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연구

한국춤비평가협회 선정 2023 춤비평논저상 - 가작논문
메를로-퐁티의 살 존재론에 비추어 본 춤 퍼포먼스의 장
송아름

초 록

본 논문은 메를로-퐁티의 살 존재론을 바탕으로 춤 퍼포먼스에서 무용수와 수용자 간에 소통이 존재함을 살펴보고 그것의 원리를 고찰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춤 퍼포먼스의 사례로서는 윌리엄 포사이드의 작품 <헤테로토피아>를 제시함으로써 메를로-퐁티의 살 존재론이 구체적인 춤 퍼포먼스에서의 말없는 소통을 설명할 수 있음을 밝히고자 한다.
 살 존재론을 전개하면서 메를로-퐁티는 무엇보다도 감각과 감각적 존재자를 강조한다. 그에게 살은 가시적인 세계를 구성하는 원소로 여겨지며, 그렇기에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운동과 현상도 살로 이루어져 있다. 메를로-퐁티는 살이 가진 여러 특성을 언급하면서 그로 인해 이루어지는 감각적 존재자들 간의 소통에 대해서도 논한다. 본 논문은 이 지점에 주목하며 예술 가운데서도 시각과 청각이 증폭되는 춤에서의 소통을 서술한다.
 무용수의 움직임이 주를 이루는 춤에서 언어는 배제된다. 이로 인해 의미 전달의 면에서 춤은 애매하다는 특징을 지닌다. 그러나 이는 애매성으로 특징지어지는 살 존재론과 만났을 때 오히려 빛을 발한다. 메를로-퐁티는 정확히 포개어지지 않는 경험이야말로 되려 소통의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둔다고 강조한다. 공백과 열개로 이루어진 살에서 엇나가고 완성되지 않는 소통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살의 특징은 춤에서의 말없는 소통이 존재함을 밝히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의 원리까지 고찰할 수 있도록 한다.



제1장 서론

본 논문은 프랑스 철학자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 1908-1961)의 살 존재론을 바탕으로 하여 춤 퍼포먼스에서 일어나는 소통을 살펴보고자 한다. 살 존재론의 어떠한 특징이 언어가 아닌 움직임을 본질로 삼는 춤 안의 소통을 설명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논할 것이며, 이 과정에서 춤의 여러 특성 가운데 감각에 초점을 맞추어 그것이 살 존재론과 맞물리는 지점에 주목하고자 한다.
 메를로-퐁티의 철학 여정을 세 갈래로 구분하자면, 주체의 고유한 몸과 지각에 관한 탐구에 천착한 현상학 시기, 예술, 문화와 정치에 집중한 중기, 그리고 그간의 연구를 갈고 닦아 살(chair) 개념에 도달한 존재론 시기라 할 수 있다. 각 시기의 저작은 『지각의 현상학』, 『기호들』 그리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으로 대표된다. 현상학에 기초한 연구에서 존재론에 이르는 이행이 시사하듯, 메를로-퐁티가 조명하고자 하는 바도 다소간의 변화가 감지된다. 『지각의 현상학』에서 메를로-퐁티는 몸을 의식 아니면 연장의 한 단편으로 간주하려는 이분법적 사고를 비판함으로써 고유한 몸의 지향성과 역량을 논하고, 몸은 곧 주체의 할 수 있음(je peux)이라고 강조한다. 이는 주체가 언제나 몸을 통해 무엇인가를 겨냥하고 지각한다는 바를 의미한다. 나아가 주체는 자신의 고유한 몸을 정박점으로 삼아 세계를 향해 자신을 기투한다. 메를로-퐁티는 이러한 세계에 현상적 장이라 이름 붙이고 있으며, 그 안에서 나와 마찬가지로 고유한 몸을 가진 타인을 마주한다고 서술한다. 이렇듯 현상학 시기의 메를로-퐁티는 무엇보다도 고유한 몸으로서의 주체를 논의 중심에 놓고 있으며 타인의 문제에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메를로-퐁티는 주체의 고유한 몸, 주체-대상의 구도에 머물러서는 그가 뛰어넘고자 했던 이분법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는다. 이러한 한계를 돌파하기 위해 메를로-퐁티가 고안한 개념이 바로 살이다. 하지만 메를로-퐁티는 몸 현상학을 확장시키고 변주함으로써 고유한 몸으로서의 주체를 완전히 저버리는 것이 아닌, 그보다 더 근원적인 차원의 감각적 존재자를 탐구한다. 그리하여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서 독자를 맞이하는 것은 어딘가 익숙한 듯하지만 또 다른 모습을 한 철학이다.
 살 존재론에서 메를로-퐁티는 반성 이전의 세계를 추구한다. 반성과 분석, 그리고 문화적 산물인 언어 이전의 이 세계에서는 무엇보다도 감각이 중요시된다. 그는 단일한 감각이 아닌 촉각, 시각 그리고 청각 간의 긴밀한 얽힘에 대해 탐구한다. 이러한 얽힘과 교차 가운데 몸 현상학에서 강조되었던 주체성이 옅어질 뿐만 아니라 오히려 주객은 상호 침투하며 서로 명확히 구분되지 않을 만큼 뒤섞인다. 그렇기에 감각적 존재자들 간의 소통은 마땅히 가능한 것이 된다. 중요한 것은 이 맥락의 소통이 반드시 언어를 수반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메를로-퐁티는 언어 이전의 원초적(primordial) 세계에서도 충분히 소통이 일어나고 있다고 본다. 원초적 세계는 『지각의 현상학』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모두에서 서술되지만, 이행에 따라 그 의미에서 차이를 보인다. 그렇기에 원초적 세계는 두 철학을 잇는 징검다리와도 같은 역할을 한다. 연구자는 바로 이 지점에 주목하였고 애매성으로 가득 찬 원초적 세계, 살, 그리고 감각이 함께 얽히며 춤 퍼포먼스 내의 소통을 논하는 데 적용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주체의 고유한 몸과 그 체험에 대한 메를로-퐁티의 논의를 토대로 춤을 논한 국내의 몇몇 시도가 있다. 이 시도들은 자신의 몸을 통해 춤을 만들어내는 무용수의 입장을 살펴보거나, 혹은 그를 지각하는 수용자의 입장에 서서 탐구했다. 두 경우 모두에서 논의의 중심이 되는 것은 주체의 고유한 몸이다. 메를로-퐁티가 고전 철학에서 도외시되었던 몸을 본격적으로 조망했기에, 춤을 논의하는 데 그의 철학이 용이한 도구가 되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하지만 연구자는 『지각의 현상학』에서 메를로-퐁티가 제시하는 개념인 상호신체성, 상호감각만으로는 무용수와 수용자를 설명하기에 한계를 보인다고 판단했다. 주체인 내가 고유한 몸으로서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타인 역시 그러하다는 사실, 그리고 몸짓을 통해 타인과 내가 만난다는 사실을 서술하면서 메를로-퐁티는 원리를 제시하지 않는다. 고유한 몸에 천착한 그에게 원리는 설명될 필요가 없는 것, 즉 우리 각자가 고유한 몸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이미 자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지각의 현상학』을 토대로 무용수와 수용자의 소통을 논하면서도 단지 양자가 고유한 몸으로써 지각한다는 사실 이상을 제시하지 못하는 것이다.
 메를로-퐁티는 춤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예술을 논하면서도 메를로-퐁티는 주로 회화와 문학을 탐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구자가 춤이라는 장르에 주목한 이유는 그것의 본질인 움직임 때문이다. 움직임은 공연예술 장르에 속하면서 말을 사용하지 않는 여타의 장르, 예를 들면 무언극, 음악 등과 춤을 명확히 구분하는 특징이며, 나아가 메를로-퐁티 철학의 이행을 잘 드러낼 수 있는 특징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본 논문은 무용수의 움직임을 몸 도식에 기반한 고유한 몸의 종합이라는 측면에 한정하지 않고, 그를 통해 여러 감각이 얽히고 교차함으로써 가능해지는 소통에 대해서도 논하게 될 것이다.
 이를 위해 본 논문은 윌리엄 포사이드(William Forsythe, 1949- )의 작품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를 분석 대상으로 삼을 것이다. 이 작품을 선정한 이유는 바로 특유한 공간 구성에 있다. 포사이드는 무대를 두 공간으로 나누었고, 수용자로 하여금 둘 사이를 자유롭게 돌아다니도록 했다. 이로 인해 무용수와 수용자 간의 거리는 대폭 줄어들며 무언의 소통 역시 더욱 활발해진다. 연구자는 이 특징이 여러 감각 간의 얽힘이 증폭되는 지점이라 판단하였기에 감각적 존재자들 간의 소통을 논하는 메를로-퐁티의 살 존재론으로 <헤테로토피아>를 풀어내고자 하였다.
 본 논문은 크게 세 장으로 이루어진다. 2장에서는 메를로-퐁티의 몸 현상학을 담고 있는 저서 『지각의 현상학』을 토대로 하여, 그가 어떻게 고전 철학에서 도외시되었던 몸을 탐구 대상으로 삼는지, 그리하여 제시되는 고유한 몸과 육화된 의식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살펴볼 것이다. 해당 장의 말미에서는 이와 같은 몸 현상학에 대해 메를로-퐁티 스스로가 고백한 한계를 실마리로 삼아 그가 왜 살 존재론으로 이행할 수밖에 없었는지, 나아가 몸 현상학과 살 존재론 간의 차이는 무엇인지 탐구할 것이다.
 3장은 살 존재론을 담고 있는 유작인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중심으로 전개될 것이다. 미완의 저작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살에 대한 특성들을 잠재성, 촉지성 그리고 가역성으로 나누어 차례대로 제시한 뒤, 이 살이 어떻게 해서 춤에 대한 논의로 확장될 수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춤이 가진 고유한 특성과 살 존재론의 내용을 함께 탐구할 것이다.
 4장에서는 앞의 두 장에서 살펴보았던 내용을 종합함으로써 구체적인 춤 퍼포먼스에 적용할 것이다. 포사이드의 작업 세계에 대해 간략히 제시한 다음, 그의 <헤테로토피아>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으며, 그 구성이 어떤 방식으로 무용수와 수용자 간의 말없는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지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메를로-퐁티의 살 존재론이 포사이드의 <헤테로토피아>에 적용됨으로써 단지 이론에 머무르지 않고, 어떻게 구체화될 수 있는지 탐구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본 연구는 2013년 성남아트센터에서 공연된 <헤테로토피아>를 감상한 데서 큰 영향을 받았다. 서술된 바와 마찬가지로 연구자는 무대 위의 두 공간을 자유롭게 이동하며 작품을 감상했다. 따라서 춤 퍼포먼스를 묘사하면서 당시 한 명의 수용자로서 체험했던 바를 최대한 담아내고자 노력했다. 다만 포사이드에 대한 국내 연구가 미비한 실정이라 대부분의 자료를 해외 문헌에서 발췌했다는 한계를 남긴다.


제2장 고유한 몸과 지각

본 장에서는 『지각의 현상학』을 중심으로 한 메를로-퐁티의 철학을 살펴볼 것이다. 메를로-퐁티는 이 저서에서 고유한 몸을 가진 주체, 그 주체를 둘러싼 타인과 세계를 논한다. 이 과정에서 메를로-퐁티는 경험주의, 주지주의와 대결을 펼친다. 메를로-퐁티는 이 두 철학의 한계를 지적하고 비판함으로써, 그리고 후설 현상학을 수용함으로써 몸으로 사는 주체를 저작의 한 가운데 우뚝 세운다. 이 점이 메를로-퐁티로 하여금 ‘몸의 철학자’라는 영광을 안겨주기도 했으나, 연구자는 『지각의 현상학』에서 개진되는 철학의 논점이 본 논문에서 논의하고자 하는 바, 무용수와 수용자 간의 소통을 논하는 경우 한계를 가진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2장에서는 먼저 메를로-퐁티가 어떻게 경험주의와 주지주의 안의 주체 개념을 넘어서는지 알아본 뒤(1절) 그 극복의 중심에 자리하는 고유한 몸과 육화된 의식에 대해 살펴보고(2절), 몸을 가진 주체가 어떻게 타인과 만남을 이루는지(3절) 고찰하고자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4절에서는 그 가운데 한계로 여겨지는 지점들을 총 세 가지로 나누어, 그것들이 어떻게 살 존재론에서 확장·심화되는지 논의할 것이다.

2.1 고전 철학의 주체 개념 비판

메를로-퐁티는 자신의 철학을 시작하는 데 있어서 경험주의와 주지주의가 걸림돌이 된다고 여겼다. 따라서 그는 두 철학적 경향을 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지각의 현상학』은 그 두 철학을 딛고 서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는 후설 현상학의 영향이 존재한다. 후설이 생활세계를 조명하기 위해 선입견으로 작용하는 경험주의와 주지주의를 비판한 것과 마찬가지로, 메를로-퐁티 역시 두 철학을 비판함으로써 현상적 장으로 돌아오고자 한다. 나아가 조명하고자 하는 사태로 접근하는 방법 역시 유사하다. 후설은 『위기』에서 초월론적 경험의 장을 해명할 수 있는 두 가지 방법, 즉 생활세계를 통한 초월론적 현상학적 환원의 방법과 현상학적 심리학을 통한 초월론적 현상학적 환원의 방법을 제시했다. 그 영향 아래 메를로-퐁티는 『지각의 현상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두 가지의 방법 모두 사용한다. 고유한 몸을 분석함에 있어서는 현상학적 심리학을 경유한 환원을 행하고, 현상적 장을 해명하는 데서는 생활세계를 통한 환원의 방법을 사용한다. 이렇듯 메를로-퐁티는 그가 조명하고자 하는 영역뿐만 아니라 그에 접근하는 방법의 면에서도 후설의 길과 동일한 길을 걷는다. 그 결과, 메를로-퐁티는 세계를 단지 그러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마는 소박함이 아닌, 반성되지 않은 것(irréfléchi)을 반성함으로써 그러한 소박함의 한계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메를로-퐁티가 보기에 경험주의와 주지주의야말로 제대로 반성하지 않은 채 세계를 그저 받아들이는 데 그친 철학이다.

주지주의와 경험주의의 친족관계(parenté)는 그처럼 매우 비가시적이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다. 이러한 친족관계는 그 둘이 모두 사용하는 감각의 인간학적 정의와 관련되는 것만이 아니라, 그 둘 모두 자연적이거나 독단론적인 태도를 유지한다는 점과 관련된다.

 고전 철학은 세계를 반성하기보다는 이미 확립된 세계를 전제한다. 그리고 고전 철학은 확립된 세계를 전제함으로써 원초적인 세계, 발생하는 의미의 풍부한 세계를 감춘다. 이는 고전 철학자들이 제 3자적 사유의 방식에 의한 객관주의적 세계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주체 역시 세계와 마찬가지로 다루어졌다. 두 고전 철학, 즉 경험주의와 주지주의는 상이한 입장에서 주체를 정의했으나, 여전히 제 3자적 관점에서 주체를 다룰 뿐이었다. 그렇다면 메를로-퐁티는 어떠한 방식으로 양자를 비판했는가. 경험주의부터 살펴보자.
 『지각의 현상학』 서론에서 우리를 가장 먼저 맞이하는 것은 고전적 편견으로서의 감각, 그 중에서도 순수 인상과 순수 성질로서의 감각이다. 메를로-퐁티에 따르면 경험주의는 감각을 순수 인상, 순수 성질로 정의하는 데서부터 오류를 범했다. 그는 붉음을 예로 든다. 우리가 붉음을 보는 것은 그 자체의 순수 성질이 아니라 그것이 어떤 표면 위에서 펼쳐지는, 예를 들면 붉은 얼룩의 카펫을 통해서 경험하는 것이다. 즉 우리가 어떤 감각적인 것을 경험한다는 사실은 이미 전체 속의 형상으로서의 그것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 순수 감각은 결국 아무것도 감각하지 않는다는 것, 따라서 전혀 감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감각의 자명성이라 주장되는 것은 의식의 증언 위에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선입견 위에 세워진다.”
 메를로-퐁티가 비판하는 또 다른 객관주의적 입장은 인간 주체를 단지 인과 관계에 입각해 설명하려는 방식이다. 그 방식의 일례로 생리학이 있다. 물리학적 법칙의 방법론을 채택하는 생리학은 인간의 몸을 대상으로 간주하는데, 그랬을 때 몸은 연장의 한 단편으로 취급되며 몸이 지닌 복잡성과 수수께끼는 그저 인과 관계에 의해 해명되어야 하는 것으로 환원된다. 특히 반사궁(arc réflexe) 이론은 몸을 통한 인간의 지각을 수용기(récepteur)와 전달기(transmetteur)의 관계로 단순화시키는 데 공헌했다. 이 이론에 따르면 객관적 세계로부터 주어진 외부 자극이 인간 몸으로 들어오고, 우리 몸은 단지 그것을 해독하는 존재가 된다. 인간 몸은 자극과 반응을 철저히 따르는, 그 외의 우연적 요소는 가지지 않는 하나의 연장이 된다.
 기계론적 생리학에 의한 인간 몸의 해명에 반대하고자, 메를로-퐁티는 심리학자 골드슈타인(Kurt Goldstein)과 겔브(Adhémar Gelb)가 실험대상으로 삼았던 슈나이더(Johann Schneider)의 사례를 여러 차례 언급한다. 그는 병리적 사례를 통해서 인간의 몸이 그저 자극과 반응을 따르는 기계가 아니라 인과 관계로는 완전히 설명되지 않는 복잡한 존재임을 드러내고자 했다. 슈나이더는 습관적인 행동은 무리없이 행하지만, 실제적 상황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추상적 운동을 하면서는 어려움을 겪는다. 그는 습관적이고 기계적인 상황 안에서만 자신의 몸을 능숙하게 움직일 수 있다. 그는 자신의 몸을 대상으로서만 파악할 뿐, 능동적인 의지를 통해 움직이지 않는다. 메를로-퐁티는 이제 슈나이더를 통해 역으로 정상 주체가 가진 역량에 대해 논한다.

정상 주체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거나 실험자가 제안할 수 있는 언어적이고 허구적인 상황들에 열려 있다. 그의 몸은 촉각에 대해서 각각의 자극이 명시적 위치를 점유하게 될 그런 기하학적 그림처럼 주어져 있지 않다. […] 정상 주체에게서 몸의 각각의 자극은 현행적 운동을 깨우는 대신에 일종의 “잠재적 운동”을 깨운다. […] 정상 주체에게서 운동적이거나 촉각적인 사건 각각은 의식에게서 풍요로운 지향들을 일으키고 이 지향들이 잠재적 행위의 중심으로서의 몸으로부터 몸 자체로 또는 대상으로 나아가게 하는 반면에, 환자에게서 촉각적 인상은 불투명하고 인상 자체 안에 갇혀 있다.

 정상 주체의 몸은 그가 가진 능동적 의지 자체다. 슈나이더가 자신의 몸을 하나의 대상으로 간주한 것과 달리, 정상 주체는 그가 지향하는 대로 운동할 수 있는 역량으로서 몸을 파악한다. 몸 자체가 가진 이 역량은 행위들이 나오는 근거이자 행위들의 잠재적 항이다. 몸의 역량에 기반한 정상 주체의 운동은 곧 지향의 풍요로움을 의미한다. 슈나이더가 행하는 습관적인 운동은 오직 제한된 상황만을 가정한다. 하지만 정상 주체가 가진 풍요로움의 앞에는 무한히 열린 상황이 있다. 이러한 풍요로움으로 인하여 정상 주체는 큰 어려움 없이, 그리고 예비적 운동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도 자신의 의지대로 몸을 움직일 수 있다. 이처럼 메를로-퐁티는 경험주의에서 수동적·대상적인 것으로 서술되는 인간 몸에 대한 선입견을 전복시켜, 몸이 가진 능동성과 고유성을 역설한다.
 경험주의가 이러하다면 주지주의는 어떠한가. 다시 서론으로 돌아가서 메를로-퐁티가 양자를 비교하는 대목을 살펴보자.

경험주의에서 빠져 있는 것은 대상과 이 대상을 촉발시키는 행위의 내적 연결이며, 주지주의에게서 빠져 있는 것은 사유의 계기들의 우발성이다. 첫 번째 경우에 의식은 지나치게 빈약하며, 두 번째 경우에 의식은 어떤 현상이든지 의식에게 청원할 수 있을 정도로 지나치게 풍부하다.

 메를로-퐁티가 보기에 주지주의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의식에 대한 관념이다. 주지주의의 계보는 데카르트에서 칸트로 이어진다고 할 수 있으며, 주지주의자들에게 의식은 구성하는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에게 의식은 그 자체로 반성되고 사유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의식은 전적으로 투명하고 확실하기 때문에, 즉 반성하고 있는 그 자신의 의식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의심할 수 없기에 다시 돌아볼 필요가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주지주의는 구성적 작업을 통해 정초된 이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만 할 뿐 그 이념에 대해서는 의심하거나 반성하지 않는다. 대신 주지주의에서 주장되는 반성은 진리 이념으로 정초된 것에 도달하기 위한 정립일 뿐이다. 그 과정에 존재하는 것은 내가 진리를 포착할 수 있다는 확신이고, 이 확신은 좀처럼 흔들리는 법이 없다. 이 확신에 따라 세계는 의식으로서의 주체가 표상하는 바대로의 그것이다. 그러므로 세계의 의미는 의식으로부터 기인한다. 주지주의는 세계를 남김없이 드러낼 수 있다고 믿으며, 따라서 의식이 구성한 세계는 일체의 불투명성이 남아있지 않은 투명한 세계다. 투명한 것은 세계뿐만 아니라 타인도 마찬가지다.
 구성하는 의식은 타인을 문제시조차 하지 않는데, 이는 세계와 마찬가지로 타인 역시 전적으로 파악되기 때문이다. 구성하는 의식의 확실성과 그로부터 얻게 되는 세계의 투명성은 진리를 포착할 수 있다는 확신과 마찬가지로, 진리로서의 세계를 소유할 수 있다는 자칫 독단론적인 태도로 향할 수 있게 만든다. 그 결과, 주지주의는 타인과 세계에 대해 철저히 사유하지 않으며 그저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데 그쳤다는 것이 메를로-퐁티의 입장이다.
 그렇지만 메를로-퐁티는 의식이 구성한 세계로 체험된 세계가 환원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칸트가 선험적 범주를 통하여 인식의 가능성을 탐구하고 그 범주 아래 인간 사유를 포섭하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진정으로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생생한 사유는 그와 같은 포섭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의식의 주체가 세계를 구성하고 정립하지만, 이러한 정립이 이루어지는 바탕으로서의 세계, 주체가 이미 그 안에 존재하는 그런 체험된 세계를 고려해야만 한다. 세계에 대해 존재한다는 것은 주체가 세계를 의식하기 전에 이미 세계와 관계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즉, 세계를 정립하려는 주체는 자신도 감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세계의 잠재적인 가능성 가운데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의식 주체에게서 구성은 사실 이미 존재하는 세계에 대한 2차적인 의미 부여다. 그러한 맥락에서 메를로-퐁티는 주지주의가 보지 못했던 지점인 몸을 가진 주체가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을 서술한다.

이 응축된 앎은 우리의 의식의 바탕에 있는 무기력한 덩어리가 아니다. 나의 아파트는 단단하게 연합된 이미지들의 계열이 아니다. 나의 아파트는 내가 그것의 거리들과 주된 방향들을 여전히 “손 안에” 또는 “두 다리 안에” 가지고 있을 때에만, 다수의 지향적 끈들(fils intentionnels)이 내 몸으로부터 내 아파트를 향하고 있을 때에만 친밀한 지대처럼 내 주위에 있게 된다.

 이 대목을 통해 우리는 메를로-퐁티가 말하는 존재하는 세계는 의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몸으로써 경험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주지주의가 의식으로서의 주체를 강조했던 것과 대비되는 지점이며, 메를로-퐁티의 몸 현상학이 개진되는 데 있어서 근간을 이루는 대목이기도 하다. 물론, 메를로-퐁티가 의식과 사유 전반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주지주의의 확고부동하고 절대적인 범주와 틀로서 규정되는 사유를 비판하며, 우리의 생생한 사유는 결코 그러한 방식으로 규정될 수 없음을 역설한다.
 앞서 살펴본 대로, 메를로-퐁티의 경험주의와 주지주의에 대한 이와 같은 비판에는 후설 현상학의 영향이 존재한다. 메를로-퐁티는 현상학이 극단적인 경험주의와 주지주의를 있는 그대로의 현상학적 세계로 결합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현상학은 세계에 대해서 과학적인 분석과 초월적인 관념의 양자택일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면서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기술하는 데 집중한다. 그리고 그러한 현상학적 세계는 단일한 순수 존재일 수 없으며, 나의 관점과 타인의 관점의 교차, 그로부터 여러 경험들의 교차로 이루어진다. 바로 이러한 점을 메를로-퐁티는 현상학에서 발견하고 있으며, 자신의 철학의 근간을 현상학에 두고자 한다.
 하지만 메를로-퐁티는 후설이 말하는 환원에 동의하면서도, 본질을 직관하는 초월론적 주체에 대해서는 이견을 보였다. 후설은 선입견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연적 태도를 멈추고 환원을 통해 세계의 의미를 다시 묻고자 했다. 소박성으로부터 탈피해 세계에 대한 반성을 취해보자는 것이다. 후설이 반성을 추구한 이유는 사람들이 자연적 태도로 인하여 그저 세계에 파묻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후설이 보기에 이와 같은 자기 망각적 태도는 정지될 필요가 있으며, 세계의 구성에 관여하는 초월론적 의식은 다시 반성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후설이 지향성을 토대로 해서 초월론적 의식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는 데 있다. 여기서 “초월론적 의식이란 대상 및 세계를 초월론적으로 구성하는 의식을 뜻”하며, 이 구성을 행하는 의식의 주체가 바로 초월론적 주관이다. 즉, 초월론적 주관은 이제 지향의 대상, 나아가 그 대상의 총체인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주관이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의미를 산출하는 초월론적 의식은 ‘내재적 존재’이기에 그것이 현존하기 위해 다른 어떤 것도 필요치 않은 ‘절대적 존재’라는 것이다. 순수성과 동일한 지위를 부여받은 의식은 스스로 완결된 존재다. 사물세계는 무화(Vernichtung)되지만 의식은 그로부터 제외되어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의식은 사물에 가해지는 인과성과 연관으로부터 철저히 자유로운 순수한 존재다. 이에 반해 대상으로서의 세계는 그것이 초월론적 의식으로부터 산출된 것인 이상, 초월론적인 의식처럼 자유롭지 않으며 오히려 의존적일 수밖에 없다. 후설은 초월론적 의식과 대상으로서의 세계 사이의 거리를 뛰어넘을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우리가 양자를 경험하는 방식에서도 차이를 보인다고 주장한다. 초월론적 의식은 필증적인 명증을 지니는 반면, 대상과 그 총체로서의 세계는 언제나 음영(Abschattung)을 지니는 채로 우리에게 주어진다. 그러한 한에 있어서 그것은 상대적인 명증을 지닌다. 이렇듯 후설에게 있어 초월론적 의식과 대상 간의 관계는 확연히 구분되며 그 존재 방식의 측면에서도 양자는 다른 방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의식을 순수성과 절대성 자체로 서술하는 후설의 입장은 메를로-퐁티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주지주의에 대한 메를로-퐁티의 비판을 염두에 둘 때, 초월론적 의식이 세계를 구성하며 그 의식의 주체가 초월론적 주관이라는 후설의 주장을 그가 꼬집는 것은 지극히 타당한 일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메를로-퐁티는 후설의 초월론적 현상학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의식이 불투명한 어떤 소여로서 자기 안에 포함하고 있는 체험된 세계를 기술하는 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으며, 이제 그 세계를 구성해야 한다. […] 따라서 이러한 새로운 “환원”은 단 하나의 진정한 주체만을, 즉 성찰하는 자아만을 알게 될 것이다. 소산적 자연에서 능산적 자연으로의, 구성된 것에서 구성하는 것으로의 그러한 이행은 심리학에 의해 개시된 주체화를 완성하게 될 것이고 나의 앎 속에 암시적이거나 암묵적인 것은 더 이상 아무것도 남겨놓지 않을 것이다. […] 그러한 것들이 초월론적 철학의 보통의 관점이며, 또한 적어도 외양상으로는 초월론적 현상학의 프로그램이다.

 투명한 의식과 동등해진 초월론적 주관을 메를로-퐁티는 긍정할 수 없다. 그는 후설의 프로그램을 거부한 뒤, 진정으로 초월론적인 것은 일체의 투명한 의식이나 세계가 아니라 오히려 애매한 삶임을 역설한다. 이 애매한 삶은 결국 의미들이 교차다. 무엇도 명료하게 판가름되지 않으며 이분법으로 나뉘지도 않는다. 우리의 삶은 결코 이것 아니면 저것인 양자택일의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메를로-퐁티는 우리의 삶이 늘 애매한 방식으로 표류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이미 존재하는 이 세계는 다만 그렇게 흘러가고 있을 뿐이다. 그곳에 거주하는 주체야말로 메를로-퐁티가 『지각의 현상학』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주체다. 그리고 이 주체는 투명한 의식이 아닌 고유한 몸으로 살며, 의식은 이제 육화된 것으로 드러난다.

2.2 고유한 몸과 육화된 의식

후설이 지향성을 토대로 초월론적 의식을 파악하고자 했다면, 메를로-퐁티는 몸을 바탕으로 지향성을 탐구한다. 몸은 타인에게 양도할 수 없이 나에게 이미 주어진 것이다. 나는 내 몸 자체다. 이를 설명하는 데 있어 메를로-퐁티가 제시하는 개념이 바로 몸 도식(le schéma corporel)이다. 메를로-퐁티는 몸 도식을 몸이 세계를 지향하면서 얻게 되는 형태로 정의하면서, 내가 나의 몸을 통해 행동할 수 있음은 어떠한 의식적 과정을 통하는 것이 아닌, 고유한 몸이 가진 지향 그 자체를 통해서임을 밝힌다. “‘몸 도식’은 결국 나의 몸이 세계에 대해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몸 도식은 나로 하여금 절대적인 앎을 가능하게 한다. 절대적 앎이란, 원주민이 사막을 지나며 자신이 왔던 길을 구태여 상기할 필요도 없이 단번에 방향을 잡는 식의 앎이다. 이 앎은 논리적 추론과 같은 식의 반성을 통해 얻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여기에 있음으로 인해 얻어진다. 메를로-퐁티가 정박점을 언급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몸 도식은 내가 처한 공간에 있어서 정박점을 가리킨다. 고유한 몸으로서의 나는 이 정박점을 의식하지 않고서 나의 위치를 안다. 따라서 이 절대적인 앎은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나에게만 주어지며, 습득을 거치지 않고서 곧장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 앎은 고유한 몸이 스스로 행하는 종합에 의한 것이다. 이에 대한 메를로-퐁티의 서술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종합을 실행하는 것은 인식론적 주체가 아니다. 그것은 몸이다. […] 우리가 객관적 몸에게서 종합을 철회하는 것은 다만 현상적 몸에게 종합을 부여하기 위해서인바, 몸은 주위에 어떤 ‘환경’을 투사하는 한에서, 몸의 ‘부분들’이 서로를 역동적으로 인지하는 한에서, […] 현상적 몸이라고 말해질 수 있다. 우리는 그러한 지향성이 사유가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그것이 의식의 투명성 안에서 수행되지 않으며 모든 잠재적 앎, 즉 내 몸이 자기로부터 얻는 그런 잠재적 앎을 습득물로 삼는다고 말하고자 한다.

 현상적 몸의 종합이 주체의 운동, 다시 말해 지향성을 통한 행동을 가능하게 한다. 몸의 종합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이루어지고, 우리는 그 종합의 결과물을 세계로 향하는 토대로 활용한다. 이 결과물, 즉 잠재적 앎을 기반으로 하는 현상적 몸은 이제 주체의 역량과 같아진다. 현상적 몸을 둘러싼 환경은 행동의 잠재적 항으로서 나의 주변에 있다. 예를 들어보자. 현재 나의 앞에 여러 개의 펜이 있다고 할 때, 이 환경은 내가 팔을 뻗어 그것들 가운데 하나를 집어 들 수도 있을 가능성을 품고 있다. 내 주변은 오직 관찰하고 구성할 수 있는 대상으로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메를로-퐁티에게 있어서 주변 환경은 주체가 스스로를 기투할 수 있도록 열려 있는 세계다. 즉, 나는 현상적 몸이 가진 역량을 통해 세계를 겨냥하며 지향한다.
 몸의 지향성과 역량 모두 현상적 몸이라는 개념 안에서 어우러진다. 이를 통해 우리는 주체의 자발적인 행동을 읽어낼 수 있다. 주체는 고유한 몸을 정박점으로 삼아 세계에 있다. 주체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으며 일상적인 행동 하나하나를 통해 세계에 자신을 기투한다. 메를로-퐁티가 언급하는 자발적인 행동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가 일상적인 삶에서 매일 행하는 것들이다. 우리의 삶을 지탱해주는 것은 실로 그러한 일상적인 움직임일 것이다. 우리는 고유한 몸으로써 존재하며 이는 곧 메를로-퐁티 철학에 있어 뚜렷이 나타나는 사실이다.
 이와 같은 고유한 몸 그리고 그것이 가진 지향성은 지각으로 이어진다. 지각은 곧 주체의 세계로의 기투를 의미한다. 지각은 오로지 내적으로 형성되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외부의 실제 대상에 의해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지각은 몸의 주체가 외부의 대상을 향해 열리면서 일어난다. 메를로-퐁티는 이와 같은 지각에 있어서 몸이 가지는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몸의 운동은 오로지 그것 자체가 본래적 지향성일 때에만, 인식의 구별된 대상에 자신을 관계시키는 어떤 방식일 때에만 세계의 지각 안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주체가 자발적으로 행동하고 이 행동은 몸이 가진 지향성과 관계한다는 메를로-퐁티의 입장을 이제 확인할 수 있다. 메를로-퐁티는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이러한 행동은 결국 주체가 세계와 관계하는 방식임을 밝힌다. 즉, 지각은 곧 주체의 체험이다. 우리의 고유한 몸은 구체적 체험을 통해 세계와 얽힌다. 그런데 여기서 주체와 세계의 관계는 어떠한 의식적 인과성을 따르지 않는다. 주체는 다만 체험할 뿐이다.
 주체는 오로지 구성하는 의식 존재로서 세계와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다. 메를로-퐁티에게 의식 개념은 사유의 영역 안에 머무르지 않으며, 주체의 운동 가능성과 연결된다. 그는 후설의 용어를 빌려와, 의식이란 무엇에 대하여 생각한다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할 수 있음(je peux)이라고 명시한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보고서 그것을 집어 들고자 할 때, 이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대상에 대한 표상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우리 스스로의 기투이며 그 기투는 몸을 통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메를로-퐁티는 데카르트의 입장, 즉 보이는 대상의 실존에 대해서는 의심하지만 본다는 사유 자체는 의심스럽지 않다는 입장을 반박한다. 데카르트가 의심하지 않는 봄이라는 사유는 메를로-퐁티의 입장에서는 봄이라는 지각, 다시 말해 구체적인 지각 행동이 먼저 이루어졌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렇듯 메를로-퐁티는 구체적 행동으로서의 지각을 거듭 강조한다. 만일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에서 절대성의 지위를 부여받을 수 있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몸이며 더 나아가 그 몸을 통한 직접적인 체험일 것이다.
 이제 의식의 지위가 전복된다. 더 이상 의식은 투명함과 명료함으로 무장한 채 몸과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불명료함과 모호함의 지대인 몸이 곧 의식의 자리가 된다. 메를로-퐁티가 의식을 주체의 할 수 있음, 즉 몸의 역량으로 간주함에 따라 의식은 이제 육화된다. 그 결과 육화된 의식은 애매함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그 예로, 메를로-퐁티는 하늘을 감각함에 있어서 벌어지는 애매함을 설명한다. 나는 푸른 하늘을 바라본다. 내가 하늘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늘 역시 나에게 열린다. 나는 세계로부터 멀리 떨어진 채로, 단지 사유 안에서 하늘을 감각하지 않는다. 내가 푸른 하늘을 감각한다는 것은 푸른색에 대한 관념만으로 표상하는 것도 아니다. 푸른색은 명료하게 구성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불투명하게 다가오고 나는 그것을 끊임없이 재포착한다. 나는 하늘을 감각하며 내 시선은 “그곳에서 돌아다니고 그곳에 거주”한다. 이 과정에서 나는 하늘에 대한 명료한 사유를 가지지 않는다. 오히려 내 의식과 하늘의 푸르름은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내가 푸른색을 소유한다는 것은 의식과 대상을 나누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과 나 사이에 모호한 관계를 맺는다는 바를 의미한다. 메를로-퐁티가 말하는 육화된 의식은 바로 이런 것이다. 대상을 지각하는 일은 그 관계의 불명료함과 애매함을 긍정하는 것, 의식으로부터 발원하는 표상을 거부하고 직접 체험하는 바에서 생겨나는 의미를 긍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육화된 의식을 통해 세계와 얽힌다.
 고유한 몸과 육화된 의식이 세계와 관계하는 것은 곧 몸이 늘 대자적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우리가 몸을 움직여 무언가를 겨냥함은 그 대상 역시 몸에 대해 존재한다는 바를 뜻한다. 몸이 본래적인 지향성을 통해 계속해서 무엇인가로 향하고 그것에 대해 작용할 때, 몸은 언제나 대상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 이는 곧 몸이 대자적인 운명에 처함을 의미한다. 몸은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몸은 ‘즉자’의 영역에 속해서는 안 된다.” 이런 의미에서 내 몸은 세계가 투영되는 교차이기도 하다. 내가 세계에 대해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세계 역시 나에게 투영된다. “세계는 구체적인 삶의 체험 속에서 몸 자신과 의미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내가 끊임없이 세계를 지각하고 체험하는 바에 따라 내 몸에는 그 결과물이 교차, 축적된다. 그 축적물을 기반으로 삼아 다시금 세계에 기투하고, 이 과정은 내가 고유한 몸으로써 삶을 영위하는 마지막까지 계속된다.
 메를로-퐁티가 주체는 몸으로써 세계에 대해 있다고 할 때, 이는 전혀 추상적인 서술이 아니다. 그는 늘 구체적인 상황을 다루고 있다. 내가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내 몸이 세계에 머무르기 때문이다. 즉, 세계가 “내 앞에서 의미를 얻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결국 내가 세계 속에 위치해 있고 세계가 나를 이해하기 때문이다.”
 주체가 계속해서 자신을 기투하는 것이자 주체 자신에게 경험되는 이 세계에 메를로-퐁티는 다른 이름을 붙이는데, 그것은 바로 현상적 장이다. 이 현상적 장이란 “객관적 세계의 이편에 있는 체험된 세계”다. 주체가 자신에게 열려 있는 이 세계에 관계하고 참여한다 함은 곧 현상적 장과 얽힘을 뜻한다. 그러므로 “나는 장이고, 나는 경험이다.” 물론, 이 과정은 의식이나 인과성에 의한 것이 아니다. 현상적 장은 고유한 몸을 가진 주체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계에 참여하며 그 안에서 타인과 다른 사물들을 마주침을 뜻한다. 즉, 주체는 세계 속에 머무르며 계속해서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와 마주한다. 이는 주체에게 부여된 운명과 다름없으며 타인과의 관계는 결국 실존의 중요한 요소로 자리한다. 그렇다면 주체가 타인을 마주하는 곳은 어디이며, 그 만남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아래 절에서 살펴보자.

2.3 세계 속에 있는 주체

메를로-퐁티에게 있어서 세계는 늘 구체적이다. 내가 의자에 앉아 책을 읽거나 신호에 맞추어 길을 건너든가 하는 식으로, 상황 하나하나가 맞물려 어우러진 구체적인 세계다. 이에 대해 메를로-퐁티는 주체가 서 있는 공간을 “위치의 공간성(spatialité de position)이 아니라 상황의 공간성(spatialité de situation)”으로 서술한다. 위치의 공간성은 객관적, 좌표적 공간에 근거하며 그 안에 자리하는 주체를 기하학적인 위치로만 규정하는 바를 뜻한다. 이에 반해 상황의 공간성인 구체적 세계라는 것은 한 명 한 명의 주체가 자리하는 위치적 공간이 겹쳐짐으로써가 아니라 각자의 고유한 상황이 서로를 향해 열려 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러한 열림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결국 몸이다. 어떠한 점에서 그러한가. 메를로-퐁티가 환자의 예시를 드는 대목을 통해 살펴보자.

우리가 말했던 환자에게서 미래, 살아있는 현재나 과거로 향하는 운동과 배우고 성숙하고 타인과의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은 몸의 증상 안에 갇혀 있는 것처럼 나타난다. […] 나의 인격적 삶을 지탱하는 그런 익명적 삶 안에 나를 가둘 수 있다. 그러나 정확히 나의 몸이 세계에 대해서 자기 안으로 닫힐 수 있기 때문에 나의 몸은 또한 나를 세계에 대해서 열어놓고 상황 속에 놓는다. 타인, 미래, 세계를 향한 실존의 운동은 얼음이 녹은 강처럼 다시 활기를 띨 수 있다.

 메를로-퐁티는 몸이 스스로를 가둘 수 있기 때문에 세계로 열린다고 말한다. 이를 언급하면서 그는 익명적(anonyme), 익명성(anonymat)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이를 일반성(généralité)과 결부시켜 설명한다. 익명성이 곧 일반성으로 설명되는 이유는 그가 감각을 논하는 절에서 해명된다. 메를로-퐁티는 “모든 지각은 일반성의 분위기 안에서 일어나며, 우리에게 익명적인 것처럼 주어진다”고 말하며 “감각함은 일반성의 환경 안에서 필연적으로 감각함 자체에 대해 나타”나고, “감각함은 나 자신 이전에서 온다”고 서술한다. 내가 감각할 수 있음은 나의 인식을 통해 밝혀지는 것이 아니라, 고유한 몸을 가진 이상 나의 의도 없이도 일어나는 것이다. 이는 나뿐만이 아니라 타인에게도 마찬가지이다. 타인 역시 무언가를 감각할 때 의식되지 않는 익명성을 전제로 한다. 메를로-퐁티가 익명성을 일반성과 나란히 놓고 설명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다. 고유한 몸이 가지는 익명성은 감각과 지각을 통해서 확인되고, 한편으로 이는 주체가 곧 타인과 세계에 열려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즉, 의식하지 않지만 자신 안에 익명성을 품은 주체가 몸으로써 살아가는 이상, 필연적으로 자신의 외부에 열려 있다. 물론 주체는 능동적 의지를 통해 스스로를 가둘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체의 고유한 몸에 세계를 향한 익명성이 내재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주체는 몸이 가진 이와 같은 익명성과 일반성을 디딤돌 삼아 타인을 향해 열리고 지각한다.
 이와 같이 일반성을 통한 타인에 대한 지각이 자연적 세계에서 일어나는 것이라면, 메를로-퐁티는 그와 달리 문화적 세계에서의 지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설명한다. 나는 음식을 떠먹기 위해 만들어진 숟가락이나 누군가를 부르기 위해 고안된 벨을 사용함으로써 나와 마찬가지로 이 사물들을 사용하는 누군가의 흔적을 느낀다. 그곳에는 나의 것이 아닌 익명적 삶의 방식이 남아 있다. 비단 눈앞에 존재하는 사물뿐만 아니라 내가 그것들을 사용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나는 내 안에 축적된 시간 속에서 문화적 관습을 습득했으며, 큰 어려움 없이 그 방식을 수행한다. 그런데 메를로-퐁티에게 있어서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만남이 어떻게 가능한지, 즉 어떻게 내가 문화적 세계에서 타인의 실존을 알아챌 수 있는지를 아는 것이다. 이 맥락에서 메를로-퐁티가 제기하는 두 가지의 큰 문제는 다음과 같다.

질문은 어떻게 공간 속의 한 대상이 말하고 있는 실존의 흔적이 될 수 있는지, 어떻게 거꾸로 지향, 사유, 기투가 인격적 주체로부터 떨어져 나와 그의 외부, 그의 몸 안에서, 또는 이 몸이 구성되는 환경 안에서 가시적이 될 수 있는지를 아는 것이다.

 전자는 내가 타인을 하나의 대상처럼 간주함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가 나와 마찬가지로 실존의 의미를 가지는지 아는 것이고, 후자는 그러한 타인이 나와 마찬가지로 어떻게 자신의 바깥으로 의미를 기투하는 존재가 될 수 있는지를 아는 것이다. 양자 모두 역설일 수 밖에 없는데, 만약 내가 타인을 사물로서 지각한다면 그는 동시에 의식일 수 없을 것이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즉 이 맥락에서 우리는 둘 중 하나를 고를 수 없는 상황에 놓인다. 내가 마주하는 타인은 둘 중 어느 한 존재로만 규정되지 않는다. 이러한 역설이 발생하는 이유는 존재를 단 두 가지 방식, 즉자 존재와 대자 존재만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즉자 존재는 의식, 다시 말해 몸 안에 가두어진 내부로 상정되고, 대자 존재는 몸의 형태 혹은 행동인 외부로 상정된다. 양자택일의 논리에 따르면, 내부인 타인의 의식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야 마땅하다. 반대로 외부인 타인의 몸에서 우리는 그의 내부인 의식을 볼 수 없어야 타당하다. 이처럼 존재를 즉자와 대자만으로 구분함은 데카르트의 이원론적 사유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이를 따르자면, 사유하는 의식인 나를 제외한 타인은 단지 대상으로 치부될 따름이므로 위에서 언급된 역설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메를로-퐁티가 이러한 이원론적 사유 혹은 이분법을 비판하면서 초월론적 사유도 함께 겨냥하고 있다는 점이다. 앞의 2.1절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후설이 주장한, 세계를 구성하는 것으로서의 절대적·초월론적 의식에 대해 메를로-퐁티는 날카롭게 비판했다. 이러한 초월론적 사유와 이원론적 사유를 나란히 놓고 볼 때, 이들은 주체가 의식으로서 절대적인 지위를 점하며 그 이외의 것은 모두 대상으로 남는다는 공통분모를 가진다. 하지만 우리는 메를로-퐁티의 비판으로 인해 내부와 외부로, 대자 존재와 즉자 존재만으로 구분되는 이러한 관계는 역설을 가질 수밖에 없음을 안다. 그렇다면 이 역설에 빠지지 않고 타인의 존재를, 타인에 대한 지각을 설명할 수 있는 길은 나를 혹은 타인을 구성하는 의식이 아닌 “세 번째 종류의 존재”인 고유한 몸을 가진 존재로 인식하는 것에 있다. 메를로-퐁티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의식과 관련해서 우리는 그것을 구성하는 의식으로서, 대자적인 순수 존재로서가 아니라, 지각적 의식으로서, 행동의 주체로서, 세계에 대한 존재로서 또는 실존으로서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럼으로써만 타인이 자신의 현상적 몸의 정상에서 나타날 수 있을 것이고, 일종의 “장소성”을 수용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나와 타인은 대자 존재와 즉자 존재로 구분되지 않는다. 우리는 그와 같은 양자택일의 이분법을 넘어선 존재, 즉 메를로-퐁티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육화된 의식이다. 이는 의식으로서의 내가 타인과 세계를 그저 대상으로 간주하지 않음을, 따라서 그들에게 의미를 부여하고 구성하지 않음을 뜻한다. 오히려 나는 “세계의 역량으로서 나의 몸을 통과해 미완성적 개체로서 세계를 가진다.” 세계는 실존하는 누구에게나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이기에 그 안에서 나와 타인의 공존은 역설이 되지 않는다. 동일한 맥락으로 세계는 오직 나의 것만이 아니다. 우리에 앞서 있는 세계 안에서 나는 나와 마찬가지로 세계의 일부를 가지는 타인을 경험한다. 타인 역시 자신의 육화된 의식에 대해서 있는 세계를 가진다. 그렇기에 내가 지각하는 세계는 나에 대해서 뿐만이 아니라 내가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육화된 의식, 즉 타인과 상관적이다. 세계에 존재하는 타인과 나의 관점은 상이하다. 하지만 이 제각각의 관점은 흩어지지 않고, 오히려 서로에게 미끄러지면서 세계 안으로 모인다. 물론, 여기서의 세계는 이미 존재하는 세계, 즉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세계다.
 세계가 이러하다면 나와 공존하는 타인은 어떠한 모습으로 내게 경험되는가. 메를로-퐁티는 우리가 타인을 일종의 몸짓으로써 지각함을 주장한다. 몸짓은 대상에 대한 우리 스스로의 기투의 흔적이다. 이러한 몸짓에는 대상에의 참조가 숨어 있다. 다시 말해, 몸짓은 주체가 구체적인 행동으로써 세계에 기투함을 나타낸다. 우리는 이와 같은 몸짓을 계속해서 행함으로써 세계에 실존한다. 따라서 내가 타인을 지각한다는 것은 자신을 세계에 기투하는 누군가의 몸짓을 지각한다는 바와 같은 뜻이다.
 나와 다른 몸짓으로서의 타인은 내가 기투하는 세계에 개입하며 그를 뒤흔든다. 나의 것이 아닌 음성 혹은 움직임을 경험함으로써 나는 낯선 느낌을 받는다. 이는 몸짓에 내재되어 있는 의미, 나아가 그에 배어 있는 타인의 상황과 세계가 나에게 넘어오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을 메를로-퐁티는 “실존의 어떤 변주”라 부른다. 이 변주는 불가피한 것인 동시에 고유한 몸의 능력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이 점에 대해 메를로-퐁티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몸짓의 의미는 물리적 현상인 생리학적 현상으로서의 몸짓 안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단어의 의미는 소리로서의 단어 안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자신의 자연적 능력들을 넘어서고 그런 능력들을 변형시키는 것이 인간 몸의 정의이며, 인간의 몸은 의미작용적 핵심들을 일련의 무한정한 불연속적 행위들 안에서 전유한다.

 타인의 개입으로 인하여 자신의 실존에 변주가 가해지는 것은 곧 주체가 자신에게 이미 주어진 바의 한계를 넘어서고, 나아가 몸짓을 통해 또 다른 의미를 발생시킴을 뜻한다. 주체의 고유한 몸은 자신에게 전달되는 의미를 특유한 방식으로 경험하고 또 다른 몸짓으로써 전유한다. 각자의 몸이 다르듯 그로 인해 전유되는 의미 역시 같을 수 없으므로, 이 과정에서 의미는 계속해서 새롭게 태어난다. 이렇듯 몸짓이라는 것은 의미 발생과 불가분한 관계에 놓여 있다. 그리고 이 의미가 향하는 곳은 언제나 타인이자 세계이다. 주체가 세계에 열려 있음은 타인과 소통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뜻하는 것이며 타인 역시 마찬가지의 태도를 취할 것이라 은연중에 인지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우리가 마주하는 세계는 무한히 미끄러지고 겹치는 의미의 연쇄로 구성된다.
 타인과 세계를 향해 열려 있음이 주체의 운명이라고 할 때, 우리는 이제 소통 문제에 직면한다. 그런데 소통에 있어서 실상 우리는 무엇을 사용하는가? 몸짓이 아니라 언어이지 않은가? 하지만 메를로-퐁티는 이러한 물음에 긍정하지 않는다. 그는 몸짓을 단지 모방에 근거한 감정적 표현으로, 언어를 관습적인 기호만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메를로-퐁티는 오히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단어가 가진 “감정적 의미”라고 서술한다. 이 표현을 이해하기 위해 언어에 대한 메를로-퐁티의 사유를 간략히 살펴보자. 무엇보다도 그에게 있어서 언어는 순수 사유의 산물이 아니다. 나아가 언어는 사유를 표현하기 위한 도구도 아니다. 메를로-퐁티에게 있어서 언어란 무한한 의미가 현존하는 이 세계에서의 “주체의 위치 잡기”이다. 언어를 가진다는 것은 곧 주체가 행동으로써 표현함을 뜻한다. 우리는 왜 말을 하는가. 오직 사유하기 위함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타인과 소통하기 위함이다. 누군가와 대화하기 위해 나는 언어를 가진다. 메를로-퐁티에게 말(parole)은 무엇보다 이러한 맥락에서 정의된다. 즉 말의 핵심은 언어를 사용하는 행위에 있다. 언어는 늘 구체적인 행동을 바탕에 둔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단순한 기호를 넘어선, 몸짓으로서의 말을 이해할 수 있다. 기호로서의 단어가 아닌, 행동으로서 전해지는 말에는 발화자의 몸짓과 그에 따른 감정이 실린다. 나는 타인의 언어적 몸짓을 통해 그가 전하고자 하는 의미를 받아들인다. 메를로-퐁티는 분노를 토하는 사람의 예시를 든다. 내가 타인의 분노를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은 그 사람의 감정을 사유함으로써가 아닌, 혹은 그 사람이 늘어놓는 단어들의 조합을 통해서가 아닌, 분노 그 자체가 된 몸짓을 통해서다. 그 몸짓에는 단어와 음성이 한데 뒤섞여 있다. 나는 그 몸짓을 경험함으로써 그 사람의 분노를 이해한다. 말은 전적으로 행동이며, 그 행동에는 고유한 몸이 결부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제 “중요한 것은 그들이 자신의 몸을 사용하는 방식이다.” 내가 타인을 이해하고 그와 소통하는 일은 곧 그 사람의 방식과 태도까지 받아들이는 것이고, 타인 역시 마찬가지로 나를 읽는다. 우리는 몸으로써 서로에게 향해 있고 서로를 경험한다. 소통은 단지 모방적인 몸짓만으로, 혹은 순수 기호인 언어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몸짓과 언어는 서로를 전제한다. 양자는 불가분한 관계에 놓여 있으며 우리로 하여금 소통하게 한다. 언어적 몸짓은 의미 발생을 무한히 가능하게 하며, 세계는 그와 같은 우연적인 의미로 꽉 차 있다.

2.4 『지각의 현상학』에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으로

지금까지 살펴본바, 메를로-퐁티 현상학의 중심에는 언제나 몸이 있다. 고유한 몸으로 존재하는 주체는 그 자신의 역량을 통해 세계를 경험하며 타인과 소통한다. 땅 위를 딛고 선 주체는 더할 나위 없이 견고해 보인다. 하지만 메를로-퐁티는 살 존재론으로 이행하면서 그 견고함에 새겨진 한계를 발견한다. 그 한계는 다른 방식으로 확장되고 내용은 더욱 깊어진다. 『지각의 현상학』의 곳곳에서 우리는 살 존재론의 씨앗들을 엿볼 수 있으며 실제로 그 내용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서술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듯 단절이 아니라 연결이자 한층 더 확장될 내용이라면, 메를로-퐁티는 왜 몸 현상학에서 살 존재론으로 이행해야 했는가. 나아가 이행을 통해 어떤 것들이 확장되었는가.

2.4.1 잔존하는 이분법

앞서 우리는 메를로-퐁티가 주지주의, 즉 대상과 세계를 구성하는 의식 철학을 비판함을 살펴보았다. 그 과정에서 메를로-퐁티는 의식만으로는 세계가 가진 풍부한 의미를 다 파악할 수 없으며 타인의 문제 역시도 다룰 수 없음을 밝혔다. 그런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서 메를로-퐁티는 자신의 몸 현상학 역시 그러한 주지주의의의 이분법에 머물러 있었음을 고백한다.

Ph.P에서 제기된 문제들은 내가 거기서 ‘의식’―‘객관’의 구별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해결이 불가능하다―
그와 같은 구별에서 출발해서는 ‘객관적’ 질서에 속하는 어떤 사실(뇌의 상해와 같은)이 세계와의 관계에 관련된 그러한 장애―‘의식’ 전체가 객관적 신체의 함수라는 것을 논증하는 듯한 대대적인 장애―를 야기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우리는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메를로-퐁티는 『지각의 현상학』에서 여러 환자의 예시를 통해 의식과 몸은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음을 피력하였다. 하지만 이후 그가 술회한 바에 따르면, 『지각의 현상학』에서 그는 여전히 데카르트적 이분법―의식과 객관적 신체―에 머물러 있었기에 양자 간의 함수와도 같은 관계를 규명할 수 없었다.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메를로-퐁티가 말하는 ‘객관적’이라는 표현의 두 의미에 대해 살펴보아야 한다. 첫째, 현상적 몸과 상반되는 것으로서의 ‘객관적’ 몸이 있다. 육화된 의식으로서 대상을 지각하는 주체가 곧 현상적 몸이라면 ‘객관적’ 몸은 어떠한 현상적 혹은 실존적 의미를 갖지 않는, 다만 기하학적 세계에 머무르는 하나의 사물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 현상적 몸인 것과 마찬가지로 ‘객관적’ 몸이기도 하다. 이 점을 염두에 두면서 두 번째 의미를 살펴보자.
 우리의 몸에는 무시할 수 없는 생리학적 현상이 존재한다. 이러한 ‘객관적’ 사실은 우리가 유기체로 존재할 수 있는 분명한 조건이다. 그러나 메를로-퐁티는 이와 같은 ‘객관적’ 사실에 대한 설명을 현상적 몸에 대한 설명으로 치환해버린다. ‘객관적’ 사실은 충분히 해명되지 않은 채 다만 현상적 몸이 가지는 경험 안으로 흡수될 따름이다. 두 의미를 정리하자면, ‘객관적’ 몸은 대상의 측면으로, ‘객관적’ 사실은 존재 조건으로서 주체적 몸에 속한다. 한편으로는 대상이자 다른 한편으로는 주체라는 이와 같은 역설은 메를로-퐁티가 의식-대상이라는 이분법적 구도에 머무른 데서 연유한다. 주객으로 설정된 이상 한 존재가 동시에 주체이자 객체일 수 없다. 나아가 의식 철학의 구도에 머무르면서 메를로-퐁티는 객체인 것에 대한 설명 역시 충분히 제공하지 않으며, 육화된 의식에 우위를 부여했다. 이로 인해 의식과 몸은 서로 외적인 두 항으로 그쳤고 양자 간에 해명되어야 할 함수 관계는 더 설명될 필요가 없는 당연한 것으로 남았다.
 위의 논의로 도출되는 또 다른 난점은 메를로-퐁티가 몸과 세계의 관계를 바라보는 이중적인 방식에 있다. 이 방식은 주체와 세계 사이에 설정된 거리와 관련된다. 첫째, 메를로-퐁티는 주체를 “몸을 가지고 있고, 몸에 의해 세계 안에서 움직이는” 이, 즉 세계 안에(dans le monde) 머무르는 이로 간주한다. 이때, 주체와 세계 사이에 놓인 거리는 없으며 주체가 그로부터 분리되지도 않는다. 주체는 세계의 일부다. 이에 반해 둘째, 메를로-퐁티가 “몸 도식은 결국 나의 몸이 세계에 대해 있다(mon corps est au monde)는 것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혹은 “몸은 세계에 대한 존재의 운반수단(le corps est le véhicule de l’être au monde)”이라고 서술할 때는 주체와 세계 가운데 거리가 존재한다. 이는 “세계에 대해(au monde)”라는 표현 때문이다. 여기서 주체는 세계로부터 떨어져 세계를 자신의 지각 경험의 대상으로 둔다. 이때 세계는 주체를 이루는 일부가 아니며 주체가 자신의 몸을 매개수단으로 삼아 탐구해야 할 무언가가 된다. 전자에서는 감지할 수 없었던 의식-대상의 구도가 후자에서는 명백히 드러난다. 후자의 논의를 확장해 생각해볼 때, 메를로-퐁티가 몸에 대해 가지는 입장의 문제가 한층 더 뚜렷해진다. 어떤 지점에 이르러서는 주체 그 자체였던 고유한 몸이 단지 의식과 세계, 즉 주체와 객체를 매개하기 위한 수단에 그치고 만다. “몸은 주체도 객체도 아니며, 주체와 객체의 매개이다.” 나아가 이 맥락에서의 몸은 단지 매개에 불과하기에 엄밀하게 사유되지 않는다.
 다시 논의의 원점으로 돌아가 보자. 메를로-퐁티가 고백한 오류는 육화된 의식으로서의 주체와 그 주체가 대상으로 삼는 객체라는 이분법이었다. 이 이분법이 전제된 몸 현상학에서는 의식과 객관, 다시 말해 객관적인 몸과 객관적 사실이 육화된 의식, 즉 현상적 몸과 어떻게 관계를 이룰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과 그에 따른 해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의문에 부쳐지지 않은 의식-대상의 구도는 결국 그가 그토록 넘어서고자 했던 이분법으로 작용함으로써 저작 내내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으며, 메를로-퐁티가 몸과 의식과의 관계를 탐구하는 데 있어서 장막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존재론에서의 메를로-퐁티는 이와 같은 이분법을 넘어서기 위하여 살 개념을 면밀히 주조한다. 후의 내용을 선취해 간략히 설명하자면, 살은 주체와 객체 혹은 의식과 대상 간의 구분이 행해지기 이전에, 모든 것이 가능하도록 하는 가능성이다. 분화 이전의 존재이자 차원인 살에 있어서 이분법은 설 자리를 잃는다. 살의 어떠한 특성이 의식-대상의 구도를 넘어설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후에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고, 이 지점에서는 메를로-퐁티가 과거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에 대한 대안으로 살을 고안해냈다는 사실만을 염두에 두도록 하자.

2.4.2 감각의 확장

메를로-퐁티는 『지각의 현상학』 서론 첫 장에서부터 감각에 대한 논의를 이어간다. 그 배치로 말미암아 우리는 감각에 대한 논의가 지니는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다. 그에게 있어 감각이 중대한 이유는 그것이 지각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앞서 보았듯이, 그는 감각을 객관적 성질로 간주하는 경험주의의 감각 이론을 거부하고 행위를 포함하는 경험, 즉 감각함을 강조한다.

본다는 것은 색들이나 빛들을 경험한다는 것이고, 듣는다는 것은 소리들을 경험한다는 것이며, 감각한다는 것은 성질들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어떠한 색을 볼 때,

나는 그 색을 내 시선의 어떤 진동처럼 눈 안에서 느낀다. […] 그 색은 나를 가득 채우며, 색이라는 명칭의 자격을 더 이상 갖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나의 바깥에서, 악기를 통해 울리는 객관적 소리가 있고, 대상과 내 몸 사이에서 분위기적 소리가 있으며, […] 이때 음향적 요소는 사라지고, 그것은 나의 몸 전부의 변형의 경험이 된다.

 이렇듯 메를로-퐁티는 색을 경험함으로 인해 내 몸에서 발생하는 공명을 서술한다. 이는 객관적 성질로서의 감각 개념을 거부하는 동시에 감각이란 곧 감각함임을 주장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세계는 주체의 의식적 표상이 아니라는 점에서, 주체가 세계를 지각하고 경험하는 데 있어 필수불가결한 것이 바로 감각이다. “감각한다는 것은 세계와의 생명적인 그러한 소통이며, 이것은 우리에게 우리 삶의 친밀한 장소로서 세계를 현전하게 만든다.” 같은 맥락에서 르노 바르바라스(Renaud Barbaras)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감각 작용은 이해의 행위에 의해서만 세계에 나타나는 내재적 체험도, 동일한 대상에 제한된 감각적 성질을 가리키지도 않는다. 그것은 그 자체로 세상의 이해이고, 우리를 세계에 열어주는 수단이다.” 우리가 고유한 몸으로 실존하는 이상 우리는 감각하고 지각할 수밖에 없으며, 그리하여 세계와 소통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한다.
 감각함이라는 행위에서 중요한 것은 “형상(figure)과 바탕(fond)이 전체로서 감각”된다는 사실이다. 메를로-퐁티가 이 점을 거듭해서 강조하는 이유는 감각이란 객관적 성질이 아닐 뿐만 아니라 나아가 결코 단일하게 감각되지도 않는다는 데 있다. 즉, 우리는 언제나 여러 감각을 동시에 경험하고 그 감각들은 서로 소통한다. 이 소통이 감각들의 통일을 가능하게 한다. 감각들의 소통과 통일은 곧, 공감각(synesthésie)을 의미한다. 통일은 종합을 행하는 의식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의식의 언어로는 완전하게 이해될 수 없는 유기체의 고유한 특성이다. 이는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가 몸 도식에 의해 그 과정을 의식하지 않고도 한 대상을 향해 손을 뻗을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 이상의 감각을 동시에 경험하는가. 그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새 한 마리가 막 날아오른 나뭇가지의 움직임 속에서, 우리는 그것의 유연성과 탄력성을 읽으며, 사과나무의 나뭇가지와 자작나무의 나뭇가지가 그렇게 금세 구분된다. 우리는 모래 안으로 파고드는 강철 덩어리의 무게를 보고, 물의 유동성, 시럽의 끈적함을 본다. 같은 식으로, 나는 자동차가 지나가며 내는 소음에서 포장도로의 단단함과 울퉁불퉁함을 듣고, 사람들의 “부드러운” 소음, “둔탁한” 소음, 또는 “메마른” 소음을 적절히 말한다.

 우리는 두 눈으로 대상을 보는 동시에 그것을 느낄 수 있으며, 무언가를 듣는 동시에 그것의 질감을 알아차릴 수 있다.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표현들, 메를로-퐁티가 예로 들고 있듯, 소리가 부드럽다거나 탁하다는 식의 표현은 청각과 촉각, 혹은 청각과 시각이 함께 경험되고 있는 사례들이다. 의식적으로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 안에는 이미 감각들의 소통과 종합, 즉 공감각이 행해지고 있다. 한편, 그는 공감각을 감각의 장을 통해 설명하기도 한다. “두 눈을 사용한 일종의 만짐”, 즉 시각과 촉각의 종합은 각 감각이 각자의 장을 가지며, 서로에게 편입되기 때문에 가능하다. 각 감각은 서로에게의 열림을 전제하고 동등한 지위를 부여받는다. 감각의 장에게 있어서 공존은 필연적이며 이는 다시 한 번 고유한 몸 안에서의 종합으로 설명된다.
 감각들의 소통과 통일, 그리고 종합에 대한 몸 현상학의 기조는 이후의 살 존재론에서도 이어진다. 다만 다소간의 변형과 확장이 가해진 모습으로 우리에게 제시된다. 먼저, 각 감각은 각자의 세계를 가지고 다른 세계들을 향해 열려 있다. 이는 감각들이 각각의 장을 가진다는 몸 현상학의 서술과 크게 다르지 않은 내용이다. 그런데 “이들[다른 감각들]과 함께 유일한 존재를 이루는 하나의 어떤 것을 구축한다”는 대목에서 『지각의 현상학』과의 차이를 보인다. 이 “하나의 어떤 것”이란 곧 감각성(sensorialité)이다. 메를로-퐁티는 이 존재, 즉 “감각성”을 “차원” 혹은 “모든 가능한 존재의 표현”으로 간주한다. 몸 현상학에서의 감각함은 다만 고유한 몸으로서의 주체가 다양한 감각으로써 세계를 지각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고, 그리하여 세계에 열려 있음을 나타내는 보증과도 같았다.
 그런데 살 존재론에서의 감각은 다층적인 차원에서 논의된다. 이제 감각은 다만 다른 감각을 향해 열려 있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감각성이라는 차원이자 존재를 이루며 다른 세계로 넘나들고 초월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이는 메를로-퐁티가 몸 현상학에서 감각들의 종합에 대해 논의한 것과 대비되는 지점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지각의 현상학』에서는 각자 존재하는 여러 감각들이 다만 주체의 고유한 몸을 통해 종합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서의 메를로-퐁티는 한층 더 대담해진다. 그는 이제 감각들의 종합을 몸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만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존재들의 존재 방식의 바탕에 감각성이 있다. 몸 현상학에서 무엇보다도 중요시되었던 주체의 고유한 몸이 가지는 의미는 다소간에 희미해지고, 그보다 더 깊은 차원의 존재가 대두됨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나아가 몸이 경험하는 공감각의 의미 역시 확장된다. 몸 현상학에서는 각각의 감각들이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주체의 몸 안에서 그저 공존하는 데 그쳤다면, 존재론에서는 감각들의 공존보다는 그것들 간의 “교환(échange)”이라는 단어로 묘사된다. 우리가 소리를 보고 풍경을 듣는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으나, 이제 메를로-퐁티는 일상적인 차원의 기저로 파고들며 감각 간의 그러한 넘나듦을 가능하게 하는 존재를 탐구한다.

2.4.3 원초적 세계

감각에 대한 논의의 이행에서 알 수 있듯, 살 존재론에 선 메를로-퐁티는 주체가 지각하는 세계에 대해서도 재고한다. 『지각의 현상학』에서 메를로-퐁티는 고유한 몸으로서의 주체와 그가 만나는 타인을 문화적 세계의 차원에서 논의했다. 여기서 문화적 세계에는 펜이나 전화기와 같은 일상적인 사물뿐만이 아니라 타인과의 소통에 있어서 요구되는 언어까지 포함되었다. 그 가운데 특히 언어는 “문화적 획득물”(acquis culturel)로 간주되어 주체가 자신의 사유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 지대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서술되었다. 그런데 한편으로 메를로-퐁티는 이와 같은 문화적 세계가 근거하고 있는 것으로서의 또 다른 세계를 언급한다.

세계라는 용어는 “정신적”이거나 문화적인 삶이 자연적인 삶(la vie naturelle)에서 자신의 구조들을 빌린다는 것을 의미하고, 사유하는 주체가 육화된 주체에 근거해서 세워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대목을 통해 우리는 메를로-퐁티가 문화적 세계와 자연적 세계를 구분하며, 전자가 후자로부터 비롯됨을, 다시 말해 전자가 후자에 근거하고 있다고 주장함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메를로-퐁티가 사용하는 ‘자연적’이라는 표현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는 그가 자연적 시간을 언급하는 부분에서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몸적 실존은 언제나 능동적인 무(無)에 의해 작동된다. 그것은 계속해서 내게 삶의 제안을 하고 다가오는 매 순간마다 자연적 시간(le temps naturel)은 진정한 사건의 비어있는 형태를 그린다. 분명 그런 제안은 대답이 없이 남게 될 것이다. 자연적 시간의 순간은 아무것도 확립하지 않는다. 자연적 시간은 곧 다시 시작되고 실제로 다른 순간 안에서 다시 시작된다.

 자연적 시간은 주체가 경험하는 현상적 시간과 다르게 언제나 흘러가는 시간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1분 1초가 균일하게 흘러감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느 때에는 시간이 빠르게 흘러간다고 혹은 느리게 간다고 느낀다. 언제나 똑같이 흘러가는 전자의 시간이 메를로-퐁티가 말하는 자연적 시간이며 후자가 개인마다 달리 느끼는 현상적 시간이다. 메를로-퐁티는 현상적 시간이 자연적 시간을 토대로 하고 있으며, 자연적 시간은 비록 어느 것도 확립하지 않고 다만 연쇄될 따름이지만 우리는 그 시간을 넘어설 수 없음을 서술하고 있다. 자연적 세계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우리의 의도가 개입되지 않은 채 우리에게 주어진 것으로 존재한다.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문화적 세계를 틔워낸다. 자연적 시간과 마찬가지로 자연적 세계 역시 완결되지 않는다. 그것은 끝없이 이어지며 문화적 세계의 근거가 된다. 우리는 자연적 세계를 직접적으로 경험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만 문화적 세계 안에서 지각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자연적 세계는 자신의 존재를 은폐하고 있으며 다만 문화적 세계의 바탕이 될 뿐이다.
 『지각의 현상학』 안에는 자연적 세계와 유사한 의미로서의 개념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바로 원초적(primordial) 세계이다. 메를로-퐁티는 문화적 획득물과 같이 내 경험에 어떠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들은 “그 자체가 경험의 최초의 의미를 세우는 원초적 세계 안에서 재단되어 나온다”고 서술한다. 원초적 세계는 자연적 세계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경험에 앞서 있는 것, 미결정적인 채로 머무르면서 문화적 세계가 가능하도록 하는 세계다. 이처럼 『지각의 현상학』 안에서 메를로-퐁티가 자연적 세계 혹은 원초적 세계를 언급하는 맥락은 문화적 세계에 대한 설명을 보충하는 데서다. 즉, 고유한 몸을 통한 일상적 경험과 언어로 인해 가능해지는 소통, 그리고 사유 활동을 논의하는 맥락에서 이루어진다. 원초적 세계는 문화적 세계를 지탱하는 역할에 그칠 뿐이며 『지각의 현상학』에서 그 이상의 의의를 찾기는 힘들어 보인다. 이는 서문에 명시된 대로, 그가 현상학에 기초한 채 주체의 지각 경험을 기술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연적 세계 혹은 원초적 세계의 의미는 존재론에서 변화를 맞이한다. 우리는 이 변화의 징조를 자연 개념의 심화에서 찾을 수 있다. 1956년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행해진 강의에서 메를로-퐁티는 자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연은 최초의(primordial) 것이다. […] 자연은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이며, 완전한 대상이 아닌 대상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앞서 있지 않다. 그것은 우리에 앞서 있지 않지만 우리를 지탱하는 토양이다.

 메를로-퐁티는 그보다 4년 뒤인 1960년의 노트에서는 자연에 대해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감각적인 것, 자연은 과거·현재의 구별을 초월하고,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 내부로부터의 이행을 실현한다 실존적 영원. 파괴 불가능한 것, 야만의 원리(le principe barbare)
자연의 정신분석학을 할 것: 자연은 살이고, 어머니이다.

 1956년의 강의록에서 언급되는 자연은 『지각의 현상학』 속 그것과 큰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 자연이 여전히 대상으로 남는다는 점 역시 동일하다. 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자연을 전적으로 대상의 구도 안으로 한정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대상이 아닌 것으로서의 자연을 위한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이와 같은 여지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이르러 더욱 확장된다. 먼저, 『지각의 현상학』에서의 자연은 다만 객관적인, 즉 그저 그곳에 있는 시간으로 서술되었다. 그것은 내가 매 순간 쌓아가는 나의 역사의 중심에 있으며 동시에 나를 둘러싸고 있는 시간이다. 그러한 자연 안에서 나는 계속해서 이행하며 삶을 영위한다. 하지만 살 존재론에서의 자연은 주체의 이행 가운데 머무르지 않고 스스로 이행한다. 즉, 이제 자연은 하나의 원리로 묘사된다. 그것은 어떤 문화와 문명으로도 파괴되지 않는 영원한 원리이다. 시간의 구별을 넘어서는 자연은 이행하기를 멈추지 않으며 인류의 토양이 된다. “자연은 추상적인 정립의 대상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기능하는 자연”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자연은 일종의 가능성이기도 하다. 여기까지 도달한 자연의 의미는 이제 몸 현상학에서의 그것과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메를로-퐁티가 자연에 부여하고 있는 의미는 결국 살 존재론의 토대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자연적 세계, 원초적 세계는 살이 가진 미분화성, 잠재성(latence)의 다른 이름이다. 메를로-퐁티는 주체의 지각적 차원에서 탐구되었던 문화적 세계를 뒤로하고 그 세계와 그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존재의 차원으로 들어선다. 즉, “존재 발생의 논리”를 찾아 원초적 존재에 천착한다.

야생의 존재(l’Être sauvage) 속에서 사실들과 본질들은 분화되지 못한 채 들어 있었으며, 야생의 존재 속에서 사실들과 본질들은 여전히 우리의 획득된 문화의 분할들의 저 뒤 또는 저 밑에서 미분화 상태로 계속 있다.

 야생의 존재, 즉 원초적 세계는 문화적인 것으로 분화되기 이전의 상태다. 야생이라는 표현이 시사하는 바대로 그 차원에는 문화적인 의미를 갖지 않는 가능성과 잠재성이 우글거린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메를로-퐁티가 언급하는 원초적 세계가 시간적으로 우리보다 앞서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위에서 언급했던 1956년 강의에서 언급되어 있듯, 원초적 세계는 우리의 문명과 문화가 움트기 시작하기 이전에 한정되는 시간이 아니다. 나아가 공간적인 것도 아니다. 원초적 ‘세계’라는 표현으로 인해 어떤 공간을 상정할 수도 있겠으나, 그렇다면 문화적 세계와 원초적 세계가 서로에 대해 외적인 공간으로 분리된다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다. 원초적 세계는 시간의 경계를 초월해 있으며 문화적 세계와 분리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일종의 존재 차원으로 작용하고 있다. 양자가 서로에게 작용하고 있음을 메를로-퐁티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물론 매우 일찍부터 추상적인 동기들, 범주들은 이러한 야생적 사유(pensée sauvage) 가운데서 작용하거니와, 이러한 점은 어린 시절 가운데 성인의 삶이 엄청나게 예시되고 있는 데서 잘 나타나 있다.

 이 대목에서 메를로-퐁티는 야생적 사유를 어린 시절에 비유하고 있다. 성인의 삶은 어느 한 순간 갑자기 생겨나지 않는다. 어린 시절의 경험이 지속적으로 바탕과 토양으로 작용하며 이후의 삶을 가능하게 한다. 명석한 사유가 행해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유아-어린이로서의 삶에는 이후의 삶을 결정하는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다. 그리고 그 시절은 성인이 되어서도 계속해서 영향력을 행사한다. 두 시기를 따로 떼어놓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원초적 세계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문화적 세계를 가능하게 하는 토양이기는 하나, 그렇다 해서 문화적 세계와 외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원초적 세계는 가시적인 세계가 아니라 일종의 차원으로서 작용하고 있다. 그것은 어떤 것이 움틀 수 있도록 하는 차원이다. 이처럼 메를로-퐁티는 우리에게 주어진 지각적 세계보다 근원적이고 심층적인 차원으로 파고든다. 그리고 그 탐구를 지탱하고 있는 야생적 존재는 곧 존재론의 근간이 되는 살 개념으로 작용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세 지점(이분법의 한계, 감각의 확장 그리고 원초적 세계)은 메를로-퐁티 사유의 이행에서 중대한 역할을 하는 것들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궁극적인 물음을 제기해야 한다. 왜 메를로-퐁티는 지각론에서 존재론으로 이행하는가.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행하도록 추동했는가. 이 물음에 대해 우리는 메를로-퐁티가 1959년에 남긴 노트를 단초삼아 답변할 수 있다. 그는 “존재론으로의 회귀의 필연성”을 주관과 객관의 문제, 상호주관성의 문제, 그리고 자연의 문제에서 찾는다. 결국 그가 『지각의 현상학』에서 제기했던 이분법의 문제가 존재론으로 이어지면서 탐구의 중심에 자리하는 것이다. 앞서 살펴본 대로 몸 현상학에서 메를로-퐁티는 주지주의와 경험주의가 초래하는 양자택일, 다시 말해 주체를 의식 혹은 물질로 간주하느냐에 대한 물음을 거부하고, 앞서 언급된 세 번째 종류의 존재인 고유한 몸을 주장한다. 육화된 의식으로서의 고유한 몸은 물질인 동시에 의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주장 역시 메를로-퐁티 자신에 의해 폐기되었음을 안다. 주지하듯, 그가 고안한 육화된 의식 역시 의식-대상 구도에 머무르며 주체의 지각 경험에 치중되어 있었다. 메를로-퐁티가 그토록 극복하고자 했던 의식 철학은 여전히 그의 몸 현상학에 잔존하고 있었으며, 그 결과 그는 이원론의 테두리로부터 탈피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메를로-퐁티는 지각 세계를 가능하게 하는 원초적인 차원으로 향한다. 그는 “기원의 규명(Ursprungsklärung)이 필요하다”고 서술하며 자신의 도정을 소묘한다.
 지금까지의 탐구를 통해 결론내릴 수 있는 사실은 몸 현상학과 살 존재론 사이에 놓인 것은 결코 뛰어넘을 수 없는 심연이 아니라 양자를 이어주는 다리라는 것이다. 이 다리는 곧 두 저작 사이의 연속성을 확증한다. 이분법의 잔존이라는 한계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몸 현상학에서 제시되었던 감각 문제와 자연 문제는 확장되고 보다 심화된 모습으로 살 존재론의 근간을 이룬다. 우리가 메를로-퐁티의 존재론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새로운 개념들이 아니다. 그것들은 이미 몸 현상학에서 예고되었던 것들이다. 메를로-퐁티는 “『지각의 현상학』의 성과들에 존재론적 해명을 가”함으로써 그 내용을 더 확장하고 풍부하게 만든다. 살 개념은 존재론적 필요성에 의해서 고안된 것이며, 이어질 3장에서는 그러한 살 존재론이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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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게재: 학위논문(석사)-- 홍익대학교 대학원 : 미학과 2023. 8, 10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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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3.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