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연구
코로나19 팬데믹 재난 상황은 무용의 현장을 위협하고 있다. 단순히 공연예술 시장이 위축되어서가 아니라 몸들이 만나는 대면의 장을 축소하고, 비대면이 활성화되면서 몸들 사이에 분리가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몸을 표현의 주체이자 대상으로 하는 무용에서 몸들의 분리는 무용이 제작되는 환경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몸의 예술인 무용 자체의 변화를 견인하는 것이다. 또한 무용 공간의 변화- 2차원 영상 공간으로의 이동-는 예술 매체로서의 몸의 한계와 가능성에 대해 재사유하도록 강요하고 있으며, ‘지금, 여기’에서 발생하는 사건으로서의 무용, 퍼포먼스, 공연예술의 존재양식에 질문을 제기한다. 동시성, 현장성의 극장예술이었던 무용의 근본적인 기반이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발달과 외부 환경에 의해 흔들리면서 공연예술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현존presence 또한 다시 질문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다.
현존이라는 개념이 공연예술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후반에 등장한 몸과 물질성을 강조하는 비재현적 성격의 작품들이 공연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텍스트 기반 위에 있는 기호적 의미로부터 실재성에의 강조를 위한 몸, 물질성, 에너지 등이 중심이 되는 공연들이 많아지면서 현존이라는 개념이 부상하게 된 것이다. 1960년대 이후 시작된 해프닝이나 바디 아트, 퍼포먼스 아트는 시간의 현재성 속에서 신체 행위를 중심으로 하는 이벤트를 펼치며 공연의 행위자와 관객 사이의 일체의 매개 없는 직접적 현존을 통해 행위자와 관객의 동시적 현존감에 도달하고자 했다.
현존은 한 마디로 말해, 몸과 물질성을 중심으로 하는 공연들이 만들어내는 ‘지금, 여기’에서의 존재론적 합일감이다. 지금, 여기에, 동시에 존재한다는 시공간적 직접성과 생생함을 우선적으로 가지는 동시에 대상에 대한 의식(consciousness), 현상 혹은 행하는 자와 보는 자의 관계를 의미하고, 때론 몸, 물질성, 에너지와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알 수 없는 신비감이나 심리적 힘, 철학적 의미에서 근원과의 합치, 존재론적 충일감을 의미한다. 그러나 현존 개념은 몸이나 행위성, 관객들과의 직접적 관계보다 넓은 의미에서 개방적이며 신축적인 개념으로 확장된다.1)
현존이 몸과 지금, 여기라는 시공간의 결합에서 발생하는 어떤 것이라 할 때, 몸을 주체이자 대상으로 하는 무용에서 현존은 사실 몸과 분리할 수 없는 관계다. 그러나 무용에서 현존에 대해 논의하는 경우는 드물다고 할 수 있다. 무용은 언제나 몸의 예술이었고, 그것은 언제나 ‘지금, 여기’에 실재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현존에 대한 인식이 희미했을 것이다. 그러나 양식적인 춤이 태동하던 시기에 몸과 현존은 춤의 본질적인 속성이었다. 이에 대해 안드레 레페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2)
바로크 시대의 무용 이론서인 라울-오제 푀이에Raoul-Auger Feuillet의 “코레오그래피, 혹은 지시적인 특성, 형상, 기호로 무용을 서술하는 기술(Chorégraphie ou l’Art de Décrire la Danse, par Caractères, Figures et Signes Démonstratifs)(1699)”에 몸과 현존이 무용의 본질적인 힘으로 등장한다고 말한다. 이 책의 오프닝 페이지에는 도식화된 극장 공간, 도식화된 신체 형상이 나타나는데, 도식화된 공간은 빈 사각의 공간으로 재현되며, 도식화된 신체는 흔적이 복합적으로 더해진 모습으로 재현되었다.
이렇게 흔적을 중층화한 몸은 일종의 추상적 서체(calligraphy)로 나타나는데 이렇게 인간적인 형상으로부터 스스로를 거리 두는 재현적 신체는 현존의 확실성으로부터 자신을 떼어놓는 신체 그 이상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서체적 신체는 “몸이라는 현존에 관하여(De la presence du Corps)”라는 캡션을 도식화된 극장 공간 바로 아래에 동반하고 있는데, 레페키는 이에 대해 결국은 몸을 부재하는 것으로 만들 것이면서도 현존이라고 쓰고 있는 이 문구가 몸은 부재하지만 현존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몸은 현존만도 아니고, 몸만도 아니고, 차이라는 변증법적 수단에 의해 다른 몸속으로 침투하는 사이의 존재로서 스스로를 선언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몸과 현존의 분리가 무용의 고유한 특성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무용은 몸과 현존의 틈 사이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유럽의 무용무대에서 이것은 오랫동안 잊혀진 사실이었다. 몸과 현존이 다시 무용의 본질로서 유럽 현장에 도착한 것은 1990년대다. 오랫동안 무용은 움직임을 그 본질로 생각했으며 그것은 운동을 근간으로 하는 근대인의 사유로부터 기인한 것이었다. 1990년대 나타난 일련의 안무가들이 서구 주체성의 역사를 몸을 통해 사유하는 후기구조주의 사상을 받아들인 안무법을 발전시키며 몸은 안무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그리고 현존은 페기 펠란이 “퍼포먼스의 존재론”3)에서 정의한 바와 같이 공연예술의 존재론적 본질인 덧없는 사라짐의 짝패로서 항시적으로 나타남과 사라짐을 반복하며 부재와 현존의 존재론을 구성해왔다.
말이 길어졌지만, 이 글이 의도하는 것은 몸과 현존은 다양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고 있으며, 매개의 방식에 따라 다시 달라질 수 있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몸과 현존의 틈 사이에 있는 시간, 공간, 매체 그리고 그들의 관계에 의해 몸과 현존의 관계가 다양하게 발생한다. 최근의 코로나 팬데믹 상황이 만들어낸 몸들의 분리와 디지털 기술의 일상과 예술 속으로의 개입은 예술가들로 하여금 몸과 현존에 대해 다시 고민하게 만든다. 지금부터 그런 고민을 담은 두 작품을 살펴보면서 시간과 공간의 다양성 속에서 달라지는 몸과 현존의 양상을 다시 생각해보고자 한다.
지금, 여기의 현존: 아트프로젝트보라 〈별양別樣〉
앞서 살펴보았듯이 1990년대 초반의 유럽 무용 무대는 몸을 무용의 중심에 두는 안무법으로 선회한다. 그러면서 벌거벗은 몸 그 자체를 드러내고 몸의 근원 혹은 몸의 정체성에 대해 사유하는 공연들이 범람하기 시작했다. 레페키는 이 벌거벗은 몸들의 범람이 페기 펠란이 공연예술의 존재론적 본질로 정의했던 덧없는 사라짐에 대한 저항이자 춤추는 몸의 지금, 여기를 포획하고자 하는 ‘현존에의 집착’4) 때문이라고 진단한 바 있다. 그리고 레페키는 안무를 들뢰즈 가타리의 용어를 빌려 덧없이 사라지는 시간을 ‘포획하는 장치(apparatus of capture)’5)로 정의하고, 무용이 이 덧없이 사라지는 시간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날 것을 주문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벗은 몸들이 포획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드러내고자 했던 벗은 몸이 단지 물질로서의 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몸이 관통하고 있는 시대를 포획하고, 공간을 포획하며, 나의 몸과 다른 몸 사이, 나와 나를 둘러싼 것 사이의 것들을 포획하는 몸은 지금 우리의 현재 상태로서 우리 몸이 관통하고 있는 시대를 적나라하게 노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지금부터 살펴 볼 아트프로젝트보라의 〈별양〉(2021, 최소영 안무)은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한 통제와 감시아래 있으며 이에 저항하는 벌거벗은 몸에 다름없는 한 겹의 얇은 표면을 가진 몸을 통해 고발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별양〉은 8월 15일 춘천공연예술제 몸짓극장에서 초연되고, 10월 29일 시댄스에서 공연된 작품이다. 작품 제목은 살과 뼈를 나누고, 가르고, 분리시키는 별(別)과 겉으로 나타나는 생김새나 모습이란 의미의 양(樣)의 합성한 것으로 “팬데믹의 불안정함으로 인해 변해가는 몸의 상태를 통해 세상을 말하는 방법을 찾고자 했다”는 작품의도를 담고 있다. 두 명의 무용수는 속옷은 물론이고 몸에 새긴 타투까지 훤히 비쳐 보일 정도로 얇은 핑크색 레오타드를 입고 등장했고, 그들의 몸 바깥쪽 테두리를 따라 가느다란 검은 줄이 그려 넣어져 있다. 드러난 얼굴과 팔, 다리의 맨살은 초록색 조명이 비춘다. 얇은 의상은 알몸이나 다름없는 혹은 더 또렷하게 ‘노골적 신체(explicit body)’를 드러내는 도구이자, 내외부와 소통하는 몸의 삼투성을 드러내는 표면이다. 그 위에 그려진 간결한 선은 몸의 구체성을 삭제하여 도식화된(schematized) 사물, 서체적 신체로 만든다. 그리고 초록색이 감도는 얼굴과 팔, 다리는 이들을 우리와는 다른 생물체로 보이게 한다.
통상적으로 몸의 윤곽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노골적 신체는 자본주의 사회가 기획한 스펙터클 사회가 촉진하는 소비의 전략이다. 잘 다듬어진 몸은 자본주의 사회의 몸의 윤리이자 재화이고 재생산을 위한 자본인 것이다. 그러나 〈별양〉의 노골적 신체가 가진 기이한 색깔의 표면과 기형적 형태는 자본주의의 스펙터클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실패를 드러내는 불편함이다. 깊이 구부러진 어깨와 등, 배를 앞으로 내밀고 뒤로 걷는 움직임, 어깨를 한껏 뒤로 빼고 팔을 몸 뒤로 멀리 보내 점프 등은 전방을 향하여 있고, 전방을 향해 움직이는 것을 정상으로 인식하는 우리 몸에 역행하는 움직임이다. 때로는 대칭적으로, 때로는 비대칭적으로 미러링 되는 동작들은 서로의 몸에 작동하는 힘을 의미한다.
“코로나로 인해 더 강하게 압박해오는 여성 신체에 대한 제한, 한계, 경계 지워짐, 움직인다는 것 자체를 침범하는 현재의 상황에 대한 반항으로서 몸의 기형, 시대에 대한 역행으로서 쉽게 읽을 수 없는 노골적인 몸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안무가 최소영의 말은 현재 우리의 시간이 역행하고 있음에 대한 고발이자 분노일 것이다. 시대에 대한 저항이자 분노로서의 기형이고, 역행하는 움직임, 노골적 신체인 것이다.
레페키는 1990년대 유럽의 무용무대에 등장했던 벌거벗은 몸들은 의미를 벗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몸의 의미를 두텁게 하는 것이라 말했다.6) 노골적 신체는 현재라는 시간에 대한 집착 속에서 번성하고 대물림된 비판의 재료로서, 단순히 벗은 몸일 뿐 아니라 역사의 각인을 온전히 드러내고, 몸을 파괴하는 역사의 과정을 노출하는 것으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 특히 표식되는(marked) 시간의 피부, 그 표면의 힘을 드러내는 것이라 한다. 페기 펠란이 퍼포먼스에 대해 정의한 “미친 듯이 충만한 현재(manically charged present)”7)를 빌려 이 벗은 몸들을 정의하며, 이들이 자연으로 인식되는 몸의 ‘자연스러움’을 비판하고, 권력의 통제 하에 거주하고 있는 곤경에 처한 상황을 노출한다는 것이다. 몸의 표면은 긴장의 장소이자 역사적 기입의 장소로 의도된 인용의 장소인 것이다.
최소영의 〈별양〉 또한 분리된 몸들의 고통을, 감시와 통제하에서 기형으로 변해가는 몸의 상태를 투명한 얇은 피부에 기입하고 뒤틀린 몸짓을 통해 시대를 읽어내고자 한다. 〈별양〉이 보여준 이 ‘미친 듯이 충만하 현재’의 몸들은 코로나 팬데믹을 살아가는 우리의 현존 그 자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동시에, 어디서나의 현존: 로이스 응Royce Ng 〈현존〉
근대적 환경에서는 시간과 공간은 장소의 위치 구속성을 통해 서로 묶여 있었다. 그러나 현대는 시간과 공간의 분리를 통해 사회를 구축한다. 이동수단의 발전에 따른 시-공간의 변화와 함께 전 세계의 인터넷 네트워크화는 기존의 시간성, 장소성 개념을 근본적으로 흔들고 있다. 특히 디지털 기술 혁명은 장소의 특수성에 구애받지 않고 시간과 공간을 재결합할 수 있게 한다. 이는 ‘동시에 어디에나’ 존재하는 유비쿼터스 시대를 의미한다. 유비쿼터스는 어디에나 존재한다omnipresent는 의미의 라틴어 ‘ubique’에서 유래한 것으로 모든 물리적 공간을 인터넷 기술로 연결하여 넓은 범위의 시간-공간을 가로질러 이동성과 가상성을 증가시킨다. 이로 인해,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확장되었고 기존의 시간성, 장소성에 대한 의미도 상실되어 지금, 여기에 너와 나가 함께 있음이 중요치 않은 시대가 되었다.
이로 인해 공간(space)은 거기에 이미 있는 장소가 아니라 일련의 문화, 권력적 담론, 그에 대한 지각 방식이 서로 병렬, 교차하는 가운데 비로소 만들어지는 공간, 또 다른 지각방식을 통해 얼마든지 새롭게 변형되고 경험될 수 있는 공간(place)으로 확장되기에 이른다. 디지털 미디어 기술은 이질적인 매체와 매체들이 서로 다양한 방식으로 어긋나고 교차하며 때로는 포개지면서 그곳에서 새롭게 발생하는 의미들, 무엇보다 그것을 지각하게 되는 감각의 공간을 만든다.8) 다양한 매체들이 서로 만나고 어긋나면서 만들어내는 틈새, 그리고 거기에서 새롭게 발생하는 감각과 지각들이 중요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매체와 매체 사이에서 현존은 원격의 공간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물음이 생긴다.
옵/신 페스티벌에 초대된 로이스 응Royce Ng의 〈현존〉(11.11.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은 렉처 퍼포먼스 형식의 원격 라이브 퍼포먼스로 홍콩과 서울이라는 물리적 공간의 차이를 가상의, 원격 현존하는 배우가 컴퓨터를 이용해 관객과 실시간으로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킹 하는 공연이다. 로이스 응은 배우가 눈앞에 실존하고 있음을 전제로 했던 현존이라는 사건을 오직 시각적 사건으로만 현시하는 것을 통해 현존을 실존의 문제가 아닌 지각의 문제로 돌리고자 한다.
작품은 응이 던지는 물질의 몸을 가진 인간도 3D 프린터처럼 디지털 기술을 통해 복제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서 시작한다. 인간의 몸이 신경전달물질을 통해 에너지를 운동으로 전환하는 것도 정보가 외부로 프린트 되는 원리와 같은 것은 아닌지, 감정과 내면의 상태도 시뮬레이션 가능한지, 인터페이스로서의 몸은 디지털 테크놀로지 신체로서의 체화할 수 있는지, 그리고 블랙박스(스마트폰과 카메라)는 다른 공간에 있는 제한된 존재의 현존까지 투사할 수 있는지 등을 지속적으로 질문한다. 그러나 그렇게 한들 그것이 실재의 로이스 응인지, 아니 원천적으로 로이스 응은 실존하는지, 무대 위의 출연자인 한국인 하윤이 로이스 응은 아닌지 하는 실존과 관객 지각에 관한 질문을 다시 던진다. 그는 아무것도 매개함없이 존재한다는 현존에 대한 믿음은 환상에 불과한 것이며, 테크놀로지 없이는 그 어떤 것도 현존할 수 없다고 말한다. “나에게 존재는 기능적인 것이다, 현존은 일종의 부재하는 몸을 느끼는 환상통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리고 천장에서 물이 가늘게 분무되어 내려오며 물분자 커튼을 만들면, 이것을 스크린 삼아 아주 강렬한 빛의 무늬을 투사한다. 현존의 기반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불안정한 물분자 커튼 위로 응은 현란한 빛과 색으로 자신의 현존을 드러낸다.
이 현란한 빛의 무늬를 응의 현존이라 부를 수 있을까. 매체가 그려낸 그 현란한 형상을 그의 몸이라 할 수 있을까. 필립 아우스랜더(Philip Auslander)는 매개되었다는 것이 반드시 라이브니스의 부재. 현실을 부차적이고 인공적인 것으로 복제한 것을 의미하지 않다고 했다.9) 라이브와 매개된 것을 존재론적으로, 기술적으로 구분하고 규정한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중요한 것은 물리적 조건이 아니라 살아있음의 강렬한 느낌인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현존이 실존의 문제가 아니라, 지각의 문제라면 현존은 현존함의 강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문제는 아닐까. 디터 메르쉬(Dieter Mersch)는 지각은 어떤 것이 인상적으로 몸에 새겨 넣어진 것이라 했다. 이 지각이 의미를 만들고 현존의 경험으로 나아가려면, 지각을 매개하는 기호나 언어가, 관습적인 틀과 배치되어 낯선 방식으로 지각되어야 현존의 경험해 도달가능하다고 보았다. 몸이 거기에 있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몸을 통해 비로소 어떤 경험이 생성될 수 있는 조건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몸 자체가 아닌, 몸에 사건들이 기입되는 방식, 그로인해 관객의 몸이 지각하는 몸으로 확장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10)
현존과 부재로 언어를 이해하지 않고, 패턴과 임의성의 정보 체계로 이해하는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만들어내는 인터스페이스의 세계에서는 현존의 경험이 물리적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어 서로 다른 시공간이 동시적으로 관계를 구축하는 그 사이에서 경험되는 원격현존tele presence다. 새로운 지각의 발생과 경험 조건을 강조하는 시대에 무대라는 장소는 지금, 여기라는 전통적인 개념의 장을 넘어서 매체와 매체사이, 실재하는 것과 가상의 것 사이에서 진동하고 있다.
응이 보여준 새로운 현존의 방식은 시간성, 공간성, 몸성에 대해 다시 사유하게 한다. 이것은 결국 다시 몸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으로 돌아간다. 1990년대 이후 유럽의 무용 무대는 ‘몸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몸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질문했었다.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발전과 환경의 변화 속에서 우리는 다시 몸은 무엇인지를 질문하며 가상의 공간에서 ‘몸은 어떤 새로운 것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몸의 잠재성과 새로운 시간성, 공간성을 질문할 때다. 디지털 기술의 도입과 함께 “스펙터클을 향한 존재”로 변해가는 무용 앞에서 몸을 다시 사유하고, 현존을 다시 사유함으로써 무용이 어떻게 다시 새로운 예술이 될 수 있을지 생각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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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방옥, 「연극에서의 현존」, 『한국연극학』, 2015. 5-6쪽.
2) André Lepecki, Of the presence of the body: Essays on Dance and Performance Theory, ed. Andre Lepecki, Wesleyan University Press, Middletown: Connecticut. 2004. p.2-3.
3) Peggy Phelan, ‘Ontology of Performance’, Unmarked: Politics of Performance, Routledge, 1993.
4) André Lepecki, ‘Concept and Presence: The Contemporary European Dance Scene’, in Rethinking Dance History: A Reader, ed. Alexandra Carter, Routledge, 2004, p.93.
5) André Lepecki, ‘Choreography as Apparatus of Capture’, The Drama Review, 2007,
6) Andre Lepecki, Skin, Body and Presence in Contemporary European Choreography.
The Drama Review, 1999, the MIT Press, p.140.
7) André Lepecki, Of the presence of the body: Essays on Dance and Performance Theory, ed. André Lepecki, Wesleyan University Press, 2004. p.6.
8) 이경미, 「인터미디어 시노그래피- 공간, 라이브니스, 현존에 대한 담론의 재구성」, 『드라마연구』, 2015, 133쪽.
9) 이경미, 153쪽.
10) 이경미, 157쪽.
김명현
학부에서는 한국무용을, 석사과정에서는 예술경영을, 박사과정에서는 문화콘텐츠를 전공했다. 무용 작품의 기획에서부터 제작, 생산, 유통, 비평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에서의 언어의 작동에 관심이 있다. 팟캐스트 플랫폼 네이버 오디오 클립에서 〈심플리 댄스〉 채널을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