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연구
사)민족미학연구소 한국민족미학회에서 지난 9월 열은 '한국 탈춤의 생성미학적 접근' 심포지움에서 발표된 발제문들 가운데 5편을 선별해서 싣는다. 춤 연구와 창작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되는 이 자료들의 폭넓은 전재를 허락해주신 사)민족미학연구소에 깊이 감사드린다. - 편집자주
Ⅰ. 들머리
청소년 시절에 시를 써 보지 않은 사람은 시론을 기필하지 말라고 한다. 시의 미세한 감각적 부분을 체험하지 않고 시를 제대로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탈춤을 추어 보지 않은 사람이 탈춤을 논한 것을 온전하다고 말할 수 없다. 이들의 탈춤에 대한 논술은 미묘한 미적 감각이 박제된 앙상한 관념을 내세우기 때문이다.
탈춤 연구의 개척적 선구자인 송석하는 물론 임석재, 정인섭, 최상수, 양재연, 이두현, 정상박 등은 탈춤을 놀아 보지 아니한 세대의 학자들이다. 이들은 우리 탈춤을 문화유산으로 연구하여 업적을 많이 남겼지만, 과연 탈춤을 예술로 얼마나 그 실상을 해명하였는가 의심이 든다. 그런데 오늘 이 자리에는 탈춤을 열심히 춘 혹은 추고 있는 분들이 직접 탈춤을 연구하여 발표를 하고 논의하는 자리라서 특별히 기대를 하게 된다.
탈춤의 전승을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 하는 과제를 검토하기 위하여 먼저 탈춤의 전승 실상을 정확히 파악하는 일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특히 다음과 같은 점에 유의하면서 연구를 하고자 한다.
첫째, 민중은 주체적 선택과 역량에 의하여 문화를 형성하고 향유한다는 점. 민중이 타의에 의하거나 수동적으로 선진 문화를 수용하여 탈춤을 추었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둘째, 문화 양상은 시공에 따라 변화한다는 점. 일제강점기의 탈춤 양상을 전통시대의 양상으로 착각하여 말하는 경우가 상당히 있다.
셋째, 예술은 장르 인식을 통하여 각기 다른 성격을 분명히 할 수 있다는 점. 떠돌이탈춤과 토박이탈춤을 구별하지 않는 경우가 많이 있다.
탈춤의 연구 과정도 사실과 논리를 통하여 진리를 탐구하는 행위이다. 일차적으로 사항과 사항 사이에 아귀가 맞아야 한다. 탈춤의 유래와 전승을 살피는 것도 논리가 맞아야 한다. 아무리 민속문화가 비기록문화여서 문헌과 유물이 영쇄해도 활용할 수 있는 자료로 아귀를 맞추며 합리성을 추구해야 한다. 지금도 자료 사이에 논리가 맞지 않는 거짓의 모래성을 묵과하는 수가 있다.
그런데 전승 현장에 가 보면 관계자들이 실상을 어느 정도 알고 있으면서도 상당히 미화하여 온전하게 전승되어 온 것이라고 여기고 논의를 시작하는 경우가 없지 않다. 한 세대 이상 지난 것이므로 전설화된 경우도 있다. 지정 무형문화재는 신청불가침의 것이라고 인식하는 경향도 있다.
논의 자료는 내가 잘 아는 경남지역 탈춤을 중심으로 제시하겠지만 탈춤의 전승 실상을 명확히 말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내가 발표한 논고도 문헌과 구술 자료의 부족으로 추론에 지나지 않은 부분이 많다. 되도록 전설적인 환상이 아닌 사실적인 실상을 토대도 탈춤 전승의 현재와 미래를 조망해 보면서 우리 앞에 놓인 과제를 점검해 보고자 한다. 탈춤 전승의 방법을 일일이 검토하는 일까지 나가지는 않고 개괄적으로 언급하겠다.
사)민족미학연구소 한국민족미학회 2022 가을 학술대회 '한국탈춤의 생성미학적 접근' 현장 |
Ⅱ. 탈춤 전승의 역사적 배경
1. 탈춤의 유래를 보는 시각
우리 탈춤 연구에서 기원 분야에 관해서는 관심이 많아 산대희기원설, 기악기원설, 제의기원설 등이 제기되었다. 이 중에서 산대회기원설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 널리 통용되었다. 오늘날의 토박이탈춤은 고려의 산대잡희, 조선조의 산대도감극이 전파된 것이라 한다. 탈춤은 궁중연희로 내려오다가 산대도감극을 놀지 않게 되자 그 연희자들이 먹고 살기 위하여 순회 공연할 때 지역 주민이 그것을 보고 시작한 것이라 한다.
과연 그럴까? 이 학설의 가장 큰 맹점은 민속문화의 주체성을 무시한 것이다. 민속 문화는 기층민의 주체적 선택에 의하여 축적된 것이다. 오늘날의 탈춤은 궁중문화가 아니라 민중 문화다. 민중이 궁중예술이 좋아서 혹은 남이 시켜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여 행한 것이다. 오늘날의 탈춤은 민중이 궁중이나 관아에서 하는 것을 본보고 시작한 것이 아니다. 비록 탈춤이 궁중 혹은 관아 연행의 영향을 받았을지라도 그대로 수용하거나 모방한 것이 아니다.
둘째, 탈춤은 민중이 삶에 필요해서 행한 것이다. 민중은 먹고 살아가는 것이 절실한 계층이다. 삶에 필요하지 않는 것을 행할 정도로 여유가 있는 유한계급이 아니다. 탈춤은 민중이 무사태평하고 배불리 먹을 수 있게 풍요롭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응집되어서 세시적 행사로 연행한 것이다.
셋째, 전문적 연희집단의 탈춤을 보고 각지 주민이 탈춤을 시작하였다는 것은 떠돌이 광대패의 탈춤과 토박이의 탈춤이 동일하거나 유사하다고 장르적 구별을 하지 않은 오류를 범한 것이다. 떠돌이탈춤은 돌아다니며 수시로 연행하는 것이지만, 토박이탈춤은 한 곳에서 일 년에 정한 날 한 번 혹은 두어 번 세시적으로 행하는 등, 양자가 다른 점이 수없이 많아 서로 다른 장르의 탈춤으로 보아야 한다.
넷째, 탈춤을 추는 광대는 천민이고 탈춤을 추는 토박이는 상민이다. 계급의식이 분명한 전통사회에서 천민 광대가 하는 짓을 상민이 아무리 좋아도 본을 보고 따라 하지 않는다. 돈을 주고 불러와서 놀이를 시키지 모방하여 행하지 않는다. 각지 탈춤의 유래설에 “떠돌이탈춤을 보고 시작하였다”는 것은 계급의식이 없어진 개화 이후에 주민들이 한 말을 기록한 것이다.
다섯째, 떠돌이 탈춤은 광대패라는 직업공동체가 먹고 살려고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행한 공연물이고, 토박이 탈춤은 지역공동체 구성원들이 삶의 필요에 의하여 행하는 자족적인 놀이였다.
농민들이 마을 단위로 행했던 마을굿의 사례가 폭넓게 조사되면서 근년에 제의기원설이 설득력을 가지게 되었다. 제의기원설 중에는 탈춤의 기원을 각기 고대제의기원설, 농악대굿기원설, 무당굿기원설로 그 근원을 달리 보고 있기도 하지만 모두 하나의 제의로 보고 마을굿기원설로 정리하기도 하였다. 탈춤의 제의기원설이 받아들여지면서 위에 제시한 탈춤을 보는 시각의 오류 혹은 모순이 많이 시정되었다. 그러나 각지 탈춤의 유래설에 제의기원설이 받아들이지 않고 여전히 전문 광대패의 놀이를 보고 시작하였다거나 광대에게 배워서 혹은 광대와 함께 놀면서 시작하였다고 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2. 근·현대 탈춤 전승의 역사적 여건
개화기에 한국 탈춤은 급격히 밀려오기 시작한 외래문물의 영향으로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1831년 영국 상선이 황해도 몽금포 앞바다에 나타나서 통상을 요구한 것을 시작으로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 역사적 사건이 이어지고 드디어 일본 운양호(雲揚號) 사건으로 19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어 문호가 개방되었다. 이어서 1905년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되고, 1910년 한일병합이 되어 우리나라에 식민지 통치가 이루어졌다. 일본을 통하여 밀려들어오는 서구 문물과 신파극, 신극 등과 영화라는 새로운 공연물 때문에 갑자기 탈춤을 놀지 않은 것이 아니다. 탈춤을 공연하는 지역공동체가 외국 문화와 일제의 수탈 때문에 몰락하여 구성원들 스스로 세시풍속으로 탈춤을 놀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게 되어 전승의 동력을 잃게 된 것이다.
1930년대 토박이탈춤은 국학부흥운동과 민족문화운동으로 일부 재연되기도 하였다. 송석하를 비롯한 민속학 관련 학자들의 관심과 격려에 몇몇 탈춤이 재연되었다. 특히 동래야류, 수영야류, 진주오광대 등에 지식 청년들이 직간접으로 재연에 참여하였다.
1937년 일제는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이어서 전시동원체제를 시행하여 탈춤을 비롯한 모든 민족 연행이, 1945년 광복이 되기까지 10년 가까이 중단되었다. 일제는 1937년 중일전쟁을 동남아로 확전하다가 1941년 진주만 공습으로 2차세계대전으로 확대하였다. 일제는 버거운 대전을 치르기 위하여 전시동원체재를 더 강화하여 인력과 물자를 강제 동원하였으므로 일본 본토는 물론 식민지 한반도에서 전쟁 수행을 위한 일 이외 일체의 일을 할 수가 없었다. 흔히 “일제 강점기 우리나라의 민속예술은 일제의 강압에 의하여 중단되었다.” 라고 말하는데, 엄밀히 따지면 일제가 강압적으로 공연을 중단을 해서 연행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문화행사를 벌일 여건이 되지 않은 환경이라 행할 수가 없었다고 해야 정직한 표현일 것이다.
1945년 해방을 맞이하여 지역에 따라서는 광복기념으로 탈춤을 공연하였다. 잠깐 재연의 기미가 보이기도 하였으나 혼란한 해방 공간에서 지역 주민들의 좌우익 갈등으로 제대로 공연할 수 없었다.
1950년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1953년 휴전되기까지 한반도는 초토화되어 지역 공동체의 집단적 세시풍속이 행해질 수가 없었다. 1960년대까지 도시와 촌락을 복구하느라 지역 공동체의 세시풍속으로 탈춤을 출 계제가 되지 못하였다.
요컨대, 193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까지 한국은 공동체의 세시적 놀이로 탈춤을 연행할 여건이 되지 못하였다.
Ⅲ. 탈춤 전승 실상
1. 무형문화재 지정 시기 탈춤 전승 실상
1962년에 문화재보호법을 제정하면서 유형문화재뿐만 아니라 무형문화재도 포함하여 시행하였다. 무형문화재 제도 초창기에 지정된 토박이탈춤이라고 해서 전승 상태가 온전한 편이 아니었다. 앞서 근·현대 탈춤 전승의 역사적 여건을 통하여 어느 정도 탈춤의 전승 상태를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원래 토박이탈춤은 지역공동체의 문화였다. 떠돌이놀이패의 탈춤처럼 수시로 연희하던 것이 아니다. 지역공동체의 소망을 풀기 위한 세시적 행사의 하나로 1년에 한번 행해졌다. 그런데 시대의 변화에 따라 지역공동체의 유대가 느슨해지면서 공동체 전체가 합심하여 행하지 않고 탈춤을 잘 추는 사람들이 맡아서 행하게 되면서 탈춤 연행자들이 계를 구성하게 되고, 1년에 한 번 세시적으로 행하던 것을, 이들 계원들이 춘추로 야외놀이를 나갈 때도 공연을 하여 2∼3회로 증가되었다. 토박이탈춤의 연희자들은 연희를 전문으로 하지 않은, 다른 생업이 있는 사람들이다. 비전문적인 연희자가 일 년에 한두 번 연행하면서 놀이를 능란하게 할 수 없다. 대부분 소박한 아마추어 수준의 연희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 토박이탈춤은 1920년대 개화기에 들어서면서 이미 소멸의 길에 들어섰다. 1930년대 민속학자가 주목하거나 지역의 지식인이 민족문화운동으로 재연했던 것이 명맥을 유지하게 되어 1960년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이 되었다. 30년만에 재연하는 탈춤의 전승양상이 좋을 수가 없다. 한 세대가 지나면서 원래 연희를 했던 사람이 2~3 명 살아남아서 재연을 하게 되었다. 탈춤은 원래 비기록문화이므로 대본이 없이 구전되었던 것이다. 현대에 연희자가 기록한 연희본이 있은 곳은 다행이었다. 당시 무형문화재 지정 조사를 한 두 분의 위원이 했다. 어떤 경우에는 전체 연희를 실연시켜 보지도 않고 연희자 몇 분만 불러 인터뷰 하는 것으로 심사를 마쳤기 때문에 실제 연희와 지정을 위한 조사보고서 내용이 다른 것이 문화재위원회에 통과되어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것도 있다.
이렇게 전승 양상이 좋지 못하고 조사보고서도 불확실한 탈춤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고 원형 혹은 전형을 논의하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무리라 할 수 있다. 당시 탈춤뿐만 아니라 많은 전승문화가 자연 전승이 어려워진 상태라 그것을 인위적 전승으로나마 보존하고자 무형문화재 제도를 시행한 것이다.
탈춤은 그래도 연희를 다른 것으로 바꾸지 않고 되도록 그대로 공연하려고 하는 것을 지정하였으므로 다른 종목에 비하여 전승 양상이 좋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일소리는 공연을 위하여 노동 현장을 재현하고 일하는 동작을 무용화하고 거기에 따라 가창을 하는 공연물을 만들어 지정하였기 때문에 재창조된 부분이 많다. 제의도 원래 제의 시공에서 벗어나 제의 기능을 수행하지 않고 연희화 하였으므로 새로 가감된 부분이 많다.
2. 현재 탈춤 전승의 실상
현재의 탈춤 전승의 실상을 세세히 말하면 논의가 분산되므로 큰 변화 현상 세 가지만 거론하겠다.
첫째 우리 전통 탈춤은 전통적 지역공동체 문화였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있었던 전통적 지역공동체는 개화 이후 역사적 굴곡을 거치면서 사라졌다. 특히 한국 전쟁으로 인한 인구 대이동, 산업화로 인한 생활의 변화, 도시화로 인한 이농 등으로 이제 벽촌에 가더라도 전통적 공동체는 찾기 어렵게 되었다. 원래의 공동체 개념을 벗어나 예술공동체, 지구촌공동체 등 모든 조직이나 단체를 공동체라고 말하고 있어 이 용어가 너무 넓게 쓰이고 있지만, 현대 한국에는 전통 탈춤의 바탕이었던 공동체는 없다. 탈춤보존회도 문화재보호법에 의하여 결성된, 인위적인 전승을 목적으로 한 법인이지 공동체가 아니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둘째, 원래 토박이탈춤을 추던 사람들은 대개 생업을 가지고 살면서 지역공동체 구성원으로 일 년에 한두 번 행하는 세시풍속으로 탈춤을 추었다. 춤을 잘 추지 못하는 비전문적인 춤꾼이었다. 그런데, 현대의 무형문화재 탈춤 예능보유자와 전승교육사와는 물론 마당극 놀이꾼들도 대개 다른 직업이 없이 연희에 전념하고 있다. 1년 365일 중 수영야류 종자자가 246일, 고성오광대 종사자가 293일 활동한다는 통계가 나왔다. 정규직 공무원의 휴일 제외한 근무일수 226.3일보다 많다. 탈춤 종사자들은 이런 활동량으로 보아서 다른 직업을 가질 수 없는 실정이다.
셋째, 탈춤 향유층이 사라졌다. 무형문화재 탈춤 행사에도 자발적 관객이 없다. 인기가 많던 마당극 공연에도 관객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 많던 대학의 탈춤 동아리도 거의 사라졌다. 2000년대 이후에 탈춤의 향유층을 찾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Ⅳ. 현대 탈춤 전승의 확장성
1. 탈춤의 보존적 전승과 확장
1962년 문화재보호법은 무형문화재 제도를 수립하여 지정의 행정 행위를 실시하였다. 중요무형문화재로 1964년 12월 7일에 종묘제례악, 양주별산대, 남사당놀이 등을 지정하고, 같은 달 24일에 갓일, 판소리, 통영오광대, 고성오광대 등을 지정하였다. 이처럼 초반에 중요무형문화재로 6종목을 지정하면서 3종목의 토박이탈춤을 지정한 것은 탈춤이 문화적 가치를 지니고 있을 뿐더러 인멸 직전에 놓였기 때문이다. 탈춤은 재연할 수 있는 것은 것은 초기에 거의 다 지정하였다.
한국에 무형문화재 제도를 실시한 것에 대하여 두 가지 상반된 평가를 한다. 하나는 무형문화재 제도의 실시는 국가주의적 입장에서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방책이었다고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요, 하나는 일제의 강압적인 문화정책에 따라 소멸해가던 전통문화의 맥을 이어 놓은 데에 큰 기여를 하였다고 보는 견해다. 무형문화재 정책이 광복 직후에 실시하지 아니 하고 1960년대에 시행한 것은 만시지탄을 금치 못하는 바이지만, 그나마 천만다행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일제 식민지 시대 이후 산업화시대, 정보화시대를 거치면서 공동체와 가족의 형태는 물론 생활문화도 크게 변하여 전통시대 무형문화유산이 전승되기가 어려운 환경에 처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1960년대 무형문화재 제도를 실시하지 않았다면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탈춤 중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이 몇이나 될까? 그때라도 이 정책을 실시한 것은 천만다행이다. 무형문화유산의 무형문화재 지정은 전통문화를 보존 전승한다는 점에서 대단히 의의가 있는 정책이었다.
그렇다고 토박이탈춤을 그렇게 무형문화로 지정한 것이 최선의 방법은 아니다. 모든 문화유산이 그렇지만 탈춤은 공동체 문화로서 자연스럽게 전승되는 것이 이상적이다. 무형문화재 제도는 사회문화의 변동으로 탈춤이 자연 전승력을 상실하였을 때 인위적으로 전승하고자 택한 전략적 보존책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무형문화재 제도는 무형문화유산의 보존이 목적이므로 규정에 의하여 원형 혹은 전형을 유지하도록 하므로 지정이 되면 일단 고착화된다. 그러나 동일한 무형문화유산이라도 사람에 따라서, 같은 사람이라도 행하는 때에 따라서 달라진다. 따라서 무형문화재 제도의 일차적 목적이 보전이지만, 무형문화유산은 변화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이상적 가상형을 보존하는 것이다.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탈춤도 지정을 위한 조사보고서를 기준으로 점검을 하면서 원래의 전형을 준수하기를 요구하지만 사회문화의 변화에 따라 변하게 마련이다. 부지불식간에 변화하는 것을 넘어 지정 보고서와 규정을 크게 벗어나지 않은 범위에서 사회문화에 대응하면서 진화하였다. 그 변화 양상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 현대에 탈춤을 극으로 상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고사, 길놀이 등 놀이과정을 축소 혹은 생략하는 경우가 많다. 역으로 고장의 축제로서 연행을 할 때는 없던 고사, 길놀이 등을 행하는 경우도 있다.
2. 원래 과장을 이어서 놀이를 하면서 과장 명칭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과장을 분명히 나누어 놀이하고, 없던 과장 명칭을 새로 만들어 쓰게 되었다.
3. 음악 장단과 춤사위 명칭이 보다 세분화되었다.
4. 욕설과 외설에 포함된 걸쭉한 대사가 점잖은 말로 바뀌었다.
5. 극내용을 표현하려고 몸짓이 과장되고, 없던 대사도 더 보태면서 설명적으로 되었다.
지역에 따라서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탈춤이 문화재 지정의 목적에 따라 전형을 계승하고 자체 발전을 위하여 진화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다른 전통예술를 정리하여 무형문화재로 지정하게 하는 데 일정 역할을 한 탈춤의 확장성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1967년 지정된 동래야류는 1972년 동래학춤을 부산광역시 지방무형문화재로 지정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하였다. 이어서 1977년 동래지신밟기를 부산광역시 지방무형문화재로 지정하는데도 크게 기여를 하였다. 마지막으로 2005년 양반춤을 추는 문장원의 춤을 정리하여 동래한량무라 명명하여 부산광역시 지방무형문화재로 지정 하였다. 수영야류도 동래야류와 비슷한 예술적 확장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단, 다른 점은 동래는 춤예술 쪽으로 확장성이 강하고, 수영은 가창예술 쪽으로 확장성이 강하다. 그 연유는 동래는 기방문화의 영향으로 춤이 발달하였고, 수영은 생산현장에서 부르는 일노래가 발달하였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2. 탈춤의 전개와 전략적 전승
탈춤이 전통사회에서 공동체의 태평무사와 풍농풍어를 기원하는 목적으로 세시적 행사로 행해졌다면 사회문화가 변한 현대에는 사회적 기능을 수행할 필요가 없어서 전승이 되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
탈춤은 조선조 후기로 들어서면서 원래의 사회적 기능인 지역공동체의 태평 기원 이외에 승려 풍자, 양반 풍자 등 시대적 모순 제시하였다. 일제식민지시대 1930년대에 들어와 지역공동체의 태평 기원의 제의적 기능보다 애향, 애족의 민족문화운동으로서 기능을 수행하기 위하여 연행되었다. 우리 민족은 감격적인 해방을 맞이하여 탈춤을 대표적 민족문화로 인식하고 광복 기념으로 공연을 하였다. 1960년 이후 산업화시대에 사라지는 탈춤을 무형문화재 제도를 통하여 보존적 전승을 하였다. 한편 군사독재기에는 학생들이 민주화운동의 일환으로 탈춤을 열심히 추었다. 지금까지의 탈춤의 궤적을 살펴보면 전통사회를 벗어났다고 탈춤이 죽은 것이 아니다.
현대 사회의 여건으로는 전통탈춤의 자연 전승이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탈춤을 전승하기 위하여 전략적 방안을 모색하게 된다. 전략적으로 전승하고자 하는 방법은 계승적 전승, 창의적 전승, 모방적 전승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계승적 전승은 탈춤을 무형문화재로 지정하여 보존적으로 전승하는 것이다. 창의적 전승은 창조적 작업으로 전통탈춤과 다른 형식 혹은 주제로 탈춤을 공연하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보기로 마당놀이를 들 수 있다. 마당놀이는 한국적 시대상황이 낳은 젊은이들의 창의적 전승이다. 탈춤의 묘미를 살린, 예술성을 극대화한 공연물을 근년에 접할 수 있는데, 이것도 창의적 전승이라 할 수 있다. 탈을 이용한 현대 연극도 창의적 전승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무형문화재로 지정하는 보존적 전승은 국가에서 무형문화유산을 보존하기 위하여 제도를 만들어 주어 탈꾼들이 탈춤을 추며 전승하기 때문에 타의에 의한 수동적인 면이 강하므로 인위적 전승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암울한 시대에 학생들이 자기 표현과 민주화 운동으로 열심히 춘 탈춤은 스스로 자기 필요와 욕구에 의하여 춘 것이므로 전통적 탈춤의 자연적 전승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타의에 위한 인위적 전승이라고 할 수 없다. 자의적, 자발적 전승이다. 마당극도 마찬가지다. 무형문화재로만 전승되는 탈춤만 주목할 것이 아니라 현대에 다양하게 전개되는 탈춤도 함께 살펴보면서 전승의 미래를 진단해 보아야 할 것이다.
Ⅴ. 탈춤 전승의 과제
현대에 탈춤의 자연적 전승을 기대할 수 없다. 전략적 전승을 도모하면서 우리가 해야 할 과제를 점검해 보아야 할 것이다.
1. 토박이탈춤은 비전문적인 토박이가 일 년에 한두 번 연행하는 자족적인 놀이다. 그러므로 이 연행은 생태적으로 서툴고 소박한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근래에 보존적 전승을 목표로 전승하고 있는 무형문화재 지정 탈춤까지 관객에게 보이기 위한 공연물이 되었다. 이런 현실에서는 탈춤의 예술화가 과제로 부각된다.
2. 식민지, 전쟁, 산업화 등을 거치는 격동의 시대 30년만에 잔존한 일부 탈춤을 보존적으로 전승하기 위하여 무형문화재로 지정하였을 때 전승 양상이 온전치 못하였다. 만신창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무형문화재 제도도 인위적 전승에 지나지 않는다. 탈춤 전승의 궁극적 목적은 민족예술의 발전에 있으므로 대국적으로 모든 탈춤을 민족예술로 보고 함께 진작시켜 할 것이다.
3. 탈춤은 할 때마다 변한다. 심지어 보존하고자 무형문화재로 지정한 탈춤도 변했다.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탈춤이 고착화되었다고 하지만 다른 전통양식의 공연예술을 촉발하여 현대에 전승을 하게 했다. 변화하고 확장하는 탈춤의 속성에 따라 새로운 민족예술을 생성하게 하는 것도 주요한 과제다.
4. 전통 탈춤은 지역공동체 문화의 소산이지만, 현대는 이런 공동체가 사라져 존재하지 않는다. 보존회도 문화재보호법에 의한 법인이라고 보고 전승과 육성을 모색해야 한다. 보존회도 게마인샤프트(Gemeinschaft)가 아니고 게젤샤프트Gesellinschaft)다. 이런 게젤샤프트에 예능보유자를 두지 않으면 운영은 물론 유지도 곤란한 시기가 올 것이다. 탈춤을 보존하고자 한다면 지역사회의 명절 혹은 축제의 일환으로 행하도록 해야 한다.
5. 전통 토박이탈춤은 생업이 있는 연희자가 일 년에 한두 번 동원되었지만, 근년의 탈꾼은 다른 직업을 가질 수 없을 정도로 공연과 연습에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 그러므로 탈꾼도 먹고 살아야 하는 인간으로 보고, 보수를 지금의 수당 혹은 보조금으로 지급하는 것을 임금 개념으로 전환하여야 한다.
6. 탈춤 향유층이 극소화되었다. 탈춤을 현대인의 예술적 욕구에 맞게 발전시키는 한편, 청소년의 교육은 물론 성년의 평생교육을 통하여 탈춤을 익숙하게 자주 접하게 하여 탈춤 향유층이 되도록 유인하는 방안을 강구하여야 한다.
7. 탈춤이 전통시대 문화유산이라고 해서 과거 지향적으로 움직여서는 살아남지 못한다. 미래를 대비할 자세가 필요하다. 콜라보 시대에 맞추어 다른 영역과의 협업, 멀티시대의 다양한 협연 등을 도모하면서 제4차 산업시대를 준비해야 할 것이다.
8. 탈 만들기도 소중한 무형문화유산이다. 지금까지 탈 제작 기능은 연희 종목인 탈춤과 다른 종목이라 도외시되었다. 그렇다고 별도로 공예종목에 넣어서 기능보유자로 지정하지도 않고 방치한 상태다. 탈 제작 기능을 보존 진흥하기 위한 방안도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의 하나다.
Ⅵ. 마무리
다행히 우리나라는 선구적으로 무형문화재 제도를 실시하여 탈춤을 보존적으로 전승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탈춤의 전승 실상과 전승 원리에 비추어 보면 탈춤을 무형문화재로만 지정하여 전승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이 들어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무형문화재로 탈춤을 전승하는 자체에 심각한 문제도 야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 대응하기 위하여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살펴보았다.
결과적으로 여기에 제시한 과제들은 우리 세대가 하지 못했거나 잘 못한 것이라 이 글을 정리하면서 자책감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결국 이 과제를 우리가 하지 못하고 다음 세대의 과업으로 넘기게 될 시기에 이르게 되니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