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연구
- 국립발레단의 「호이 랑」(2019)을 중심으로
Ⅰ. 서론
Ⅱ. 발레 역사에 따른 여성상의 변화 양상
Ⅲ. 「호이 랑」 속 여성 이미지의 특성
Ⅳ. 결론 및 제언
I. 서론
본 연구는 국립발레단의 전막 창작발레인 「호이 랑」(2019)을 중심으로 한국 창작발레에 나타난 여성 이미지의 재현 양상을 고찰한다. 여기서 ‘재현’이란 단순히 현실을 반영하거나 모방하는 것을 넘어, 사회문화적 맥락 속에서 특정한 의미를 구성하고 지속적으로 형성·변형되는 상징체계로 이해된다. 다시 말해, 무대 위에서의 여성상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시대적 가치, 젠더 이데올로기, 미적 감수성 등의 복합적 요소에 의해 구성된 결과물로 간주한다. 이로써 「호이 랑」이 발레 사적 맥락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중심으로, 작품이 시도한 새로운 여성 정체성을 관찰하며 동시대 발레에서 여성 이미지의 변형 가능성을 탐색하고자 한다.
연구 대상인 「호이 랑」은 국립발레단의 2019년 신작으로 초연된 대서사 발레극으로서, 대한제국 언론인 장지연이 엮은 『일사유사(逸士遺事)』(1916)에 나오는 이야기에 예술적 상상을 더한 창작발레이다. 연구 대상으로서 「호이 랑」을 선정한 이유는 두 가지 측면에서 그 타당성을 지닌다. 첫째, 이 작품은 ‘한국 소재의 전막발레 창작’, ‘국립발레단의 고유성을 대변할 만한 대표작’(국립발레단, 2022, p. 36)이라는 단체의 숙원을 풀기 위한 노력으로 제작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호이 랑」은 「왕자호동」(2009) 이후 국립발레단이 10년 만에 선보이는 전막 창작발레로 그 제작 의미를 강조했다. 이를 위해 2015년부터 단체가 주도적으로 기획 및 운영하는 ‘안무가 육성 프로젝트’를 통해 발굴해 낸 안무가 강효형(1988~)의 안무에 대본 한아름, 연출 서재형, 무대 정승호, 의상 루이자 스피나텔리 등 국내외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제작진이 총출동하여 한국 발레의 현재와 미래를 대변하고자 하는 기획 의도가 바탕을 이룬다.
둘째, 「호이 랑」은 여성 안무가에 의해 발레 무대에서 보편적으로 시도되지 않았던 새로운 여성 미학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안무가 강효형은 2015년부터 꾸준히 안무작을 선보여왔으며, 첫해에 발표한 「요동치다」(2015)가 2017년 무용계의 아카데미상이라 불리는 ‘브누아 드 라 당스’ 안무가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며 큰 주목을 받았다. 「호이 랑」은 강효형이 「빛을 가르다」(2016), 「허난설헌-수월경화」(2017), 「Shape of Panthers」(2018)과 같은 이전 작품들에서 축적한 한국적 색채와 동시대성을 결합한 안무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동시에, 서사 전개에서 여성 캐릭터를 중심에 두어 강인하고 독립적인 여성상을 형상화하는 독창적 시도를 선보였다. 특히 주인공 ‘랑’이 노쇠한 아버지를 대신해 남장하고 자발적으로 군에 들어가 전장에서 공을 세우는 과정은 복합적인 안무 구조와 다양한 무대 요소(의상, 소품, 무대세트, 조명 등)를 통해 발레 무대에서 여성의 주체성과 능동성을 구현한 사례로 읽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낭만주의 발레 이후로 여성은 발레 무대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해왔으나, 그 여성성은 대체로 수동적이고 이상화된 이미지로 고정되어 왔다. 이에 최근 무용학계에서는 여성의 몸과 정체성에 대한 사회문화적 인식 변화에 주목하며, 발레 속 여성 이미지에 대한 비판적 분석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에 본 연구는 다음과 같은 전제를 설정하고 작품 분석, 문헌 연구, 관계자 인터뷰 등을 통해 예증하는 것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첫째, 발레는 특정한 여성상을 반복적으로 제시해 왔으며, 이는 사회적 · 문화적 맥락 속에서 구성된 젠더 이데올로기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둘째, 한국 창작발레, 특히 「호이 랑」은 이러한 전통적 여성 이미지와는 차별화된 새로운 여성상을 제시함으로써, 현대의 젠더 감수성과 여성 정체성을 반영하고 있다.
무용 무대에서 여성이 주요한 역할을 차지해 온 것이 이미 18세기에 이루어진 일임을 상기해 볼 때, 무용에 대한 여성 중심적인 시각은 매우 뒤늦게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여성주의(feminism) 이론이 생물학적 성에서 벗어나 사회적 성의 개념인 젠더(gender)로 변화 및 발전함에 따라, 최근에 이르러 무용 작품에서 나타난 여성의 이미지를 사회적, 문화적 관습의 속박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바라보고 이를 분석하는 연구들이 등장했다. 그중 김윤수의 “미국 발레 작품에 내재된 페미니즘적 특징 연구”(2013)는 페미니즘의 태동과 변천 양상에 따라 페미니즘 이론을 대변할 수 있는 대표작품을 분석하여, ‘개척 시대의 여성 이미지’, ‘주도적인 여성 이미지’, ‘흑인 여성의 주체의식’이라는 특징을 도출했다. 제환정의 “발레 「잠자는 숲속의 미녀」의 내러티브 및 캐릭터에 나타난 여성성에 대한 연구”(2016)는 고전발레인 「잠자는 숲속의 미녀」(1890)가 이상적인 여성상에 대한 사회적인 합의를 암시하는 동시에 여성의 성장기를 작품의 골자로 하고 있음을 밝힌다. 이러한 선행 연구들은 모두 발레의 다른 사조 및 다른 작품을 연구 대상으로 삼고 있지만, 공통으로 여성주의적 관점을 적용하여 발레에 뿌리 깊게 인식되는 가부장적인 세계관의 프레임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주요 문제로 다루고 있다.
본 연구는 ‘여성 이미지’를 단순히 성별 표현 이상의 것이자, 발레에서 다층적인 요소들에 의해 구축된 ‘여성의 정체성’으로 바라보는 시각에서 출발한다. 연구 방법으로서 여성 이미지를 분석하는 기준은 네 가지 범주로 구성할 수 있다. 첫째 ‘서사적 이미지’는 인물의 역할이나 사건에서의 위치에 해당된다. 둘째 ‘신체적 이미지’는 무대 위 몸의 형태와 쓰임을 의미한다. 셋째 ‘사회문화적 이미지’는 시대의 여성상과 발레의 관계로 젠더 이데올로기를 반영한다. 넷째 ‘미학적 이미지’는 의상, 조명, 움직임(안무)을 통한 시각 구성이 해당한다. 네 가지 이미지 범주는 독립되는 개념이라기보다 서로 역동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이미지를 입체화한다. 따라서 본 연구는 발레의 역사에 따른 기존 여성상의 변화 양상을 다양한 이미지 범주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재정의함으로써 논의의 토대를 마련한다. 이어 「호이 랑」이 기존의 여성 이미지를 어떻게 해체, 전복, 재의미화하였는지에 주목함으로써 발레에 재현된 여성상의 역사를 이어가고자 한다.
또한 앞선 연구들이 줄곧 서양의 무대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한국 발레를 향한 무용학적 연구의 미진함을 지적하고자 한다. 발레는 유럽에 기원을 두고 있는 예술 장르로서, 이에 따라 국내외 선행 연구들은 대부분 서양의 발레를 연구하고 있다. 그러나 본 연구는 발레의 여성상에 대한 논의를 개진하는 데 있어 서양과 동양의 시선에 존재하는 차이점을 밝히고자 한다. 다시 말해 서양의 발레에서 동양 여성을 재현해 온 역사적 사실을 고려하는 가운데, 오로지 한국 발레의 역사적 흐름에서 논의될 수 있는 여성성의 특수성을 논의하고자 한다. 따라서 본 연구는 한국창작발레의 가치에 주목하여 그 안에서 작동하는 여성상의 재현 양상과 변형의 의미를 고찰함으로써 한국 발레의 해석의 지평을 넓히고자 한다는 데 연구의 독창성이 있다.
본 연구는 분석의 논리적 일관성과 층위별 접근을 위해, 「호이 랑」에 형상화된 여성상을 세 가지 항목을 중심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첫째, ‘여성영웅성의 형상화’는 기존 발레 문법에서 배제되어 온 능동적 여성 주체의 서사 구조를 분석하고, 여성이 영웅으로서 수행하는 행위의 의미를 조명한다. 둘째, ‘오리엔탈리즘의 변이와 재해석’은 무대 위 동양 여성의 시각적 재현 방식과 그 권력 구도를 해체하려는 시도를 탐색한다. 셋째, ‘젠더 수행성의 이분법적 한계’는 남성과 여성의 고정된 역할 수행이 어떻게 반복되고, 동시에 어떻게 균열되는지를 움직임, 의상, 관계 구조 등을 통해 분석한다. 이 세 분석 틀은 각각 서사적, 미학적, 신체적 차원에서 본 작품의 구조를 해석하는 데 중심 축이 되며, 이는 이후 분석 장에서 구조적으로 연계된다.
발레극 「호이 랑」을 중심으로 한국창작발레에 나타난 여성 이미지의 재현 방식과 변형의 의미를 밝히고자 하는 본 연구는 발레 담론의 현대화 맥락에서 연구의 중요성과 필요성이 있다. 무용 무대가 신체성(corporeality), 즉 춤추는 여성으로서 ‘여성의 몸’에 대한 담론을 반영하고 발전시킨다는 점에서 여성주의적 문화비평으로서 기여할 것이다. 또한 본 연구는 사회적 담론과 다양한 정체성의 표현을 포함하는 것을 창작발레의 주된 경향으로 파악하며, 나아가 전통 발레의 ‘고정된 이미지’에서 벗어나 새로운 서사를 만드는 과정이 중요한 창작적 흐름임에 주목한다. 따라서 「호이 랑」이 전통 발레의 여성상에 어떠한 균열을 가하고 동시에 그것이 진정으로 동시대적인 감성인가를 물음으로써 창작 실천 현장에 이론적 발판을 제공할 것이다.
Ⅱ. 발레 역사에 따른 여성상의 변화 양상
발레는 특정한 시대와 사회의 미적·윤리적 감수성을 반영하는 예술 형식으로,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상 역시 시대에 따라 다르게 구성되어 왔다. 이러한 변화는 여성 캐릭터가 맡는 이야기 속 역할(서사적 이미지), 무대 위에서의 몸의 형태와 쓰임(신체적 이미지), 당대 사회의 여성관을 반영하는 맥락(사회문화적 이미지), 그리고 시각적으로 구현되는 형식과 분위기(미학적 이미지)의 네 가지 범주에서 포착될 수 있다. 이 네 범주는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긴밀하게 교차하며, 발레가 재현하는 여성상을 다층적으로 구성한다.
이러한 분석 틀은 특히 낭만주의, 고전주의, 그리고 드라마틱 발레의 세 유형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낭만주의 발레(Romantic Ballet)는 천상적 존재로서의 ‘초자연적 여성 형상’을 중심에 두며, 현실을 초월한 사랑과 비현실적 순결성을 강조한다. 고전주의 발레(Classicism Ballet)는 선악의 이분법 속에서 ‘선한 여성의 이상화’를 강화하며, 질서와 균형의 미학을 통해 여성성을 전형화한다. 반면, 드라마틱 발레(Dramatic Ballet)는 전통적인 예술사조의 개념이라기보다는 스토리와 감정 표현에 초점을 둔 무용 경향으로, 심리적 서사와 일상적 감정의 층위를 반영한 ‘감정 중심의 여성상’을 통해 사랑, 갈등, 열정 등을 보다 현실적이고 인간적인 층위에서 묘사한다.
비록 드라마틱 발레는 낭만주의나 고전주의처럼 특정 시기를 대표하는 사조는 아니지만, 스토리와 감정 표현을 중심에 둔 무용 경향으로서 20세기 이후 무용예술의 흐름 속에서 이론적 정당성을 지닌 개념으로 간주할 수 있다. 이것의 사상적 배경으로서 장 조르주 노베르(Jean-Georges Noverre)는 그의 저서 『무용과 발레에 관한 편지, Letters on Dancing and Ballet』(1760)에서 “발레는 기교를 과시하는 형식적 움직임보다, 감정을 전달하는 움직임으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형식성에 치우친 무용에 대한 비판과 함께 ‘발레 닥시옹(Ballet d’Action)’이라는 감정 중심의 무용 개념을 제시한 바 있다(김말복, 2003, p. 100). 이러한 노베르의 주장은 이후 20세기 초 러시아 안무가 미하일 포킨(Michel Fokine)의 개혁 발레에 계승되어, 이야기와 감정, 그리고 인물의 내면을 무용 언어로 표현하는 경향으로 구체화했다. 포킨은 ‘발레는 극적 진실성을 지녀야 하며, 모든 춤과 움직임은 줄거리와 인물의 감정에 부합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김말복, 2003, pp. 250-251).
수잔 오(Susan Au)에 따르면, 20세기 중반의 발레가 추상적이고 형태의 변형이 일어나는 등 매우 다양한 양상으로 발전되는 가운데, 스토리텔링 발레(Story-telling ballet) 혹은 내러티브 발레(Narrative ballet)가 계속 부상한 데는 작품의 서사나 주제가 관객에게 편리한 ‘손잡이’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Susan Au, 1988, p. 182). 극적 발레의 대표적인 안무가로는 프레더릭 애쉬턴(Frederick Ashton), 존 크랑코(John Cranko), 케네스 맥밀란(Kenneth MacMillan) 등이 있으며, 고전적 형식을 차용하면서도 심리극적 요소와 서사적 현실성, 인물의 내면 변화에 주목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발레 형식을 개척하였다. 이 같은 경향에 대해 잭 앤더슨(Jack Anderson)은 ‘격동의 극적 발레(turbulently drama ballets)’라 언급했다(Jack Anderson, 1992, p. 207). 따라서 드라마틱 발레는 학문적으로 정착된 개념은 아니지만 맥락적으로 분명히 존재한다. 이는 단지 장르적 특성이나 형식적 분류를 넘어서, 이야기와 감정 표현을 핵심 언어로 삼는 무용의 서사화 경향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본 연구가 여성의 감정 중심 재현이라는 분석 범주로 채택하는 데 있어 효과적인 분류 도구로 기능한다. 그러므로 본 논문에서는 이 드라마틱 발레라는 개념을 심리적 내면성과 드라마적 전개의 강조라는 표현적 경향을 가리키는 용어로써 기능적으로 사용하고자 함을 밝힌다.
또한 본 연구는 단지 서구 발레의 여성상에 대한 고찰에 머무르지 않고, 한국 창작발레의 흐름 또한 동등한 분석 대상으로 포함하고자 한다. 즉 낭만발레, 고전발레, 드라마틱 발레로 이어지는 서양 중심의 미학적 분류만으로는 한국 발레 안에서의 젠더 재현 양상 전체를 포착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그리고 「호이 랑」과 같은 동시대 창작 발레를 분석하는 데 있어, 그 선행 계보로서의 한국 창작발레 여성상에 대한 고찰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한국 창작발레는 1970년대 국립발레단의 독립을 기점으로 점차 자생적인 창작 시도를 시작하였으며, 전통 설화와 고전 문학, 민속신화를 모티프로 한 다양한 작품들이 발레 장르 안에서 한국적인 미학과 서사를 구현하려는 시도를 지속해왔다. 이들 작품들은 비록 지속적인 공연이나 레퍼토리화로까지 이어진 경우는 드물지만, 발레 장르 안에서 한국적 서사와 여성 정체성을 재현하려는 독자적 실천으로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에 본 장에서는 II-1. 낭만주의 발레, II-2. 고전주의 발레, II-3. 드라마틱 발레, II-4. 한국 창작발레의 순으로 여성상의 재현 양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1. 낭만주의 발레: 초자연적인 여성의 형상
낭만주의 발레(19세기 전반)는 여성 캐릭터를 초현실적 존재로 묘사하며, 천상의 존재, 요정, 유령 등이 이미지를 통해 이상화된 여성성을 표현하였다. 대표작인 「라 실피드, La Sylphide」(1832)에서는 제임스(James)의 눈에만 보이는 요정 실피(Sylph), 「지젤, Giselle」(1842)에서는 처녀들의 영(靈)인 윌리(Wilis)가 있다. 역사학자 제니퍼 호먼스(Jennifer Homans)의 표현을 빌자면, 실피는 ‘정말이지 가볍고 공기 같고 언제나 날고 있는 완벽하게 자유로운 모습’(Homans, 2010, p. 154)이며, 윌리들의 세계는 ‘낯설고 귀신이라도 나올 듯한 환상으로, 강렬한 추억과 견딜 수 없는 후회의 안개가 자욱한 세계’(Homans, 2010, p. 167)이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서 있는 여주인공을 중심으로, 서사는 사랑을 이루지 못하는 비극적 결말을 공유한다. 「라 실피드」는 실피의 유혹에 넘어간 제임스가 현실의 약혼자까지 잃게 된다는 줄거리이며, 「지젤」은 지젤의 죽음에 애도를 표하기 위해 무덤가를 찾은 알브레히트(Albrecht)가 슬픔에 몸부림치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막을 내린다. 이를 통해 여주인공은 낭만적 사랑과 순결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한다. 무대 연출은 전체적으로 어둡고 황량한 숲속에 푸르른 불빛이 어슴푸레하게 번지는 몽환적인 분위기를 통해 비현실적이고 불가사의한 초자연성을 강조한다. 와이어와 승강기 등의 장치 등이 활용된다. 「지젤」의 2막 중 윌리가 대거 등장하여 순식간에 베일이 벗겨지는 장면,「라 실피드」는 실피가 제임스의 방에 있는 창가와 굴뚝을 오르내리는 장면, 또 실피를 따라 도착한 숲속에는 공중을 날아다니는 실피들의 모습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초자연적인 여성의 형상은 움직임과 안무 방식에서도 독창성을 발휘한다. 클래식 발레는 신체의 바른 정렬을 바탕으로 온몸을 팽팽하게 위로 끌어올리는 풀업(pull-up)을 기본으로 하는데, 이에 더해 낭만발레는 천상의 존재를 표현하기 위해 하늘로 솟아오르고 땅에 닿을 듯 말듯 한 가벼운 움직임의 특질, 즉 발롱(Ballon)을 강조한다. 이로부터 발끝으로 서는 포인트 기술(sur les pointes, on point)은 클래식 발레를 대표하는 포인트 슈즈(point shoes)의 등장을 초래했다(김말복, 2003, p. 106). 그뿐만 아니라 손끝에 힘을 빼 부드러운 곡선으로 마무리 짓는 폴 드 브라(port de bra)는 형태가 뚜렷하지 않아 마치 연기처럼 사라질 듯한 영묘한 존재를 나타낸다.
2. 고전주의 발레: 선한 여성의 이상화
고전발레는 1830-40년대에 정점을 찍은 프랑스의 낭만발레의 인기가 사그라질 때 러시아로 배경을 옮겨 형식상 고전주의 기법을 발레화했다. 1870-90년대 황금기를 맞이한 러시아의 고전발레는 마리우스 프티파(Marius Petipa)와 같이 프랑스의 활동 배경을 가진 외국인을 중심으로 발전했기 때문에 낭만발레의 영향을 받았다. 대본상 존재하는 마법적 요소, 클래식 발레의 기법 유지, 여성 무용수 중심이라는 공통점이 존재한다(김말복, 2003, p. 142). 그러나 여성상을 더욱 명확하게 선과 악의 이분법 속에서 구분 지었다. 이 시기의 여성상은 왕자에 의해 구원받거나 외부의 악한 존재에 의해 시험받는 순종적 존재로 그려진다.
「백조의 호수, Swan Lake」(1877)는 본 로트바르트(Von Rothbart)의 마법에 걸려 낮에는 백조의 모습을 살아가는 오데트(Odette) 공주가 마법을 푸는 유일한 방법인 진실한 사랑을 기다리는 이야기다. 마법을 풀 수 있는 방법이 남성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오데트는 철저히 수동적이며, 지그프리트(Siegfried) 왕자와의 사랑을 방해하기 위해 백조를 사칭하는 오딜(Odile)은 오데트의 연약함을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선과 악의 대비는 백조와 흑조의 파드되(pas de deux)에서 뚜렷이 제시된다. 비련의 주인공으로서 슬픔에 찬 백조의 날갯짓은 처량하고 가냘픈 느낌이며 그녀에게 사랑을 맹세하는 왕자와의 춤은 서정성과 애절함이 있다. 반면 왕자를 유혹하는 오딜의 춤은 힘 있고 템포가 빠르며 고난도 기교가 응축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잠자는 숲속의 미녀, The Sleeping Beauty」(1889)에서 오로라(Aurora) 공주는 마녀 카라보스(Carabosse)에 의해 죽음을 예고하는 저주를 받지만, 데지레(Desire) 왕자의 키스로 잠에서 깨어난다는 이야기다. 마법에 걸리고 풀리는 과정에서 오로라 공주는 수동적이다. 그녀를 비호하는 요정들도 저주를 완전히 없애지는 못하고 백 년의 잠으로 겨우 바꾼다는 점에서 연약하다. 중요한 것은 수동적이고 연약한 여성 캐릭터가 매우 젊고 아름답게 묘사된다는 점이다. 연구자 제환정은 원작에서 ‘공주’나 ‘오로라’ 대신 ‘미녀(아름다운 여자 bell)’라는 명사를 사용하는 것을 지적하며, 특히 여섯 요정이 선물하는 고귀한 특성들은 17세기 지배계급 여성이 갖추어야 할 이상적인 조건을 상징하고 있음을 논의한다. 춤동작으로 구현되는 발레의 성격상, 오로라를 축복하는 특성들은 요정들의 춤 특질이 정서적으로나 기교적으로 구분된다. 예를 들어 풍부한 표현력을 지닌 달변의 요정이 카나리는 재잘대는 새처럼 손가락을 움직이는 동작이 특징적이며, 열정을 선물하는 요정은 붉은색 의상을 입고 웅장한 음악에 격렬하고 단호한 동작 연결을 선보인다(제환정, 2016, p. 169-171). 따라서 오로라 공주의 아름다움은 단순히 외모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닌, 내면의 측면과 후천적으로 습득한 지혜와 태도를 아우르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프티파의 일부 작품은 오리엔탈리즘의 시선을 담고 있다. 「파라오의 딸, The Pharaoh’s Daughter」(1862)과 「라 바야데르, La Bayadere」(1877)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 시기 여성 캐릭터는 여전히 선한 존재로 이상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예컨대 「라 바야데르」‘니키아’(Nikiya)는 권력의 음모에 희생당하는 순결하고 헌신적인 무희로 묘사된다. 또 「파라오의 딸」(1862)의 여주인공인 ‘아스피시아’(Aspicia)는 이집트의 꿈 속 세계에서 ‘타호르’(Ta-Hor)가 되는 현실 세계의 남성 주인공(잉글랜드의 젊은 귀족)과 사랑에 빠지는 존재이다. 그러나 ‘아스피시아’는 ‘타호르’에게 보호받는 존재로 등장 및 사랑의 대상으로 묘사되어 수동적이고 이상화된 서사구조를 가진다. 나아가 파라오의 딸이라는 자신의 신분과 아버지의 뜻, 그리고 ‘타호르’의 위태로운 처지 사이에서 갈등하며 끝내 사랑을 위해 나일강에 투신하며 자기 희생을 감수한다. 그녀의 행동은 꿈속 남성 주인공의 감정적 중심이자 윤리적 귀결의 기점으로 작용한다. 이는 감정적 순결성과 사랑의 헌신 코드로서, 고전주의의 정형화된 여성 미덕과 일치한다.
3. 드라마틱 발레: 감정 중심의 여성상
20세기 전반 러시아 혁명으로 고국을 떠난 러시아 안무가와 무용수들은 이미 서유럽에서는 발레의 쇠퇴로 자취를 감췄던 작품들을 개정해 다시 등장케 하거나, 러시아에서 만든 새로운 레퍼토리를 전파해 유럽 발레의 활기를 불어넣었다. 프랑스 안무가 장 도베르발(Jean Dauberval)이 안무한 「고집쟁이 딸, La Fille Mal Gardee」(1789)과 러시아 키로프 발레단에서 초연된 레오니드 라브롭스키(Leonid Lavrovsky)의 「로미오와 줄리엣, Romeo and Juliet」(1940)이 대표적이다. 「고집쟁이 딸」의 경우 러시아의 1885년부터 거듭 개정된 마리우스 프티파, 레프 이바노프의 버전이 1903년 모스크바 볼쇼이 발레단에서 초연된 알렉산드르 고르스키 버전으로 계승된 후 1960년 영국의 프레더릭 애쉬턴에 의해 현재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러시아 초연 이후 다양한 유럽 안무가들에 의해 재안무 되었는데, 1955년 덴마크 왕립 발레단에서 초연된 프레더릭 애쉬턴 버전, 1962년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 초연의 존 크랑코 버전, 1965년 영국 왕립 발레단 초연의 케네스 맥밀란 버전이 있다. 애쉬턴의 「고집쟁이 딸」과 맥밀란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각각 최근까지 국립발레단과 유니버설발레단의 레퍼토리로 공연되어 국내에 익숙한 작품이 되었다.
두 작품 모두 유럽에서 수정되면서 강조된 공통된 특징은 주인공들의 심리묘사가 한층 풍부해지고, 이것이 춤에 의해 충실히 묘사되어 발레 닥시옹의 철학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줄거리에 상관없이 남녀의 춤을 형식에 따라 선보이는 그랑 파드되(Grand pas de deux)나 특정한 의사를 표현하기 위해 움직임을 정형화한 마임(Mime)이 완전히 사라지는 등 이야기 전달에 기여하지 않는 부수적인 요소들은 배제하고, 일상적인 차원의 동작을 춤적으로 풀어내는 안무방식을 통해 훨씬 자연스러운 발레극을 제시했다. 이 같은 특징은 문학과 회화를 중심으로 19세기 중반~20세기에 등장해 변화된 전개를 보여준 리얼리즘(realism) 예술사조와 연관성을 지닌다. 20세기 무용예술에서의 리얼리즘 경향과 표현을 연구한 나일화에 따르면, 발레에서 리얼리즘은 20세기에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고난도의 기교나 미적으로 아름다운 표현보다 신체를 통해 논리적인 행위를 연기하는 무언극(mimed drama)의 새로운 발레 표현을 특징으로 한다. (나일화, 2014, pp. 12-13)
따라서 두 작품은 스토리와 인물의 내면을 춤으로 표현하는 데에 집중했기에, 여성 캐릭터는 자신의 감정과 욕망을 더욱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특징을 가진다. 그리고 결혼의 성공 여부로 두 작품은 성격은 대비된다. 「고집쟁이 딸」의 여주인공 리즈(Lise)는 엄마의 반대에도 자신이 사랑하는 콜라스(Colas)와 결혼에 성공하는 과정을 코믹하게 그려낸다. 반면 「로미오와 줄리엣」은 원작인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충실히 반영한 작품으로, 집안의 반대로 결국 목숨을 잃은 젊은 연인의 비극적 운명을 그린다. 즉 전자가 성공적인 결혼으로 완성된 코믹한 각본이라면, 후자는 실패한 결혼으로 형성된 비극적 각본이다. 두 작품에서 여성은 사랑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열정적인 존재다. 앞서 살펴본 바대로 드라마틱 발레 특성상 사랑을 향한 여성의 열정은 온몸으로 표현하는 안무와 춤에 의해 더욱 극적으로 드러난다. 이에 따라 드라마틱 발레에서 여성상은 결혼제도를 바탕에 둔 애정 감정 중심의 여성상이라 정리할 수 있다.
나아가 현실 묘사와 사회 반영을 특징으로 하는 리얼리즘 사조의 징후를 발견할 수 있다. 「고집쟁이 딸」의 경우 평범한 동화나 환상의 세계가 아닌 서민 농가를 배경으로 한다는 점, 지참금을 차지하기 위해 부잣집 청년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려 고군분투하는 리즈의 엄마 시몬(Simone)에서 부르주아 계급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현실 묘사와 사회 반영에서 사회 개혁 의지를 포함할 수 있는 리얼리즘에 따라 드라마틱 발레가 재현한 감정 중심의 여성상은 가문을 위해 결혼하는 가부장적 윤리나 가치에 대항하는 성격으로 사회비판적 해석이 가능하다.
이처럼 발레는 시대별로 여성의 이미지를 다양한 방식으로 구현해 왔으며, 이는 당대의 사회문화적 가치관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낭만발레, 고전발레, 드라마틱 발레는 각각 다른 여성상을 제시하면서도, 특정한 여성성에 대한 이상을 재현한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이러한 흐름은 이후 한국 창작발레가 어떤 방식으로 여성상을 구성하고 재구성하는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비교 기준이 된다.
4. 한국 창작발레: 전통성과 재현의 이중구속
1960년대 이후 한국 발레는 서구 고전 레퍼토리를 수용하는 단계를 지나, 점차 자국의 전통 서사와 미적 감수성을 반영한 창작 발레를 시도해왔다. 특히 국립발레단은 「지귀의 꿈」(1974)을 시작으로, 한국 설화나 고전 문학, 무속 신화 등을 소재로 한 창작발레를 선보이며 ‘한국적 발레’라는 형식적 실험을 지속해왔다. 이러한 창작 시도는 비록 레퍼토리화되어 장기 공연으로 이어진 사례는 적지만, 한국 창작발레의 흐름 속에서 독자적인 발레미학을 형성하려는 의지를 반영한 중요한 지점들이다.
한국 창작발레를 하나의 예술 사조나 장르로 명확히 규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들이 서구 고전발레와는 다른 주제와 표현 전략을 실험해왔다는 점에서 한국 발레사의 한 축으로 논의될 필요가 있다. 본 연구에서는 낭만주의, 고전주의, 드라마틱 발레의 여성 이미지에 이어, 한국 창작발레에서 재현된 여성상 또한 동등하게 고찰함으로써, 서양의 시선을 기준으로 한국 발레를 해석하는 관점의 모순을 극복하고자 한다. 즉, 한국 창작발레는 독자적인 미적 체계와 젠더 재현 구조를 형성해왔으며, 이를 분석 대상으로 포함하는 것은 동시대 무용 담론의 지역성과 다양성을 확장하는 데에도 필수적이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 ‘한국 창작발레’는 민족적 정체성, 전통 예술 요소, 역사적 서사 등을 창작의 모티프로 삼아 한국 발레 단체에서 제작한 작품을 지칭한다. 특히 본 연구는 이 개념을 국립발레단의 창작 작품을 중심으로 한정하여 사용한다. 이는 해당 단체가 한국 창작발레의 제도적 대표성과 해당 작품에 대한 자료 접근성 및 공연 맥락의 명료성이 분석에 유리하다는 점에 기인한다. 실제로 한국 창작발레에 대한 분석은 실질적인 자료 부족이라는 현실적인 한계에 직면한다. 영상 기록이나 공연 사진조차 제대로 보존되지 않은 경우가 많고, 안무 노트나 공연 평문 또한 희소하다. 본 절에서 다루는 7개의 대표작 역시 『국립발레단의 50년사』(2012)에 실린 정기공연(1회~41회) 작품 분류표 중에서 (1) 한국적 발레, (2) 서사 기반의 창작 발레, (3) 여성 캐릭터가 주요 인물로 등장, (4) 주제나 포스터, 연출 정보 등을 통해 일정 부분 작품을 추론할 수 있는 작품들을 기준으로 선정하였다. 이에 따라 작품 분석은 객관적 재현이라기보다, 텍스트에 기반한 연구자의 비판적 추론과 해석을 전제로 한다는 제한점을 분명히 밝힌다.
이러한 기준에 따라 선정된 일곱 개의 작품은 1974년 임성남의 「지귀의 꿈」을 시작으로, 「처용」(1981), 「배비장」(1984), 「춘향의 사랑」(1986), 「왕자호동」(1988), 「바리」(1998), 그리고 문병남 안무의 「왕자호동」(2009)에 이르기까지 약 35년간의 시기별 창작발레를 포함한다. 이들 작품은 모두 전통 설화나 고전 문학, 무속신화 등을 소재로 하며, 포스터, 프로그램 노트, 무대 장치 설명 등 극히 제한적인 정보 속에서도 여성 인물이 중심 서사 구조에 개입했을 가능성이 포착되는 점에서 분석 대상으로 포함하였다. 각 작품 속 여성상은 공연 당시 실제 무대에서 어떻게 재현되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영상자료나 비평문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이 연구에서는 작품의 주제, 등장인물, 대본과 포스터 상의 묘사 등을 바탕으로 서사적 이미지 수준에서의 추정을 통해 여성 이미지의 재현 경향을 유추하고자 한다.
1980년대의 경우, 서양의 클래식 발레를 한국화하는 데 주력하여 한국적 주제를 사용하지만, 표현에 있어서는 한계가 있었다. 그리하여 이 시기의 한국 창작 발레는 한국적인 주제를 발레극으로 창작하는 경향을 갖는다(유장일, 2020, p. 211). 예컨대 「지귀의 꿈」의 경우, 선덕여왕이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점에서 ‘여성 통치자’라는 역사적 위상과 함께, 사랑과 죽음을 둘러싼 감정 중심 서사의 일부로 기능했을 가능성이 있다. 「처용」은 여성 캐릭터가 중심 무대에 등장하지 않지만, 설화 구조상 남성 인물의 명예와 수난의 배경으로서 간접적 여성상이 설정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배비장」은 ‘우리나라 최초의 코믹 발레’로 기생 애랑이라는 여성 인물이 등장하며, 그녀가 지닌 유희적 특성과 코믹한 구성이 당대 여성성에 대한 해학적 시선을 반영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국립발레단, 2012, p.64). 「춘향의 사랑」은 고전소설 『춘향전』을 모티프로 한 작품으로, 기존 서사에서 춘향이 ‘정절’과 ‘헌신’을 상징하는 인물로 재현되어 온 점을 고려할 때, 해당 발레 역시 유사한 이미지의 연장을 시도했을 가능성이 있다. 「왕자호동」 또한 전통 설화 속 낙랑공주의 서사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어, 여성이 국가적 책임과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거나 희생하는 구조 속에 위치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바리」는 제3대 최태지 단장 겸 예술감독 시대에 제작된 작품으로, 무속신화 속 바리공주의 여정을 서사화한다. 발레극이라는 점에서는 이전 작품과 큰 차이가 없지만, 딸로 태어나 버림받고도 부모를 구하기 위한 여정을 떠난다는 이야기 구조를 고려할 때, ‘효’사상과 여아 멸시에 대한 ‘여권 옹호’사상을 동시에 담아 능동적 여성 주체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전환적 이미지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국립발레단, 2012, p. 142). 마지막으로, 2009년의 「왕자호동」은 초연 이후 21년 만에 재구성된 작품으로, 초연 당시 주역을 맡았던 최태지 예술감독의 기획 아래 문병남 부예술감독이 안무를 맡아 새롭게 탄생하였다. 한국적 발레의 레퍼토리화를 지향하며 제작된 이 작품은, 동시대 예술의 역동성을 반영하고자 각 예술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 중인 국내외 창작진들이 대거 참여한 점에서도 주목된다. 2002년 월드컵 개막식 연출을 맡아 국제적으로 주목받은 국수호가 총연출을, 현대무용 안무가 차진엽이 조안무를 맡았으며, 작곡가 조석연, 무대 디자이너 신선희, 의상 디자이너 제롬 카플랑(Jérôme Kaplan), 조명 디자이너 뱅상 미예(Vincent Millet) 등 각 분야의 예술가들이 협업하였다(국립발레단, 2012, pp. 234-236). 이러한 제작진의 조합은 작품이 보다 현대적인 감각과 세련된 무대 미술을 지향했음을 시사한다. 특히 상징적이고 미니멀한 무대 구성, 감정 표현을 중시하는 안무적 접근은 인물의 내면을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구성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그로 인해 낙랑공주의 심리적 복합성과 감정적 깊이가 더욱 강조되었을 것으로 유추된다.
이러한 유추를 바탕으로 도출할 수 있는 한국 창작발레 속 여성 이미지의 경향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전반적으로 유교적 도덕성과 전통적 미덕을 구현하는 존재로서의 여성상이 반복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둘째, 여성 캐릭터는 단독으로 이야기를 이끄는 주체라기보다는, 남성 중심의 서사 구조 속에서 정서적 동기나 전개 장치로 위치했을 가능성이 있다. 셋째, 무대 구성이나 의상, 조명 등 시각적 요소를 통해 여성의 감정이나 미덕을 상징적으로 표상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는 여성 신체의 상징화, 미화로도 이어졌을 수 있다. 다만 1990년대 후반 이후에는 바리공주나 낙랑공주와 같은 인물들이 감정의 내면화, 또는 행동 주체로서의 이미지로 구성되었을 가능성이 열리며, 여성 주체성에 대한 새로운 서사적 가능성을 드러냈다고도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한국 창작발레는 전통적 서사의 반복과 젠더 이데올로기의 재현이라는 한계를 지니면서도, 점진적으로 여성 주체성의 전환 가능성을 탐색해온 흐름을 지닌다. 본 절의 고찰은 이러한 맥락을 바탕으로, 이후 논의될 「호이 랑」이 어떤 방식으로 기존 여성 이미지의 틀을 수용 및 변형하며 새로운 재현 전략을 구성했는지를 분석하는 비교 기반이 될 것이다.
Ⅲ. 「호이 랑」 속 여성 이미지의 특성
앞선 장에서는 발레 사적 흐름에 따라 여성 이미지가 시대별로 어떻게 재현되어 왔는지를 서사적, 신체적, 사회문화적, 미학적 범주로 분석하였다. 분석 결과 낭만발레는 요정, 유령 등 초자연적 존재로서의 여성성을 강조하며 순결과 죽음의 미학을 중심에 두었고, 고전발레는 도덕적 미덕과 이상적 여성상을 구현하는 이분법적 서사 속에서 여성 무용수를 이상화하였다. 드라마틱 발레는 감정을 주도하는 여성 캐릭터를 중심에 두고, 일상성과 사회적 저항이라는 요소를 통해 신체와 정체성의 내면화를 시도하였다. 한국 창작발레는 이와 같은 유럽 전통 발레의 여성상 계보를 수용하면서도, 유교적 도덕성과 전통적 미덕을 구현하는 여성상을 중심으로 반복해 왔으며, 주로 남성 중심의 서사 구조 속에서 정서적 기능이나 전개 장치로 작동하였다. 시각적 무대 요소를 통해 여성의 감정이나 미덕이 상징화되고, 여성 신체는 미화의 대상으로 기능하였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 이후 등장한 「바리공주」, 「낙랑공주」 등의 작품에서는 감정의 내면화와 행위 주체로서의 여성상이 점차 형성되기 시작하였으며, 이는 여성 서사의 주체성에 대한 전환 가능성을 암시한다.
이러한 논의는 본 장에서 논의될 「호이 랑」이 어떤 전통을 계승하고, 어떤 층위에서 그것을 변형·확장하고 있는지를 고찰할 수 있는 분석의 비교틀로 기능한다. 이를 위해 세 가지 분석 축을 설정하였다. 첫째, ‘여성영웅성의 형상화’는 기존 발레에서 이상화되거나 수동적으로 그려지던 여성 이미지와는 다른 주체적 서사를 지닌 인물의 재현에 주목하며, 서사적 이미지와 신체적 이미지의 변형 양상을 드러낸다. 둘째, ‘오리엔탈리즘의 변이와 재해석’은 발레 장르 안에서 관습적으로 소비되던 동양 여성상에 대한 시선을 전환하고자 한 시도로, 이는 사회문화적 이미지에 대한 비판적 접근과 동시대적 대안을 제시한다. 셋째, ‘젠더 수행성의 이분법적 한계’는 여성성을 수행하는 신체와 무대 위 관계의 재현 양식에 주목함으로써, 발레에서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미학적 이미지의 관습적 재현에 대한 비판을 포함한다.
1. 여성영웅성의 형상화
포스터 속 “긴 머리 묶어 올리고 내 의지로 세상을 향해 걸어가리”라는 부제처럼 「호이 랑」은 진취적인 여성의 성장드라마다. 작품의 스토리는 대한제국 시대 언론인 장지연이 연재한 『일사유사』에 등장하는 효녀 ‘부랑’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다. 『일사유사』는 1916년 1월 11일부터 9월 5일까지 대략 8개월간 180회에 걸쳐 연재한 것으로 인물의 생애사를 간략히 기술하는 전장류(傳狀類)의 양식을 취하는데(최기숙, 2024, p. 12), 여기서 ‘부랑’의 이야기는 1916년 7월 29일, 30일, 8월 1일, 2일 연재분(3258~3261호)에 등장한다. 『일사유사』의 젠더 정치를 연구한 최기숙에 따르면, 『일사유사』의 연재는 양반 남성 중심의 조선시대 문화사 틀에 저항하고 새로운 문화 기획을 제안하려는 의도가 매개한다고 밝혔다. 그 근거로는 글쓰기 방식이나 편집 체제도 물론 중차대한 것이지만, 여성의 감각, 인지, 통찰, 자부심을 담은 발언의 수록과 여성의 직접적인 발화가 서술되어 여성 일사를 가시화했다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
특히 여장부 ‘부랑’은 노쇠한 아버지를 대신해 남장하고 군에 들어가 전쟁에서 공을 세우는 영웅담으로, 여성영웅소설의 구도와 유사하다. 여성영웅소설에서 여성의 영웅적 행동은 남성영웅이 해왔던 나라를 다스리거나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행위 이외에 제도적으로 부딪히는 사회적 제약과 가정 내에서 일어나는 남편과의 갈등을 필연적으로 야기시킨다(최선영, 1997, p. 7). 여성영웅소설은 국내에서 19세기를 전후로 등장해 널리 읽히기 시작했는데, 이는 단순히 주인공의 성이 남성에서 여성으로 변화한 것뿐만 아니라 남성 중심적 지배 이데올로기의 변화에 따른 여성의식이 반영된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성 영웅적 행동이 발레의 소재가 된 것에는 어떠한 의미가 있는가? 「호이 랑」의 2019년 초연 당시 언론은 ‘성 역할에 대한 고정 관념을 깨는 문화계 흐름이 감지되었다’고 보도했다. 앞 장에서 밝힌 바와 같이 발레는 줄곧 여성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왔고, 여성의 이미지는 신비로움, 아름다움, 연약함, 선함, 사랑스러움 등을 강조했다. 그 결과 남성의 애정의 대상으로서의 당위성을 부여하거나 애정의 성취 여부의 개연성을 부여했다. 그러나 「호이 랑」 속 ‘랑’의 고난은 아버지를 향한 효심, 적군으로부터 군대의 위기를 막아낸 업적 등 지향의 가치가 개인의 차원에서 나아가 가정과 국가의 차원으로 확대된다. 즉 단순히 여성의 도덕성이나 효성을 강조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국가적 차원의 고난을 감내하는 여성 영웅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본 연구에서 참조한 여성영웅 유형 분류는 조필호, 최인숙의 “애니메이션 「뮬란」의 가정지향적 여성영웅성 연구”(2009)에 따른 것으로, 이들은 안기수의 연구 “영웅소설연구: 유형과 서사성을 중심으로”(1995)에서 제시한 ‘고난 모티프에 따른 유형화’를 기반으로 한다. 여성 영웅의 서사를 개인, 가정, 국가의 차원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고난의 양상으로 이론적 기틀을 수립했다. 이 틀은 고전적인 남성 영웅서사와 구조적 유사성을 유지하면서도, 여성에게 주어지는 고난의 성격이 사회적 의미와 갈등구조에서 차별성을 띤다는 점을 강조한다. 분류에 따르면, 고난의 양상은 인물이 고난을 겪는 영역, 극복 과정, 지향의 가치에 따라 구분된다. 고난의 영역이 개인의 차원이고 지향하는 가치가 애정 성취의 유형이라면 애정지향적 유형, 고난의 영역이 개인과 가정이고 가정적 문제 해결을 지향가치로 두면 가정지향적 유형, 고난의 영역이 개인과 가정과 국가이고 지향가치가 기존질서 회복에 있다면 도덕지향적 유형으로 분류하는 것이다.
「호이 랑」의 주인공이 경험하는 고난 역시 가족·국가적 층위에서 부과된 것으로, 이를 통해 형상화되는 여성영웅성은 이 분류 기준에 따라 ‘도덕지향적 유형’으로 분석될 수 있다. 한편 기존 발레에서 여성은 애정지향의 가치에 치중되었다. 예외적 사례로 「호이 랑」의 안무가인 강효형의 전작 「허난설헌-수월경화」는 여성의 탁월한 문학적 역량을 강조한 경우로 애정지향에 벗어나는 경우이지만, 인물의 행위가 영웅성으로 해석할 만큼 극복의 서사가 부재하다. 한편 「심청」(1986)은 아버지를 위해 인당수에 몸을 던지는 효사상에 입각해 ‘가정지향적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발레에서 도덕지향적 영웅 유형은 1956년 레오니드 야콥슨(Leonid Yakobson)이 마린스키 발레단에서 초연한 「스파르타쿠스, Spartacus」가 가장 근접한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주인공은 남성으로, 기존 여성발레의 흐름에 반하여 남성의 에너지와 역동적인 움직임을 강조했다는 의미를 가진다. 그러므로 「호이 랑」이 선보인 도덕지향적 여성 영웅 유형은 지금껏 발레에서 시도된 적 없는 새로운 여성상이라 할 수 있다.
「호이 랑」속 ‘랑’은 도덕지향적 영웅 유형을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방식을 모색한다. 반짝이는 티아라 대신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고 칼을 든 발레리나의 모습, 남성 군무로 구성된 군대를 이끄는 리더십 있는 발레리나의 모습이 기존 발레 작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정경이라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호이 랑>의 여성 영웅의 모습이 새로운 여성상이라는 맥락에서 주인공 ‘랑’ 역할을 맡은 박슬기 수석무용수, 안무가 강효형, 예술감독 강수진의 인터뷰를 보자.
여자도 남자들 사이에서 파워풀한 춤을 출 수 있는 작품이었어요. 지고지순한 여성상을 깨는 작품이라는 점이 신선하게 다가왔어요. 팔 길이만 한 커다란 칼을 들고 춤추는 신이 많았는데 휘청거릴 정도로 컨트롤이 쉽지는 않았어요. 평소보다 상체 근육을 굉장히 많이 썼고 준비하는 과정 동안 남자 무용수들의 춤과 움직임을 연구했어요.(W Fashion, 2019년 7월 25일, 박슬기 발레리나 인터뷰 내용 中)
점프를 많이 하고 보폭을 굉장히 넓게 쓰고, 신체적으로 굉장히 숙련도가 높은 무용수여야 소화할 수 있는 고난도의 동작으로 안무를 구성했습니다.”(MBC 뉴스투데이, 2019년 11월 8일, 강효형 안무가 인터뷰 내용 中)
여성들이 예전에 자신들이 표현 못 했던 것들을 좀 더 많이 표현할 수 있는 세대가 왔잖아요. 그래서 이 작품이 잘 맞는 것 같아요.(MBC 뉴스투데이, 2019년 11월 8일, 강수진 국립발레단 예술감독 인터뷰 내용 中)
남장하고 군대에 들어가 전투하는 ‘랑’의 역할은 발레리나에게 생소한 캐릭터임을 알 수 있다. 남성 무용수의 주특기인 높은 점프와 힘 있는 테크닉을 소화하기 위해 여성 무용수는 성역할이 고정된 발레 훈련법의 변화를 수반해야 하는 도전 의식이 요구된다. 안무와 의상, 움직임 전반에서 남성적인 에너지를 요구하는 이 캐릭터는 기존 발레의 여성 역할 경계를 확장하는 사례로 볼 수 있다.
2. 오리엔탈리즘의 변이(變移)와 재해석
「호이 랑」은 국립발레단의 ‘안무가 육성 프로젝트’를 통해 제작된 작품으로, 대표 레퍼토리화의 기본 조건에 ‘한국적 발레’가 내재하고 있다. 이는 2022년 국립발레단의 60주년을 기념하는 포럼에서 장인주 무용평론가가 ‘한국 소재의 전막발레 창작이라는 숙원을 풀기 위한 노력’이라는 부제로 설명한 글에서 잘 드러난다.
발레가 서양에서 온 것은 분명하지만, 우리의 것 즉 한국적 소재로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염원은 이 땅에 뿌리를 내린 초기부터 강조돼 왔다. (중략) 전막발레로서 발전 가능성이 가장 높았던 <왕자호동>은 (중략) ‘국립발레단의 고유성을 대변할 만한 대표작’이라는 타이틀은 얻지 못했고 이후 7년 동안 라인업에서 사라져 아쉬움이 남는다. (중략) 강수진 단장은 단원들에게 창작의 기회를 주고 안무력 향상을 적극 지원하여 이 문제를 해결해 보려 시도했다. 2015년부터 ‘KNB 무브먼트 시리즈’를 기획해 7회째 지속하고 있는데 첫해 강효형이 안무한 소품 <요동치다>가 이듬해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넥스트 제너레이션’에 초청받는 성과를 내자, 2017년 <허난설헌-수월경화>, 2019년 전2막의 <호이 랑> 안무를 맡겼다(강수진, 2022, pp. 36-37).
그러나 「호이 랑」은 안무가의 전작들에 비해 동양성을 과도하게 표면화하지 않고 절제된 방식으로 한국적 미학을 드러낸다. 「요동치다」에서는 발레에 전통춤의 호흡법과 동작을 가미했고 「허난설헌-수월경화」는 가야금 명인 황병기의 음악을 삽입했지만, 「호이 랑」은 전통적인 발레의 움직임을 유지하고, 브람스, 홀스트, 차이콥스키 등 클래식 음악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이전 작품들과 구별된다. 대본과 의상 등에서 은은한 동양적 요소를 배치함으로써 외적 장식에 머무르지 않는 동양성을 구현한다.
“한국적인 성향이 ‘허난설헌’ 때만큼은 도드라지지는 않을 거예요. 대신 대본과 의상에서 동양미를 느낄 수 있죠. 그런데 무엇보다 강수진 단장님과 얘기한 부분은 극사실주의적인 작품은 만들지 말자는 거였어요. 명확하게 제시되지 않지만, 거기서 한국적인 성향이 드러나는 거죠”(이재훈, 2019년 5월 14일, 강효형 인터뷰 中)
강효형의 안무에서 특기할 만한 점은 한국적인 요소를 적극 내세워 ‘한국적인 발레’ 운운하지 않는 세련된 태도다. (중략) 한국적인 오리지낼리티를 풍겼으나, 오리엔탈리즘이 배어있지는 않았다.(이재훈, 2019년 5월 14일, 기사 원문 中)
여기서 언급된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 개념은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W. Said)에 의해 서양에 의해 형성된 동양에 대한 선입견, 이미지, 그리고 사고방식이라는 문제 제기를 수반한다. 사이드는 자신의 저서 『오리엔탈리즘, Orientalism』(1978)에서 ‘서양 제국주의의 산물로서 동양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한계를 설정하는 용어’(정진농, 2003, p. 16)로 오리엔탈리즘을 정의했다. 그 이후 이 개념은 동양이라는 타자를 받아들이는 다양한 태도와 접근방식에 대한 담론(정옥희, 2004, p. 5)으로 확장되었다. 오리엔탈리즘의 형성 배경에는 제국주의와 식민지건설이라는 정치경제적 상황과 문명의 유럽과 비문명의 비유럽을 구분하는 사상적 요소가 결합해 있다. 그 결과 오리엔탈리즘은 19세기 중반에 최고조에 달한다.
무용연구자 정옥희는 발레에서 동양이 지닌 이국적 정취에 대한 관심이 발레의 역사만큼이나 길다는 점을 지적하며(정옥희, 2004, p. 10), 특히 오리엔탈리즘의 최고조에 달하던 19세기 중후반과 동시대 러시아 고전발레의 영향관계를 분석했다. 분석 개념으로는 오리엔탈리즘의 세 가지 유형을 적용했는데, 이는 학문적 개념과 예술작품에 나타나는 유형을 종합하여 “야만적 타자”, “정신적 타자”, “여성적 타자”로 이루어진다. 이 중 세 번째 유형인 “여성적 타자”는 예술작품에서 두드러지며 페미니즘 관점에서도 다루어지기 때문에 「호이 랑」의 여성상을 고찰하는 본 연구에서 주의 깊게 다뤄져야 할 필요가 있다.
전통적인 발레에서 발견되는 오리엔탈리즘적 특성 중 “여성적 타자”의 핵심은 ‘여성의 관능성’, ‘성스러움’, ‘팜므파탈(femme fatale)’, ‘매혹적인 도취’로 정리할 수 있다. 특히 낭만발레 이후 발레의 중심이 여성의 매력으로 전개되면서 프티파에 의해 구축된 고전발레와 이후 20세기 초에 활동한 발레 뤼스(Ballets Russes)의 작품에서는 이 같은 여성상이 자주 발견된다. 발레 작품에 등장하는 동양 여성 캐릭터와 이것의 표현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파라오의 딸」의 ‘아스피시아’는 러시아 황실이 선호한 이국적이고 이상화된 동양 이미지를 반영하여 낭만적 사랑의 대상이면서도 관능미가 강조되는 것이 특징이다. 「라 바야데르」의 ‘니키아’는 사원의 제사장이 그녀를 욕망하고, 사랑 때문에 죽는 비극적 여인이다. 성스러운 무희인 동시에 금욕적이면서도 사랑에 빠지는 이중적 존재로 그려진다. 「세헤라자데」의 ‘조바이데’는 유혹적이고 절대적인 권력을 지닌 인물이다. 발레에서는 그녀의 성적 자유와 욕망의 화신으로 묘사되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다른 시대와 지역을 주제로 하지만, 모두 여성 캐릭터의 관능성을 부여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한편,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발레 작품 중 동양 여성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보여준 사례도 존재한다. 비엔나에서 초연된 「한국의 신부, Die Braut von Korea」(1897)가 그러하다. 이 작품은 요제프 바이어(Josef Bayer)의 음악, 하인리히 레겔(Heinrich Regel)의 대본, 요제프 하쓰라이터(Joseph Haßreiter)의 안무로 완성된 4막 9장의 대규모 작품이다. 당대 유럽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을 배경으로 하며, 실제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던 청일전쟁(1894~1895)을 소재로 삼았다(김지은, 2023, p. 75). 흥미로운 점은 여주인공인 한국 여성 ‘다이샤’(Daisha)다. 그녀는 작품 속 한국 왕자의 오랜 신하인 ‘리-타-미’(Ri-ta-mi)의 딸로, 대담하고 용감한 인물로 그려진다. 「한국의 신부」에 관해 연구한 김지은에 따르면, 위기의 상황에서 남장하고, 직접 전쟁터에 나서며, 외국의 장군들과 대면하고 지혜롭게 행동하여 사랑하는 왕자와의 결혼에 이르는 다이샤의 모습은 당시 아시아는 물론 유럽 사회에서도 드문 주체적이고 강한 여성상이라 할 수 있다(김지은, 2021, p. 67).
본 연구의 대상인 「호이 랑」의 ‘랑’은 앞서 언급한 관능적 여성과 거리가 멀고, 「한국의 신부」의 다이샤와 유사한 면이 많다. 두 작품 모두 발레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전쟁’이라는 소재의 사용, 전쟁터에 나가기 위해 ‘남장’을 하는 공통된 설정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호이 랑」에서는 유교 도덕 사상과 실천 덕목이 추가된다는 점에서 독창성이 있다. 아버지를 대신해 군에 들어가는 효심(부위자강 父爲子綱), 나라를 위해 싸우고 군의 사령관에 복종하는 충성심(군위신강 君爲臣綱)이 해당한다. 이러한 접근은 서구 발레에서 나타나는 오리엔탈리즘적 여성상, 즉 관능적이고 이국적인 여성 타자로서의 동양 여성 이미지를 탈피하려는 의도를 보여준다. ‘랑’은 유혹적이거나 신비로운 여성상이 아니라, 윤리적 결단과 공동체적 책임을 실천하는 인물로 재현된다.
특히 『일사유사』에서 ‘부랑은 전쟁에 공을 세우지만, 남편을 통해 흡수되었고, 남편의 삼년상을 지낸 뒤에는 묘향산에 들어가 비구니가 되었다’(최기숙, 2024, p. 23)는 원래 내용을 보면, 남편을 섬기는 것을 근본으로 하는 부위부강(夫爲婦綱)의 지침도 찾아볼 수 있다. 이는 단순히 서구 시선의 대상이었던 동양 여성을 능동적 주체로 전환하려는 창작적 실천으로 해석할 수 있다.
3. 젠더 수행성의 이분법적 한계
「호이 랑」의 대본을 맡은 한아름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중국에 애니메이션 ‘뮬란’의 모티프가 된 여걸 화목란이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부랑의 이야기가 있다”(파이낸셜뉴스, 2019년 10월 28일)고 설명한 바 있는데, 뿐만 아니라 「호이 랑」은 상당 부분 ‘한국판 뮬란’(홍상희, 2019년 11월 2일)이라 홍보되며 애니메이션 <뮬란>에 비유되었다.
「뮬란」(1998)은 1990년대 이후로 주체적인 여성상을 보여주기 시작한 디즈니 애니메이션 캐릭터 중 하나로 도전적인 여성의 표상이 되었다. 그런데 한국창작발레 「호이 랑」과 애니메이션 「뮬란」은 ‘세상의 편견을 이기고 당당한 여성으로 성장하는 소녀의 이야기’라는 서사의 큰 틀뿐만 아니라 여성영웅 서사의 세부 구조에도 매우 높은 유사성을 보인다. 뮬란의 여성영웅성 서사구조를 분석한 양은경, 이관표의 연구(2020) 중 뮬란의 구조분석 내용을 일부 참조하고, 「호이 랑」의 내용을 적용하여 두 작품의 구조분석 내용을 비교하면 아래 <표 5>와 같다.
비교 분석을 위해 적용한 분석틀은 비교신화학자인 조셉 캠벨(Joseph John Campbell)이 설명한 ‘원질신화’를 바탕으로 한다. 원질신화란, 캠벨이 자신의 저서 『세계의 영웅신화, The Hero with a Thousand Faces』(1949)에서 세계 각지의 문화권에 존재하는 영웅 신화를 분석하고 공통요소를 정의한 것이다(Campbell, 2020, p. 49). 캠벨은 원질신화 안에서 영웅의 보편적인 단계를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첫 번째 ‘출발’에서는 주인공이 겪게 되는 시련에 앞서 주인공의 소명에 관해 설명한다. 두 번째 ‘입문’에서는 주인공이 시련을 겪는 과정에서 비범한 능력을 지닌다. 세 번째 ‘귀환’에서는 소명을 완수한 주인공이 자아실현을 통해 삶의 자유를 얻는다(이혜원, 2017, pp. 28-30).
<표 5>에서 알 수 있듯이, 두 작품은 단위별로 동일한 기능과 내용을 가진다. 유일한 차이점은 ‘뮬란’과 ‘랑’의 여성성의 재현 방식이다. ‘뮬란’은 신붓감으로는 최악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기존 여성에게 요구되는 여성성이 결여된 반면, ‘랑’은 특별한 재현이 없다. 양은경, 이관표의 연구에서는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뮬란」 서사의 한계 세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 외모 변화의 요구, 둘째, 남성에 의한 인정, 셋째, 가부장주의에 대한 저항과 좌절이다. 세 가지 한계점 모두 「호이 랑」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먼저 외모 변화의 요구는 ‘뮬란’과 ‘랑’이 머리 스타일에 변화를 주는 것과 관련이 있다. ‘뮬란’은 긴 머리 자르는 장면, ‘랑’은 머리끈으로 머리를 묶어 투구를 쓰는 장면이 있다. 여성의 긴 머리는 사회적 통념에 근거한 여성의 이미지이며, 이것에 변화를 주는 것으로써 두 작품 모두 여성으로서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고자 하는 여성 주인공의 욕망을 표출하고 결연한 의지를 표현한다. 두 번째 남성에 의한 인정은 ‘뮬란’과 ‘랑’이 전쟁터에서 공을 세우자 비로소 남성들에 의해 인정을 받는 장면이 해당한다. 이는 여성의 정체성이 스스로 자아실현을 통해 결정된다기보다 최종적으로 규범적 주체, 즉 남성에 의해 특별히 허락되는 것이 특징이다. 마지막으로 가부장주의에 대한 저항의 경우에는 두 작품 모두 부대에 입대하기 위해서 여성 주인공이 남장하는 것이 해당한다. ‘영웅으로서의 진입 과정에서 사회적인 제약에 부딪힌다’(양은경, 이관표, 2020, p. 212)고 했듯이, 「호이 랑」 역시 여성 영웅의 출발이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전통 발레가 축적해온 젠더 수행성의 틀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작품의 결말에서 ‘랑’은 군대에서 함께 싸운 사령관 ‘정’과 결혼에 이르게 되며, 서사는 다시금 이성애적 사랑과 결혼이라는 전형적인 구조로 귀결된다.
지금껏 발레가 고수해 온 주제로서, 거듭 반복해서 결혼 상대자를 고르는 모습에 대해 무용학자 샐리 베인즈(Sally Banes)는 ‘결혼각본’(the marriage plot)이라 일컫는다. 그녀는 자신의 저서 『춤추는 여성, Dancing Women: Female Bodies on Stage』(1998)에서 19세기 중반 이후 무용 정전(canon)을 여성주의 시각에서 재구성하면서 무용 무대 위의 여성 등장인물들은 발레와 현대무용을 막론하고 결혼각본에 관여한다고 설명한다. 나아가 결혼각본이란 용어는 결혼체제의 가부장적 기반과 결혼이 여성 대부분의 운명이라고 인식하는 가부장적 기대라는 의미를 시사한다(베인즈, 2012, p. 31).
이렇게 봤을 때, 결혼각본을 유지한 「호이 랑」 역시 결혼을 둘러싼 담론에 참여하면서 새로운 여성상을 제시하고자 했던 본래의 목적과 멀어진다. 더욱이 안무 구성과 방식에서도 한계를 드러낸다. 작품에서 결혼각본을 재현하는 것은 ‘랑’과 ‘정’의 파드되이다. 이 대목은 전쟁을 끝내고 마을로 돌아온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한 마음을 확인하며 추는 사랑의 파드되이다. 독일 낭만주의 작곡가인 막스 브루흐(Max Christian Friedrich Bruch)의 「스코틀랜드 환상곡, Scottish Fantasy」(Op. 46) 3악장을 사용하였다. 곡의 특징은 낭만주의 특유의 선율미를 간직하면서 차이콥스키처럼 감정을 극대화하는 방식과도 거리를 두고, 멘델스존과 슈만의 영향으로 균형 잡힌 형식과 서정적인 선율을 중시한 것이다. 파드되에서 젠더 수행의 이분법적 한계는 두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하나는 ‘랑’의 여성상이 여전사의 용맹함이나 강인함보다는 애정지향성을 강조한 우아함에 가깝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고난도의 리프팅 기술이 돋보이는 가운데 남성의 스텝이 줄곧 여성 무용수를 받쳐주고 강조하는 것에 머문다. 철저히 ‘발레리나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던 프티파의 안무기법’(팀 숄, 1998, p. 36)과 대동소이하다.
지금까지 본 장의 분석 주제와 여성 이미지 범주의 관계는 아래 <표 6>과 같이 시각화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호이 랑」은 네 가지 여성 이미지 범주를 다양한 방식으로 변형하고 재의미화함으로써, 현대 창작발레에서 여성 정체성을 재구성하는 중요한 사례로 분석될 수 있다.
Ⅳ. 결론 및 연구 구조의 정합성 고찰
본 연구는 한국 창작발레 「호이 랑」에 나타난 여성상의 재현 방식을 발레 사적 맥락 속에서 분석함으로써, 현대 발레가 담아낼 수 있는 여성 정체성의 가능성을 조명하고자 하였다. 전통적으로 발레는 발레리나를 중심으로 한 시각적 미학과 성역할의 고정적 구도로 여성 이미지를 형성해 왔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에 따라 무대 위 여성상 또한 변화해 왔으며, 본 연구는 그 변화가 단순한 전이(transition)가 아닌, 기존 질서를 전복하고 재구성하는 변형의 차원임을 강조하고자 하였다.
연구의 분석 구조는 크게 세 단계로 구성된다. 첫째, 2장에서는 낭만발레, 고전발레, 드라마틱 발레, 그리고 한국 창작발레에 나타난 여성상의 변천을 ‘서사(narrative)’, ‘신체성(corporeal)’, ‘사회문화적 맥락(sociocultural)’, ‘미학적 코드(aesthetic)’라는 네 가지 범주를 기준으로 정리함으로써, 「호이 랑」이 어떤 역사적 여성 이미지의 전통을 계승하고, 어떤 지점에서 변형을 시도하고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분석 기준을 마련하였다. 이 장은 단순한 배경 설명이 아닌, 본론 분석을 위한 전사적(前史的) 비교틀로 기능하였다. 둘째, 본 연구는 ‘여성영웅 서사 유형’, ‘오리엔탈리즘 문화비평 담론’, ‘결혼각본 이론’ 이라는 세 가지 이론을 중심으로 「호이 랑」의 내러티브와 형상화된 여성 캐릭터를 해석하고자 하였다. 셋째, 본론에서는 ‘여성영웅성의 형상화’, ‘오리엔탈리즘의 변이와 재해석’, ‘젠더 수행성의 이분법적 한계’라는 세 가지 분석 축을 바탕으로 「호이 랑」의 구조와 미학을 고찰하였다. 이와 같은 분석 구조는 논문의 전반에 일관된 해석틀을 제공하면서, 동시에 이론 - 비교 - 분석의 흐름을 정합성 있게 연결하는 장치로 작동하였다.
연구 결과, 「호이 랑」은 단지 수동적 존재로서의 여성이 아니라 서사를 이끌고 전투에 참여하는 여성 영웅상을 발레 무대 위에 구현하며, 발레에서 보기 드문 도덕지향적 여성 영웅형을 제시하였다. 이는 기존 발레 담론에서 상대적으로 간과되었던 여성영웅성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로서 주목할 만하다. 또한 이 작품이 보여주는 동양적 모티프는 한국적 서사를 기반으로 하되, 절제된 미학을 통해 오리엔탈리즘의 틀을 우회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즉 단순히 ‘동양의 여성’을 소비하는 서구적 시각을 넘어, 동양 내부에서 재해석되는 정체성과 수행성을 시도하는 창작적 실천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작품은 결혼이라는 구도 속에서 서사를 마무리하고, 파드되 및 안무 구조에서는 여전히 전통 발레의 이분법적 젠더 수행성을 반복함으로써 기존 발레 문법의 한계를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이러한 모순은 「호이 랑」이 단 두 차례 공연(2019년 5월 초연, 2019년 11월 수정 및 보완 재연) 이후 재공연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도 일부 드러난다. 작품이 지닌 창작적 도전과 여성 이미지의 실험이 무대 위에 지속적으로 확산하지 못한 현실은, 창작발레의 한계이자 앞으로 극복해야 할 지점이다. 즉, 「호이 랑」이 제시한 여성상은 한국 창작발레의 전통적 여성 이미지에 균열을 내는 ‘변형의 시도’였으나, 그 시도가 미학적 제도와 관객 수용의 관성 속에서 충분히 확장되지 못한 것이다. 향후 한국 창작발레는 보다 다양한 젠더 감수성과 탈이분법적 시선을 반영할 수 있는 예술 언어를 개발해야 할 것이다. 여성성의 미화나 수동성에 기댄 전통적 형상에서 벗어나, 현실 속 여성 주체의 감각과 정체성, 실천적 에너지를 무대 언어로 구현하려는 창작적 실험과 재공연 구조가 함께 구축되어야 한다. 이를 통해 발레는 살아있는 시대 감수성과 함께 호흡하며, 여성 이미지의 새로운 재현 양식을 선도하는 예술로 발전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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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게재: 무용예술학연구 Vol.99, No.2(2025), pp. 139-160. https://doi.org/10.16877/kjds.99.2.202506.139
인터넷 잡지 <춤웹진>의 편집 사정상 논문의 각주 및 참고문헌, 영문 초록(Abstract)은 삽입하기가 어려우므로 해당 내용은 논문의 원문을 참조하기 바란다. - 편집자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