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연구

사)민족미학연구소 한국민족미학회 2022 가을 학술대회
탈춤 판과 생명
최찬열_민족미학연구소 연구위원

사)민족미학연구소 한국민족미학회에서 지난 9월 열은 '한국 탈춤의 생성미학적 접근' 심포지움에서 발표된 발제문들 가운데 5편을 선별해서 싣는다. 춤 연구와 창작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되는 이 자료들의 폭넓은 전재를 허락해주신 사)민족미학연구소에 깊이 감사드린다. - 편집자주


탈춤 판

탈춤은 마당에서 펼쳐진다. 마당은 일상적 생활공간이다. 그렇다면 탈춤이 열리는 마당의 상대적인 바깥은 현실의 생활공간 모두를 가리킨다. 그런데 마당의 절대적 바깥을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발제자가 보기에 탈춤 판의 절대적 바깥은 생명의 장이다.

생명의 장은 탈춤판의 상대적 바깥이 아니라 절대적 바깥이다. 탈춤 판은 일상 생활공간의 특정한 일부분만을 점유해 열리므로, 그 외의 다른 모든 공간은 항상 탈춤판의 상대적 바깥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탈춤판은 어느 공간에나 설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탈춤 판은 그 자체로 성질을 달리하는 두 가지 측면의 바깥을 지닌다.

하나는 상대적인 측면으로서 이 측면을 통해 공간 속에서 닫힌 체계는 보이지 않는 집합을 지시하며 이 집합이 보이게 되면 그것 역시 보이지 않는 다른 새로운 집합을 지시하며 이러한 관계가 무한히 계속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절대적 측면으로서 이는 닫힌 체계를 여는 집합이 아니라 가시적인 것의 질서에도 속하지도 않는 우주 전체의 내재적 지속을 향해 열리게끔 한다.

탈춤 판의 바깥은 다른 장소나 근처 또는 주위에 존재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탈춤 판의 잠재적 차원에서 내속하고 존속하며 끈덕지게 자신을 주장하는, “더욱 근본적인 다른 장소"이며 “균질적인 공간과 시간의 바깥"에 있으면서 자신의 현전을 통해 탈춤 판을 생성 변화하게 하는 생명의 장이다.






사)민족미학연구소 한국민족미학회 2022 가을 학술대회 '한국탈춤의 생성미학적 접근' 현장




생명

“모든 생명이 유기층에 갇히지는 않는다. 차라리 유기체는 생명이 스스로를 제한하기 위해서 자체에 거슬러 설치한 것이다. 따라서 훨씬 강도-높은, 훨씬 강력한 탈유기적 생명이 존재한다.”

생명은 유기적 생명과 비유기적 생명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유기적 생명은 개체적 생명이다. 비유기적 생명은 전개체적 생명이다. 유기적 생명은 현실적 차원의 생명이고 비유기적 생명은 잠재적 차원의 생명이다. 그리고 이 두 유형의 생명은 착 딸린 채 상호 규정하며 운동한다. 유기적 생명은 비유기적 생명의 인식론적 근거이며 비유기적 생명은 유기적 생명의 존재론적 근거이다. 베르그손의 생명철학을 이어받은 들뢰즈에게 잠재적 차원의 비유기적 생명은 순수 잠재성의 지대로 죽음의 자리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때의 죽음은 프로이트가 말하는바 죽음충동의 자리는 아니다. 오히려 이 자리는 무엇이든 다 될 수 있는 상태의 충만한 생명의 자리이다.

생명은 주로 죽음과 짝을 이루어 사유한다. 그리고 삶과 죽음을 사유하는 두 가지 다른 방식이 있다. 죽음⟶ 삶 ⟶ 죽음의 구조로 보는 방식은 삶을 닥쳐온 죽음의 순간을 일정 정도 유예하는 것으로 본다. 이때 삶은 죽음의 부정을 통해서 정의되며 죽음은 어둠이나 공포의 이미지로 다가오는 무조건 피하고 싶은 어떤 것이다. 삶 ⟶ 죽음 ⟶ 삶의 구조로 보는 방식은 죽음을 새로운 삶의 과정으로 본다. 이때 죽음은 생명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시작으로 이해된다. 앞의 방식이 동일성을 일차적인 것으로 놓고 사유하는 동일성⟶ 차이 ⟶ 동일성의 구조라면 뒤의 방식은 차이를 일차적인 것으로 놓고 사유하는 차이 ⟶ 동일성 ⟶ 차이의 구조를 가진다.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차이 안에서 운동은 효과로서 산출"된다고 말하면서, "차이는 모든 사물의 배후에 있다. 그러나 차이의 배후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강조한다. 자기의 배후에는 아무것도 없는 자기 차이화하는 물질은 그 자체로 생명성을 가진 것이다. 들뢰즈는 유기적인 것의 배후에서 물질의 '비유기적인 생명성'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본다. 그러므로 유기적인 생명성보다 더 근본적인 비유기적 생명성으로 나아가는 운동, 즉 탈영토화의 창조적 운동이 중요하게 된다. 탈영토화의 운동을 통해 분자적 층위에 이를 때에만 거기에서 비로소 진정한 창조와 생성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들뢰즈가 말하는 생명은 어떤 세계, 어떤 주체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생명으로부터 비로소 세계와 주체가 생산되는 어떤 질료적 흐름, 즉 비유기적인 생명의 부단한 변화와 창조를 일컫는다. 따라서 먼저 존재하는 것은 주체가 아니라 생성이며, 주체가 지각하는 것은 이러한 생성의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지점들에 해당한다. 생명은 그 자체로 '하나'인 것도, 또 '여럿'인 것도 아니다. 생명은 잠재성으로서의 순수 과거처럼 수많은 이질적인 요소들, 경향들이 상호침투하고 있는 잠재적 다양체라고 할 수 있다. 우주의 보편적 생성이란 잠재적 다양체인 생명의 현실화 운동이다. 이 운동은 우주 스스로 자기 변화하는 운동, 즉 자기-차이화하는 운동이다. 보편적 생성 그 자체인 생명은 모든 존재자를 생성하는 구체적 실재이며, 그 잠재적 바탕에서는 발생적 에너지가 작동하고 있다. 자연 전체에 내재하는 잠재성, 창조적 생성을 가능케 하는 힘은 바로 발생적 에너지, 창조적 에너지로서의 생명, 단지 그것을 의미할 뿐이다. 생명은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에너지로서 습관화된 삶과 일상적인 상식을 전복시킬 수 있는 역량을 담지하고 있다. 들뢰즈가 말하는 생명은 유기체의 것이 아닌 생명이다. 이것은 생명인 동시에 죽음인데 여기서 유기체의 죽음은 전혀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유기체의 죽음은 근본적인 의미에서의 생명 곧 잠재성으로 되돌아감을 의미하고, 이런 유기체의 죽음을 통해 변화도 진화도 생명도 그 근본적인 의미에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마당

마당에서의 연행 판은 공동체의 공동의 적을 공동적으로 공격하는 싸움판이다. 연희 방식은 투쟁방식이며, 탈춤은 탈춤-전쟁기계가 된다. 또 마당은 이러한 싸움과 투쟁의 승리 끝에 공동적으로 신명을 공유하는 사회적 신명풀이의 현장이다. 탈춤 판은 경험적 차원의 ‘그런 것'과 그것들 ‘넘어'의, 그것들의 객관적 가능 조건인 ‘그렇게 한 것'이 공존하는 판이다. 곧, 탈춤은 당대 사회에 내재해 있는 기본 모순과 주요 갈등을 공동체적 관심의 표적으로 부각시키는 현실 반영적인 기능과 거기에서 쟁취된 승리와 사회적 인식을 집단적 신명으로 행동화하며 생명과 합일하는 기능을 동시에 함축하고 있다. 탈춤의 보이는 차원은 공동체의 생활에 내재한 사회적 모순과 갈등 관계를 드러내고 공격하는 것에 있다면, 보이지 않는 차원은 싸움 속에 쟁취한 승리를 집단적 신명으로 공유하며 생명과 합일하는 것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곧, 대립과 갈등을 이루는 현실적 차원과 그것들 모두를 아우르며 포용하는 생명의 잠재적 차원이 맞물려 순환하는 역동적인 장이 탈춤 판이다.

채희완에 의하면, 마당은 우선 일터, 쉼터, 놀이터이자 집회의 공간이다. 곧 삶의 현장으로서 생활문화 공간이다. 그다음, 마당은 정세, 형국, 처지, 정황, 판국처럼 맞닥뜨려 실제로 부딪치고 있는 시공간적 현실 상황 국면이다. 곧 마당은 생활문화 공간으로서의 ‘여기'이며, 매번 새롭게 발생하는 사건과 마주하는 ‘지금'이다. 마당이란 바로 지금-여기이다. 그러면 지금은 무엇인가? 지금은 오늘이다. 오늘은 어제와 내일을 자신의 차원들로 구성하는 ‘살아 있는 현재'이다. 현재는 과거 전체와 수축한 통합체인 동시에, 미래의 새로운 계기를 머금고 있는 현재이다. 그러니 마당은 “가능적인 현장 연희" 상황을 뜻한다. 씨름판, 싸움판, 난장판, 이판사판처럼 판이 바뀌고, 뒤집힐 듯한, 치열한 그 무엇이 일어남직한, 일어나고야 말, 일어나고 있는 “현재 진행형의 연희 상황"을 뜻한다. 마당에서 현재 일어나는 모든 사건의 상황들은 이미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초월론적 과거를 전제한다. 그러니 여기는 단순한 우리 삶의 현재 생활공간이 아니라 공동체의 전체 과거를 동시에 품은 시간의 공간이다. 또한 동시에 마당에서의 현재의 시간은 역사적으로 형성된 공동체의 보편성을 전제로 한 우리의 고유한 삶의 양식이 매번 새롭게 생성되는 공간으로서의 지금이다. 여기에서 우리의 삶은 모든 고착적인 배치로부터 탈주하며 탈영토화의 운동을 지속적으로 펼친다. 마당이란 무엇인가? 마당은 생성이다. 마당에서는 매번 새롭게 생성되는 지금-여기만 있을 뿐이다. 마당이란 무엇인가? 마당은 안과 바깥이 공존하며 순환하는 항구적인 역동성의 장이다. 그것은 과거와 현재가 끝없이 순환하며 새로운 것이 생성하고 소멸하는 생명의 장이다.

마당은 과거 전체(잠재성)의 지극한 수축이 만들어내는 “역동적 상황 현장"(현실성)으로서 열려진 장이며, 모든 권위적인 삶의 배치로부터 나와 나의 삶을 새롭게 창조하는 탈주의 선이 그려지는 생성의 장이다.


마당, 지금-여기

다시 채희완의 말을 음미해보자. “그러므로 각각 상이한 마당은 독자적으로 분리되어 공연될 수 있고, 또 공존하여 한꺼번에 보여질 수도 있는 것이다. 몇 개의 마당만 선택적으로 공연되어도 무방하다." 즉, 탈춤의 각 과장 사이에는 논리적 인과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극의 전개는 어떤 결말을 향해 선형적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과장과 과장이 공명 관계를 이루며 틈과 간격을 발생시킨다. 이를테면, 탈춤에서는 “스토리텔링식과 같은 사건 전개상의 필연성"은 중요하게 고려되지 않으며, 관중 또한 극의 흐름에 주목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탈춤이 사건 규명극이라기보다는 사건 향유극이고, 현실 인식극이라기보다는 현실 해소극에 가깝다."는 말은 곧, 탈춤은 현실을 반영하는 현실주의 극이기도 하지만 이보다는 생명과 합일하는 신명풀이의 연행 판에 가깝다는 말이고, 과장과 과장 사이에 형성되는 틈, 간격을 통해 관객들은 탈춤판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며 생명과 합일하는 것이다. 특히 탈춤에서 과장과 과장 사이에 탈꾼과 참여자들이 함께 어울려 춤을 추는 대목이 자주 연출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리라 짐작된다.

탈춤에서는 전체의 열려있음이 생명의 간접적인 재현을 통해 제시된다. 열려있는 전체를 근거로 절대적인 의미의 바깥 영역이 존재할 수 있고 봉합적 연산구조가 긍정된다. 탈춤의 봉합적 연산구조에서 대표적으로 나타나는 단절은 과장과 과장 사이에서도 일어날 수도 있고, 또 한 과장을 구성하는 요소들 사이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 바깥으로서의 생명은 이러한 사이나 간격 혹은 틈을 통해 자신을 드러낸다. 탈춤에서는 더 이상 장면과 장면, 과장과 과장의 연합 혹은 견인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장면과 장면들, 혹은 과장과 과장 사이의 틈새, 간격이 문제이다.

이것은 마당을 지금-여기라는 생성하는 시간 위에 놓고 사유하는 것이다. 이때 현재의 궁극적 근거는 과거전체이다. 그리고 과거전체는 봉합적 연산구조로부터 열리는 틈으로 솟아오른다. 봉합적 연산구조에서 핵심적인 것은 틈, 사이, 간격의 발생이다. 이것은 바로 창조적 여백이다. 그리고 “저장된 실체”로서의 탈춤의 과거는 지나가 없어져 버리는 연대기적 시간의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궁극적 근거로써 언제나, 이미 존속하는 초월론적 바탕으로서의 시간, 곧 과거 전체이다.

탈춤 판은 닫힌 폐쇄계가 아니라 열린 개방계이다. 여기서는 언제나 다른 무엇이 들어올 수 있고, 그럴 때마다 판 전체는 변화한다. 이러한 우발적이고 즉흥적인 상황이 허용되면서 역동적으로 변화해가는 판이 탈춤 판이다. 열린 개방계란 무한히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런 변화는 바로 창조와 생성의 다른 이름이다.

 

2022. 10.
사진제공_사)민족미학연구소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