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연구
문학평론가였던 故 백철(白鐵, 1908∼1985)이 최승희의 춤을 회상하며 ‘주먹춤’이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프롤레타리아 무용이라 해서 마구 주먹을 휘두르는 동작의 되풀이에 불과하여 너무 단순한 직선적인 표현이었다.’(백철, ‘최승희의 주먹춤’ 『중앙일보』 1978. 1. 20)라는 내용이다. 이는 1931년 무렵 최승희의 춤에 대한 인상이었다.
최승희에게 있어서 1931년은 남편 안막과 오빠 최승일의 영향을 받아 백철의 표현대로 ‘프로레타리아 무용’을 고민했던 시기이다. 1931년 1월의 3회 발표회에서 보여주었던 <그들의 행진곡>이나, 그해 9월의 4회 발표회에서 <世界의 노래>, <미래는 청년의 것이다>, <건설자>와 같은 작품들이 그러한 고민을 형상화한 작품들로 보인다.
<그들의 행진곡>에 대해 “이러하니 어떻게 해야마나 되겠느냐? 그러나 그들의 문제는 그들의 행진 속에서 그들의 힘으로 - 그들의 손으로 해결을 맺고야 말 것이다.”(『동아일보』 1931. 1. 11.) 라는 작품 설명을 달았다. 또 최승희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제 삼회 작품 중에서 <그들의 행진>이나 <흙을 그리워하는 무리>같은 것은 조선의 현실이 그러한 것을 낳게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 조선의 현실이 만들어내었다고 나는 생각하는 것입니다.”(『조선일보』 1931. 8. 25, 26)
이러한 발언으로 짐작컨대 최승희는 그 무렵 식민지 조선에서 전개되었던 사회주의 리얼리즘 문예운동의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정치적 자각과 노동계급의 건설을 춤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최승희의 이러한 춤이 대중적 지지를 받지 못했지만, 최승희 춤의 역사에서, 또한 한국 근대춤의 역사에서 엄연히 존재했던 춤들이므로 소개하고자 한다.
이와 관련된 자료로 사진과 논설이 있다. 사진은 <그들의 행진곡>이라는 것으로, 주먹을 쥐고 춤추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글은 최승희가 4회 발표회를 앞두고 신문에 논설한 「제 사회 신작발표회을 압두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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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승 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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