후에는 대중적 인기까지 획득한다. 수천 명의 관객이 운집하여 함께 출렁거렸던 이른바 전설의 공연이라 일컬어지는 사례가 적지 않은 것이다(연세대 탈패의 노천극장 창작탈춤 공연).
이러한 대학 탈패의 성장 양상은 81~83학번 시기에 100명이 넘는 신입생 등록으로 외화된다. 이와는 좀 다른 양상으로는 단대별, 캠퍼스별 탈패 창립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동아대 탈패 ‘한두레’의 경우가 전자에 해당하며, 고려대 탈패가 후자의 경우이다. 물론 고려대 탈패의 경우 성장을 통한 확산의 결과라기보다는 학생운동 차원에서의 활동가 재배치의 속성이 강하기는 하다.
○ 대학 탈패의 공연 양상과 쇠퇴의 몇 가지 징조들: 대학 탈패들은 초기 전통탈춤을 중심으로 공연이 이루어진다. 성장하면서 ‘창작탈춤’, ‘창작탈놀이’, ‘탈극’이라 부르는 공연이 등장하며, 이후 마당극, 마당굿, 상황극, 집체극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부르는 공연을 한다. 대학 탈패의 등장 초기 몇 년을 제외하고는 대학 탈패 대부분은 창작 공연을 고집스럽게 지향한다. 그 공연의 질적 수준이나 기량과는 상관없이 집착이라 여겨질 정도로 ‘창작’ 공연을 강조하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 ‘창작’ 공연의 명칭을 마당극으로 일원화하거나 단일화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른바 ‘전통탈춤 → 창작탈춤 → 마당극 → 마당굿’으로의 발전 단계가 적어도 대학 탈패의 공연 양상에서는 통용되지 않는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창작탈춤이나 마당극을 이행기의 양식이라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는 점이다.
1986년 전후 대학 내 탈패의 확산과 이에 따른 분화, 그리고 이와 정반대되는 장르 통합과 연합 공연 등의 공존 이후 탈패의 정체성 모색과 재정립이 이루어진다. 이 과정에서 대학 탈패 본진이 약화하는 양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이 문맥에서 춤패로서의 지향, 마당극패로서의 지향이 적절한 것이었는가 하는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3. 대학 탈춤부흥운동 고찰의 열쇠어 제안과 과제
○ ‘운동’
- ‘운동’이라면 이념성 혹은 지향성, 이를 수행하는 집단, 그리고 지속성이 갖추어져야 함. 대학 탈패 창설사가 아니라 대학 탈춤부흥운동사라고 할 때 역시 동일함. 지향, 집단, 지속이라는 요소가 갖추어져야 함. 이렇게 본다면 대학 탈춤부흥운동사의 효시를 부산대 탈패로 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음.
- 대학 탈춤부흥운동의 주요한 성과인 ‘대동제의 창출’ 역시 조심스러워져야 함. 70년대 연세대의 대학축전, 부락제, 민속제 등을 그 효시라고 주장함. 혹은 70년대 여러 대학에서의 민속제를 효시로 삼기도 함. 1980년 〈관악굿〉을 내세우기도 함. 더 나아가 60년대 대학 축제에서의 민속 활용까지 거슬러 올라가기도 함. 이런 식의 접근은 생산적이지 못함. 끊임없는 원조 논쟁의 늪으로 빠질 가능성이 큼. 대동제 창출의 핵심은 유해정(유인렬) 등의 대동놀이론, 공동체놀이론, 애오개 문화마당의 노력, 이를 바탕으로 한 고려대 문화패의 실천임. 고려대 대동제 구현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대동놀이감의 발견이었음. 영산줄다리기라는 대동놀이감을 발견하고 그것을 실제 대학 사회에서 구현해 내었다는 점. 이것이 중요함. 대학을 하나의 마을로 상정하고, 농악대 중심의 마을굿을 연행하는 시도는 이전에도 이미 있었음. 농악대 중심의 마을굿을 접한 이들에게 이러한 유비 혹은 치환은 그리 어렵지 않은 것이었음. 1984년 고대 대동제 이후 빠르게 전국 대학에 퍼지고, 큰 무리 없이 실행할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음.
○ ‘불온’과 ‘불량’
- 불온: 대학 탈패 출신들의 회고담에서 그 가입 이유를 보면 대체로 탈패를 불온한 동아리로 인식했음. “북 치고 장구 치고 꽹과리 두들기며 춤추지 않아도 도망치고 붙들리고 매 맞고, 갇히는 것도 탈춤”(서울대 탈패 71) “연대에서 제일 쎈 서클”(연세대 탈패 82), ‘교수들이 들어가지 말라고 했던 탈춤 서클’(경북대 탈패 83), “건대 학생운동권 중 가장 빨간 탈춤반”(건대 86). 이는 정부 기관의 인식에서도 찾아볼 수 있음.
- 안기부, 「전국대학별 문제서클 및 제적학생, 해직교수 현황」(1981.3.20.) 문건에서 나타난 ‘재경 49개 써클 중 탈춤 관련 동아리’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음.
서울대 민속극연구회(80.2 학원민주화 등 풍자극 현실 비판극 연출 학생 선동), 경희대 탈춤반(총장 배척 적극 가담), 고대 민속학연구회(78.6.25. 학내 데모 가담), 서강대 민속문화연구회(77.12.12. 구속 학생을 위한 ‘서강 학술세미나’ 개최 기도), 숙대 가면극연구반(78.10.6. ‘4천 숙명인이여 다시 한번 일어나라“ 제하 불온 유인물 250장 살포), 연대 탈춤연구회(79.11.27. 학원민주화를 위한 성명서 발표), 이대 민속극연구회(77.10. 불온 유인물 배포 및 연좌 데모 강행), 홍익대 민속극반(80.4~5월 학원 자율화를 위한 교내외 시위 주도, 80.10.13. 교내 불온 유인물 살포사건 주동), 한신대 민속학회(탈춤 등으로 각종 학내 행사시마다 문제성 야기)
- 국정원의 「전국대학별 문제단체 조직현황 및 명단(전학련 삼민투)」(1985.5.28.) 문건에서는 총 33개대 96개(2,762명) 문제단체가 정리되어 있음, 그 가운데 대학 탈패는 26개대 28개 동아리가 거론되고 있음.
서울대 민속가면극연구회, 연대 우리문화연구회, 고대 민속학연구회, 성대 민속연구반, 서강대 민속반, 한양대 민속예술연구회, 외대 가면극연구회, 중대 민속가면극연구회·전통예술반, 경희대 민속연구반, 동대 민속극연구부, 건대 민속연구회, 단대 전통예술연구회, 홍익대 전통문화반·민속악반, 국민대 탈춤반, 숙대 가면극연구반, 시립대 민속문화연구반, 부산대 전통예술연구회, 경북대 민속문단, 동아대 한두레, 산업대 전통예술연구회, 충북대 민속연구반, 충남대 탈춤연구회, 전북대 한마당, 전남대 민속문화연구회, 조선대 전통문화연구회
- 순환론적이기는 하지만, 이런 식의 ‘불온 집단화’에 부응하듯 대학 탈패는 볼온함을 보여줌. 그것은 시위 공간 마련이라는 수동적 행위를 넘어서서 직접 공연하고 시위하는, 혹은 시위와 공연이 하나가 된 활동을 하기도 함. 정부 당국은 창작탈춤이나 마당극은 물론이고, 전통탈춤 그 자체마저도 불온시하는 양상을 보이기도 함(서울대 민속제 유산, 서울대 공대 〈봉산탈춤〉 축소 공연과 공연 취소).
- ‘불량’: 대학 탈패의 ‘불온함’은 ‘불량함’과도 연관됨. 처음 대학 탈패가 생성되고 공연할 때, 대견함으로 인식되기도 함. 홍대 탈패의 창립 공연에서는 대학교 총장까지 나와서 축사를 할 정도였음. 확인이 필요하지만, 임진택에 의하면 연극반에 비해서 탈춤반은 건전 혹은 대견한 집단으로 인식되기도 했다고 함. 하지만 그 대견함은 전통탈춤 자체가 갖는 파격으로 인하여 불량함으로 바뀜. 전통탈춤 자체의 ‘야한 재담과 몸짓’, ‘개망나니 같은 사람들에게 탈춤을 배우는 젊은이들’, ‘대학 사회에서 천한 것들을 끌어들인 장본인’. 이에 조응하는 듯한 대학 탈꾼들이 꾀죄죄함. 이것들이 ‘불량함’의 꼬투리였음.
- ‘불량’이라는 딱지는 기성세대 혹은 대학 외부에서만의 편견은 아니었음. 대학 탈패의 운동성이 강화되고, 조직화 됨에 따라 학생운동권에서 일정한 지분과 역할을 담당함.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다른 차원의 ‘불량함’이라는 딱지가 붙음. 운동성 확보와 강화에 따라 나타나는 곁눈질을 통하여 대학 탈패는 ‘칙칙함’, ‘단무지(단순, 무식, 지랄)’, ‘룸펜성’ 등으로 표현되는 외적 불량함을 지적 받음. 나아가 ‘낭만성’ ‘관념성’, ‘원리주의 혹은 근원주의’(대동, 신명, 공동체 등) 등의 사유나 사상 문제까지 비판받음.
○ ‘공동체성’ 혹은 ‘집단성’
- 대학 탈패는 끊임없이 연대하고 함께 하고자 함. 탈춤부훙운동의 초기부터 4개 대학 연합 활동. 1979년 전후에는 연탈을 조직하고 실천 활동을 함. 전수 지원, 연합 공연, 독자적 시위와 활동 시도, 집단 하방(투신) 시도 등이 연탈을 중심으로 이루어짐. 이러한 대학 탈패의 집단성은 거의 모든 대학 탈패의 ‘불온화’를 추동함. 대학 간 경계를 넘어서는 인맥과 활동, 이를 통한 운동이론의 전파와 정보 공유 등이 이루어짐. 특히 지역 대학 탈패의 경우 사실상 핵심 운동권의 역할을 했는데, 그 요인이 여기에 있음. 공동창작의 시도와 지속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도 있음. 1986년 이후 서탈의 조직화, 지역 대학 탈패의 조직화 등도 집단성이라는 열쇠어로 풀어낼 수 있음. 비록 실제로 적절하게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서탈을 통해 전수 지원, 공동전수, 연합 공연, 집단 투신과 조직 투신의 시도 등이 이루어짐.
○ ‘문화’와 ‘정치’
대학 탈패의 지향은 어디에 있나? ‘예술적 창조의 길’인가 ‘정치운동으로서의 길’인가? 양자를 다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리 쉬운 일은 아님. 초기 ‘예술적 창조의 길’로의 지향은 중후기에 이르면서 사실상 약화됨. 창작탈춤과 마당극이라는 성과에 비길 후기의 성과는 대동제 이외는 찾아 볼 수 없음. 과연 그런가? 문화의 길과 정치의 길에 대한 통합 노력은 없었나? 문화와 정치의 통합 시도 혹은 시위가 곧 문화! 시위극 만들기 시도. 〈김상진 추모제〉, 〈관악굿〉, 〈대동제〉, 그리고 1980년대 중후반의 다양한 상황극, 시위극들을 문화와 정치의 통합 시도로 볼 수는 없는가? 대학 탈패 중심의 활동을 정치의 수단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문화를 통한 효과적이고 정치적인 싸움을 시도한 것으로 평가할 수는 없는 것인가?
○ ‘원형 전승’·‘전형 전승’·‘창조 전승’
- ‘원형 전승’: 대학 탈패는 국가무형문화재 전통탈춤의 ‘원형 전승’에 대하여 비판적. 일부 대학에서 이른바 ‘순수/참여’ 갈등과 같은 분란을 일으키기도 함. 하지만 대부분의 대학에서는 탈패 생성의 초기부터 ‘원형 전승’에 대하여 비판적 관점을 취함. 하지만 ‘원형적 전통탈춤’은 대학 탈패에게는 ‘마음의 고향’ 역할을 함. 그것이 비록 의도적이지는 않았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자리하고 역할을 함. 비판적인데, 가끔은 돌아가서 힘을 얻어오는 그러한 존재로서 원형적 전통탈춤. 대학 탈패의 모순적 태도.
- ‘전형 전승’: 어느 대학 탈패에게나 공통된 지향이 있음. 그것은 그 대학 탈패 고유의 창작 탈춤을 만드는 것임. ‘계명오광대’, ‘신촌산대놀이’ 운운하는 것이 이를 보여주는 사례임. 그런데 그 실제 사례는 보이지 않음. 물론 〈무악대학〉이나 〈고길동전〉과 같은 것을 그 지향의 한 단계로 볼 수도 있음. 특정 대학 공동체가 지닌 문제를 당대의 시선에서 풀어내는 당대 탈춤의 형태로 〈무악대학〉이나 〈고길동전〉 같은 것을 평가할 수 있음. 당대 탈춤을 만들어내는 일은 탈춤의 정신을 이어받으면서, 그 당대성에 주목한 것임. 그렇다면 이는 탈춤의 전형을 ‘당대성’으로 본 것임. 곧, 전통탈춤의 전형 전승의 일환이라 말할 수 있는 것임. 그리고 이는 ‘대학 사회 세시풍속으로서 탈춤’을 만드는 길이기도 함. 이는 달리 말한다면 반복한다는 것임. 대학 탈패가 끊임없이 창작을 선호하면서도 이루고자 했던 것은 당대 대학 탈춤을 만드는 일이었음. 그리고 그것이 하나의 전통으로 지속되는 것이었음. 창작 선호와 반복은 얼핏 모순으로 보일 수 있음. 하지만 대학 탈패의 창작은 창조적 개성을 드러내는 예술로서의 창작이 아니었음. 이렇게 본다면 이른바 대학 탈패 공연의 ‘상투성, 도식성’ 지적은 적절한 것이 아닐 수도 있음. 반복되며 지속되는 당대 탈춤을 만들려는 지향에서 그 상투성과 도식성은 전형성을 말하는 것임.
- ‘창조 전승’: ‘원형 전승’과 ‘전형 전승’이 국가무형문화재 탈춤 보존회와 대학 탈패 사이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라면, ‘전형 전승’과 ‘창조 전승’은 대학 탈패의 세대 간 차이를 말하는 것일 수 있음. 탈춤부흥운동의 초기와 중기에 집중된 창조 전승의 사례와 성과가 이를 말해주고 있음. 적어도 탈춤의 ‘창조 전승’은 ‘대학 사회 세시풍속으로서의 탈춤’과는 모순. ‘원형 전승’은 물론이고 ‘전형 전승’ 역시 예술가로서의 개성과 창의력 보다는 ‘전승’을 강조. 반복과 지속을 강조한다는 의미. 이에 비해 창조는 전승과 어울리지 않음. 개성적이고 독창적인 것과 전승은 어울리지 않음. 물론 창조 전승의 성과가 반복되고 지속될 길은 있음. 그것은 걸작 혹은 고전이 되는 길. 필자 개인적 평가에 의거한다면, 〈일어서는 사람들〉이나 〈칼노래 칼춤〉 정도가 이에 해당함. 창조 전승은 어떤 이상적 지향임. 그리고 쉽게 성취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함.
○ 이상에서 제안한 열쇠어들은 기존 논의에서 논의되지 않았거나 폄하되었던 것들을 달리 인식하고 풀어 본 것들임. 그동안 평가되지 못했거나 과도하게 폄하되었다고 생각한 주제들을 중심으로 논의할 때, 좋은 실마리가 될 것이 생각함. 물론 이러한 논의를 위해서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기초 자료 정리가 선행되어야 함. 여러 탈꾼의 구술 역시 필요함. 여전히 힘들고 떠올리기 어려워하는 이들이 많은 것을 알고 있음. 그야말로 게워내야 하는 것들도 적지 않음. 그럼에도 필요한 작업임에는 분명함.
○ 특정 대학 탈패를 중심으로 접근하는 것도 초기에는 필요한 연구임. 이번 준비 작업을 통하여 필자는 그 대상을 정했음. 연세대 탈패가 그러함. 연세대 탈패의 일생은 독특하면서 전형적임. 대학 탈패의 거의 모든 문제를 가지고 있음. 이른 시기에 생성된 탈패, 초기의 낭만성의 극복 과정, 핵심 운동 조직화, 언더 조직과 오픈 조직을 망라한 거대 세력화, 기청탈춤반이나 연탈 등과의 깊은 연관, 노동운동, 종교운동, 도시빈민운동과의 연관, 가장 많은 동아리 이름 변화, 1980년대 후반의 정체성 모색과 재정립 등이 연세대 탈패 활동에서 드러남. 마당극이 아니라 창작 탈춤, 창작 탈놀이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도 흥미로운 지점. 이미 『연세탈춤 40년사』라는 거칠지만, 어느 정도 정리된 기록물을 가지고 있다는 점도 모델 연구의 대상으로 적합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