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연구

마사 그레이엄과 한국
이만주_본회 회원 / 비평

  “주제를 담는데 있어 특정 표현언어에 구애받지 않는다.” “나는 늘 새로움을 탐구할 뿐 과거에 집착하지 않는다.” 1990년 마사 그레이엄(Martha Graham)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공연하기 전 기자회견에서 한 말들이다. 자기의 제자였다가 독립해나간 머스 커닝햄과 포스트모던 댄스에 대해서도 의견을 피력했다. “새 조류와 관련해서는 자기 영역을 개척해 나가는 데 있어 권장할 일이지 섭섭하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1990.11.7 동아일보 8면)
 마사 그레이엄은 나이 96세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국을 방문해 1990년 11월 7-9일, 사흘간 서울의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공연했다. 그녀는 1894년 5월 11일 펜실베이니어 피츠버그 시에서 태어났으니, 생일 기준으로 나이를 따지는 서양식 계산에 의하면 96세에 한국을 방문하고 97세가 되기 5주 전인 1991년 4월 1일 뉴욕 시에서 이승을 떠난 것이다.
 춤비평가 김태원은 당시의 평에서 “세계 현대무용사에서 거의 유례없이 이른바 그레이엄 테크닉을 63년 이후 대학 무용과에서 주종으로 수용하고 있는 국가가 한국이고, 국내 춤계나 문화계의 입장에서는 무수한 그레이엄 추종자와 현대주의 예술의 지지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사그레이엄무용단은 수십 년 간에 걸친 무수한 세계 순회공연의 여정에서 그간 한국을 빠뜨렸다”고 적고 있다.
 마사그레이엄무용단의 초청 공연은 1974년에 계획된 적이 있다. 그러나 영부인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 이후 공연 예정으로 잡혀 있던 국립극장이 잠정, 폐쇄되면서 그녀의 방한은 무산되었다. 그녀에게 있어 특별한 의미를 갖는 나라일 수도 있는 한국으로의 전설 같은 최후 여행. 이와 같은 극적인 사건을 좀 더 자세히 알기 위해 인터넷에서 마사 그레이엄의 홈페이지와 당시의 뉴욕 타임스를 찾아보고 몇 권의 책과 당시 초청신문사였던 동아일보사의 기사들을 참고하니 흥미로운 사실들이 발견 된다. 



 

모던 댄스가 아니라 컴템포러리 댄스

 우선 그녀의 공식 홈페이지(marthagraham.org)에서 모던 댄스(Modern Dance)라는 용어는 한 마디도 사용치 않고, 대신 컨템포러리 댄스(Contemporary Dance)라는 용어를 쓴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마사 그레이엄 하면 반사적으로 모던 댄스로 떠올리는 우리에게 그와 같은 실상은 놀랍다.
 그레이엄과 관련하여 모던 댄스라는 말을 일체 쓰지 않고 컨템포러리 댄스라는 말을 쓰는 이유는 왜일까? 다음과 같은 추론이 가능하다. 20세기의 어느 한정된 시기를 놓고 볼 때는 모던 댄스와 포스트모던 댄스는 구별 내지 구분되는 것으로 보였다. 무용학자들도 그 차이를 확연하게 설명해 놓았다. 그러나 세월이 한참 흘러 이제 21세기의 첫 순년(旬年)도 지난 현재에서 보면 포스트모던 댄스라는 것이 모던 댄스에 대한 반항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나 결국은 모던 댄스의 뿌리에서 새끼치기를 해나간 한 갈래일 뿐이다. 마치 불교나 카톨릭에서 많은 교단들이 독립하여 독자적인 길을 걷고 있으나 큰 관점에서 보면 불교나 카톨릭인 것처럼. 실제로 포스트모던 댄스의 불을 지핀 머스 커닝험도 그레이엄의 제자이자 춤 파트너였으며 탄츠테아터를 창시한 피나 바우쉬도 그레이엄의 영향을 받지 않았는가.
 모든 예술 실험이 진자의 추처럼 반동에 의해 좌·우를 번갈아 왔다갔다 하는 것처럼, 1960년대에 포스트모던 댄스가 시작된 이래, 오늘날의 춤에는 모던 댄스와 포스트모던 댄스의 요소들이 뒤섞여 있다. 그 둘이 서로 상충하고 요동치는 것 같아도 동일한 큰 흐름 속에 융합되어 있는 것이다. 모던 댄스가 좀 더 정형화된 수축(Contraction)과 이완(Release)이라는 테크닉, 표현주의와 연극성에 더 충실하다는 것일 뿐, 포스트모던 댄스가 표방하는 철학의 대부분은 이미 그레이엄도 설파했던 것들이고 포스트모던 댄스가 한 실험들도 그녀가 이미 시도했던 것들이다.
 1936년, 그레이엄은 피카소의 ‘게르니카(한국 6.25전쟁을 그린 피카소의 작품)’에 훨씬 앞서 그녀의 작품 『크로니클(Chronocle)』에서 스페인내전과 관련하여 파시즘에 대한 고발과 전쟁의 참담함을 표현하는 안무를 했고, 그해 베를린올림픽 예술축전에 참가해 달라는 히틀러의 초청을 거절했다. 일찍이 그녀의 창작활동 초반부에 사회성 짙은 작품들을 시도했고 불의에 대한 저항정신을 나타내기도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여러 관점에서 오늘날 모던 댄스와 포스트 모던 댄스의 구별은 의미가 없어져버렸다. 실제로 그레이엄 자신이 1926년 그녀의 춤 센터를 설립할 때 ‘Martha Graham Center of Contemporary Dance’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미국의 그레이엄 추종자들이 더 이상 모던 댄스라는 용어를 사용치 않고 컨템포러리 댄스라는 용어를 내세우는 것은 20세기 춤예술에 대한 그녀의 공헌을 시각예술의 피카소, 음악의 스트라빈스키, 건축의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와 같은 반열에 놓는 마당에 그녀를 큰 테두리 안에서 모던 댄스와 포스트모던 댄스를 담는 컨템퍼러리 댄스의 조종(祖宗)으로 내세우겠다는 강한 의지로 읽힌다. 이런 양상은 아직 모던 댄스 운운하는 한국의 춤계에는 시사하는 바가 있다. 



 

끊임없는 창작 작업과 76세까지 춤추기

 그레이엄은 32살인 1926년, 자신의 독자적인 무용센터를 세운 후 안무작을 내놓기 시작해 1990년까지 근 65년간 모두 181개의 작품을 안무했다(머스 커닝햄의 경우 안무 수는 150여개이며 800여개의 실험적인 이벤트 내지는 퍼포먼스를 함). 창작을 하지 않고 건너뛴 해들도 있지만 평균 잡으면 한 해 2.8편(소품들 포함)의 작품을 창작한 셈이다. 춤예술이 종합예술이며 공연을 해야 함을 감안하면 결코 적은 수가 아니다. 그 위에 더하여 끊임없이 과거의 작품들을 다시 살려 공연하곤 했다. 더욱이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창작과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무용사에 있어 새로운 지평을 연 그녀의 안무가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지에 대하여는 여러 설이 전한다. 그레이엄은 안무를 하기 시작한 첫해인 1926년, 소품인 솔로(Solo)와 트리오(Trio) 작품 28개를 발표한 후, 그녀의 스승이라 할, 루스 세인트 데니스와 테드 숀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을 고백했다. 하지만 더 근원적으로는 신경정신과 의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이래 그런 인연으로 인간에게는 고대로부터 내재되어 내려오는 집단적 무의식이 자리하고 있다고 주장한 칼 융의 분석심리학과도 관련이 있다. 산타 바바라에서 성장기를 보낼 때 목격한 인디언들의 대지(땅) 숭배에서 영감을 받기도 했다. 또한 우연히 칸딘스키의 그림을 본 후, 추상회화가 주는 이미지에서 안무에 대한 깊은 생각을 하게 되고 그런 춤을 추어야겠다고 마음먹었었다고 한다. 그녀의 안무와 춤도 오랜 진화과정을 거친 것이다.
 그레이엄이 새 장을 열어 개화시킨 모던 댄스에 대하여는 무용학자들이 정연한 이론을 정립해 놓았지만 당시 미국의 춤비평가 존 마틴(John Martin)의 다음과 같은 평이 그 모든 것을 대변한다. “그레이엄의 춤에는 열정과 항의가 생생하게 담겨 있다. ………그녀는 무용가로서 용서받지 못할 짓을 저질렀다. ………보는 이들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든 것이다.” 그녀의 출현으로 인해 예쁘고 장식적이었던 춤, 오락의 기능을 하던 춤에 새로운 지평이 열린 것이다. 춤이 인간 영혼의 이야기를 담는 예술이 된 것이다.
 그녀는 오늘날의 한국 여성에 견주어도 작다고 할 수 있는 159cm의 키로 무대에 섰다. 이와 같은 사실은 춤예술에 있어 스타가 된다는 것은 키나 신체조건과는 별 상관이 없음을 입증한다. 그녀가 언제까지 그녀의 작품에 무용수로 무대에 섰는가에 대해서는 각각 1968년, 69년, 70년이라는 세가지 주장이 제기된다. 그러나 1991년에 발간된 그녀의 자서전인 ‘Blood Memory’에서는 1970년 『Cortege of Eagles』가 마지막 무대임을 밝히고 있다. 76세까지 무대에 서고 내려온 것이 된다. 속되게 표현하면 “한참 할머니가 될 때까지 무대에서 춤을 춘 것이다.” 그녀는 춤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춤꾼이었다.
 타고난 춤꾼이 무대에서 내려와 더 이상 춤을 추지 않게 되자 그녀는 급격하게 생의 의욕을 잃어버린다. 식사의 양은 최소한으로 줄어들었고 집에서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아진 그녀는 수심에 잠기기 시작하고 고통을 잊으려고 과다한 술에 의존하게 된다. 알콜중독자가 된 것이다. 결국 건강을 버려 병원에 장기간 입원하게 되고 혼수상태를 헤맨다. 이 기간 자살도 시도하는데 실패에 그치자, 1972년 술을 끊고 자신의 무용단을 재조직하여 과거의 작품들을 살리면서 다시 왕성한 창작 안무 작업에 몰입한다. 



 

 ​극적인 한국 방문과 그레이엄의 최후

 그레이엄이 한국을 방문했던 그녀 생애의 마지막 해를 부연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최후의나이인 96세로 들어선 후 1990년 10월, 죽기 6개월 전, 뉴욕에서 그녀의 181번째이자 마지막 안무작인 『메이플 리프 래그(Maple Leaf Rag)』를 발표한다. 그녀가 작품을 만들 때는 늘 다른 장르의 예술가들과 협업했듯이, 이 작품도 스코트 조플린(Scott Joplin) 음악과 우리가 익히 아는 캘빈 클라인(Calvin Klein) 의상에 힘입어 만들었다.
 그리곤 11월부터 일본, 한국, 대만, 홍콩을 55일 간 순회하며 공연한다. 그녀의 스승이었던 루스 세인트 데니스와 테드 숀이 동양의 춤에서 영향을 받았음을 감안하면 그레이엄의 춤도 동양춤의 제의성과 내면의 표출성에 근원을 두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마지막 순회공연여정으로 동양을 택한 것은 그녀 춤의 뿌리찾기 여행이었는지도 모른다.
 생의 마지막 불꽃이 가물거리는 즈음, 휠체어에 의지해 한국을 찾은 그녀는 공연을 하기 전 갖은 기자회견에서 사진기자들에게 부축을 받는 모습을 찍지 말아달라고 부탁한다. 사람들이 자신의 쇠락한 몰골이 아니라 전성기 때의 모양새를 기억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머리에 검정 리본을 달고 화장을 곱게 해 나이보다 훨씬 젊게 보였다고 한다.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7일과 9일에는 Temptations of the Moon(1986), Herodiade(1944), Night Journey(1947), Acts of Light(1981)를, 8일에는 Night Chant(1988), Rite of Spring(1984. 이 날 공연되었는지 불분명), Errand into the Maze(1947), Diversion of Angels(1948)를 무대에 올려 처음이자 마지막인 한국 방문에서 그녀의 40년대 안무작 4작품과 80년대 안무작 4작품을 공연하며 그녀의 춤 생애를 정리한다.
 12월 중순 미국으로 돌아간 그녀는 긴 원정여행으로 인한 여독과 피로가 겹쳐 처음에는 독감을 앓게 되고, 1991년 1월 중순 병원에 입원한다. 한때 회복세를 보이는 듯하다가 4월 1일, 결국 폐렴(기관지염이라는 보도도 있음)으로 세상을 떠난다. 서양의 매장 풍습과는 달리 그녀의 시신은 화장되었고 재는 뉴멕시코 주 북부에 있는 상레드크리스토 산(Sangre de Cristo Mountains)에 뿌려진다.
 그녀가 생애 최후의 순간에 한국과 만남을 이룬 것은 극적이다. 100세에 가까운 노인이 죽는 날까지 창작과 작업을 멈추지 않고 현역으로 살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또한 그 나이에 비행기를 타고 멀리, 장기간 여행을 한다는 것도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이제 그 모든 것은 신화가 되었다. 그녀의 신화는 모든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고, 인간 수명이 길어진 시대에 평범한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도 느끼게 하는 바가 있다.
 마사 그레이엄을 만났던 사람들은 그녀의 눈에서 언제나 형형한 광채가 났다고 증언했다. 그녀의 작품 연보를 보면 1991년의 미완성작으로 『The Eyes of the Goddess』가 적혀 있다. 그녀는 생의 마지막 작품으로 ‘여신(女神)의 눈’을 안무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2012. 05.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