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연구
Ⅰ. 서론
무대 위에서 연출되는 궁중춤 공연을 관람하면, 무대 배경에 궁궐이라는 장소를 나타내거나 혹은 그것을 관람하였을 인물인 왕이나 왕실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사진이나 그림들이 종종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주로 사용하는 이미지로, 장소를 강조할 경우 궁궐의 대표적인 건물인 경복궁의 근정전(勤政殿)이, 후자의 경우 임금을 상징하는 해와 달 앞의 다섯 산봉우리를 그린 일월오봉도(日月五峰圖)가 흔히 쓰인다. 이러한 배경 사진이나 그림은 아마도 궁중춤이 궁궐 혹은 임금과 관련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관객들에게 이를 공연 내내 상기시키려는 목적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배경 사용은 과연 적절한 것인가? 이 질문은 "궁중춤의 관람 위치는 어디인가?"라는 것으로 바꾸어도 무방하다. 이는 궁중춤이 왕을 비롯하여, 왕실, 대신들, 혹은 외국의 중요한 사절들을 위한 공연으로, 당시 이들의 관람 위치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본래 동아시아적 전통에서 보면, 왕은 반드시 '남면(南面)'을 하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사실에서, 공연자의 입장에서 볼 때, 왕은 북쪽에 위치하고, 공연자의 뒤 배경은 남쪽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현재 흔히 사용되는 경복궁의 근정전(勤政殿)이나 일월오봉도(日月五峰圖)같은 이미지가 무대 배경에 위치한다는 것은 왕이 위치하는 곳을 보여주는 것으로 북쪽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이미지를 무대 배경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궁중춤이나 음악 공연에서 공연자가 뒤를 보며 공연하는 의미가 되어 적절하지 않다. 오히려 이와 같은 이미지는 필요하다면 오늘날 왕을 대신한 관람객들의 자리 뒤에 위치하는 것이 옳다. 그리고 궁중춤의 무대 배경은 남쪽을 상징하는 무엇인가이어야 적절하다.
이제 우리는 왜 임금은 남면을 하여야 하는지 그 의미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전통적인 한국 궁중춤에서 객석의 위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공연자의 위치는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좀 더 명확하게 살펴 볼 수 있다. 궁중춤의 공연 방향에 대한 이해를 통해 우리는 한국 더 나아가 동아시아의 춤과 음악 공연에서 공간에 대한 새로운 창작의 기반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 궁중춤의 방향에 대해 논하고 있는 연구는 전무하다. 그렇지만 범위를 넓혀서 전통춤 전체를 놓고 보았을 때 공연 공간에 대한 논문은 약소하지만 몇 개가 존재한다. 대표적인 연구로 성기숙(2001), 손선숙(2010), 그리고 조경아(2019)의 연구를 들 수 있다. 이 연구들은 옛 문헌과 영상 및 그림 자료를 가지고 조선 시대 궁중춤의 공연 양상을 파악하고, 그 연행 공간에 대해 분석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우선 성기숙(2001)의 연구는 순조 때 자경전 진찬의 사례를 문헌기록과 그림 자료를 토대로 조선후기 궁중춤의 양상을 자세히 다루고 있다. 아울러 이러한 공연 양상과 공간에 대한 해석을 '예악 사상'을 가지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공간성'에 대한 해석에 있어 구체적인 증거를 제시하지 않고 '예악 사상'이란 개념에 맞추어 성급한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 같다. 일례로, 이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는 공간인 자경전의 경우, "정전(正殿)이 아닌 내전(內殿)으로 평소 왕실 아녀자들이 기거하는 일상 공간"임을 들어 "예악 사상을 실험하기 위한 공간"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순조(純祖)가 직접 지은 〈자경전기(慈慶殿記)〉의 기록을 보면, 이러한 주장과는 다르게, 자경전은 궁궐에서 "그 존엄이 (궁에서 제일 으뜸가는 전각인) 법전(法殿)과 같다"1)고 밝히고 있다. 즉 자경전 진찬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순조 자신의 기록에 따르면, 자경전의 위상은 단순한 왕실 아녀자의 일상 공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논문의 자경전은 "예악 사상을 실험하기 위한 공간"이라는 주장은 그 전제부터 오류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조경아(2019)의 연구는 현존하는 다양한 궁중 그림의 분석을 통해 조선시대 춤을 살펴보는 것으로 이제까지 무용학계에서 등한시한 방법론이라 할 수 있는 도상학적 분석을 통해 한국 궁중춤의 공연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 주목된다. 특히 이 연구가 그림의 분석을 통해 다양한 궁중의 춤 공간의 사례들을 그림 분석을 통해 상세히 밝히고 있다. 비록 이 논문도 역시 춤의 방향에 대해서는 크게 인식하고 있지 않지만, 이 연구가 제시하고 있는 다양한 그림 분석들은 궁중춤 공간의 의미를 밝히고자 하는 본 연구에 참고 자료가 된다. 이 연구가 제시하고 있는 다양한 궁중 그림들을 살펴보면, 춤의 방향이 모두 북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조선시대는 궁중춤의 관람자(즉 왕)의 위치에 맞추어 공연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손선숙(2010)의 연구도 조선시대 궁중춤의 공연 양상을 논하고 있다. 이 연구는 1931년 조선총독부에서 촬영한 영상을 분석한 것으로, 춤 동작과 무원(舞員)의 동선과 함께 궁중 공연에서의 무대에 대해 분석하고 있다. 영상 자료를 토대로 근거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 연구가 주로 다루고 있는 것은 1931년도 촬영 당시의 춤 공간에 대한 분석이다. 그러나 궁중춤의 방향이나 혹은 그 방향이 가지고 있는 의미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그런데, 조선총독부 조사 조선궁중무용기능영화 '조선무악(朝鮮舞樂)' 동영상 필름을 본 연구의 관점이 춤의 공연 방향에 초점을 맞추어서 살펴보면, 한국 궁중춤이 일제에 의해서 어떻게 왜곡되고 있는지 엿볼 수 있다. 이 영상에서, 공연자들은 공연 장소인 창덕궁 대조전(昌德宮 大造殿)을 등지고 즉 배경으로 하여 춤을 추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카메라의 위치하고 있는 곳 즉 남쪽을 향해 공연하고 있어, 실재 관람자(왕 혹은 왕비)의 위치 즉 북쪽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 필름이 제작할 당시 춤의 방향이 북향하는 것에서 남향하는 것으로 바뀌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조선시대 그림들이 보여주고 있는 방향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조선총독부의 한국 전통의 몰이해와 이에 따른 왜곡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아직까지 한국 궁중춤의 방향과 공간의 의미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하고 있는 연구는 없다. 이러한 사실에서 이제까지 한국 무용학계에서 춤을 연구에 대상이 춤 자체 더 좁게는 춤 동작에만 집중하고, 춤을 둘러싼 다양한 요소들에 상당히 무관심하였다고 볼 수 있다. 춤 연구란 것은 춤 동작에 대한 연구를 포함하여 역사적 배경, 사회적 배경, 문화적 배경에 대한 이해부터 의상(衣裳), 무구(舞具), 음악(音樂)은 물론 공간에 대한 이해가 입체적이고 종합적으로 수행 되어야 그 실체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 연구는 지금까지 다소 소홀하게 보아 넘기고 있던 한국 궁중춤의 공간에 대한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한국 궁중춤에 대한 보다 심도 있는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Ⅱ. 본론
1. 남면(南面)의 이유와 그 뜻
과거 시험에 시험관으로 참여한 정약용(丁若鏞, 1762-1762)이 출제한 "동서남북에 대하여 물음(問東西南北)"이란 제목의 문제가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제9권 〈책문(策問)〉에 수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남면(南面)'과 관련된 사항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에 이 개념은 제법 중요한 사항이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우선 왕의 위치가 (1) 왜 남면(南面) 즉 남쪽을 향하여야 하는지 그리고 (2) 그 뜻은 무엇인지 간략하게 살펴보자.
첫 번째로, 왜 왕의 위치가 '남면'인지에 대해서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남면에 대해 논하고 있는 글로 먼저 〈논어(論語)〉 위정(爲政) 편을 들 수 있다. 이 기록을 살펴보면, 공자는 "정치를 덕으로써 함은 마치 북극성이 북쪽 자리에 있고 많은 별들이 이를 향하는 것과 같다."2)고 말하였다. 이 구절을 풀어보면, 하늘에서 임금의 별자리는 북극성에 해당한다. 그리고 북극성은 북에 해당하기 때문에 그 방향이 남쪽을 향하게 된다. 그러므로 임금의 자리를 뜻하는 말로 '남면'이라 쓴다. 위의 〈논어〉의 기록은 마치 루이14세가 당시 천동설을 대신하여 지동설이 등장하자 세상의 중심을 자처하며 〈한 밤의 발레(Ballet Royal de la Nuit)〉에서 "태양왕(Le Roi Soleil)"이라 자칭하였던 것을 연상하게 한다.
또 다른 기록에는 〈주역(周易)〉설괘전의 기록이 보인다. 여기에서는 "이는 밝음이니, 만물이 모두 서로 보기 때문이다. 이는 남방의 괘이다. 성인이 남면하여 천하를 듣고, 밝은 곳을 향해 다스리니, 여기에서 그 뜻을 취하였다."3)라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임금이 '남면'을 하는 이유는 임금이 "향명(嚮明, 밝은 곳을 향함)"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 오늘날의 궁중춤 무대 배경에 적용하여 보면 배경은 임금이 바라보는 남쪽을 뜻하는 것으로 "밝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간단히 말하면 무대 배경은 밝음을 상징하는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두 번째로 그 뜻을 살펴보면, '남면'은 동양 정치의 가장 이상적인 통치 모습을 보여준다는 의미가 있다. 이러한 사실은 다음에서 알 수 있다. 〈논어〉 위령공(衛靈公) 편에 보이는,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무위(無爲)로 천하를 다스린 사람은 순(舜)이다. 그분께서는 어떻게 하셨는가? 공손한 태도로 남면하여 앉아계셨을 뿐이다."4)가 바로 그 구절이다. 여기서 인용된 순 임금은 동양에서 요 임금과 함께 가장 이상적인 통치자로 묘사되는 인물이다. 그런데, 순 임금이 이상적인 통치자가 되는 이유는 이 구절에서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무위(無爲)' 덕분이다. '무위'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에 대해 주자(朱子)의 주석을 보면 이것이 어떤 뜻인지 대강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이 구절에 대해 "무위로 다스린다는 것은 성인의 덕이 성대하여 백성들이 감화되어 성인께서 작위 하는 바를 기다리지 않는 것이다."5)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무위'의 반대 의미로 '작위(作爲)'라는 말을 쓰이고 있다. '작위'라는 것은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도 그렇게 보이려고 갖가지 수단을 사용한다" 혹은 "억지로 꾸며 무엇을 한다"는 의미이다. 여기에〈예기(禮記)〉의 예기(禮器) 편에 보이는 '남면'에 관련하여, "그러므로 옛적에 선왕이 덕이 있는 이를 숭상하며, 도(道) 있는 이를 높이며, 재능이 있는 이에게 맡기며, 어진 이를 들어서 제자리에 앉히며, 무리를 모아 경계하였다…… 이 때문에 성인이 남면하고 서 있으면 천하가 크게 다스려지는 것이다."6)라는 말이 있다. 이를 상고해 보면, '무위'는 "어떤 사안에 대해 매우 잘 파악하고 있으며, 그것에 대해 적재적소 혹의 시의 적절하게 잘 대응한다는 것을 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남면'을 단순히 임금의 정치나 통치의 개념으로만 이해할 것이 아니다. 바로 궁중춤을 감상하는 감상자의 마음가짐으로 적용하여 이해해도 크게 문제는 없어 보인다. 단순하게 위의 내용을 가지고 궁중춤의 관객의 자세에 대해 논하여보면, 감상자는 작품을 '작위'하지 않고 '무위' 하여야 한다고 풀이할 수 있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춤을 감상하는데 아무 것도 모르는데 무엇인가 아는 것처럼 꾸며 대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그 작품에 대해 자세히 이해하고 있어야 하며, 그러면서 동시에 겸허한 자세와 열린 마음으로 작품과 교감하며 대하여야 한다고 해석해 볼 수 있다.
2. 춤의 공간, 명당
지금까지 우리는 간단하게나마 남면의 의미와 그 뜻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좀 더 구체적으로 남면의 개념을 중심으로 궁중춤의 공간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남면을 이루어지는 공간에 대한 설명은 〈예기(禮記)〉의 예기(禮器)편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 글은 다음과 같다.
그런 까닭에 하늘의 높음에 인유하여 하늘을 섬기는 교사의 예를 저행하고, 땅의 낮음에 인유하여 후토의 신을 섬기는 사사의 예를 거행한다. 오악을 순수할 때에 방악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유명한 큰 산에 올라 이 방면 제후의 치공을 하늘에 고하고 길토에 인유하여서는 교에서 상제를 제향한다. 제후의 치공이 이루어짐을 하늘에 고하니 봉학이 내려오고 거북과 용이 나타난 것이며 또 교에서 상제를 제사하니 비바람이 정도에 맞게 내리고 한서가 때를 맞추어 틀리는 일이 없으며, 성인은 남면해서 서니 천하는 태평하였다.7)
위의 인용에서 "성인은 남면해서 서니(聖人南面而立)”라는 구절에서 ‘남면'이 등장하는데, 그렇게 되었을 때, 세상이 평안해진다고 한다. 그런데, 이 남면의 개념이 들어있는 위의 기록을 살펴보면, 이 공간은 본래 춤을 포함한 공연예술이 행하여지는 오늘날의 개념과 같은 무대 공간이 아니다. 위의 글에서 묘사하고 있는 공간은 오히려 제사의 공간이다. 〈예기(禮記)〉를 영문으로 영역한 제임스 레지(James Legge, 1815-1897)도 위의 글에서 "그런 까닭에 하늘의 높음에 인유하여 하늘을 섬기는 교사의 예를 저행하고, 땅의 낮음에 인유하여 후토의 신을 섬기는 사사의 예를 거행한다(是故因天事天 因地事地)"이라는 부분에서 "섬긴다(事)"에 해당하는 단어에 "service"라고 하고 있다.8) 이것은 그 역시 이 공간을 종교의 공간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고대 동아시아에서 춤을 비롯한 공연 예술의 공간은 본래 제사 공간에서 유래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주지하듯이, 이것은 사실 동아시아만의 특수한 현상은 아니다.
또 다른 기록에 보면, '남면'의 개념이 포함되는 공간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그 기록은 다음과 같다.
옛날에 주공(周公)이 정치를 보살펴 제후를 명당의 자리에 입조시켰을 때 천자는 부의(斧依)를 뒤로 하고 남쪽을 향해서 섰다.9)
위의 〈예기(禮記)〉의 명당위(明堂位)편 기록에서 역시 우리는 "남쪽을 향해서 섰다(南鄕而立)"라는 부분을 찾아 볼 수 있다. 이 기록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앞선 예기(禮器)편 기록과는 달리 공간의 의미가 다르다는 점이다. 예기(禮器)편의 기록은 남면의 개념이 사용되는 공간이 제사 즉 종교 행사의 공간이었으나, 보는 바와 같이 명당위(明堂位)편의 기록에서 보이는 공간은 종교 행사의 공간이라기보다는 정치적 공간이다. 이 기록을 통해 우리는 남면의 개념이 포함된 공간의 명칭은 "명당(明堂)"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본 기록이 포함된 예기(禮記)의 편이름이 '명당위(明堂位)'라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이러한 "명당(明堂)"이라는 개념에 대해 후한後漢)시대 학자인 정현(鄭玄, 127-200)은 "밝은 정치가 이루어지는 곳(明政敎之堂)"10)으로 정의를 내리고 있다는 것에서 역시 이곳이 정치적 공간임을 알 수 있다. 또 〈송사(宋史)〉의 기록을 보면 “하(夏)나라 때는 이를 세실(世室)이라고 하였고 상(商)나라 때에는 중옥(重屋)이라고 하고, 주(周)나라 때에는 명당(明堂)이라 하였다”10)고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남면'이라는 개념이 사용되는 공간인 '명당(明堂)'의 시대에 따른 명칭과 의미 변화이다. 즉 본래 이 공간은 제사를 드리는 종교적인 공간이었다가, 후대에 왕의 정치적인 공간으로 그 의미가 변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풍수지리에서 길지(吉地)를 뜻하거나 의학(醫學)에서 침구(鍼灸)와 관련하여 침이나 뜸을 놓는 자리로 그 의미가 확대된다.
3. 역사적 관점에서 한국에서 궁중춤과 남면
이제 “남면(南面)이라는 개념은 언제부터 한국에서 알고 있었을까?”에 대해서 알아보자. 이 물음은, “한국 궁중춤의 공연 방향이 북쪽을 향한 것은 언제부터인가?”로 바꾸어 볼 수 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시대에 ‘남면’이라는 개념은 과거시험에도 등장할 만큼 매우 일반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이러한 의미가 포함된 ‘명당(明堂)’이라는 개념도 줄 곳 사용되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고려시대는 어떠하였을까? 고려시대 기록에서 남면의 기록은 제법 여러 곳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981년인 성종6년의 기록이다. 그 기록은 다음과 같다.
이 달에 정우현(鄭又玄) 등을 급제(及第)시키고, 교서(敎書)를 내려 말하기를, “옛날 매듭을 묶어 글자를 대신하던 때로부터 이미 괘를 그려(畫卦) 〈글자로 사용한〉 이래 북극성같이 높은 왕위에 올라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은 백성을 위해(南面) 나라를 경영하는 주체로 반드시 오상(五常)을 익혀 교화를 베풀고 6경(經)에 근거하여 법규를 취하지 않음이 없었다...”11)
위의 〈고려사〉의 기록을 보면, 앞서 인용하였던 〈논어〉의 기록을 인용하고 있다. 이를 통해 고려시대에도 이러한 개념은 사용하고 있었으며, 조선시대와 마찬가지로 왕은 북쪽에 위치하여 남면(南面)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를 궁중춤 공연 공간에 적용하여 보면, 고려시대에도 춤의 공연은 임금이 위치하고 있던 북쪽을 향하여 공연하였음을 짐작하여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시대를 좀 더 거슬러 올라가서 삼국시대 혹은 통일신라시대는 ‘남면(南面)’이라는 개념을 알고 있었을까? 우선 ‘남면’이라는 개념이나 이와 관련된 공간인 ‘명당(明堂)’에 대해서는 이 당시에 이미 알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는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찾을 수 있다. 그 기록은 다음과 같다.
논하여 말한다. 옛날에 명당(明堂)에 앉아, 나라에 전해져 내려오는 옥새(玉璽)를 쥐고 구정(九鼎)을 늘여 놓는 것이 제왕(帝王)의 훌륭하고 장한 일인 것처럼 하였다.12)
위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통일신라시대인 경명왕(景明王, 재위 917-924)시대에도 왕의 위치를 알 수 있는 ‘명당’이라는 용어가 널리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적어도 이 당시에 궁중춤의 방향도 역시 왕이 위치하고 있던 북쪽을 향하고 있었음을 충분히 추정해 볼 수 있다.
다시 좀 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서 삼국시대에는 어떠하였을까? 이 시대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와 같은 기록에서는 이와 관련된 직접적인 기록은 찾아 볼 수 없다. 그렇지만 〈삼국유사〉와 몇 가지 문헌들을 비교 분석하여 보면, 삼국시대에도 ‘남면’에 대한 개념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먼저 이를 추정하기 위해서 〈예기〉 곡례하(曲禮下)편의 기록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천자가 의(依)를 세우고 그 앞에 서면 제후가 북면(北面)하여 천자를 뵙는 것을 일러 근(覲)이라 하고, 천자가 문병(門屛) 사이에 저립(宁立)하면 제공은 동면(東面)하고, 제후는 서면(西面)하는 것을 일러 조(朝)라 한다.”13)
위의 기록에서 우리는 임금의 위치가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지금까지 살펴본 왕과 신하들이 만나는 공간 즉 남면(南面)의 개념이 들어있는 ‘명당’을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기록에서 특이한 점은 천자의 뒤에 배경에 ‘의(依)’라는 것을 세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의(依)’는 ‘부의(斧依)’의 약어이다. ‘부의(斧依)’는 왕의 뒤에 배경이 되게 세워두었던 일종의 병풍으로, 비단을 가지고 만들며, 높이는 8척이다. 그런데 윗부분에 도끼 모양의 문양이 있으므로 이를 ‘부의(斧依)’라고 불렀다.
‘부의(斧依)’는 앞서 인용하였던 〈예기〉의 명당위(明堂位)편 기록에도 등장하고 있어 이와 같은 사실을 재차 확인할 수 있다. 또 한편 ‘부의(斧依)’를 ‘요의(瑤依)’라고도 불렀는데, ‘요(瑤)’는 북두칠성(北斗七星)에서 맨 끝에 위치한 꼬리별인 알카이드(Alkaid, 라틴어: Eta Ursae Majoris) 북두자루를 뜻한다. 그러므로 ‘부의(斧依)’와 ‘요의(瑤依)’는 북두칠성의 자루를 뜻하는 것으로 북쪽을 상징하게 되고, 이런 의미에서 임금의 자리와 같은 말이 된다.
한편 신라시대 승려였던 원효(元曉, 617-686)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재위: 654-661)의 딸인 요석공주(瑤石公主)와 동침하고자 할 때 부른 몰부가(沒斧歌)라는 노래가 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원효는 거리에서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허락하려는가? 나는 하늘을 받칠 기둥을 다듬고자 한다.”14)고 노래 불렀다 그런데 아무도 그 뜻을 알지 못하였으나, 오직 무열왕만이 그 뜻을 알아채고 요석공주와 함께 있게 하였고, 후에 그들 사이에서 신라시대 최고의 학자인 설총(薛聰, 658-?)이 태어난다.
그런데, 어떻게 태종 무열왕은 원효의 의도를 알 수 있었을까? 여기서 원효가 부른 이 노래는 본래 〈시경〉 빈풍(豳風)편에 수록된 ‘벌가(伐柯)’라는 시에 등장하는 “도끼자루를 베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도끼(斧)가 아니면 되지 않는다네.”15)는 구절을 인용한 것에 주목하여 보자. ‘벌가’의 이 구절에 이어 다음에 나오는 구절은, “아내를 취하려면 어떻게 하나? 중매쟁이 아니면 얻지 못하네.”16)이다. 그렇다면 〈시경〉에 나오는 이 시를 무열왕은 알고 있었고, 그러므로 그는 원효가 결혼하고 싶다는 것을 간파하였을 것이다.
여기서 원효가 인용한 〈시경〉의 ‘벌가伐柯)’를 분석하여 보면, “도끼(斧)”와 “중매쟁이(媒)”가 등치인 것을 알 수 있다. 즉 원효는 중매쟁이로 임금을 지목하며, 이를 임금의 위치를 상징하는 도끼(斧)로 은유한 것이다. 그리고 무열왕도 중매쟁이로 자신을 지목한 것으로 파악하였을 것이다. 여기에 다시 무열왕이 원효의 노래가 그의 딸인 요석공주(瑤石公主)를 특별히 지목한 것으로 이해한 부분이 흥미롭다. 이 시에서 “도끼자루(柯)”와 “아내(妻)”가 등치임에 주목하면 이를 파악할 수 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요석공주(瑤石公主)의 이름에서 ‘요(瑤)’는 ‘북두자루’를 뜻한다. 역시 위에서 살펴본 ‘부의(斧依)’의 같은 말인 ‘요의(瑤依)’와 관련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하여보면, 원효가 부른 노래의 의미는 원효가 요석공주와 결혼하고 싶은데, 무열왕에게 중매를 서달라는 뜻이 된다. 그리고 그 뜻을 간파한 무열왕은 이를 성사시켜주어 〈삼국유사〉에 그 기록이 남게 된다.
본 연구 주제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사실은 신라시대 위의 노래와 고사에 등장하는 원효와 무열왕은 모두 ‘남면(南面)’과 관련이 깊은 ‘부의(斧依)’와 ‘요의(瑤依)’와 같은 말의 의미를 매우 잘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를 다시 말하면, 이것은 신라시대 즉 삼국시대에도 임금의 위치가 북쪽이며, 임금은 남면(南面)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를 고대 한국 궁중춤에 적용하여 보면, 삼국시대 궁중춤의 방향도 역시 북쪽을 향하여 공연하였고, 관객 즉 왕은 남쪽을 바라보고 있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한국 궁중춤의 방향이 북쪽을 향하고, 관객 즉 왕은 남쪽을 바라보는 형태는 유교가 성행하였던 조선시대에만 존재하였던 것이 아니다. 이러한 개념은 고려시대와 통일신라시대, 그리고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각 시대 사람들은, 현재 우리와는 달리, 이에 대한 의미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남면(南面)의 의미는 궁중춤이 공연될 때도 그대로 적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즉 한국의 궁중춤은 삼국시대부터 북쪽을 향하여 연행되었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
III. 결론
지금까지 한국 궁중춤의 공간에 대해 소략하게 살펴보았다. 전통적인 궁중춤의 연행 공간에서 관람자인 임금은 북쪽에 위치하여 남쪽을 바라보는 남면(南面)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춤 공간에 대한 의미 부여는 당시 매우 중요한 사항이었음을 찾아 볼 있다. 그 의미는 모든 별이 북극성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뜻에서 중심을 뜻하며, 궁극적으로는 ‘무위(無爲)’를 뜻한다.
또한 ‘남면(南面)’의 개념이 포함된 ‘명당(明堂)’은 본래 종교적인 공간을 의미하였다가 점차 정치적인 공간으로 바뀌고 있어, 시대를 거치며 그 의미가 변화하였음도 확인하였다. 한편 한국에서 이러한 개념은 이미 삼국시대의 기록들에서부터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찾을 수 있어, 상당히 오래된 전통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하면, 현재 춤 배경에 궁중이나 임금의 이미지로 종종 사용되는 근정전이나 일월오봉도와 같은 그림은 임금이 위치한 북쪽을 상징하므로, 전통 춤 전승의 입장에서 볼 때,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종묘제례악의 일무(佾舞)는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신위를 향하여 그들을 위하여 드리는 제사에 등장하는 춤이다. 그러므로 이 경우도 종묘의 정전의 모습을 배경으로 하는 것도 그 의미가 맞지 않다. 이러한 오해의 원인은 일제 강점기 일본의 한국 전통에 대한 무지와 이에 따른 왜곡, 그리고 우리의 전통에 대한 무지, 급격한 서구화 과정에서 무비판적으로 도입된 액자형 무대 즉 프로시니엄(proscenium)과 전통 공연의 충돌, 그리고 종합예술인 춤을 춤 동작으로만 국한하여 이해하려는 모더니즘(modernism)의 영향 등등 여러 가지 사항들이 어우러져 생겨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식민지 경험이 없이 근대화 과정을 비교적 주체적으로 이끌어낸 일본의 경우는 우리와 이런 점에서 다르다. 가부키(歌舞伎) 극장, 노(能) 극장, 그리고 일본 왕궁의 궁내청 내의 가가쿠(雅樂) 무대 등은 그 형태를 온전히 보전하며 그 장소에 담겨있는 공연도 비교적 온전히 내려오고 있는 덕분에 이러한 문제에서 제법 자유로울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그 상황이 매우 다르다. 주지하듯이, 일본과는 대조적으로 급격하게 말살되는 한국의 전통들을 보존하려는 여러분들의 피눈물 나는 노력이 있었다. 그들에게는 변변한 지원이나 관심도 없었고, 그 와중에 눈앞에서 사라져가는 많은 전통들을 지키는 와중에, 미쳐 세세하게 돌아볼 경황이 없었다는 사실은 우리가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살벌한 식민지시대와 급격하게 이루어지는 서구화와 근대화라는 급류 속에, 많은 전통들이 왜곡과 단절의 위기 가운데 희미한 기억에 의지한 극적인 복원 과정을 거치며 전승되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비록 이 문제가 작은 사안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우리도 우리의 전통을 여전히 잘 모르고 있었다는 제법 불편한 진실의 증거이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히 전통을 보존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전통을 바탕으로 한 창작의 문제와도 연결이 된다. 전통에 대해 이야기 할 때, “법고창신(法古創新)”이라는 말을 자주 언급한다. “옛것을 바탕으로 새 것을 창조한다”는 뜻으로 창조성, 창의력이 중요해지는 요즘 더욱 눈에 띠는 말이다. 본래 이것은 18세기 선각자 박지원(朴趾源)이 설파한 개념이다. 이 말은 그의 아끼는 제자인 박제가가 지은 〈초정집(楚亭集)〉의 서문을 써주며, 그의 글을 격려하면서도 ‘창신’ 즉 ‘창조’만을 추구하려는 그에게 ‘법고’의 중요성을 일깨우려 할 때 등장한 말이다. ‘창조성’, ‘창작력’과 같은 말들이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는 이때 다시 눈 여겨 보아야 할 대목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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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其尊嚴殆與法殿同也. 〈純齋稿〉 卷三
2) 子曰 爲政以德 譬如北辰 居其所 而衆星共之. 〈論語〉 爲政
3) 離也者 明也 萬物皆相見 南方之卦也 聖人南面而聽天下 嚮明而治 蓋取諸此也. 〈周易〉 說卦傳
4) 子曰 無爲而治者 其舜也與 夫何爲哉 恭己正南面而已矣. 〈論語〉 衛靈公
5) 朱註 無爲而治者 聖人德盛而民化 不待其有所作爲也. 〈論語集註〉 卷之十五 衛靈公
6) 是故昔先王尙有德 尊有道 任有能 擧賢而置之 聚衆而誓之… 是故聖人南面而立 而天下大治. 〈禮記〉 禮器
7) 是故因天事天 因地事地 因名山升中于天 因吉土以饗帝于郊. 升中于天 而鳳凰降 龜龍假 饗帝於郊 而風雨節 寒暑時. 是故聖人南面而立 而聖人南面而立. 〈前揭書〉
8) 이 부분의 그의 영역은 다음과 같다. Then in accordance with (the height of) heaven they did service to Heaven, in accordance with (the lower position of) earth they did service to Earth. Li Ki (Book of Rites). Book I-X, SBE 27 [& 3, 16, 28, 39-40], translated by James Leege, Oxford: Clarendon Press. 1885. reprinted 1966.
9) 昔者周公朝諸侯于明堂之位 天子負斧依南鄕而立. 〈禮記〉 明堂位
10) 夏曰世室 商曰重屋 周曰明堂. 〈宋史〉 禮志四
11) 是月 賜鄭又玄等及第 敎曰 自昔結繩旣往 畫卦以來 北辰御極之君 南面經邦之主 莫不習五常而設敎 資六籍以取規. 〈高麗史〉 卷三 世家 卷第三 成宗 六年 八月
12) 論曰 古者坐明堂 執傳國璽 列九鼎 其若帝王之盛事者也. 〈三國史記〉 卷第十二 新羅本紀 第十二 景明王
13) 天子當依而立, 諸侯北面, 而見天子曰覲 天子當寧而立 諸公東面 諸侯西面 曰朝. 〈禮記〉 第二 曲禮下
14) 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 〈三國遺事〉 卷 第四 義解第五 元曉不羈
15) 伐柯 伐柯如之何 匪斧不克. 〈詩經〉 豳風 伐柯
16) 取妻如何 匪媒不得. 〈前揭書〉
참고문헌
원서:
〈高麗史〉
〈論語〉
〈論語集註〉
〈三國史記〉
〈三國遺事〉
〈宋史〉
〈純齋稿〉
〈詩經〉
〈禮記〉
〈周易〉
〈後漢書〉
Li Ki (Book of Rites). Book I-X, SBE 27 [& 3, 16, 28, 39-40], translated by James Leege, Oxford: Clarendon Press. 1885. reprinted 1966.
논문:
성기숙(2001). 조선후기 궁중정재의 극장공간성 연구 - 순조 이축 자경전 진찬의를 중심으로. 〈대한무용학회논문집〉 29권, pp. 109-145. 서울: 대한무용학회.
손선숙(2010). 20세기 초 궁중정재의 발현양상 -1931년도 영상자료를 중심으로-. 〈한국무용사학〉11권. pp. 85-118. 서울: 무용역사기록학회.
조경아(2019). 그림으로 읽는 조선시대의 춤 문화 Ⅰ : 왕실공간의 춤 그림. 〈무용역사기록학〉 제55호, pp.275-315. 서울: 무용역사기록학회.
필름 사본:
조선총독부(1931). 조선궁중무용기능영화 〈조선무악(朝鮮舞樂)〉, 서울: 국악아카이브실.
서정록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이론과 교수. 태국 Mahidol 대학교 국제대학 강사, 국립대만대학교 초빙교수, 런던대학교 SOAS 연구원을 역임하였다. 한국춤을 비롯한 동북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춤문화 역사 연구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