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연구
창작 공간 개념이 변하고 있다. 서울시창작공간을 비롯 수도권의 몇 사례에서 그런 조짐이 뚜렷하다. 창작 발표 공간에 치중하는 일반적인 극장(혹은 공연장) 일변도의 개념에서 창작 준비 공간까지 아우르는 개념으로 창작 공간의 범위가 넓혀지는 경향을 보인다.
서울시창작공간, 인천아트플랫폼, 경기창작센터는 대표적 창작 공간으로 꼽힌다. 이들 공간은 모두 공공의 기관으로 2009년도에 개관하였다. 개관 연도가 약속이나 한 듯이 일치하는 것은 우연의 일치치고는 다소 신기도 한데, 한 시대의 변화 즉 창작 공간의 개념 변화를 뚜렷이 상징하는 것 같다. 이제부터는 새 창작공간도 연구 주제로 떠오를 것이다.
이 가운데 경기창작센터는 스튜디오, 전시, 지역협력, 국제교류, 교육, 작품창고, 예술공방, 국제 섬머 페스티벌 등 다양한 프로그램과 시설을 통해 국내외 작가들의 창작과 연구활동을 지원한다. 인천아트플랫폼은 시각예술을 비롯한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와 연구자들이 창작과 연구활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지원함으로써 새로운 예술 창작의 인큐베이팅 역할을 자임한다. 두 기관 모두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운영된다. 분야로 치면 경기창작센터는 시각예술을 지원하고, 인천아트플랫폼은 시각예술의 비중이 높은 중에 여러 장르를 지원한다. 서울시창작공간의 경우 서울시 일원에 산재한 9개 공간으로 구성되고 공간마다 제각각 문학, 공연, 시각 예술이 중심이므로 전체로 봐서 복합 장르를 지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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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예술 측면에서 주목받는 공간은 서울시창작공간과 인천아트플랫폼이다. 이들 공간에서의 ‘공연’ 발표 활동은 어느 정도 있으나, 활발치는 않은 것 같다. 공연이 활발치 않은 현상황을 갖고 두 공간의 성과를 단정할 일은 아니다. 아직은 개장한 지 2년도 채 안된 공간들의 성과를 공연 중심으로 논하는 것이 자칫 성급할 수 있겠고, 이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로서 다음의 두 가지 점을 더 참작할 수 있다. 해당 공간이 놓인 입지 조건을 참조해야 한다는 점, 그리고 해당 공간이 창작 발표와 창작 준비 가운데 어느 역할에 중점을 두느냐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공간에 따라서는 두 가지 역할에서 조화를 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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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중반까지 국내 공연장 정책은 대체로 공연장 즉 창작 발표 공간을 확충하는 쪽으로 관심이 모아졌다. 그러다가 최근 몇 해 창작 준비 공간이 정책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앞서 지적했듯 창작 공간 개념이 일정하게 변동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서울시창작공간의 경우 00극장이라 이름을 붙인 공간은 하나도 없고, 00예술공장, 00예술센터 식으로 유동적인 느낌을 주는 명칭이 대부분이다. 인천아트플랫폼에서도 유사한 느낌이 전달된다. 이들 현상에서 내실있는 공연을 위해서는 창작 발표에 못지않게 창작 준비도 중요하다는 인식을 짚어낼 수 있다. |
창작 준비 및 창작 발표를 겸하는 이들 공간은 지금 대안공간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 공간들을 ‘대안’ 공간이라 부를 수 있는 이유로는 기존의 극장과는 다른 유형의 공연장이라는 점이 들어질 것이다. 이에 더해 다음의 점도 고려되어야 한다. 이들 대안공간은 도심(혹은 도시) 재생 차원에서 컬쳐노믹스 관점에 의해 탈바꿈한 공간들이다. 즉 기존의 보건소나 주민센터, 공장 등등 다종다양한 공공 공간에 대한 새로운 (예술적) 대안이다. 그러므로 대안공간은 예술의 재편성과 컬쳐노믹스의 두 가지 측면에서 대안인 것이며, 그것이 대안일 수 있으려면 당연히 두 측면을 동시에 충족시켜야 할 것이다.
컬쳐노믹스를 충족시켜야 한다면, 예술인 입장에서 우선 부담부터 가질 법하다. 이는 기존 극장에서도 강조되는 바이기도 하다. 다만, 컬쳐노믹스의 평가 기준은 이코노믹스가 아니라 말 그대로 ‘컬쳐’노믹스에서 찾아져야 한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즉 이코노믹스의 경제 효과가 컬쳐노믹스의 경제 효과를 바로 대신하는 것은 아니다. 이코노믹스와 컬쳐는 각각 떼놓고 보면 으레 상극처럼 거리가 멀어지는 데 비하여, 둘이 근접할 경우 마케팅, 협찬, 지원, 후원 같은 다양한 개념이 생성된다. 서울시창작공간이 표면적으로는 컬쳐노믹스에서 발상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함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이코노믹스의 경제 효과에 치중하지 않은 것도 컬쳐노믹스의 특성을 존중해온 때문이라 생각된다. 그러므로 현단계에서는 대안공간이 창작 준비 및 창작 발표 공간이라는 두 가지 역할에 충실할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더 실질적이어 보인다. 말하자면 컬쳐노믹스 앞에서 위축될 일이 아니고, 오히려 이를 선용하는 적극성을 키울 필요가 있다.
대안공간의 적극성은 창작 작가 및 관객 주민과 이루는 연계 관계에 준해 판별될 것이다. 이 중에서도 특히 관객 주민과의 연계 관계는 대안공간에 주어진 새로운 과제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대안공간은 창작을 지원하는 동시에 관객과 맞춤 관계를 형성해가는 새로운 대안으로 부각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대안공간이 창작을 지원하는 원론에 머문다면 역시 ‘그들만의’ 공간으로 인식되기 쉽고, 또 외부자의 시선에는 경제 효과가 낮은 곳으로 비치기 마련이다. 지금 기존 극장에 대해서도 그러한 요구가 어느 정도 제기되지만, 대안공간에 대해 커뮤니티 공간으로서의 역할이 훨씬 더 강조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창작과 관객을 가급적 특정한 맥락 속에서 파악하고 결합시키는 것, 여기서 대안공간은 그 존재 가치(존재 이유가 아님)에 대해 공감을 살 수 있을 것이다.
대안공간과 커뮤니티 아트를 연결시키는 발상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근대 이후 강화 일로를 향해 달려온 예술과 일상의 분리는, 주지하다시피, 20세기 초 이후 아방가르드들의 예술과 일상의 경계 허물기 실험 이후 20세기 말에는 허물어지는 양상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이런 현상이 오늘날 한 예로서 시각예술 부문에서 완연하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종국에 예술이 소멸할 것인지 여부는 문명의 흐름에 맡겨두고, 일단 편하게 생각하자면 생활이 ‘예술적인 것’을 요구하는 정도는 날로 높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이는 예술계에서 먼저 1세기 전부터 아방가르드들이 예술/일상 간의 경계를 흔드는 작업을 해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일반인들이 예술의 맛 혹은 가치를 체험한 상황에서는 이제 역으로 일반인들이 예술/일상 간의 경계를 허무는 데 가세할 가능성이 높다. 이는 문화의 세기나 여가 사회, 정보 사회의 중요한 특성 가운데 하나로 자리잡을 것이다.
대도시의 대안공간은 무엇보다 길거리와 담벼락을 비롯하여 곰곰 생각해보면 뉴욕의 PS1, 베를린의 TanzFabrik(춤공장) 등등 전세계적으로 엄청날 것 같다. 대안공간마다 특수성이 있고 또 이를 바탕으로 커뮤니티 맞춤 활동이 진행되므로, 대안공간의 개념은 일률적이지도 않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런던의 치슨헤일 춤 공간을 잠시 들여다본다.
지난 2월 쌀쌀한 날 밤 거기를 갔다. 런던 북쪽 변두리에 위치한 이곳에 접근하려니 어두운 가로등에다 조금은 을씨년스러웠고 첫눈에 노동자들의 조용한 주택가로 느껴진다. 3층짜리 전체 건물 이름은 치슨헤일 아트 플레이스, 여기에 춤 공간과 미술 스튜디오와 갤러리가 있다. 긴 벽돌 건물 한 동 전체를 쓰고 있는 이곳에 도착해서 조그만 입구를 찾아 초인종을 누르니 한참만에 응답이 들린다. 용건을 말하고 방문해본 치슨헤일 춤 공간은 손바닥만하다. 주택을 개조한 건물답게 좁은 계단과 좁은 복도가 인상적이다. 계단을 비집고 올라가니 라운지가 나오지만 큰 가정집 응접실에 지나지 않는다. 그 옆으로 통하는 메인 스튜디오는 눈 대중으로 40평 정도, 객석은 70석이었다. 이 정도면 더 이상 설명이 없어도 짐작이 갈 것 같다.
치슨헤일 아트 플레이스는 1980년 당시 런던 재개발 바람이 한창일 적에 런던시에서 창작자들에게 마련해준 공간이다. 쥐가 돌아다니고 폐가처럼 된 이곳은 그래도 예술인들에겐 감지덕지였다. 그전에 몇해 테임스강 버틀러 선창가의 버려지고 다 낡은 창고 지역에 있던 창작자들이 버틀러 선창가 재개발로 인해 어쩔 수 없어지자 당국에서 제공한 공간이 이곳 치슨헤일 아트 플레이스이다. 그들이 이곳으로 이주하며 가장 먼저 한 일은 물론 쓰레기를 치우고 그래피티 낙서를 지우며 깨진 유리창부터 갈아치는 일이었다. 그로부터 30년이 흘러 가본 치슨헤일 아트 스페이스는 음습한 기미가 없지 않았다. 지난 2월 같은 시기에 방문했던 베를린의 춤공장 역시 베를린 맨 북쪽 변두리 지역에 있다. 방문할 시기에 베를린 남쪽 변두리에서 갓 이전하여 공장을 약간 리모델링하는 작업을 진행하는 중이었다. 주변이 음습하기는 치슨헤일 춤 공간에 못지않다. 그래도 이전보다 크나큰 마당을 갖고 훨씬 넓어진 공간으로 옮겨서인지 사람들은 활기에 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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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슨헤일 춤 공간은 춤 작가 양성, 지역 사회 춤 지도, 창작 공간 지원, 청소년 및 성인 춤 클래스 운영, 공연 대관 등의 사업을 한다. 공연 대관은 하루 50만원선, 클래스 대관은 시간당 2만원선이고, 성인 춤 클래스의 수강료는 시간당 1만원선이다.
치슨헤일 춤 공간의 효시는 1970년대 후반 인디 댄스가 태동하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반인들에게 당시 새로운 춤 공연을 전달하기 위한 사전 작업으로서 그들에게 새로운 춤을 보여주고 가르치는 워크숍을 인디 댄스 춤꾼들이 시작한 활동이 치슨헤일 춤 공간에서도 그대로 이어졌고 또한 영국 전역으로 퍼졌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더 선구적이었던 런던의 더 플레이스 극장을 비롯하여 다른 극장들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물론이다.
예술공장에 대한 수요는 갈수록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지금까지 제작 공간 인프라가 부실했던 점에 더하여 예술과 일상의 경계 희석 등 예술의 지각변동에 따라 예술공장 같은 대안공간에 대해 사회적 인식도 호전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안공간이 거의 대부분 공공의 공간으로 확보되어야 하는 만큼 주도권이 예술인에게 있을 경우는 극히 희박하다. 그렇다면 대안공간은 예술과 현실이 서로를 위해 적응할 것을 전제로 하며, 대안공간에 대한 일방적 환상은 금물이다. 또 예술공간을 만드는 것이 능사가 아니므로 현장 예술가도 예술가 나름대로 소통의 예술로서 대비해야 할 것이다.
예술의 본질적 계기는 나눔에 있다. 이 나눔을 소통으로 불러 무방하다. 아무튼 대안공간의 나눔이 맞춤형의 나눔이라는 데서 대안공간의 대안성과 소통성은 의미심장해진다. 예컨대 해외 대안공간들에서 무수히 보게 되는 아웃리치(외부로 내밀어 뻗기) 프로그램들은 기존의 예술이 하기는 어렵되 지금 현장의 예술가들이 할 수 있는 대안의 활동들이다. 그러자면 대안공간에서는 예술을 응용하여 소통의 길을 찾아내는 창의성이 요청되며, 대안공간의 가지를 뻗으려면 창작자나 대안공간 운영자나 대안공간을 새로운 유형의 창작 산실로 대하는 태도가 요청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