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연구

춤 소장 및 아카이빙을 안무하기
한석진_무용연구가

춤을 소장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춤은 공연자와 관객이 공유하는 현재에 존재하고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소멸된다는 특성을 지니기 때문에 춤을 소장한다는 말 자체가 어불성설이라고 느껴진다. 그렇기에 춤을 소장한다는 것은 춤으로부터 파생된 어떠한 유형물을 소유함을 의미하고 일반적으로 그 유형물은 아카이브 자료로 간주된다. 춤 아카이브의 다양한 형태들, 사진, 영상, 구술록, 안무노트, 스케치, 공연 프로그램, 리뷰 등은 공연 현황에 대한 기록뿐 아니라 안무 과정과 결과물을 둘러싼 개인적, 역사적, 사회문화적, 정치적 의미를 담고 있다. 춤 아카이브는 춤이 일어나는 그 장소와 시간을 온전히 담아낼 수 없으나, 춤이 소멸되지 않도록 연장, 영구화하려는 욕망이 담겼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춤을 소장할 때 춤의 어떤 모습, 내용을 영구화할 것인가는 또 다른 문제로 제기된다. 일반적으로 춤의 원형, 원본성을 훼손시키지 않은 상태로 보존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춤의 원본은 초연 때의 공연인가 아니면 몇 번의 공연을 거쳐 수정된 최종 버전으로 볼 것인가, 누구에 의해 추어진 버전이 원본인가 등을 질문할 수 있다. 춤을 만든 주체로서 안무가가 지정한 특정 날짜의 공연을 원본으로 설정하였다고 하더라도 안무가가 생각하는 원본 공연과 무용수 또는 관객의 기억 속 공연은 다르게 구성될 수 있다.

페기 필런(Peggy Phelan)은 공연은 사라짐을 통해서 존재하며, 따라서 관객의 주관적 기억 속에 각자 다르게 재구성된다고 보았다.1) 다이애나 테일러(Diana Taylor)는 공연으로부터 파생된 물질적 증거를 ‘아카이브’라 명명하고 제의, 춤, 집회와 같은 일시적이고 훼손되기 쉬우며 쉽게 잊히는 체화된 실천을 ‘레퍼토리’라고 지칭한다. 아카이브와 레퍼토리는 분리된 것이 아닌 서로를 활성화시키며 기능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2) 필런과 테일러와 같은 포스트구조주의 영향을 받은 퍼포먼스학자들에 따르면, 공연은 고정된 하나의 실체로 존재불가능하며, 파생된 물질적 형태와 기억, 비평, 재공연 등의 비물질적 형태를 바탕으로 끊임없이 재구성된다. 즉 공연은 원본 없이 파생물로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퍼포먼스학을 중심으로 논의된 공연의 원본성, 물질성, 매개성, 재연(re-enactment) 담론은 이미 20여 년 전부터 논의되었던 터라, 더 이상 새롭게 다가오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정다슬 안무가는 정다슬파운데이션을 설립하고 운영하는 등의 수행적 작업을 통해서 춤 보존, 아카이브, 소장, 재연 개념을 매우 흥미롭고 신선하게 다룬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서울과 함부르크를 기반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30대 후반”의 정다슬 안무가가 설립한 정다슬파운데이션은 “1985년”에 설립되어 춤과 퍼포먼스를 수집, 소장, 연구하는 단체이다. 이 단체는 설립 이래로 “1,204개”의 춤과 퍼포먼스를 소장했음에도 불구하고 2021년 5월 1-2일 양 일간 디스이스낫어처치에서 소장품 다섯 점을 처음으로 선보였다. 이번 《정다슬파운데이션 소장품전》(이하 소장품전)에서 소개된 작품은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진주검무〉, 〈학연화대합설무〉, 〈처용무〉, 〈살풀이춤〉과 최근 복원 작업을 끝내고 국가무용문화재 지정을 위해 절차를 밟고 있는 〈발해와무〉였다. 이 다섯 편의 작품들은 흰색의 평상복 차림을 한 두 명의 여성 무용수들에 의해 약 45분간 연달아 선보이는데, 무음 상태에서 무용수들 입에서 나오는 장단 소리에 맞춰 진행되었다. 줄지어 엮어 놓은 일자 조명등이 바닥에 배치되고 각각의 작품 시작 전후에 조명등의 위치가 바뀌면서 일종의 무대 또는 작품을 놓은 좌대 역할을 했다. 관객석처럼 고정되어 앉아있을 필요가 없이 공연 내내 자유롭게 움직이며 관람하는 것이 가능했다(물론 대부분의 관객들은 무대라고 상정되는 공간 밖에 착석한 채 관람하였다). 이러한 공간 구성은 《소장품전》이 미술관의 작품 소장 및 전시 체계와 공연예술에서의 무대와 관객석 관계를 복합적으로 작동시키려는 의도로 파악되었다.






《정다슬파운데이션 소장품전》 공연 장면 ©정다슬파운데이션/조현우




공연이 일상복 차림과 무음으로 진행되었다는 부분에서 이미 예측할 수 있듯이, 정다슬파운데이션이 소장하고 있는 국가무용문화재 4점은 원형의 모습 그대로를 재연하지 않는다. 여섯 개의 진주건무 공연 영상을 종합한 버전(〈진주검무〉), 『궁중무용무보』에 그려진 학춤 그림을 바탕으로 구성한 버전(〈학연화대합설무〉), 문화재청과 SK텔레콤에서 개발한 AR 어플리케이션에서 나타나는 이미지를 기반으로 만든 버전(〈처용무〉), 살풀이 이수자로부터 전수받은 버전(〈살풀이〉) 등이다. 보통 무형문화재로서 전통춤은 무형의 원형이 존재하고 오랜 훈련을 통해 그것을 온전하게 담아낼 수 있다고 승인받은 신체(이수자의 신체)에 의해 전승된다. 그에 반해 정다슬파운데이션이 소장한 춤은 보존된 원형도 아닐 뿐 더러 전통춤을 매개할 수 있는 승인받은 신체에 의해 수행되지도 않는다. 왜 이러한 춤을 “소장”한 것일까?

공연의 말미에 최근 복원작인 〈발해와무〉가 재연되었고 위의 궁금증은 이내 해결되었다. 이 작품은 두 명의 무용수가 등장해 마주하고 약 3분 동안 바닥을 보며 멍하니 서 있다가 끝나는 춤이었다. 프로그램북에 따르면, 정다슬파운데이션이 발굴한 〈발해와무〉는 발해 고유의 춤으로 알려진 답추의 마지막 부분에 이어지는 춤이며, 그 형식과 기능에 있어서 요즘의 “멍 때리기” 또는 알렉산더 테크닉과 유사하다. 또한 예술과 비예술을 교묘하게 섞어서 미술에서의 우상숭배를 비판한 (이미 사망한) 마르셀 브로타에스(Marcel Broodthaers, 1924~1976)와의 소통과 협력을 통해 구성되었다고 명기함으로써 〈발해와무〉가 상상 속의 꾸며낸 춤임이 명백해졌다.

《소장품전》은 정다슬파운데이션이 수집, 소장, 복원한 춤을 전시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원본의 춤을 소장하고 복원하는 것을 둘러싼 허구적 믿음과 제도적 맹점을 드러내기 위한 프로젝트이다. 정다슬 안무가는 인간문화재 제도가 전제하는 원형의 가치중립성과 신뢰성을 의심하고 전통춤의 원형을 담아내기에 허락된, 그릇과도 같은 신체에 의해 수행된 춤을 소장하길 거부한다. 뿐만 아니라 전통춤 전승 제도뿐 아니라 미술관에서 미술작품을 소장하는 방식을 그대로 가져와 적용함으로써 미술계의 제도권 내 춤 매체에 대한 몰이해를 폭로하는 방식을 취한다. 예를 들어 전통춤을 설명하는 작품별 캡션에서 “〈진주검무〉... 디지털 영상을 입력한 두 개의 신체, 167X41X24.5cm, 170X42X25.5, 2021”라고 표기하여, 미술 작품을 소장하듯 춤의 소장을 춤추는 신체를 소장하는 것으로 대입시켜버리는 식이다. 이는 춤이 지나가고 난 뒤의 파생물을 춤을 간주하고 소장, 전시하는 등 춤 매체의 존재론적 특성을 고려하지 않는 미술관의 제도 권력을 비판하는 안무가의 시각이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3)

춤 아카이빙에 대한 정다슬 안무가의 포스트구조주의적 태도와 전략은 2022년 8월 25~28일 온수공간에서 열린 《정다슬파운데이션 회고전: 기연 1951-1988》(이하 회고전)에서 보다 명백해진다. 이 《회고전》에서 정다슬파운데이션은 한국무용사에서 누락되어있던 안무가인 기연의 흔적을 추적하여 아카이빙하고 이를 바탕으로 그녀의 대표작 〈무제 36〉을 복원하였다. 기연이 남긴 안무 노트와 자료들, 애장품, 고고학에 관심이 많던 그녀가 그리스와 이집트를 여행하며 남긴 영상, 페스티벌 투어과정을 촬영한 영상, 동료들의 사진과 그들이 남긴 편지 및 인터뷰 영상, 그리고 기연의 초상 조각 등이 전시되었다.




  

《정다슬파운데이션 회고전: 기연 1951-1988》 속 기연이 남긴 기록과 자료들(좌), 기연의 동료 인터뷰 영상(우) ©정다슬파운데이션/조현우



  

《정다슬파운데이션 회고전: 기연 1951-1988》 속 〈무제 36〉 복원 퍼포먼스 ©정다슬파운데이션/조현우




유심히 살펴보면 아카이브 자료 속 기연의 실체는 매우 흐릿하고 잡히지 않는, 마치 전시장에서 이따금씩 뿜어져 나오는 스모그처럼 느껴진다. 기연이 수집하고 기록한 고고학 자료와 영상은 가장자리 캡션을 통해 실재성이 부여되지만, 그 속에 그녀의 흔적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골동품처럼 보이는 기연의 애장품과는 달리 그녀가 남긴 안무 노트는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은 종이 질감을 보여준다. 기연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자료는 원본의 존재 유무를 알 수 없는 초상 조각이라는 점에서 더욱더 아이러니하다. 동료 인터뷰 영상에서 기연을 아끼고 존경하는 이야기들이 오디오를 통해 나오는 것과 달리, 내용과 어울리지 않는 무표정과 움직이지 않는 입모양으로 인해 동료 증언의 진정성은 퇴색된다. 기연이라는 인물의 허구성에 결정적으로 힘을 실어준 건 그녀의 1987년 안무작 〈무제 36〉 복원 퍼포먼스이다. 세 명의 무용수는 45분간 2022년 라운지 바에 흘러나올 듯한 강한 비트의 전자음악에 맞춰 절도있는 단순한 움직임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소장품전》을 관람한 관객이라면 《회고전》이 허구의 역사 속 춤 〈발해와무〉의 발굴 및 복원하는 구성이 기연이라는 허구의 인물로 발전되고 본격화된 것임을 쉽사리 알아차릴 수 있다. 실제로 프로그램북 내 기연의 일대기를 다룬 글을 보면 〈발해와무〉가 1978년에 고고학 연구를 위해 고국에 돌아온 기연이 발굴된 춤이라고 언급되었다. 포스트구조주의의 사상적 영향력 아래 춤 담론은 “아카이브로 춤 원본을 재연할 수 있는가”에서 “가치중립적인 춤의 원본성이 존재 가능한가”라는 질문으로 전환되었다. 정다슬 안무가의 《회고전》은 언뜻 보면 전자의 질문에 답을 하는 작업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기연이라는 존재하지 않은 인물의 설정은 《회고전》이 안무가의 후자에 대한 응답임을 확신하게끔 한다. 객관적인 자료라고 믿어지는 물질적 형태의 아카이브를 바탕으로 한들 충분히 가짜 춤 원본은 만들 수 있음을 수행적 작업을 통해 보여준다. 즉 춤의 기록과 보존은 어떤 지식이 만들어지고 보존되고 배포되는지, 어떻게 행해지는지에 따라 달라지며, 따라서 누구의 관점에서 어떤 가치를 추구하느냐에 따른 담론적 행위임을 안무적 실천을 통해 방증한다고 볼 수 있다.

정다슬 안무가는 정다슬파운데이션이라는 수행적 프로젝트를 통해 춤의 원본성, 춤 아카이브의 객관성에 대한 회의적 태도를 견지하고 춤을 소장하고 전시하는 방식을 둘러싼 정치성에 문제제기했다. 정다슬파운데이션은 춤 아카이빙, 소장, 복원에 있어서 기존의 제도가 작동하는 방식과 전제하는 믿음을 그대로 주입하는 일종의 미러링 전략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전략은 기존의 패러다임을 비판하고 해체하지만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는데 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냉소적이고 회의주의적 태도에 머무를 수 있다는 위험성을 지닌다. 레베카 슈나이더(Rebecca Schneider)는 재연은 원본을 망치는 복제품 혹은 원본이 없는 허구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있지만 재연을 위해 동반되는 오류나 수정은 아카이브의 정밀한 조사만큼이나 많은 것을 알려줄 수 있다고 말한다.4) 정다슬파운데이션이 소장품 재연을 통해 춤 원본의 존재불가능성과 제도 비판을 넘어 지나간 공연에 대한 어떠한 새로운 시각을 담아낼 수 있을지 앞으로의 행보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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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Phelan, Peggy(1993). Unmarked: the Politics of Performance. 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2) Taylor, Diana(2005). The Archive and the Repertoire: Performing Cultural Memory in the Americas.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3) 프랑스 안무가 보리스 샤마츠(Boris Charmatz)는 자신이 큐레이팅한 2015년 테이트 모던 전시 《만약 테이트 모던이 무용 박물관이었다면?(If Tate Modern was Musée de la danse?)에서 선보인 〈20세기 무용사를 위한 20명의 무용수(20 Dancers for the XX Century)〉를 통해 춤의 역사를 전시할 때 미술관에서 전통적으로 채택하는 공연의 파생물을 전시하는 것이 아닌 비물질적, 운동감각적인 측면까지 담아내는 신체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안무가 티노 시걸(Tino Sehgal)은 자신의 퍼포먼스 작품이 미술관에 “전시”될 때 관람시간 내내 공연이 되도록 하거나 작품을 안무가와의 구두 계약을 통해 사고 팔 수 있도록 하는 등 미술관의 전통적 제도를 수용했다. 하지만 사진, 기록, 도록 만드는 것을 허락하지 않음으로써 퍼포먼스가 가지는 고유한 특징을 지켜내려고 했다.
4) Schneider, Rebecca(2011). Performing Remains: Art and War in Times of Theatrical Reenactment. London: Routledge.

한석진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에서 무용이론 전공 예술사 과정 후 영국 서리대학교에서 무용학 박사 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이론과 조교수로 재직중이다.​

2022. 9.
사진제공_정다슬파운데이션/조현우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