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연구

조선 예술의 정점 〈무산향〉
서정록_춤연구가

서론

지난번에 〈춘앵전(春鶯囀)〉을 중심으로 ‘법고창신(法古創新)’이 어떻게 한국 전통춤 창작에 적용되었는지 알아보았다. 이번에는 박지원이 주창한 ‘법고창신’과 여기에 더해 ‘합변지기(合變之機)’를 통한 창작 방식을 효명세자(孝明世子)의 작품인 〈무산향(舞山香)〉의 창작 사례를 가지고 살펴보고자 한다. ‘합변지기’는 서로 다른 생각이나 요소들 가운데, 서로 공통적인 것을 중심으로 합하여 새로운 것이 되고, 또 각각이 가지고 있던 생각이나 요소들 가운데 차이점들이 내용을 더 풍성하게 하거나 강조하는 창작 방식을 말한다.



〈무산향(舞山香)〉 『순조무자진작의궤』



‘법고창신(法古創新)’과 ‘합변지기(合變之機)’의 사례로 다룰 〈무산향〉에 대해 우선 대략의 개요를 살펴보자. 〈무산향〉은 〈춘앵전〉과 마찬가지로 한 사람이 추는 독무(獨舞)다. 또 〈춘앵전〉은 화문석 위에서 추지만, 무산향은 대모반(玳瑁盤) 위에 올라서서 추는 춤이다. 『순조무자진작의궤(純祖戊子進爵儀軌)』에는 대모반의 크기와 모양이 그림과 함께 설명하고 있다. 대모반은 길이가 7척, 너비는 4척 6촌 5분, 높이는 족대까지 1척 3촌이며, 사방에 ‘태평화(太平花)’가 그려져 있다. 난간은 판각(板刻)과 운각(雲刻)으로 장식되어 있다. 게다가 여러 가지 색으로 채색된 ‘반(盤)’에는 대모 무늬가 그려져 있다. 대모반은 여타 다른 궁중 춤은 물론 한국 전통춤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화려한 무대 공간이다.

그렇다면 효명세자는 왜 대모반을 만들었을까? 또 〈무산향〉의 춤 제목도 흥미롭다. 〈춘앵전〉의 경우 그 제목의 의미는 ‘봄날 꾀꼬리의 노래’다. 직관적으로도 바로 그 뜻을 알 수 있다. 반면에 〈무산향〉은 직관적으로는 그 뜻을 알기가 어렵다. 이 제목은 과연 효명세자가 창작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이것은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또 효명세자가 창작한 여러 춤 작품에는 몇 가지 특이점이 있다. 그중 한 가지는 〈무산향〉을 비롯한 『순조무자진작의궤』에 보이는 여러 작품에 ‘아광모(砑光帽)’라는 모자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 모자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무산향〉에 대해 이와 같은 여러 질문을 할 수 있다. 이것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무산향〉이 어떻게 구상하게 되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그래서 먼저 이 작품의 배경은 무엇인지 찾아보고 이를 자세히 들여 다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효명세자가 기획했던 진작례 전체를 관통하는 창작 배경은 어떤 것인지도 추정해 보고자 한다.


『순조무자진작의궤』에서 〈무산향(舞山香)〉

지난번에 살펴본 〈춘앵전〉과 마찬가지로 〈무산향〉의 창작 배경을 살펴보기 위해, 먼저 『순조무자진작의궤』에서 〈무산향〉의 기록과 〈무산향〉에서 부르는 창사(唱詞)를 각각 살펴보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순조무자진작의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예제 무산향(睿製舞山香) (1) 당(唐) 여남왕(汝南王) 진(璡)이 항상 아견모(砑絹帽)를 쓰고 곡을 연주하였다. 상(上)이 스스로 홍근화(紅槿花)를 따서 모첨(帽簷)에 올려놓고는 이 한 곡조를 연주하게 하였다. (2) 『도서집성(圖書集成)』에, “『동파지림(東坡志林)』: 이도(李陶)의 아들 시에 ‘누구와 함께 아광모(砑光帽)를 쓰고, 한 곡조 〈무산향〉을 연주할까’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3) 대모반(玳瑁盤)을 설치하는데 침상(寢床)처럼 만든다. 무동 1인이 반(盤)에 올라 춤춘다.


이 기록에서 〈춘앵전〉과 마찬가지로 ‘예제(睿製)’라는 단어를 통해 〈무산향〉도 역시 효명세자가 창작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순조무자진작의궤』의 이 기록은 크게 3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 고사와 두 번째 고사, 그리고 무대에 관한 설명이다. 〈춘앵전〉의 경우 2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 것과 차이가 있다. 두 가지 고사 중 하나는 (1) 당나라 때 인물인 이진(李璡)에 관한 고사이며, 또 다른 하나는 (2) 송나라 시대 인물인 이도(李陶)의 아들에 관한 고사다. 여기서 (1)의 경우, 당나라 이진(李璡)의 고사는 인용 표시가 되어 있지 않고, (2)의 경우는 송나라 때 서주 통반이었던 이도(李陶)의 아들의 이야기로 북송의 문인인 소식(蘇軾)의 문집인 『동파지림(東坡志林)』을 인용한 『도서집성(圖書集成)』에서 근거를 가져왔다. 그리고 (3) 부분은 무대와 관련된 것으로 ‘대모반’을 언급하고, 그 사용법을 설명하는 것으로 마치고 있다. 이러한 설명 방식은 〈춘앵전〉과 유사하다. 다음으로 〈무산향〉에서 부르는 노래인 창사를 살펴보도록 하자.

“여럿 가운데 홀로 군왕의 미소를 받아(衆中偏得君王笑)
서둘러 좁은 소매 비단옷 집어 갈아입는다(催換香羅窄袖衣)
꾀꼬리 지저귀는 나무 사이로 새로운 노래가 울려 퍼지니(遊響新歌鶯囀樹)
바람을 의지해 가볍게 춤추며 구름을 헤치고 날아오른다(倚風輕舞拂雲飛)”

이 창사는 마치 아름다운 여인이 왕의 눈에 들어 노래하고 춤을 추는 내용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뒤에 살펴볼 이 노래의 배경을 확인하면 다른 맥락의 내용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세 번째 연 “꾀꼬리 지저귀는 나무 사이로 새로운 노래가 울려 퍼지니”는 지난번에서 살펴본 〈춘앵전〉을 연상하게 한다.


〈무산향〉, 이진(李璡) 그리고 당 현종

이제 『순조무자진작의궤』에서 〈무산향〉 관련 기록의 세 부분을 차례로 알아보도록 하자. 먼저 (1)의 고사의 인물인 이진(李璡)에 대해 살펴보면, 이진과 관련하여 알 수 있는 기록으로 『고문진보(古文眞寶)』을 꼽을 수 있다. 이 책에 수록된 글 가운데 이진과 관련된 부분은 송나라 시인인 소식(蘇軾, 1036-1101)의 시 〈괵국부인야유도(虢國夫人夜遊圖)〉다. 『고문진보』는 지난번에도 이야기하였듯이 조선시대 서당에서 필수로 가르친 교재 중 하나였기에, 당시 서당교육 정도를 받은 사람이라면 충분히 아는 내용이었다. 뒤에서 이에 대해 좀 더 살펴보겠지만, 그래서 혹시 이진의 고사 부분은 인용 표시가 없는 것은 아닐까 추정해 본다. 다시 소식의 〈괵국부인야유도〉로 돌아와서, 이 시에서 이진과 관련된 구절은 “궁중에서는 갈고로 꽃과 버들 재촉하니, 옥노가 비파 줄타고 화노가 갈고 친다오(宮中羯鼓催花柳 玉奴弦索花奴手)”라는 부분이다. 이 구절에서 ‘옥노’는 양귀비를 가리킨다. 양귀비의 본명이 양옥환(楊玉環)이기 때문에 이런 별칭이 붙었다.

이 시 구절의 또 다른 인물인 ‘화노(花奴)’는 바로 이진을 가리키는데, ‘화노’는 그의 별명이다. 이 시에서 이진이라는 인물은 ‘갈고(羯鼓)’라는 악기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양귀비와 함께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이진은 당나라 현종 시대 사람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진은 당나라 시대 악과 풍류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는 당 현종의 조카로, 당나라 시대 악서(樂書)인 『갈고록(羯鼓錄)』를 살펴보면, 갈고 연주를 현종에게 직접 배웠으며, 갈고 연주의 명인으로 이름을 떨쳐 당 현종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게다가 그는 잘생긴 외모로 인기가 많았는데, 그래서 현종이 그를 ‘화노’라고 별명을 붙여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의 풍류에 관한 것은 지난번에서 살펴본 두보의 시 〈음중팔선가(飮中八仙歌)〉의 두 번째에 그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이진은 술 세 말을 마셔야 조정에 나가고, 길에서 누룩 수레만 만나도 침을 흘리며, 주천으로 옮겨주지 않음을 한스러워하네(汝陽三斗始朝天 道逢麴車口流涎 限不移封向酒泉)”라는 구절이 바로 그것이다. 이 시가 보여주듯 그는 당나라에서 상당한 술꾼으로 알려져 있었다. 술을 좋아하는 것 이외에도 그는 당시에 존경받는 인물이었던 것 같다. 이와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는 기록은 역시 두보의 시 〈증특진여양왕이십운(贈特進汝陽王二十韻)〉다. 두보는 이 시에서 그를 다음과 같이 칭송하였다.

“학업은 학식 있는 학자처럼 풍요롭고, 문장은 화려한 장인의 솜씨처럼 능숙하다. 붓은 날아오르듯 용처럼 솟아오르고, 문장이 끝나면 봉황처럼 날아오른다. 정교한 이치를 웃음으로 대화로 나누며, 친구들 앞에서는 격식을 잊는다. 조그만 장점이라도 소중히 여기며, 한 번 약속한 것은 결코 교만하지 않는다(學業醇儒富 辭華哲匠能. 筆飛鸞聳立 章罷鳳鶱騰. 精理通談笑 忘形向友朋. 寸長堪繾綣 一諾豈驕矜).”

여기서 알 수 있듯이 그는 학문과 문학, 서예에 뛰어난 사람이었다. 또 자신의 신분이나 권력을 함부로 과시하지 않고, 오히려 사람들을 대할 때 항상 겸손하고 소탈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앞서 이야기한 이진의 별칭인 ‘화노’에 관한 고사는 『태평광기(太平廣記)』 가운데 악기 부분에 갈고와 당 현종 관련 부분에 수록되어 있다. 『태평광기』는 송사대서(宋四大書) 중 하나로 한국에서도 이미 고려 시대부터 이 책을 반드시 읽어야 할 고전으로 여겼으며, 한문을 읽을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조선 명종 때 이 책에서 유명한 이야기들을 골라 『태평광기언해』라는 제목으로 우리말로 번역한 책이 발행되기도 하였다. 『태평광기』에서 당 현종과 갈고에 관련하여서는 『갈고록』과 당나라의 단성식(段成式, 803-863)이 지은 수필집인 『유양잡조(酉陽雜俎)』를 인용하고 있다.

“여양왕 진(汝陽王 璡)은 영왕(寧王)의 장자로, 용모가 아름답고 출중했다. 현종(玄宗)은 그를 특별히 총애하여 직접 가르쳤다. 진은 총명함과 민첩함으로 현종의 뜻을 잘 이해하고 항상 그를 따라다니며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다. 어느 날, 진이 아견모(砑絹帽)를 쓰고 곡을 연주할 때, 현종은 붉은 무궁화꽃을 모자 위에 올려놓았다. 이것은 본래 머리를 고정하는 방법이다. 아견모와 무궁화꽃은 모두 미끄러워 한참 후에야 매우 미끄러워서 가만히올려놓는 데 시간이 제법 걸렸다. 그는 이때 〈무산향(舞山香)〉을 연주했는데, 연주 도중에 모자 위의 꽃이 떨어지지 않았다. 현종은 이를 크게 기뻐하여 웃고 금으로 만든 물건을 하사하였다. 현종은 "화노는 자태가 빛나고 아름다우며, 피부에서 광채가 나니, 인간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반드시 신선이 벌을 받아 이 세상에 떨어진 것이 분명하다."라고 말하였다.”

『태평광기』의 이 고사 부분은 본래 『갈고록』에 있던 것을 인용한 것으로, 이진이 아견모를 쓰고 갈고를 연주하는데, 현종이 꽃을 아견모 위에 올려두었으나 연주가 끝날 때까지 꽃이 땅에 떨어지지 않고 모자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 당 현종이 웃으며 매우 기뻐했다는 이야기이다. 이 고사에서 앞서 살펴본 효명세자의 〈무산향〉에서 부르는 창사의 시작에 “여럿 가운데 홀로 군왕의 미소를 얻어”라고 하는 부분이 바로 『태평광기』의 이진의 이 고사와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 〈무산향〉의 창사 내용은 아리따운 여인이 왕의 눈에 들어 노래하고 춤을 추는 것이 아니다. 왕이 미소 지은 이유는 이진의 공연이 훌륭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여기서 이때 이진이 갈고를 가지고 연주한 작품이 바로 〈무산향〉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효명세자가 창작한 〈무산향〉의 제목은 바로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이진의 이 고사를 미루어 짐작해 보건대, 효명세자가 창작한 〈무산향〉도 어쩌면 타악기인 갈고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 이 고사에서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사실은, 당시 갈고를 연주할 때 올바른 자세는 고개를 흔들거나 머리를 흔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갈고는 장구와 마찬가지로 몸통 양쪽 끝에 가죽을 대어 만든 두 개의 북면을 가진 타악기라는 점에서 유사한 모양이다. 그러나 가운데 부분의 경우, 장구는 움푹 들어가 있으나 당나라 갈고는 가운데로 갈수록 살짝 볼록한 것이 큰 차이점이다. 또 장구의 경우 양손에 열채와 궁굴채를 양손에 들고 두드려서 소리를 내기도 하지만, 또 열편에만 열채를 쓰고 궁편은 맨손으로 때리기도 한다. 그렇지만 갈고의 경우 항상 양쪽 모두 채를 들고 두드린다.



 

갈고 연주 모습 莫高窟第154窟, 갓고(かっこ)



 

산노츠즈미(三ノ鼓), 장구



일본의 궁중악인 가가쿠(雅樂)의 경우, 갈고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일본에서는 이를 ‘갓고(かっこ)’라고 발음하는데, 이 악기는 한국에서 일본에 전래한 것으로 알려진 고마가쿠(高麗樂) 계열에서는 사용되지 않고, 중국에서 혹은 중국에서 한국을 거쳐 일본에 전래한 도가쿠(唐樂) 계열의 작품에서 사용한다. 일본의 갓고, 즉 갈고는 당나라 시대와 마찬가지로 양쪽 모두 채를 들고 두드린다. 한국의 경우 아마도 갈고가 고대 한국에 전래되었지만 그 연주법과 역할이 비슷한 장구에 흡수되며 사라진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볼 수 있다.

한편 고대 한국에서 일본으로 전래하여 아마도 장구의 오래전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고마가쿠에 사용되는 산노츠즈미(三ノ鼓)의 경우 한국의 장구와 비교하여 우선 그 크기가 작다. 그렇지만 가운데가 잘록한 형태는 한국의 장구와 같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산노츠즈미를 한쪽만 두드리며 연주한다. 옛 기록을 살펴보면, 본래 일본에서도 한국의 장구와 마찬가지로 양손으로 가죽의 양쪽 면을 치며 연주하였다. 그러나 오닌의 난(応仁の乱) 때 가가쿠를 담당하던 많은 귀족과 악사들이 사망하고, 이들이 연주하던 악보들도 함께 사라지면서 양손 주법은 소실되었다. 그래서 현재 가가쿠 연주자들은 산노츠즈미를 한쪽만 채를 가지고 연주하고 있다.

갈고는 본래 중국의 악기가 아니었다. 이 악기는 본래 구자악(龜茲樂), 천축악(天竺樂), 고창악(高昌樂), 소륵악(疏勒樂)에서 사용되던 것이었다. 지난번에도 잠시 살펴보았듯이 여기서 구자(龜茲)는 오늘날 신장(新疆)의 타림(Tarim) 분지에 위치하였던 왕국이며, 천축(天竺)은 북인도를 의미한다. 고창(高昌)은 중국의 타클라마칸(Taklamakan) 사막의 북쪽에 위치하였던 왕국이며, 소륵(疏勒)은 타클라마칸 사막에 있었던 고대 오아시스 왕국이다. 여기서 갈고는 지난번에 살펴본 ‘무연(舞筵)’, 즉 카펫과 마찬가지로 본래 중앙아시아에서 유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갈고가 당 현종이 가장 사랑했던 악기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갈고록』에, 당 현종이 “여러 악기 가운데 최고 우두머리로, 그 어떤 음악에 비할 수 없다(八音之領袖 諸樂不可爲比)”라고 말했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다. 실제로 그는 악기 연주 실력 뿐 아니라 작곡도 직접 할 정도로 음악에 상당히 관심과 조예가 깊었다. 다음의 기사는 이를 잘 보여준다.

“어느 날 2월 초하루 아침, 비가 갠 후 경치가 맑고 아름다웠다. 작은 전각 안 정자에는 버드나무와 살구꽃이 막 피어나려 하고 있었다. 이를 보고 감탄하며 “이런 경치를 두고 어찌 이와 견주어 어찌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좌우 신하들이 서로 눈짓하며 술을 준비하려 하자, 홀로 고력사가 갈고를 가져오게 했다. 황제는 곧 그것을 연주하며 한 곡을 타니, 곡명은 〈춘광호(春光好)〉였다. 이 곡은 황제가 직접 지은 것이다. 마음이 흡족해져 돌아보니, 버드나무와 살구꽃이 이미 활짝 피어 있었다. 그것을 가리키며 빈비와 내관들에게 웃으며 말했다. “이 일로 나를 하나님이라 부를 만하지 않은가?”하니 모두 만세를 외쳤다(嘗遇二月初 詰旦. 巾櫛方畢 時宿雨始晴 景色明麗. 小殿內亭 柳杏將吐. 睹而歎曰 對此景物. 豈可不與他判斷之乎. 左右相目 將命備酒 獨高力士遣取羯鼓. 上旋命之 臨軒縱擊一曲 曲名 春光好. 上自制也 神思自得. 及顧柳杏 皆已發拆. 指而笑謂嬪嬙內官曰 此一事 不喚我作天公可乎 皆呼萬歲).”

『태평광기』에서 『갈고록』을 인용한 이 부분은 당 현종의 갈고에 대한 조예를 보여준다. 이 기사에서 등장하는 인물 고력사(高力士)는 현종의 환관으로 그의 마음을 잘 읽고 이를 수행한 이로 유명했다. 이 기사에서 현종은 갈고를 연주하는 것은 물론 갈고를 위한 음악을 직접 작곡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곡의 이름이 〈춘광호(春光好)〉인데, 놀랍게도 순조 무자년 진작례에서 〈춘앵전〉 다음에 공연한 정재 작품이 바로 〈춘광호〉다.



〈순조무자진작의궤〉에서 갈고



여기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순조무자진작의궤』를 살펴보면, 갈고가 소개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갈고를 다른 악기들과 함께 소개하지 않고,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향령(響鈴), 보등(寶燈), 그리고 당(幢)과 같은 무구(舞具)들과 함께 등장하고 있다. 이것은 갈고를 무구(舞具)로 보았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하는 추측을 해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순조무자진작의궤』의 기록에 “갈고차비(羯鼓差備) 서학범(徐鶴範)”이라고 언급하고 있어, 갈고가 실제로 연주된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당시 〈무산향〉을 추었던 이는 김형식(金亨植)으로 갈고를 연주한 이와 다르다. 그러므로 갈고는 무구로 사용한 것이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이전 궁중 기록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갈고가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조선시대 갈고에 관한 기록은 『악학궤범(樂學軌範)』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악학궤범(樂學軌範)』에는 다른 악기들과는 달리 갈고의 구조나 연주 방법, 그리고 제작하는 방식 등이 서술되어 있지 않다. 다만 장구를 설명할 때 중국의 비슷한 악기의 하나로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다. 이런 사실에서 조선 전기에 갈고는 궁중악에서 사용되고 있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순조무자진작의궤』의 그림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실제 갈고가 제작되고, 또 악사가 이를 연주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런 사실에서 효명세자는 연경당 진작례의 공연에서 중국의 기록을 참조하여, 갈고 연주법을 부활해 보고자 이를 제작하여 연주한 것은 아닌가 하는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렇지만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연경당 진작례에서 사용된 갈고를 다시 살펴보면, 당나라의 갈고와 그 모습이 다르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진작례에서 사용된 갈고는 가운데 부분이 움푹 들어가 있어, 가운데가 살짝 볼록한 당나라 갈고와는 그 모양이 다르며, 이런 형태는 오히려 한국의 장구와 더 닮았다. 다만 한국의 장구와 차이점은 음량을 조절하는 축수가 양쪽으로 있다는 것이다. 즉, 진작례에서 사용된 갈고는 한국의 장구를 참조하여 효명세자가 새로운 악기 창작에 참여하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것은 효명세자가 〈춘앵전〉을 창작할 때, 당나라의 ‘무연’을 한국적인 상황에 대입하여 이를 화문석으로 재해석한 것과 닮았다.



  

서유구(徐有榘), 〈유예지(遊藝志)〉양금(洋琴) 부분, 산투르(سنتور)



이 당시는 북학파를 중심으로 외국의 악기(樂器)와 그 연주법에 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때이다. 이러한 모습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를 북학파의 대표적 학자 중 하나인 서유구(徐有榘, 1764–1845)의 『유예지(遊藝志)』에서 살펴볼 수 있다. 선비의 교양이라 할 수 있는 육예(六藝)에 대한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는 『유예지』에는 거문고와 같은 기존의 한국 악기 연주법 이외에도, 이전에는 한국에서 연주되지 않았던 금(琴), 양금(洋琴), 생황과 같은 악기를 그 연주법과 함께 소개하고 있다. 여기서 금(琴)은 “고금(古琴)”, “칠현금(七絃琴)”, 또는 “당금(唐琴)”이라고도 불리는데 공자(孔子)가 즐겨 연주한 것으로 유명한 중국의 대표적인 악기다. ‘양금(洋琴)’의 경우, 본래 페르시아의 ‘산투르(سنتور)’에서 기원한 것으로, 명나라 말 예수회 선교사인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1552–1610)가 중국에 전하였다. 이 악기는 서양에 소개되어 “덜시머(dulcimer)”로 불리었고, 나중에 타현악기인 피아노 발명에 근간이 된다. 이 악기는 북경에 사신으로 갔던 북학파인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이 조선에 소개하였다. 서유구와 홍대용, 즉 북학파의 외국 문물에 관한 관심은 효명세자의 정재 창작과 많은 부분에서 닮은 점이 많다. 이들 당금(唐琴)과 양금(洋琴)이 연경당 진작례에서 연주되었다는 사실을 『순조무자진작의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진의 고사로 돌아와서, 이진은 갈고를 연주하고 있으나, 효명세자의 〈무산향〉에서는 이 춤을 출 때 춤추는 이는 장구춤처럼 갈고를 연주하고 있지 않는다. 〈무산향〉의 춤사위를 기록한 무보(舞譜)인 『정재무도홀기(呈才舞圖笏記)』에서 이것을 확인할 수 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무산향〉의 창사(唱詞)에는 이진의 고사가 인용되어 있기에, 효명세자는 당나라의 〈무산향〉을 춤으로 착각한 것이 아니고, 분명 갈고를 연주하는 음악 작품으로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이를 음악 작품으로 재창작하지 않고 이를 춤으로 재해석하여 창작하였다. 이것은 창사의 마지막 부분, 즉 “바람을 의지해 가볍게 춤추며 구름을 헤치고 날아오른다”라는 구절에서 음악이 춤으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효명세자가 당나라의 음악 작품이었던 〈무산향〉을 춤 작품으로 재해석하게 되는 또 다른 근거는, 아마도 『순조무자진작의궤』에서 언급하고 있는 〈무산향〉 두 번째 고사인 이도의 아들에 관한 이야기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무산향〉과 이도(李陶) 아들의 시 창작

음악이 아닌 춤으로의 〈무산향〉은 (2) 부분의 이도(李陶) 아들 이야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고사에 대해 『순조무자진작의궤』는 『도서집성』를 인용하며 『동파지림』이라 출처를 밝히고 있다. 그런데 사실 『동파지림』에는 이도의 아들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지 않다. 이 고사는 소식(蘇軾)의 또 다른 책인 『구지필기(仇池筆記)』에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도서집성』의 편집자는 이를 착각하여 잘못 인용하였다. 그리고 이를 모르는 효명세자는 『도서집성』의 기록을 그대로 인용하여 따르고 있다. 그러므로 이는 효명세자가 착오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앞서 살펴본 이진과 관련하여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순조무자진작의궤』에서는 이진을 ‘여남왕(汝南王)’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신당서(新唐書)』를 비롯한 여러 문헌과 앞서 살펴본 2편의 두보(杜甫)의 시와 같은 기록에는 일관되게 그를 ‘여양왕(汝陽王)’으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순조무자진작의궤』의 기록은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오기는 우선 『순조무자진작의궤』 기록자가 효명세자의 글이나 구술을 받아 적는 과정에서 발생했을 수 있다. 혹은 효명세자 본인이 이를 착각했을 수도 있다. 그렇지 않다면 『도서집성』의 사례처럼 효명세자가 참조한 어떤 책에서 오류가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구지필기(仇池筆記)』의 이도의 아들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구원필(寇元弼)이 말하기를 서주 통판(徐州通判) 이도(李陶)에게는 열일곱, 열여덟 살쯤 되는 아들이 있었는데, 평소에는 시를 거의 짓지 않던 아이가 어느 날 홀연히 〈낙화(落花)〉라는 시를 읊었다고 한다. 시는 다음과 같다.

“흐르는 물은 시선을 따라 끝없이 흘러가고,
저무는 해는 쉽게 사람의 마음을 끊는다.
누구일까, 아광모(砑光帽) 쓰고 춤추는 이는,
한 곡 〈무산향(舞山香)〉”
이에 이도가 깜짝 놀라 물었다. 그러자 아들이 마치 무엇인가에 홀린 듯 나는 “사중사(謝中舍)다"라고 하였다. ‘아광모(砑光帽)’가 무엇이냐고 묻자, 그가 “서왕모(西王母)가 여러 신선과 연회를 베풀었는데, 그 자리에 춤추는 자가 '아광모(砑光帽)'를 쓰고 있었고, 모자 위에는 꽃이 꽂혀 있었습니다. 〈무산향(舞山香)〉을 추었는데, 곡이 끝나기도 전에 꽃이 모두 떨어졌습니다.”라고 하였다.”

『구지필기』의 기사의 이도 아들의 이야기를 보면, 이도의 아들은 본래 시를 짓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으나, 어느 날 갑자기 빙의(憑依)라는 특이한 방식을 통해 멋진 시를 지었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이도의 아들이 빙의하였다는 ‘사중사’는 당송 팔대가(唐宋八大家) 중 한 명인 구양수(歐陽修, 1007–1072)가 친구와 이별할 때 지은 유명한 시 〈송사중사이수(送谢中舍二首)〉에 등장하는 친구다. 그러니까 소식(蘇軾)의 『구지필기』 속 이 이야기는 시(詩) 창작, 더 나아가 예술 창작 가운데 특이하고 신비한 창작 형태를 소개하고 있다.

이 이야기에서 이도의 아들이 지었다는 시 〈낙화(落花)〉를 살펴보면, 이 시(詩) 가운데에 춤이 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시에 등장하는 춤의 제목이 바로 〈무산향〉이다. 효명세자의 춤으로써의 〈무산향〉은 바로 이 시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도의 아들이 만든 시의 배경이 서왕모(西王母)의 요지연(瑤池宴)인데 여기에 ‘떨어지는 꽃’ 이야기가 등장한다. 또 이 이야기에는 아광모(砑光帽)가 등장한다. 아광모는 바로 이도의 아들이 지었다는 시 〈낙화(落花)〉에 등장하는 요지연에서 춤추는 이가 쓰고 있던 모자다. 정재 〈무산향〉에서 춤추는 이가 쓰는 모자가 아광모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제 앞서 살펴본 이진의 이야기와 이도의 아들 이야기를 비교해 보도록 하자. 먼저 두 고사에서 공통된 부분부터 살펴보면, 첫째, 두 고사 모두 〈무산향〉이라는 제목의 작품이 등장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둘째, 두 고사 모두 ‘꽃이 떨어지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이런 공통점으로 보아 아마도 송나라 이도의 아들이 시를 지을 때, 혹시 당나라 시대 이진의 이야기를 창작의 동기로 삼지 않았나 추측해 볼 수 있다. 『순조무자진작의궤』에서 두 이야기를 모두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효명세자의 〈무산향〉은 또다시 이들 당나라와 송나라의 이야기를 토대로 정재(呈才) 〈무산향〉이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당나라에서 송나라로 그리고 조선으로의 연결을 볼 수 있는데, 박지원이 주장한 ‘법고창신’을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

두 이야기 사이에는 차이점도 있다. 이진의 고사의 경우 〈무산향〉은 갈고로 연주하는 음악 작품이다. 반면에 이도의 아들의 시에서 보이는 〈무산향〉은 춤 작품이다. 또 이진의 이야기에서는 꽃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이도의 아들 이야기에서는 모자 위의 꽃이 모두 떨어졌다는 차이가 있다. 의상에도 차이가 있다. 이도 아들의 시에 등장하는 아광모(砑光帽)는 이진의 고사에 등장하는 아견모(砑絹帽)와 다르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그 배경도 앞서 살펴본 것처럼 당나라 현종의 궁궐과 서왕모의 요지연이라는 차이점이 있다는 것이다.



아광모(砑光帽) 『순조무자진작의궤』



지금까지 살펴본 것을 잠깐 정리하여 보면, 효명세자가 창작한 춤 작품 〈무산향〉은 이진의 이야기와 이도 아들의 이야기에서 공통된 부분을 중심으로 하되, 각각의 이야기 속의 다른 요소를 포함하여 새로운 작품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먼저 이도의 아들이 지은 시에 등장하는 요지연 속 춤에 근거하여 만들어진 작품임을 파악할 수 있다. 또 아광모 역시 이도 아들의 고사에서 그 근거를 가져온 것이다. 그러므로 아광모는 요지연에서의 춤을 상징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아광모는 효명세자가 창작한 여러 춤에 등장하는데, 이는 이 춤들이 서왕모의 잔치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연경당 진작례는 요지연을 뜻한다.

그런데 『순조무자진작의궤』에서 보이는 악기인 갈고는 당나라 이진의 고사에서 비롯된 것을 알 수 있다. 즉, 효명세자는 당나라 음악 작품인 〈무산향〉과 송나라 시 속에 존재하였던 춤 〈무산향〉을 합하여 이를 실제 춤으로 만들었다. 이렇듯 효명세자는 두 고사에 다른 요소들을 정재 〈무산향〉에 합쳐 이전에 없던 전혀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바로 지난번에 소개한 박지원의 ‘합변지기’의 창작 방식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무산향〉과 대모반(玳瑁盤)



대모반(玳瑁盤) 『순조무자진작의궤』



〈무산향〉에는 〈춘앵전〉과 마찬가지로 독특한 무대인 대모반이 등장하고 있다. 이것은 어떻게 창작한 것이고, 또 그 의미는 무엇인지 살펴보자. 이를 알아보기 위해, 〈춘앵전〉의 사례에서 알 수 있었던 것처럼, 효명세자가 관심이 있던 당나라 시대를 중심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당나라 시대에 호화롭고 진귀한 연회석에 등장하는 무대 가운데 ‘대모연(玳瑁筵)’이라는 것이 있다. 주로 궁정이나 상류층의 호화로운 연회 장면을 묘사하는데 자주 보인다. 이 단어에서 ‘대모’는 ‘바다거북의 껍질’이란 뜻이고, ‘연(筵)’은 지난번에 살펴본 바와 같이 ‘자리’를 의미한다.

먼저 당나라 시대 류우석(劉禹錫, 772-842)의 시 〈포구락〉에 ‘대모연’이 등장한다. 이 시는 화려한 잔치에서 〈포구락(抛毬樂)〉이 공연되는 것을 형용하고 있는데, 그 구절은 “오색 수놓은 둥근 자리(五色繡團圓), 그대 대모연 위에 오르네(登君玳瑁筵)”이다. 이 시를 보면 춤 작품의 화려함을 묘사하는 여럿 가운데 ‘대모연’이 핵심을 차지하고 있다. ‘대모연’이 문헌에 처음 등장한 것은 위진 남북조(魏晉南北朝) 시대인 3세기 중엽, 서진(西晋) 반니(潘尼, ca. 250– ca. 311) 〈유서악시(游西岳詩)〉이다. 이 시에서 세 번째 구절과 네 번째 구절 “금빛 누각과 호박빛 계단(金樓琥珀階), 상아 침대와 대모연(象榻玳瑁筵)”에 보면 ‘대모연’이 보인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대모연’은 ‘화려함’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대모연’이 등장하는 또다른 당나라 시 가운데 이백의 〈대주(對酒)〉도 있다.

“포도주, 금 술잔(蒲萄酒 金叵羅)
작은 말에 실려 온 열다섯 오나라 미녀(吳姬十五細馬馱)
검푸르게 그린 눈썹, 붉은 비단 신발((靑黛畫眉紅錦靴)
말소리 투박해도 교태로운 노래 부른다(道字不正嬌唱歌)
대모연 가운데 내 품 안에서 취했으니(玳瑁筵中懷裏醉)
연꽃 장막 안에서 그대를 어찌하랴(芙蓉帳裏奈君何)”

이 시의 제목은 ‘대주(對酒)’, 즉 ‘술자리에서’라는 뜻이다. 아마도 이 시를 보면 이백은 강남 지방을 주유하다가 술집에 들러 술을 마시는데, 남쪽 미녀가 남방어(南方語)로 노래를 부르며 아마도 술 시중을 들었던 것 같다. 그러다 여자가 술에 취해서 이백의 품 안에서 잠이 들어 안절부절못하는 자신을 묘사하고 있다. 역서 첫 구절에 ‘포도주’와 ‘금 술잔’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이 술집은 제법 화려한 곳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런 화려함의 정점에 ‘대모연’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대모연’이 등장하는 시(詩) 가운데 아마도 가장 유명한 것은 『고문진보(古文眞寶)』에 수록된 이백의 시 〈유야랑증신판관(流夜郞贈辛判官)〉이다. 이 시는 지금의 구이저우(貴州) 지역에 해당하는 야랑(夜郞)이라는 먼 곳으로 귀양을 떠나는 기막힌 처지가 되어, 옛날 호기롭게 술을 마시고 시를 지으며 장안을 활개 치던 화려한 시절을 회상하는 내용이다. 이 시에서도 ‘대모연’은 화려한 자리임을 보여준다. “노래하고 춤추는 대모연에도 앉자 보았지(歌舞淹留玳瑁筵)”라는 구절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이백의 〈대주〉와 〈유야랑증신판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대모연’은 잔치 가운데 춤과 노래가 있는 곳이라는 사실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두보의 시 〈관공손대랑제자무검기행(觀公孫大娘弟子舞劍器行)〉을 보면 역시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시에서 “대모연 위에서 급한 피리 곡이 다시 끝나고(玳筵急管曲復終), 즐거움이 극에 달하니 슬픔이 찾아와 달이 동쪽에서 떠오르네(樂極哀來月東出)”라는 구절에서 ‘대연(玳筵)’이라는 단어가 보인다. ‘대연’은 ‘대모연’을 줄여서 쓴 것이다. 이 시는 당나라에서 검무(劍舞)로 유명하였던 공손대랑(公孫大娘)의 제자가 검무를 추는 것을 보며 그를 추억한 것이다. 여기서 공손대랑의 제자가 검무를 추는 자리가 바로 ‘대모연’에서다. 여기서도 ‘대모연’은 당나라에서 화려한 공연의 무대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에서 효명세자는 아마도 〈춘앵전〉에서 ‘무연’을 ‘화문석’으로 재창작한 것처럼, ‘대모연’을 ‘대모반’으로 새롭게 해석하여 〈무산향〉에서 사용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연경당 진작례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춤인 〈무산향〉에 등장하는 ‘대모반’을 통해 화려하였던 당나라 시대 잔치를 새롭게 재현해 보고자 한 것으로 파악해 볼 수 있다. 연경당 진작례에서 갈고를 제작하여 사용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그렇다고 효명세자가 당나라 것을 단순히 모방하려 한 것은 아니다.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무산향〉을 비롯한 〈가인전목단〉, 〈최화무〉는 당나라의 이야기와 송나라의 이야기가 합쳐진 작품이다. 게다가 『순조무자진작의궤』에 등장하는 독특한 의상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아광모의 쓰임을 보면, 효명세자의 진작례 연출이 단순한 모방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아광모는 〈무산향〉, 〈춘앵전〉, 〈최화무〉, 〈가인전목단〉, 〈침향춘〉, 〈춘광호〉는 물론 다른 여러 작품에도 등장한다. 그런데 사실 이들 정재 작품은 아광모의 유래를 알 수 있는 이도의 아들 고사와 관련이 없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도의 아들 이야기 가운데 요지연과 관련하여 오직 〈무산향〉만 아광모와 직접 관련이 있다. 그런데도 연경당 진작례의 여러 작품에 아광모가 등장한다. 이러한 사실에서 효명세자가 동아시아 문화와 예술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당나라 현종 시대, 즉 개원성세(開元盛世) 때의 궁중 예술을 ‘아광모’를 통해 서왕모(西王母)의 요지(瑤池)에서의 잔치로 재해석하고 이를 연경당 진작례에 적용하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결론

지금까지 효명세자의 춤 창작 과정을 살펴보자. 먼저 그는 〈무산향〉이라는 작품을 만들 때 다양한 문화적 요소와 역사적 배경을 깊이 연구했음을 알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도 아들의 시를 창작하는 이야기는 『구지필기』의 ‘아광모’ 부분에 있다. 그렇지만 효명세자가 참조하였던 『도서집성』에서는 이 이야기를 “화부기사(花部紀事)”, 즉 ‘꽃 관련 이야기’로 분류하여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효명세자가 〈무산향〉을 비롯한 연경당 진작례의 작품들을 창작하고 연출할 때, ‘꽃’을 주요 주제 중 하나로 삼았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꽃’과 관련 있는 당나라 시대의 이진의 〈무산향〉이라는 음악 작품과 송나라 시대 이도의 아들이 지은 시 속의 서왕모의 요지연에서의 춤 〈무산향〉이 중요한 영감의 원천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두 이야기 속 〈무산향〉은 각기 다른 시대와 문화 배경에서 창작되었지만, 효명세자는 ‘꽃’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이를 연결하고 융합하여 독창적인 작품을 탄생시켰다. 바로 ‘합변지기(合變之機)’의 창작 방식을 살펴볼 수 있다.

효명세자의 〈무산향〉은 단순한 모방이 아닌, 동아시아 예술의 흐름을 반영하며 새로운 창조적 시도를 담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무산향〉과 같은 전통 예술을 우리가 본격적으로 감상하는데 있어서 기본적인 동아시아 예술의 문화적 배경과 맥락을 이해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 효명세자는 옛 것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고, 오히려 이를 토대로 하되 서로 다른 요소를 결합하여 완전히 새로운 작품을 만들었다. 이는 ‘법고창신(法古創新)’과 ‘합변지기(合變之機)’를 적용한 것으로,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독창성을 발휘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효명세자의 〈무산향〉은 과거의 유산을 재해석하고 확장하여 만든 이전에 없던 새로운 작품으로, 시, 음악, 의상, 무대, 그림 등등 이 모두를 춤에 담아낸 조선 예술의 정점이자 동시에 동아시아 예술의 깊이를 새롭게 조명하는 작품이라 평할 수 있다.

서정록

현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이론과 교수. 태국 Mahidol 대학교 국제대학 강사, 국립대만대학교 초빙교수, 런던대학교 SOAS 연구원을 역임하였다. 한국춤을 비롯한 동북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춤문화 역사 연구를 하고 있다.​ ​​​​

2026. 7.
*춤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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