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연구
사)민족미학연구소 한국민족미학회에서 지난 9월 열은 '한국 탈춤의 생성미학적 접근' 심포지움에서 발표된 발제문들 가운데 5편을 선별해서 싣는다. 춤 연구와 창작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되는 이 자료들의 폭넓은 전재를 허락해주신 사)민족미학연구소에 깊이 감사드린다. - 편집자주
1. 거인의 어깨 위에서
○ 이 글은 18세기부터 20세기까지 탈춤의 전승사를 ‘서술’하려는 의도에서 준비되었다. 흔히 문화예술사를 논의할 때 ‘기술’이라는 표현을 쓰지만, 필자는 서술이라는 표현을 한다. 기술이 갖는 객관성 추구의 지향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필자는 의도적으로 이를 피한다. 모든 논의는 혹은 모든 글은 주관적일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 18세기에서 20세기까지 약 200년간의 탈춤 전승사를 서술하면서, 필자는 어떤 독자적이고 파천황(破天荒)의 방법을 이용하지 않는다. 필자에게는 그럴 능력도 여력도 없기 때문이다. 필자의 탈춤 전승사 서술 방법은 기존 논의를 곁눈질하는 것이다.
○ 필자가 곁눈질하는 기존 논의는 조동일, 채희완 등의 성과이다. ‘본격적인’ 탈춤 연구 초기부터 구축해 온 그들의 탈춤 전승사는 탈춤 관련 담론의 장에서 여전히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이에 필자는 기존의 탈춤 전승사를 실마리로 삼아 논의를 진행한다. 탈춤 관련 연구의 거인들 어깨 위에서 탈춤 전승의 역사를 바라보는 것이다.
○ ‘거인의 어깨 위에 서 있는 난쟁이’의 시선으로 탈춤 전승사를 서술하는 것이 이글의 방법이기는 하다. 하지만 필자는 어깨 위의 난쟁이로만 남아있지는 않으려 한다. 물론 기존 논의를 보완하는 수준에 머무를 가능성이 크지만, 때로는 어깨 위에서 내려와서 거인의 딴지를 걸어보기도 하려 한다.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 18세기에서 20세기까지의 탈춤 전승사는 ‘탈춤 전승의 근·현대사’라 할 수도 있다. 이 시기를 필자는 ‘조선 후기(18세기~19세기)’, ‘일제강점기(20세기 전반)’, ‘해방 이후(20세기 후반)’로 구분한다. 이 구분은 어떤 엄밀한 기준에 따른 것은 아니다. 일제 강점과 해방이라는 획기적인 꺾임목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어떤 엄밀한 기준 아래서 구분한 것은 아니다. 서술상의 편의를 위해서 구분일 따름이다.
사)민족미학연구소 한국민족미학회 2022 가을 학술대회 '한국탈춤의 생성미학적 접근' 현장 |
2. 조선 후기 탈춤 전승의 새로운 면모
○ 탈춤 전승의 역사에서 18세기는 그야말로 획기적인 시기이다. 18세기 탈춤 전승의 획기적 양상에 대한 조동일의 견해를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 후기는 탈춤의 역사에서도 중요한 전환이 마련된 시기이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 농촌탈춤을 기초로 도시탈춤이라 부를 수 있는 더욱 발전된 탈춤이 출현했다. 농촌탈춤은 농촌 마을에서 농민이 공연하는 연극이고, 도시탈춤은 도시적인 성격을 띤 고을에서 상인이나 이속이 주동이 되어 공연하는 연극이다.”
“도시가 성장하고 도시탈춤이 생겨난 시기는 대강 18세기 중엽이라고 생각된다.”
“결국 도시탈춤은 18세기 이래 발달을 본 신흥 상업도시에서 상인과 이속에 의해 창조된 탈춤으로서, 전부터 있어 온 농민의 농촌탈춤을 기반으로 하여 이를 더욱 높은 수준의 것으로 계승 발전시킨 새로운 연극이다. 도시탈춤의 성립으로 탈춤의 역사는 세 단계에 들어섰고, 우리 문화 내지 예술에서 탈춤이 차지하는 위치는 더욱 확고하게 되었다.”
“농촌탈춤은 양반의 허위를 폭로하는 데 그치지만, 도시탈춤은 말뚝이를 내세워 민중의식을 긍정하는 연극이다. 그러므로 초랭이나 이매가 말뚝이로 바뀌었다는 것은 농촌탈춤에서 도시탈춤으로서의 발전이 얼마나 큰 의의를 가지는가를 가장 분명하게 말해 준다.”
“탈춤은 18세기 이후의 새로운 상황에서 밑으로부터 대두한 혁신의 움직임이 가장 극명하게 표현된 예술형태이다. 농민 문화의 뿌리를 상인과 이속이 가담해 키운 결과, 모두 함께 어울려 노는 노동놀이를 기반으로 해서 등장인물 사이의 갈등을 박진감있게 구현하고, 하층 민중의 생활 의지와 어긋나는 지배 체제의 허위 의식을 다각도로 비판했다.”
○ 채희완 역시 유사한 견해를 피력한다.
“탈춤연희집단의 사회경제사적 측면에 주목하여 두레의 변천에 따르는 공동체의식의 분화과정이 탈춤의 연희구조에 어떠한 특성을 가져오게 하였는가 그 일면을 밝혀보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 전통사회가 서서히 해체되면서 근대사회로 넘어오는 시기, 특히 18세기 이후에 있어서의 두레의 향방에 초점이 맞추어질 수밖에 없다.
새로운 참여층이 대두하면서부터 탈춤의 연희집단은 폐쇄적인 대에서 개방적인 대로 이행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탈춤에 관여하는 민중의 구성층이 넓혀지고 분화되기도 하여 탈춤 자체가 이원화되거나 다양성을 띠게 되었는데, 이를 통일적으로 파악하자면 하나의 일관된 관점이 필연적으로 요구되기 마련이다. 이에 우리는 민중성 전반 내지 개방적 민중성이라는 인식점을 마련함으로써 탈춤사를 한줄기로 조망할 수 있는 시각을 얻어내는 동시에, 나아가 이러한 관점을 토대로 하여 ‘통일적인 것의 다양화’라는 탈춤구조의 한 특성을 설정함으로써 탈춤의 역사와 원리를 통합하고 탈춤 이해에 있어서 하나의 통일된 관점을 관철시키고자 한다.”
“18세기 이후 도시의 대두와 더불어 근대적인 초기자본주의사회로 서서히 이행되면서부터 민중예술의 전반적인 발전 추세와 병행하여 탈춤도 그 모습을 달리 하게 된다. 탈춤의 변천은 바로 농촌공동체인 두레의 변천과 양상을 같이한다. ···(중략)··· 탈춤에 있어서도 농촌 중심의 페쇄적인 집단구조에서의 탈춤과 도시에서의 개방적인 집단구조에서의 탈춤이라는 이중구조가 공존하게 된 것이다.”
“탈춤의 연희집단이 개방적인 형태를 취하게 되면서부터는 새로운 ‘예술동반층’으로서 상인이나 이속(吏屬)이 대두하게 된다. ···(중략)··· 탈춤의 주도층 내지 후원층으로 상인이나 이속이라는 새로운 계급이 등장되면서 탈춤은 새로운 단계에 들어선다. ···(중략)··· 일례를 들어 도시에서의 탈춤을 보면 취발이와 말뚝이라는 인물이 나와서 극의 중심세력이 되어서는 이들이 서로 합작하기도 하면서 탈춤의 흐름을 주도한다. 이들은 다름 아닌 상인이나 이속계급을 전형화한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18세기 이후 근대사회로 전이되는 과정에서 탈춤 변천의 이원성, 곧 농촌에서의 탈춤과 도시에서의 탈춤은 이러한 포괄적인 민중성 전반이라는 인식점을 가질 때 탈춤의 변천사는 일관된 관점에서 통일적으로 기술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도시에서의 탈춤은 농촌에서의 탈춤을 토대로 계승한 것이다. 그리고 농촌에서나 도시에서나 탈춤은 민중을 주 대상으로 한 것이며, 여러 계층의 민중의 의사 전반을 포괄적으로 반영하고 여러 가지 예술적 요구를 함께 충족시켜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 조동일과 채희완의 견해는 조선 후기, 구체적으로 18세기에 농촌탈춤에서 도시탈춤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졌고, 이에 따라 주체, 내용, 주제 등의 획기적인 변화가 이루어졌다는 주장이다. 18세기 탈춤 전승의 획기적 전환에 대한 견해는 다른 연구자들에 의해서도 피력된다. 서연호는 “1778년 이전에 이미 개성적이고 세련된 가면극이 만들어진 것”이라거나 “18세기 중엽부터 야희가면극이 독자적인 연극으로 거듭났”다고 주장한다. 전경욱 역시 다음과 같이 탈춤 전승사의 획기적 변화를 서술하고 있다.
“이처럼 사회, 경제, 사상, 문화, 예술 등 전반에 걸쳐 총체적 변모를 보인 시대 조류와 결부되어 판소리, 본산대놀이(가면극), 꼭두각시놀이(인형극)가 18세기 전반기에 성립되었다. 이것들은 이전 연희와는 달리 연극으로 인정할 수 있을 정도로 수준 높은 예술성을 갖췄다. 물론 이것들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갑자기 툭 튀어나온 것은 아니다. 이전에 이미 산악, 백희에 해당하는 여러 연희가 존재했고, 그것들을 바탕으로 조선 후기의 사회 변동과 시대 의식을 반영한 새로운 연희가 재창조되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중국 사신 영접 때 나례도감에 동원되어 연희를 펼치던 반인이 18세기 전반기에 산악·백희 계통 연희와 기존 가면희를 바탕으로 본산대놀이를 성립시켰다.”
○ 지금까지 살핀 연구자들의 주장은 그 용어나 강조점이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18세기에 탈춤 전승에서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는 유사하다. 그것을 조동일과 채희완은 ‘도시탈춤의 성립’이라 표현했고, 서연호는 ‘개성적이고 세련된 야희가면극’으로, 전경욱은 ‘반인의 본산대놀이 성립’이라 표현했다.
○ 그런데 20세기 말과 21세기 초엽을 전후해서 새로운 자료들이 발굴된다. 청나라 사신 아극돈의 화첩 『봉사도(奉使圖)』(1725), 강이천의 한시 「남성관희자(南城觀戱子)」(1789), 수원 화성의 <낙셩연도>(18세기 말), 경복궁 중건 때의 연행 기록 『기완별록(奇琓別錄)』((1865) 등의 자료가 발굴된 것이다. 이 자료들은 “한국연희사 연구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획기적인 자료” 혹은 “1990년대 이후 전통연희사 연구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획기적인 자료 네 가지”로 평가받으며 여러 연구를 추동시켰다.
『봉사도』 제7폭 왼쪽 및 오른쪽 부분, 1725, 중국 중앙민족대학교 |
○ 흥미로운 것은 이 자료들에서 보여주는 탈춤의 존재 양상이다. 「남성관희자」나 『기완별록』에서 우리는 현전하는 탈춤 그대로의 형태가 적어도 18세기 초에 형성되어 19세기 말까지 연행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는 현전하는 산대놀이나 탈춤 계통의 탈춤과 흡사한 여러 대목이 존재한다. 나아가 『기완별록』에서는 동해안 지역의 호탈굿이나 진주오광대의 팔선녀놀이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도 존재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기완별록』에서 묘사된 것이 국가적 행사라는 점이다. 국가적 행사에 탈춤 공연이 벌어진 것이다. 국가행사에서 벌어진 탈춤의 양상은 『봉사도』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또한 <낙성연도>에서 보여주는 것 역시 화성 행궁에서 벌어지기는 했지만, 국가행사 차원에서 벌어진 탈춤의 모습이다.
<낙셩연도>(『정리의궤 삼십구성역도』), 18세기말, 프랑스 미테랑국립도서관 |
<낙셩연도>의 탈춤 연행 부분 |
○ 이러한 상황은 아래의 언급과는 결을 달리하는 것이다.
“탈춤은 국가에서 거행하던 행사가 민간에 정착되어 생겨난 것은 아니고, 하층민이 만들어내 자기네 역량으로 발전시킨 민중예술의 대표적인 본보기이다. 농사가 잘되게 하려는 풍농굿에서 유래해 농민의 농촌탈춤으로 오래 전승되다가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 상업도시가 성립되면서 상인이나 이속이 주도하는 도시탈춤으로 발전했다. 탈춤의 역사는 민중의식 각성의 역사이기도 하다.”
○ 탈춤과 산대나례(국가행사)의 연관성을 부정하는 위의 견해는 새롭게 발굴된 자료들의 양상을 설명할 수 없다. 혹 이전 탈춤의 전승 양상과 달리 18세기 이후에 갑자기 국가행사에 참여하게 되었다거나 아니면, 탈춤이 도시탈춤으로 전환되면서 나타난 부정적 측면 중에 하나라는 식으로 설명할 수도 있다. 그런데 과연 그런 것일까?
○ 18세기 이후 ‘농촌탈춤에서 도시탈춤으로 전환’이라는 시각은 철저하게 민중 중심적 입장을 견지한다. 여기서는 “탈춤이 국가적인 산대희와 상관없는 민중의 연극”이라는 관점을 일관되게 유지한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은 탈춤의 풍농굿 기원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자생적 기원론, 반 침강문화재론(沈降文化財論)의 견지 등이 이 관점의 올곧은 생각이다. 그런데 이러한 입장에서는 새로운 자료들이 보여주는 국가행사와 탈춤의 공존 양상을 설명할 수 없다. 500년 이상 지속되어 상층문화와 민중문화의 교류를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사진실의 다음과 같은 언급은 주목할 만하다.
“농촌과 어촌을 포함한 여러 지역에서 토착적인 민속문화를 기반으로 하는 탈춤이 굿에서 극으로 발전하였다. 외방재인이 산대나례와 같은 국가적인 공연 행사에 참여하면서 탈춤을 포함한 지방의 연희가 중앙에서 공연될 기회를 얻게 되었을 것이다. 나례도감이 재인들을 모아 산대나례를 총연출하는 과정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궁정의 연극문화가 외방재인의 탈춤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이러한 순환적인 방식을 통하여 500년 이상 궁정과 민간의 문화가 교류하였으니 각 지방의 탈춤에 많은 유사점이 나타난 것은 당연하다.”
○ 조선 후기, 구체적으로 18세기 이후의 탈춤 전승의 양상은 지금까지와는 좀 달리 서술될 필요가 있다. 탈춤 기원론을 염두에 놓고 볼 때, ‘풍농굿 기원설’과 ‘산대희 기원설’을 상호 보완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최근의 ‘산악·백희 기원설’ 역시 활용할 필요가 있다. 그럴 경우, 탈춤의 자생적 속성, 외래 영향, 상층문화와 민중문화의 교섭 등의 양상이 설명될 수 있다. 특히 상층문화 민중문화의 교섭이라는 측면에 주목했을 때, 18세기 이후 나타난 탈춤 전승의 새로운 면모와 그 의의를 뚜렷하게 부각할 수 있다.
○ 탈춤의 전승은 민중문화 영역 내부에서만 고립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민중문화 영역 밖 특히 상층문화와 교류하면서 이루어졌다. 특히 탈춤 연희자들은 국가행사에서도 많이 참여하였다. 그 참여의 성격이 ‘동원’이라는 비자발적 성격이 강하기도 했지만, 탈춤 연희자들은 참여 자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18세기에 이르러 국가행사를 참칭하기 시작했다. 그 참칭의 대표적 사례가 ‘본산대놀이’ 혹은 ‘본산대패’이다. 이 참칭을 통해서 국가행사인 산대나례 참여자였음을 드러내면서, 자신들의 질적 수준을 자랑했다. 이들은 비단 이름만 활용하는 데 그친 것은 아니다. 탈춤의 내용 측면에서는 획기적인 전환을 이루었다. <낙셩연도>를 보면 초월적 중세의 이념을 드러내는 수직적 질서의 대표적 상징이었던 산대를 해체하고, 하나의 무대 장치로 활용하고 있다. 그리고 아예 산대 자체를 없애고 일상적 삶의 역동성을 드러내는 탈춤을 생성시켰다. 수직적 질서의 해체와 수평적 질서의 생성이 이루어진 것이다.
“높은 산대의 수직적 구조는 일상적인 삶과 단절된 채 임금과 하늘로 이어지는 상승과 승화의 이념을 표현하는 반면, 수평적인 마당은 일상적인 삶의 공간과 이어져 난장의 판놀음을 만들어낸다. 봉래산(蓬萊山) 등을 본떠 만들어진 산대의 모습은 그 자체로 당시 지배층의 세계관과 우주관을 반영하는 한편, 이처럼 독특한 무대양식을 창출해냈다.
조선후기 나례의 폐지와 산대의 소멸은 수직적 가치의 패퇴와 함께 마당의 시대가 열림을 뜻한다. 수평적 질서의 세계, 난장의 한판은 시정인들의 유흥거리로 자리잡은 가면극의 현장이자 서민대중이 주도하는 민중연희의 무대였다.”
○ 탈춤 전승에서 상층문화와의 교류라는 요인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18세기 새로운 주목점이 등장한다. 탈춤이 국가행사에 등장하고, 연희자들이 동원되었다고 해서 그 민중적 기반이 무너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주목할 만한 거리가 생긴다. 18세기 도시탈춤화 되면서 “관 행사에서의 적극 참여”라는 양상이 나타난 것이 아니다. 오히려 18세기 이후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관 행사 혹은 국가행사에서의 독립이라는 측면이다. 그리고 이는 중세 수직적 질서와 가치의 패퇴이자, 수평적 질서의 생성과 진입으로 나타난다. 이전의 민중문화 영역 내에 한정된 전승사에서는 찾을 수 없었던 조선 후기 탈춤 전승의 새로운 면모이자 가치가 여기에 있다.
3. 일제강점기 탈춤 전승 서사의 균열
○ 일제강점기 이후의 탈춤 전승은 ‘일제의 탄압으로 단절, 해방 이후의 부단한 노력으로 복원’이라는 기본 서사를 가지고 있다. 일제강점기 이후 탈춤 전승사의 전형적 서사라 말할 만하다. 실제 거의 모든 탈춤 전승 단체(보존회)의 공연 팸플릿이나 전수용 교재에서 유사 아니 똑같은 서사를 발견할 수 있다. 조동일 역시 다음과 같이 일제강점기 이후 탈춤 전승에 대하여 말한다.
“탈춤은 일제의 탄압으로 멍이 들었을 뿐만 아니라, 서양에서 들어온 연극인 신극 때문에도 관심 밖의 것으로 버려졌던 쓰라린 과거를 지니고 있다. 탈춤을 전승한 분들이 재현을 위해 분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고, 1930년대에 일어난 민족문화 운동의 일익을 담당하면서 탈춤의 존재와 가치를 알리는데 힘겨운 노력을 한 선각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일제의 식민지 통치가 계속되는 동안에는 탈춤이 살만한 여건이 조성될 수 없었다.”
“탈춤은 19세기 후반에 전성기에 이르렀다가 외세의 침투로 인한 사회 변화 때문에 위축되기 시작했고, 일제의 강점으로 결정적인 타격을 받았다. 민족문화 특히 민중예술의 탄압을 중요한 시책으로 삼은 일제는 1911년, 밤에 함부로 노래 부르거나 춤을 추면 즉결 처분으로 처벌한다는 명령을 공포했다. 그래서 탈춤을 계속 공연할 수 없었다. 1920년대에 이르러서는 이른바 문화통치를 표방하고 명절놀이나 민속행사를 제한된 범위 안에서 사전 승인을 받아 할 수 있다 했는데, 그런 조건에서도 탈춤이 되살아나기 어려웠다. 민속을 연구하고 진흥시키고자 하는 관심이 일어나 탈춤을 다시 공연하도록 했으며, 1936년의 봉산탈춤 공연은 전국적인 관심거리가 되었으나, 대세를 돌려놓지 못한 채 암흑기를 맞이했다.”
○ 전형적인 일제강점기 탈춤 전승의 서사는 사실 김일출이 먼저 제시했다. 남북한 탈춤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김일출의 『조선민속탈놀이연구』를 보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렇듯 오랜 세기를 통하여 인민들이 즐겨 온 탈놀이는 일제의 조선 민족 문화 말살 정책으로 말미암아 최근 반세기 이래로 급격한 쇠멸의 길을 밟아 왔으며···(하략)···.”
○ 그런데 김일출은 “봉산 탈놀이가 일제 통치 기간에도 전국적인 흥행을 계속”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실제 봉산탈춤은 일제강점기 활발한 전승 양상을 보여준다. 남근우가 정리한 일제강점기 봉산탈춤의 전승 양상을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1906년 경의선이 개통되고 황해도의 중심으로 부상하기 시작한 사리원에서는 적어도 1920년부터 단오절을 맞이해 각희(대)회가 성대회 개최된다. 그리고 사흘간 계속되는 이 씨름대회의 여흥으로 야간에는 탈놀이가 펼쳐지곤 한다. 주로 봉산의 쇠락한 구읍에서 신도시 사리원으로 활동무대를 옮긴 탈꾼들의 연행으로, 그들의 구성진 불림과 재담 및 壯麗한 춤사위 등을 보러 씨름판 주위엔 대낮의 씨름판보다 더 많은 인파가 몰려든다. 이 사리원의 봉산탈은 지역 여론의 향배와 사회적 상황에 따라 연해으이 폐지와 재개를 되풀이하며 1920, 30년대를 통과하는데, 때때로 청년회를 비롯한 지역사회의 ‘진보적’ 여론에 의해 ‘傷風敗俗’과 풍기문란의 張本으로 내몰리기도 한다. 그렇지만 봉산탈은 각희대회의 흥행에 불가결한 여흥거리로서 그것을 주최하는 노인회나 상공협회의 호의적 시선 아래, 뿐만 아니라 읍내 주민과 인근 지역민의 열광적 환호와 지지 속에 ‘사리원의 6월 연중행사’로 확고한 자리를 잡아간다.
이윽고 1930년대 중후반 사리원의 로컬한(local) 봉산탈이 조선을 대표하는 민속예술로 거듭나 경성 시민들에게 소비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중일전쟁 이후의 이른바 총력전 체제하 경향 각지에서 공연 초청이 쇄도함으로써 ···(중략)··· ‘전국적 흥행을 계속’하게 된다.”
○ 일제강점기 봉산탈춤의 성행은 1940년대까지 이어진다. “보급 조장할 향토예술”로 지정되어 경복궁 경회루 옆 잔디밭에서 총독 등을 관객으로 공연(1940. 9. 28), “풍농축하농악무용대회”에 초청되어 부민관에서 공연(1941. 11), 일본연극협회 회원 일행 앞에서 특별 공연(1943. 12) 등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렇게 본다면 적어도 봉산탈춤은 이른바 일제강점기 탈춤 전승의 서사에서 벗어난다.
○ 일제강점기 동래야류 전승사 역시 만만치 않다. 이훈상이 밝혀낸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실은 동래야류를 단순한 탄압과 단절의 서사로 정리하는 것을 조심스럽게 만든다.
“식민지기 동래야류의 연행에서 한말 이전 동래의 吏胥나 武任 출신 또는 그 후손, 그리고 이들 사이의 연망이 중요한 역할을 한 사실을 밝혔는데, 이것은 탈춤 연행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하다. 더불어 1928년에 주로 이들 출신으로 구성된 청년 운동 단체에서 야류 연행을 반대하였다가 1935년의 ‘부흥’ 운동에 적극 참여한 사실은 주목할 만한 사건이며 이것은 탈춤 연행과 새로운 연출, 그리고 식민지 근대성과의 관계로 논의를 확장하는 데 중요한 관건이 된다.”
“먼저 식민기에 일제가 탈춤의 연행을 중지시켰다는 주장을 검토하려 한다. 일제가 한국을 병합한 후 연행을 중지시켰다는 이야기를 손쉽게 꺼내는데, 이것은 근거가 없다. 일제가 한국을 병합하고 7년 후인 1917년 2월 11일에 진주오광대가 연행된 사례가 이것을 뒷받침한다. 당시에 수천명이 모여서 연행을 관람했다고 한다. 일제가 탈춤의 연행을 중지시킨 것은 전시동원체제에 들어가면서부터이다. 실제로 1938년 이후 동래는 물론 전국 각 지역에서 탈춤이 연행된 사실은 확인되지 않는다.”
○ 일제강점기 동래야류 연행은 1912년, 1923년, 1927년, 1928년, 1929년, 1931년, 1933년, 1934년, 1935년 등에서 확인된다. 적어도 1938년 이전에는 일시 중지된 시기는 있어도 단절이라 말할 수는 없다.
○ 일제강점기 동래야류 연행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1928년 연행이다. 이때 동래야류의 연행은 줄다리기 대회와 함께 치렀다. 그런데 그 준비과정에서 줄다리기를 준비하는 측인 동래 청년회에서 탈춤이 풍속을 저해한다고 비판하고 나선다. 비판하고 나선 동래청년회 간부들은 동래야류 주도자들과 같은 향리나 장교의 후손이었다. 다만 동래야류 연행의 비판자들은 근대 교육을 받고 사회 운동에 열의를 가진 젊은 세대였다는 점이 달랐다. 1928년 2월 6일에 연행된 동래야류는 비판을 받아들이며 새로운 모습을 보인다. 화려한 가두 행렬을 도입하고 동래 특유의 춤을 강조하면서 재담을 뺀 것이다. 이러한 동래야류의 모습을 동아일보에서는 “夜景會”라 칭했고, “고전적인 공공극”이라 칭하기도 했다.
○ 1928년 연행 이후 동래야류는 줄다리기와 긴밀하게 결합하여 연행된다. 1928년 이후 1930년에 한 번 중단되고 매년 연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 동래야류 전승사에서 주목할 만한 양상이 다시 한번 포착된 시기는 1935년이다. 그것은 1928년 동래야류 연행에 비판적이었던 청년회 집행위원들이 1935년에 연행 주도자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1935년 동래야류 연행에 대하여 이훈상은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1935년의 연행은 단순히 1928년의 것을 재현하는 것을 넘어섰다. 대사의 채록 등과 같은 새로운 작업이 1928년의 연행 이후 이루어졌으며 여기에는 지역사회의 지식인과 연희자, 그리고 그 중요성과 가치를 역설하는 외부의 연구자가 합세하였다. 대중 매체들은 탈춤의 가치를 강조하여 연행의 중요성에 대한 관심을 확대하고 지식인의 호응을 끌어내는 환경이 조성되면서 이러한 변화가 축적되어 1935년 연행이 이루어진 것이다.”
○ 이상에서 살펴본 동래야류의 사례 역시 일제강점기 탈춤 전승사를 탄압과 단절의 서사로 쉽게 쓸 수 없게 만들고 있다. 봉산탈춤처럼 일제 강점 말기까지 이어지고 있지는 않지만, 1935년까지 이어진 전승의 역사는 만만치 않다. 줄다리기와의 연동, 가두 행렬의 확대, 춤 중심의 연행, 주도층의 변화 등의 양상은 단순히 탄압과 단절의 서사를 정리할 수 없게 만든다. 더구나 1928년 연행에서 보여준 가두 행렬의 모습은 ‘문제적’이다. 1928년 동래야류의 가두 행렬에 대해 이훈상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상략)··· 그 결과로 나온 것이 당시 언론 보도에 나온 바와 같이 현대야외극적 색채로 실연하기로 한 기획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실천 방안 중의 하나가 화려한 가두 행렬의 도입이다. 당시 현대야외극적 색채로 실연한다는 기사는 이것을 지칭할 것이다.”
“각종 형태의 등을 갖고 이동하는 가두 행렬과 각종 무용을 도입하는 연행은 크게 주목받았고 그 결과 재담이 빠지면서 흥미를 자아낼 수 없는 문제를 어느 정도 상쇄할 수 있었다. 특히 먼 거리를 대오를 이루어 각종 등을 들고 연희장으로 이동하는 행렬은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이를 위하여 야류의 연희자 외에도 많은 이들이 대거 참석하는 등 규모도 훨씬 커졌다. 이 행렬은 길놀이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연출물이었다.”
○ 이러한 1928년 동래야류의 가두 행렬은 수영야류의 길놀이와 많은 부분 유사하다. 조동일은 강용권의 『야류·오광대』에서 수영야류 길놀이 양상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처음의 길놀이는 놀이꾼과 구경꾼이 한데 어울려서 놀이판으로 가는 행진이다. 마을굿에서 하던 행진을 물려받은 것인데, 그 규모가 썩 야단스럽다. 놀이패, 풍물잡이, 구경꾼이 행진을 하는 단순한 형태가 아니고, ‘소등대(小燈隊), 풍악, 길군악대, 팔선녀, 사자 또는 거마(車馬)를 탄 수양반, 난봉가대, 양산도패가 장사진을 치고, 가장, 가무, 연등이 화려 장대한 대행렬을 이루는 것이다. 이러한 길놀이는 대방놀이의 분위기를 돋구고, 대방놀이를 위한 단결을 굳게 하며 확대하는 구실을 한다.”
○ 1928년 동래야류 가두 행렬과 수영야류 길놀이의 유사성은 1928년 동래야류 가두 행렬의 기획에 수영야류의 길놀이가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을 상정하게 한다. 이와는 반대로 우리가 수영야류의 길놀이라고 알고 있는 것이 어쩌면 1928년 동래야류 가두 행렬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말할 수도 있다. 만약 후자에 입장에 선다면 논란은 커진다. 조동일은 “수영야류가 도시탈춤 가운데 특히 농촌탈춤의 유산을 충실히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농촌탈춤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길놀이와 군무가 수영야류에서 충실하게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라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수영야류 길놀이가 1928년 동래야류 가두 행렬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한다면, 문제가 생긴다. “농촌탈춤의 유산”과 “현대야외극적 색채”가 동일시되는 결과가 나오기 때문이다.
○ 일제강점기 양주별산대놀이의 전승사 역시 그리 단순하지 않다. 일제강점기 양주별산대놀이는 서연호에 의하면 “사회적으로는 몰락의 길을 가고 있었다고 해도 예술적으로는 아직 견실한 내용과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여러 자료와 연구 결과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라고 한다. ‘1929년 9월 총독부 주관의 조선박람회 초청공연’, ‘1930년 3월 17일 경성제국대학 조선문학연구실에서 다카하시 도루(高橋亭) 주도로 이루어진 조종순 구술 채록 작업’, ‘조종순 구술과 증언을 기초로 해서 이루어진 연구 작업(김재철의 『조선연극사』, 김지연 채록의 「산대도감각본」, 다카하시의 논문 「산대잡극에 대하여」, 아키바의 「산대희」)’, ‘1937년 1월 발표한 오청의 「가면무용 산대극대본」’, ‘1939년 조선고전극이라는 개념으로 홍구가 조종순 구술본을 『영화연극』지에 게재’ 등이 양주별산대놀이와 관련된 일제강점기 자료와 연구 결과들이다. 이렇게 적지 않은 자료 정리와 연구 성과는 일제강점기 양주별산대놀이의 몰락에 대해 다시 보게 만든다. 그리고 「1957년 양주산대연희교본」과 1958년 1월 김성태와 박준섭의 구술을 이두현이 채록한 「양주별산대놀이 대사」의 수준을 보면 “사회적으로 몰락의 길을 걸어왔다고 해도 예술적으로 견실한 내용과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 그 밖에도 강령탈춤의 무대화·전국화 시도와 좌절, 하회별신굿탈놀이의 발견과 탈춤으로의 정박 과정 등 역시 단순한 탄압과 단절의 서사를 넘어서는 내용이 담길 수 있다. 이러한 사정은 일제강점기 탈춤의 전승을 살피는 데 있어 또 다른 시각과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탈춤 전승에 대한 안일한 태도에서 벗어나 그 다양한 움직임의 양상을 미시적으로 살피는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 그런데 여기서 유념해야 할 것이 있다. 봉산탈춤이 보여주는 사례를 모든 탈춤에 해당하는 것으로 일반화하거나, 혹은 일제강점기 봉산탈춤의 전승 양상을 보여주는 현재까지의 자료가 모든 봉산탈춤 전승공동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곧바로 이해하는 것에 대해서 필자는 조심스럽다. 이는 봉산탈춤의 전승공동체를 일원화하는 시각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봉산탈춤의 양상을 보여주는 현재까지의 사례가 과연 단일한 전승공동체에서 나온 것일까? 구체적으로 ‘이동벽으로 대표되는 전승공동체가 유일한 일제강점기 유일한 봉산탈춤 전승자들이었을까?’ 하는 의문을 품어볼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하여 필자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한 적이 있다.
“1936년 사리원 공연을 주도한 이동벽에 따르면, ‘1926년부터 기생조합이 주도하여 봉산탈춤을 추었다’고 한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1936년 연행 역시 이루어진 것이다. 이는 이때의 연행이 이른바 ‘자연스러운 전승 상황’에서의 연행이 아니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오청 역시 1936년의 공연은 ‘임시 연행’이었음을 분명히 한다. 1936년 연행이 임시적인 것이었고, 그 연행의 주체들은 1926년 이후부터 주도했던 기생조합이다. 그런데 ‘봉산탈춤의 전승이 오로지 기생조합 중심으로만 이루어졌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김일출에 의하면 일제강점기 봉산탈춤의 전승과 연행에는 이장산의 활약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장산은 1936년 연행에서는 그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이동벽 주도의 봉산탈춤과는 다른 봉산탈춤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다분히 가설적인 것이지만, 필자는 기생조합 혹은 이동벽이 주도한 탈춤을 ‘사리원탈춤’이라 하고, 이와는 다른 봉산 구읍의 탈춤이 독자적으로 존재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 결국 봉산 구읍의 ‘봉산탈춤’과 사리원의 ‘사리원탈춤’으로 변별해야 할 가능성과 그들 사이의 긴장 관계 역시 필자는 염두에 두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심우성은 “실제 봉산에서 놀아오던 탈춤놀음은 1915년 행정기관이 봉산에서 사리원으로 옮겨지게 되고, 또 경의선 철도가 사리원을 통과하게 됨으로써 사실상 사리원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봉산탈춤으로 부르고 있는 탈춤놀음은 이미 1910년대에 그 놀이판을 사리원으로 옮김으로써 <사리원 탈춤>이 된 것”(심우성 편저, 『한국의 민속극』, 창작과비평사, 1975, 53쪽.)이라 하고 있다.”
○ 유념해야 할 사항이 있기는 하지만,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서 일제강점기 탈춤 전승 서사의 균열은 명백해 보인다. 물론 그 균열의 정도는 탈춤마다 다르고, 균열이 심한 봉산탈춤마저도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필요는 있다. 그래서 앞서 언급했듯이 미시적 연구의 필요성이 더욱 요구된다. 이와 관련해서 일제강점기의 민속연행에 관한 최근 연구들이 주목할 만하다. 간헐적으로 이루어진 이 연구들은 전경수의 방대한 연구와 남근우의 세밀한 점검, 그리고 민속박물관의 송석하 논저 정리 작업 등에 힘입어 하나의 흐름을 만들고 있다. 그 흐름은 ‘민속연행의 탄압과 단절, 그리고 복원의 서사’을 다시 쓰는 양상으로 나타난다. 이른바 ‘일제의 탄압으로 인하여 일제강점기에 단절되었다가, 전승자들의 부단한 노력으로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라는 식의 상투적 전승사가 재고되고 있다. 진주오광대 채록본에서 보이는 다음과 같은 대사는 일제강점기 탈춤 전승에 대한 미시적 연구의 필요성을 더욱 증대시킨다.
“『문둥광대』 五人. (서로 모와, 무엇을 협의하는 듯하드니, 큰 목소래로, 日氣도 조코, 五人이 모인짐에, 晉州고은, 丹城ᄭᅩ은, 馬山ᄭᅩ은, 統營ᄭᅩ은......各人 고해서, ᄯᅡᆼᄯᅡᆼ구리, 도박하자. 도박하자. (한 장소에 갓치 안는다)......공산주의하자......(여러 말을 연속해서, 웃기는 겸, 도박하는 형용을 낸다) ᄭᅳᆺ수가 만타. 익잇다. (서로 승부를 닷로아 싸흠도 하고, 웃기도 하고, ᄯᅱ기도 하야, 야단 난리가 난 것갓다)”
4. 해방 이후 탈춤 전승의 이면
○ 해방 이후 탈춤 전승에 대해 조동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광복 후에도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가, 시련을 겪고 가까스로 이어진 탈춤이 1960년대 후반 이래 무형문화재로 지정되고 전승되고 있다. 1970년대부터는 대학들이 대단한 열의를 보여 탈춤 재흥의 시기를 맞이했다. 탈춤을 마당극 또는 무대극으로 변용해서 계승하고자 하는 시도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 해방 이후 탈춤 전승은 위에서 인용한 조동일의 정리가 적절하다. 공시적으로 본다면 탈춤의 전승은 두 가지로 크게 나눌 수 있다. ‘보존회 중심의 원형 전승’과 ‘문화운동 차원의 창조 전승’이 그것이다. 명확하게 시대구분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1950년대 후반부터 보존회 중심의 원형 전승이 시작되어 이어지는 가운데, 1960년대에 문화운동 차원의 창조 전승이 나타나고, 1970~80년대에 그 꽃을 피운다. 그런데 보존회 중심의 원형 전승과 문화운동 차원의 창조 전승은 서로 곁눈질하기도 하고 상호 영향을 주기도 한다.
○ 대한민국 정부에서 탈춤 전승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후반부터이다.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를 통해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전승하고 있었던 탈춤들이 포착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포착은 1960년대 무형문화재 제도를 통해서 보다 체계적으로 관리되기 시작했다. 오늘날까지 한국의 탈춤 전승을 가능하게 한 동력으로 ‘대한민국 만들기 작업’과 ‘전통문화 관련 정책’을 꼽을 수 있다. 신생 독립 국가로서 전력투구했던 대한민국 만들기 작업의 하나로 탈춤에 대한 주목이 이루어졌다. 대한민국 만들기 작업이 구체화 된 한 양상으로 나타난 것이 전통문화 관련 정책이다. 뿌리 찾기, 전통의 확인과 계승 작업 등을 통하여 국가 정체성을 구성하려 했다. 독립과 국가의 수립이라는 시대적 정황에서 기인한 국가 정책, 그리고 그것이 구현된 제도 혹은 정책에의 조응이 탈춤 전승의 한 동력이었다.
○ 여기에 ‘탈춤 전승 주체들의 지향’을 또 하나의 동력으로 덧붙일 수 있다. 정책에 대한 탈춤 전승자들의 적극적인 호응이 없었더라면 탈춤 전승은 그리 수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탈춤 전승 주체들의 지향은 인정 욕구였다. 그것은 명예 욕구이기도 했다. 동시에 안정적으로 전승할 수 있는 기반 마련을 위한 기대도 있었다.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다는 것은 자랑스러운 것이었고, 명예로운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인정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구나 이러한 인정에는 안정적 전승을 위한 기반 마련이 따라왔다.
○ 국가의 정책을 통해 지역을 기반으로 한 탈춤들이 주목받았고 발굴되었다. 그들 중 일부는 여전히 전승되고 있었던 것이고, 어떤 것은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던 것이었기도 했다. 이러한 탈춤들을 하나하나 포착해내고 주목하게 만든 것은 비단 국가만은 아니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탈춤 전승을 해왔던 연희자들, 그것들에 주목하고 채록하고 주목받게 만든 탈춤 연구자들 역시 탈춤 전승에서 나름의 역할을 했다. 앞장에서 살펴본 탈춤과 관련된 다양한 논의들은 바로 탈춤 연구자들이 중심이 되어 수행한 것이었다. 그들의 논의와 논쟁은 탈춤에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탈춤 전승에 일정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 탈춤의 전승을 위한 국가의 정책, 관련 연구자들의 활발한 탈춤 연구, 그리고 탈춤 전승자들의 부단한 노력 등이 어우러져 탈춤의 국가 차원의 관리와 보호 체계가 만들어진다. 대한민국 정부는 1958년에 시작하여, 1961년 이후 매년 열리게 된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이후 ‘한국민속예술축제’로 개칭되었다가 현재 ‘한국민속예술제’로 명명됨)를 지속해서 지원했다. 그리고 1961년 10월 문화재관리국 직제가 공포되고 ‘문화재’라는 용어를 공식적으로 사용하게 된다. 그리고 1962년 1월 법률 제961호로 문화재보호법이 제정 공포되었다. 이에 따라 탈춤의 국가무형문화재 지정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 1964년 양주별산대놀이를 지정한 것을 시작으로, 통영오광대(1964년), 고성오광대(1964년), 강릉단오제(강릉관노놀이)(1967년), 북청사자놀음(1967년), 봉산탈춤(1967년), 동래야류(1967년), 강령탈춤(1970년), 수영야류(1971년), 송파산대놀이(1973년), 은율탈춤(1978년), 하회별신굿탈놀이(1980년), 가산오광대(1980년) 등이 지정되었다. 국가의 관리와 보호 정책 속에서 탈춤은 보존회를 중심으로 전승이 이루어졌다. 특히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탈춤의 경우, 대표 전승 단체로 해당 탈춤의 보존회가 인정받았다.
○ 현재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탈춤 보존회에서는 일정한 전승 지원금을 국가로부터 받고 있다. 탈춤 보존회는 각각의 상황에 맞추어 전승에 힘쓴다. 전승의 토대가 될 탈춤 정본의 마련, 체계적인 전수 교육을 위한 기본춤의 구성, 사라진 대목이나 춤사위 탐구와 복원 노력 등이 탈춤 보존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보존회를 중심으로 한 전승 활동의 결과, 현재 탈춤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그 존재를 알고 있는 전통연희로 자리 잡았다. 고성오광대 보존회의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탈춤 전수 교육 경험자가 4만 명이 넘는 보존회가 존재하기도 한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탈춤 한 번 정도는 보았으며, 직접 춤을 춘 경험이 있는 이들도 적지 않다.
○ 지금까지 ‘보존회 중심의 원형 전승’이라 했지만, 애당초 탈춤의 ‘원형’ 전승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실제 무형문화재 체제상의 원형은 그야말로 원래 그대로가 아니라, 관리나 운용 차원의 개념이었다. 이러한 사정을 염두에 두고 2015년 이후부터 ‘전형’이라는 개념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새로운 용어가 사용되게 됨에 따라 이에 대한 여러 견해가 피력되고 있지만, 이 역시 무형문화재 관리나 운용을 위한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전형으로 대체된 것은 탈춤 전승의 실제를 정확하게 포착할 수 있는 용어를 쓰고자 하는 지향에서였다. 따라서 전형은 새로운 그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탈춤 전승의 실제에 더 부합하는 용어를 찾는 과정에서 선택된 것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할 듯싶다.
○ ‘보존회 중심의 원형 전승’의 역사는 복원과 체계화의 역사라 할 수 있다. 이른바 ‘원형 그대로’를 지향하면서 지역 탈춤이 전국화되고 체계화되었다. 그리고 그 전승의 양상은 ‘탄압→ 단절 → 복원과 체계화’의 서사를 공고화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대한민국의 대표 상징으로 정체화되기도 했다. 또한 전수 교육을 위한 ‘기본춤’의 체계화 혹은 생성의 양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원형 전승’이라는 지향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 형식에 치중한 전승의 모습 역시 이 전승 양상에서 나타나는 특징이라 할 수 있다.
○ 앞서 언급했듯이 ‘보존회 중심의 원형 전승’과 더불어 해방 이후 또 하나의 전승 양상은 ‘문화운동 차원의 창조 전승’이다. 이 전승 양상은 그 전승 공간이나 지향이 ‘보존회 중심의 원형 전승’과는 아주 다르다. 이러한 전승 양상에 대해 채희완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탈춤의 역사적 맥락으로 볼 때 1970년대는 가히 ‘대학 탈춤의 시대’라고 일컬을 만하다. 18, 9세기를 전후하여 농촌에서 도시로 탈춤이 옮겨오면서 탈춤사의 한 분기점이 이루어졌다면 1970년대에 이르러 또다시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였다고 하겠다.”
“전승사라 한다면 현존 탈춤인 경우에는 그 정도로 보고, 좀 더 중시해야 할 것은 60년대 말에서 특히 70년대에 들어와서 대학가를 중심으로 이른바 탈춤부흥운동이랄까가 일어나면서 탈춤의 새로운 전환기를 맞았다는 사실일 겁니다. 현존하는 탈춤의 생성초기가 그 전 탈춤과의 역사적인 전환기라면 60년대 이후에는 또 다른 역사적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 느낌이 듭니다.”
○ 이렇게 채희완은 탈춤 전승사에서 18세기에 일어난 획기적인 양상에 비견되는 또 하나의 획기적인 양상으로 대학가의 탈춤부흥운동을 꼽고 있다. 이 탈춤부훙운동이 ‘문화운동 차원의 창조 전승’이라 부를 수 있는 사례이다. 이 전승은 공공의 적들에 대한 풍자와 민중 생활에 관한 주목이라는 탈춤의 주제에 주목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 경향은 대학생들의 자발적이고도 적극적인 전승 활동으로 시작되었다. 1970년대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1990년대까지 이어진 시기에 대학마다 탈춤 동아리가 만들어지고, 수많은 대학생이 탈춤을 추었다. 흔히 이 시기를 ‘대학 탈춤의 시대’라 부르고, 그 움직임을 ‘탈춤부흥운동’이라 부른다. 탈춤이 지향했던 주제 의식과 민중에 주목하려는 흐름이,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만난 시기가 이때였다.
○ 한국 탈춤의 전승사에 있어 주목할 만한 현상은 대학생들의 자발적인 전승 활동이다. 대학생들의 탈춤 전승 활동의 시작은 1960년대부터이지만, 1970년대 이후 본격적인 하나의 움직임으로 나타났다. 1970년대에 이르면 대학생들이 탈춤의 전승자이자 향유자로 나서기 시작한다. 1969년 부산대를 시작으로 1970년대 초중반 서울대, 이화여대, 연세대, 서강대, 고려대 등에서 탈춤 동아리가 만들어지고 탈춤 공연이 벌어졌다. 1980년에 이르면 전국의 거의 모든 대학에서 탈춤 동아리가 만들어진다. 흔히 이 시기를 ‘대학 탈춤의 시대’라 부르고, 그 움직임을 ‘탈춤 부흥 운동’이라 부른다. 전국의 수많은 젊은이가 탈춤을 즐겼고, 직접 전승하기도 했다. 이러한 양상에 대해 조동일은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1970년대 이후 20여년 동안, 대학에서 탈춤에 대한 관심이 크게 일어났다. 학생들이 탈춤을 배워 공연하고, 탈춤을 새롭게 만든 마당극을 공연하는 데 대단한 열의를 가져, 대학가를 뒤흔들어 놓았다. 그것은 탈춤 재생을 위해 크게 다행스러운 일일 뿐만 아니라, 잊히고 짓밟힌 민중예술을 되찾아 계승해서 문화제국주의를 극복하고자 하는 제3세계문화운동의 모범사례로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 이렇게 탈춤부흥운동은 “제3세계문화운동의 모범사례”로 평가할 만하지만, 동시에 무형유산 전승의 차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양상은 무형문화유산 전승의 역사에서 유례없는 일이었다. 대한민국의 다른 무형문화유산은 물론이고, 전 세계의 무형문화유산 전승의 역사에서 유사한 사례를 쉽게 찾을 수가 없다.
○ 탈춤의 전승자이자 향유자로 직접 나선 대학생들은 탈춤 동아리를 만들었고, 직접적인 전승 활동을 했다. 이들은 보존회에서 직접 배운 탈춤으로 정기공연을 했다. 그뿐만 아니라 축제 행사나 대학 간의 교류 공연, 위문 자선 공연, 각 지역사회의 행사 참여 등으로 활동의 폭을 넓혔다. 또한, 탈춤 전승 현장 조사, 탈 제작 전시회, 세미나 등의 활동 역시 대학 탈춤 동아리는 수행했다. 이러한 대학생들의 탈춤 부흥 운동은 기성 문화 전반에 대한 강력한 대항의 움직임이 되었다. 한 걸음 나아가 우리 문화의 향방을 가름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 대학생들의 탈춤 전승은 ‘오늘날 과거의 탈춤을 왜 추는가’에 대하여 끊임없이 자문하면서 이루어졌다. 그들은 전통적 탈춤을 배우고, 단절되었던 탈춤을 복원하기도 했다. 서강대학교 탈춤 동아리의 가산오광대 복원이 대표적 사례이다. 그렇게 복원된 가산오광대는 1980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990년대 진주 지역의 문화운동 차원에서 복원한 진주오광대 역시 대학교 탈춤반 출신이 중심이 되어 전통적 탈춤을 복원한 대표적 사례이다. 대학생들의 활동은 전통탈춤의 단순 전승이나 복원 작업에 멈추지 않았다. 민족문화에 대한 낭만적인 태도에서, 탈춤에 반영된 민중의 실체에 관심을 가지고 탈춤의 창조적 계승을 모색했다. 그 결과 창작탈춤이 등장했다. 전통탈춤을 바탕으로 민중적 해학과 풍자라는 비판의식을 담은 당대의 탈춤을 만들려 한 것이다.
○ 나아가 마당극이라는 새로운 공연 양식을 창출하기도 했다. 대학교 축제의 대명사인 ‘대동제(大同祭)를 만들어낸 것도 이들이었다. 1983년 고려대에서 시작되어, 1980년대 후반 전국의 거의 모든 대학에서 벌어졌던 대동제는 대학 축제의 이름을 바꾸었다. 그 내용과 형식 역시 획기적으로 바꾸었다. 대동제라 불리는 그 축제의 중심에 탈춤 동아리와 그들의 탈춤 공연(전통탈춤, 창작탈춤, 마당극 등)이 자리했음은 물론이다.
○ 대학 탈춤 동아리의 전승 활동은 우리 사회 문화를 재정립하려는 움직임이었다. 그 움직임의 한쪽에는 우리 문화의 뿌리에 대하여 자각하고, 이를 계승하려는 노력이 자리하고 있었다. 다른 한쪽에는 당시 정치적 상황에 대한 비판의식이 자리했다. 특히 산업화의 영향으로 상대적으로 고통받는 경제적 약자인 민중에의 관심 고조가 큰 역할을 했다. 우리 문화의 뿌리에 대한 자각과 비판적 정치의식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 대학교 탈춤 동아리의 전승 활동이었다. 대학교 탈춤 동아리의 전승 활동은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문화운동으로, 강력한 문화·사회·정치적 대항 담론으로 자리했다. 그리하여 탈춤을 활용하고 그 정신을 계승하는 단계에서 새로운 형식과 양식의 창출로까지 이어지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 ‘보존회 중심의 원형 전승’과 비교해 보았을 때 ‘문화운동 차원의 창조 전승’은 원형의 강박에서 자유로웠다. 대학 탈춤 동아리들의 탈춤 전승의 논리는 창조적 계승이었다. 이른바 ‘원형 전승’에 대한 지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소수였고 초기에 한정되었다. 1970년대를 넘어서고 1980년대를 지나며 그들의 이러한 지향은 보다 강해졌다. 이른바 ‘원형 탈춤’ 혹은 ‘전통탈춤’은 돌아갈 거점 혹은 마음의 고향이라 여기고 있었지만, 나아가야 할 곳은 아니었다. ‘문화운동 차원의 창조 전승’에서는 사실 ‘원형 그대로’의 탈춤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원형 그대로의 탈춤이라 하는 것들을 박제화된 것이라 비판하고 거부하기도 했다. 원형과 관련해서 유연했다. 그게 무엇이든 창조적으로 계승 혹은 재창조하면 그만인 것으로 생각했다. 그들의 핵심은 창조적 계승 혹은 재창조에 있었기 때문이다. 창조적 계승이라는 이름 아래, 창작탈춤, 마당극 등에 치중한 것이 그들이 전승 양상이었다. 이른바 원형 탈춤은 창작탈춤이나 마당극 창작을 위해 활용되는 자원 정도로 이해되었다.
○ ‘보존회 중심의 원형 전승’이 형식적이고 표면 중심의 전승이라 할 수 있다면, ‘문화운동 차원의 창조 전승’은 내용 중심이고 이면적 전승이라 할 수도 있다. ‘문화운동 차원의 창조 전승’은 탈춤의 정신 계승을 지향한다. 이러한 지향과 원형 전승에서의 자유로움이 마당극, 마당굿, 대동제 등으로 이어지는 성과를 낳은 것이다. 물론 ‘원형 전승’에 비견되는 ‘정신 계승’의 경직성이 비판 거리로 등장하기도 했다. 다음과 같은 조동일의 일갈이 그 좋은 사례이다.
“탈춤에 열을 올린 그 많은 대학생 가운데 탈춤의 원리와 그 계승 방향에 대해서 깊이 있는 연구를 계속한 사람은 없다. 그 때문에 탈춤의 원리에 대한 연구가 계속되지 못하고, 탈춤을 오늘의 연극으로 계승하는 방향이 올바르게 설정될 수 없다. 마당극 운동이 제대로 될 수 없었던 이유도 거기 있다. 마당극은 정치적인 억압에 대해서 항거하는 민중운동으로서는 커다란 의의가 있지만, 예술운동으로서 평가할 만한 성과를 이룩하지 못했다. 예술로 형상화하지 않은 직설법을 남용해서 탈춤에 대한 오해나 불신을 자아내게 하는 역기능을 수행하기까지 했다.”
“전국 대학의 탈춤패나 마당극패는 대학을 불신하고 학문을 우습게 만드는 장외경기를 하느라고 들떠 있는 것이 진보적인 자세라고 하고, 학문을 바로잡아야 역사가 발전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문제이다. 정치운동의 열기가 학문을 황폐하게 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어서, 그런 예슬 쉽사리 들 수 있으나, 근래 우리 주변에서 일어난 일 만큼 어처구니없는 것은 더 찾기 어려울 것이다. 더구나 연극공연의 정치운동 때문에 연극학을 망친 것은 전에 없던 일이다.”
○ 그런데 이 비판은 좀 과한 감이 있다. 탈춤의 정치 투쟁적 전유나 이를 가능하게 한 정신적 계승의 경직성에 대한 지적은 수긍할 만하지만, 이 비판은 대학 탈춤패를 예술운동을 지향하는 전문적 집단임을 전제로 하고 있다. 굳이 비교하자면 대학에서의 탈춤 전승은 도시탈춤이나 떠돌이탈춤이기보다는, 농촌탈춤의 성격이 강하다. 대학생 탈꾼들은 전문가들이기보다는 비전문가이다. 그 문제의식의 방향이 사회나 국가로 향하기는 했지만, 그리고 적지 않은 수의 예술가와 문화활동가를 만들어내기는 했지만, 대학 탈춤패가 존재하는 공간은 폐쇄적이고 자기충족적인 대학이었다. 이러한 속성을 가진 대학 탈춤패에게 전문적인 예술운동 차원의 성과를 요구하고 비판한다는 것은 과하다.
○ 그 비전문성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대학 탈춤반의 창조적 계승의 질적 수준은 물론 만족스럽지 않다. 춤을 예로 들면, 일정한 양식 혹은 틀에다 당대의 내용을 끼워 넣는 식의 방법이 주를 이루었다. 여기서 크게 진전하지 못했다. 여러 창작 탈춤이나 마당극에서 재담은 창조되기도 했지만, 춤의 창조적 계승이 이루어졌는가에 대해서는 조심스럽다. 대학탈춤운동에서 주로 치중했던 것은 내용 중심의 창조적 계승이었다. 이른바 형식 차원의 창조 전승은 미진했다. 새로운 춤을 만들어내기는 했지만 아쉬움이 크다. 최근 한예종 연희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시도되는 형식 차원의 창조적 계승 시도를 주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섞어잽이’로 명명된 그 시도는 탈춤 춤사위의 패턴을 찾아내고, 그것을 해체했다가 재조합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서로 다른 야류와 오광대 계통의 탈춤들이 만나 새로운 춤사위를 만들어낸다. 산대놀이 계통과 탈춤 계통의 혼종이 시도되기도 한다. 이제 막 시작하는 상황이라 그 미래를 쉽게 전망할 수는 없지만, 형식의 창조적 계승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가치는 있다.
○ 국가 차원의 전승 관리 곧, ‘보존회 중심의 원형 전승’과는 다른 ‘문화운동 차원의 창조 전승’의 역사는 아직 다 쓰이지 않았다. 1970년대 정도만이 정리되었을 따름이다. 쓰이지 못한 이유가 여전히 살아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라면 사실 크게 아쉬울 필요가 없다. 하지만 사정은 그렇지 않아 씁쓸하다. 1980년대 중반 이후 나타난 ‘집단 대사’, ‘집단 주인공’, ‘대사의 축소와 춤의 강화’, ‘집단춤의 강조’ 등의 양상이 예술적 고민의 성과보다는 당대 대학 공동체의 상황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는 점을 말할 필요가 있다. 80년대 이후의 창조적 전승, 대동제 등에 대한 정리가 필요하다. 프레시안에서 이루어지는 ‘탈춤과 나’ 기획이 보여주는 각양각색의 후일담이 그래서 흥미롭다.
5. 탈춤 전승사를 다시 쓰기 위하여
○ 지금까지 3백 년에 걸친 탈춤의 전승사를 살펴보았다. 탈춤 관련 담론에 영향력이 큰 논의를 실마리 삼아 필자의 생각을 얹는 수준의 접근이었다. 삼백 년의 걸친 세월 동안 탈춤 전승의 역사는 크게 두 차례의 꺾임목이 있었다. 18세기 현전 탈춤의 등장 혹은 도시탈춤의 등장이 그것이고, 20세기 후반 대학 탈춤의 등장이 또 다른 하나이다. 전자에 대해서는 여러 이견이 있다. 이는 역설적으로 학계에서 활발하게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 그 논의가 확산하지 못하고 있다. 세계 무형유산의 차원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전승 양상이라는 점을 보다 강조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선차적으로 필요한 일은 관련 자료의 정리이다. 특히 1980년대 이후의 양상에 대한 자료 정리가 시급하다. 이왕이면 그 자료 정리와 더불어 실증적 연구와 정치한 이론적 접근도 함께 이루어졌으면 한다. 다분히 개인적 전망이지만, 멀지 않은 시기에 자료 정리와 관련 연구들이 발표될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
○ 18세기 탈춤 전승의 획기적인 양상에 대한 논의는 이제 순연한 민중 영역의 틀에서 나올 필요가 있다. ‘민중주의’라 불리기도 하는 이 논의는 여러 제약을 불러일으킨다. ‘자생론’, ‘반 침강문화론’과 연결된 풍농굿 기원설은 더 유연해질 필요가 있다. 특히 500년 이상 지속된 광대 조직의 실체를 인정하게 된다면, 그들의 역할과 상층문화와의 관계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광대 조직의 실체와 그 역할을 인정할 때, ‘중세 수직적 질서와 가치의 패퇴와 근대 수평적 질서의 생성과 진입’이라는 조선 후기 탈춤 전승사의 획기적이고도 새로운 면모를 포착할 수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 조선이 망하고 일제의 강점이 시작되면서 나타난 탈춤 전승의 흐름을 ‘탄압과 단절의 서사’로 정리하는 것은 통념이다. 이는 학계를 넘어서 전승 현장의 전승자들, 일반 국민까지 그렇게 인식한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탈춤 전승의 양상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다행히 그 단순치 않은 문제들을 논의할 수 있는 관련 문헌이나 자료가 발굴되고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단순치 않은 일제강점기 탈춤 전승 양상에 대한 논의가 가능한 시점에 이르렀다. 제국과 식민지라는 거시적 구도를 물론 염두에 두어야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전국과 지역, 전승자 개개인의 욕망, 전문가 혹은 기획자의 등장 등으로까지 논의 대상을 넓히고 세밀화할 필요가 있다. 시각을 달리할 필요도 있다. 단순화해서 명쾌하지만 그만큼 상투화되어버린 선입견에서 해방될 때, 우리는 새로운 혹은 또 하나의 시각을 가질 수 있다. 적어도 현재까지의 연구 결과를 놓고 보았을 때, 탄압과 단절의 전승 서사는 균열하고 있다.
○ 해방 이후 탈춤 전승에서 그동안 중심이 되어온 것은 ‘보존회 중심의 전승’이었다. 당연히 주목받은 것도 이러한 유형의 전승이었다. ‘보존회 중심의 전승’은 식민지 경험을 한 국가 특유의 나라 만들기 차원의 움직임이 구체화한 것이다. 무형문화재 제도를 통한 전승의 양상이 그것이다. 원형을 강조하고 전통을 강조했지만, 그것이 구성되는 것임을 인지했을 때 나타나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아니 이미 그 논쟁은 시작되었다. 그런데 우리가 더 주목하고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전승 양상이다. 다른 무형유산은 물론이고, 세계 차원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대학생 주도의 탈춤 전승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동안 전승 관련 논의에서 중심에 서지 못하고, 비공식적으로 혹은 일부 영역에서 주변화된 논의로만 존재했던 것을 부각할 필요가 있다. 그만큼 독특하고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 이를 위해서는 일차적 자료 정리와 기초 연구가 필요하다. 대학 탈춤반 구성원 개개인의 연대 조직이 아니라 탈춤반 자체가 연대하는 조직의 형성(서울지역탈패협의회 등), 상황이 만들어낸 1980년대 중반의 독특한 연행 방식들(집단 대사, 집단 주인공, 대사의 축소와 춤의 강화, 집단춤의 강조 등) 등이 논의될 1980년대 이후의 탈춤 전승사를 기대해 본다. 이들의 활동에 대해서는 아직도 정리되지 못했다. 1970년대나 80년대 초반까지의 대학 탈춤반이나 마당극 집단에 대한 정리는 시도되기도 했지만, 1980년대 이후의 경우 아직 시도조차 되지 않았다. 과거 탈춤이 그랬던 것처럼. 혹은 과거 탈꾼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은 자료를 쉽게 내어주지 않는다. 아니 남겨놓지 않았다. 그것은 정치적 상황 때문일 수도 있고, 천성 탓이기도 하다. 하지만 『기완별록』을 통해 19세기 마지막 산희와 야희의 연행 모습을 남겨준 벽동병객(碧洞病客)처럼, 혹은 18세기 본산대탈춤의 뚜렷한 존재를 여지없이 드러낸 ‘정조 시대 불량 선비’ 강이천(姜彝天)처럼 자료를 남겨놓은 이들이 있다. 대동제 관련 연구나 프레시안의 ‘탈춤과 나’ 시리즈를 주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1세기에도 여전한 구술문화 전통의 강력한 힘을 필자는 확인한다.
○ ‘조선 후기 탈춤 전승의 획기적 전환의 새로운 면모 인식하기’, ‘일제강점기 탄압과 단절의 서사 넘어서기’, ‘해방 이후 주목하지 않았던 획기적인 탈춤 전승의 이면 주목하기’ 등으로 요약할 수 있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여기에 한 가지 덧붙여 보기로 한다. 그것은 한반도 차원의 탈춤 전승사 서술이다. 이미 예상했겠지만, 북한 지역의 탈춤 전승사 정리가 앞서 말한 사항들만큼 시급하다. 김일출의 성과 이후 사실상 공식화되지 않은 북한 탈춤의 전승 양상을 이제 논의해야 할 때이다. 남한의 보존회 중심의 원형 전승과는 다른 차원, 흡사 문화운동 차원의 창조 전승과 유사한 모습을 보이는 것 같지만, 그것과도 다른 북한 지역 탈춤의 전승사 정리가 우리 앞에 놓인 시급한 과제이다. 그것은 우리가 할 수도 있고, 북한에서 할 수도 있다. 물론 같이 할 수도 있다. 한반도 차원의 탈춤 전승사를 기술하면서 독특하지만 기쁜 것만은 아닌 이산(diaspora)의 탈춤 전승사도 여기서 가능하다. 가능할까? 물론 가능하다. 없던 길을 만들어낸 이들이 탈꾼들이었고, 탈춤판 주변의 우리들이기 때문에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