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연구

2021 한국춤비평가협회 포럼 발제문
춤꾼과 기계
최찬열_춤비평가

공연과 지각

에리카 피셔 리히테의 퍼포먼스 이론에서 공연은 일차적으로 신체적 관계를 통해 형성된다. 그리고 이렇게 신체를 매개로 형성된 공연은 “집중된 지각의 공간”1)을 형성한다. 신체와 신체가 무매개적으로 만나 관계를 이룰 때 공연은 독특한 지각적 배치체로서 성립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공연에서의 관계는 고정적이거나 안정적이지 않다. 그것은 아주 느슨하고 유동적인 체계를 이룬다. 이는 공연을 구성하는 각각의 신체가 일상적 상황으로부터 임시로 이탈하기 때문이다. 공연에 참여한다는 것은, 일상적으로 있던 곳과는 전혀 다른 곳에 있는 것이다. 이로써 공연은 일상적 관계에 균열을 내며 그 안에 잠재해 있는 새로운 관계를 드러내 보여준다. 이는 공연에 참여한 자의 지각이 일상의 필요와 유용성에 소용되기보다는 어떠한 이해관계로부터도 초탈한 무관심한 상황에 놓이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때 무관심은 방임이나 부주의와 같은 의미가 아니다. 지각이 무관심한 상황에 놓인다는 것은 일상적 지각이 비일상적인 지각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이는 견고하게 작동하는 일상의 고착화된 감각-운동 도식이 느슨해지는 것이며, 그 도식에 따라 차단되고 배제되어 온 무용한 감성들이 호출되는 상태에 다름 아니다. 곧, 공연은 일상적 지각 행위를 벗어나는 다른 지각을 활성화한다는 의미에서 지각의 변화를 유발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지각과 경험의 확장을 촉발한다.

 공연은 소통의 매체이다. 하지만 동시대 춤 공연이 매체성을 가지고 있다면, 이는 춤이 단순한 전달의 도구가 아니라 직접적인 매개성 곧, 신체적 소통을 실현한다는 의미이다. 물론 이는 감각, 지각, 정념적 차원에서 행위자와 관객이 공유하는 ‘경험의 직접성’이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공연예술이 여타의 다른 예술과 다른 점은 행위자와 관객의 동시적 현전이다. 그래서 춤 공연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지금-여기의 현장성이다. 이는 춤 공연에 ‘재현’의 문제라는 가장 오래된 화두를 제기한다. 동시대 춤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는 공연에서 재현의 기능이 사라진다는 점이다. 이는 춤 공연이 더는 무엇인가를 다시(re-) 나타나게(presentation)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현시(presentation)한다는 것이다. 기존의 춤 공연이 가진 엄격한 구조가 무시되며, 플롯이 붕괴하고 내러티브가 느슨해지며 우연이 개입하고, 즉흥이 성행한다. 무대와 객석을 나누던 엄격한 구분은 모호해지고, 관객의 참여를 부추기며 그들이 창작 과정에 개입하게 한다. 공연은 하나의 ‘사건’이 되기에 이른다. ‘사건’은 무언가가 지금-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태다. 그것은 하나의 새로운 발생이고 생성이다. 1978년 발표한 짧은 텍스트 「들리지 않는 힘들을 그 자체로 들리게 하기」에서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더는 질료-형상의 용어로 사유하지 말 것을 사방에서 요구받고 있다.”2)

 그것은 사유 일반의 패러다임을 전환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며, 감성론과 예술론 또한 이에서 예외가 될 수는 없어 보인다. 요컨대 질료-형상 도식은 사유 일반은 물론 감성론 및 예술론과 관련해서도 이미 중심성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플라톤적 질료-형상 도식에서의 공연

플라톤은 자신의 책 『티마이오스』에서 우주 창조에 관한 하나의 모델을 제시한다. 이 모델은 고 중세 시대 서양 사람들의 세계관을 지배하였고 그 후로도 오랫동안 서구의 사유를 지배하는 모델이 된다. 그러나 이 모델은 비단 서양 사람들의 사유의 모델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플라톤의 우주 창조 모델은 바로 오랫동안 서구 사회를 지배한 그들의 예술창작 모델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제 판단으로는 먼저 다음 것들이 구분되어야 합니다. ‘언제나 존재하는 것'(to on aci)이되 생성(genesis)을 갖지 않는 것은 무엇이고, ‘언제나 생성되는 것'(to gignomenon)이되 절대 존재하지 않는 것은 무엇인지 말씀입니다. 분명히 앞엣것은 ‘합리적인 설명(logos)과 함께하는 지성에 의한 앎(이해)'(noesis meta logou)에 의해 포착되는 것으로서 ‘언제나 같은 상태로 있는'(aei kata tauta on) 것인 반면에, 뒤엣것은 ‘비이성적인 감각'(aisthesis alogos)과 함께하는 의견(판단:doxa)의 대상으로 되는 것으로서, 생성, 소멸되는 것이요, 결코 ‘참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데, 생성되는 모든 것은 또한 필연적으로 원인이 되는 어떤 것에 의해 생성됩니다. 어떤 경우에도 원인 없이는 생성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만드는 이'(demiourgos)이건 간에, 그가 ‘언제나 같은 상태로 있는 것'을 바라보며, 이런 걸 본(paradeigma)으로 삼고서, 자기가 만드는 것이 그 형태(idea)와 성능(dynamis)을 갖추게 할 경우에라야, 이렇게 완성되어야만, 모든 것이 필연적으로 아름다운 것으로 됩니다. 하지만 그걸 만드는 이가 이 생겨난 것을 바라보며, 이 생성물을 본으로 삼는다면, 그건 아름다운 것이 못 됩니다.3)
 플라톤의 사유에서 보이는 차원은 보이지 않는 차원으로 설명된다. 곧 감각적인 것과 가지적인 것을 나누어 후자를 통해 전자를 설명하는 것이 플라톤 철학의 출발점이다. 감각적인 것은 보이는 것으로 신체의 세계이며 가지적인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영혼의 세계이다. 보이는 차원은 현상의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체’, 종, 질 등을 가리키고 보이지 않는 차원은 초월적 세계의 이데아를 일컫는다. 현상의 세계는 생성, 소멸하는 세계요, 이데아의 세계는 영원한 자기 동일성의 세계이다. 플라톤의 윗글에서 우선 중요한 것은 존재(being)와 생성(becoming)의 대립이다. 존재는 영원하고 자기 동일적인 반면 생성은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지 못하며 항상 생겨나고 소멸하기를 반복하는 존재이다. 존재는 언제나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순수사유와 논리적 추론의 대상이 되지만, 생성은 항상 변하는 것이기에 우리의 감각 대상일 뿐 사유의 대상은 되지 못한다. 플라톤에게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생성하는 세계로 이해된다. 그리고 이 세계는 영원한 동일성의 세계인 이데아를 본으로 삼아 재료인 코라(chora)를 빚어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플라톤에 따르면 이 세계를 만드는 데 중요한 세 번째 존재는 데미우르고스 즉, 장인이다. 플라톤이 말하는 장인은 곧 조물주이지만, 이 글의 맥락에서는 예술가이다. 장인은 자기 동일적인 존재들 곧 형상을 본떠서 코라를 빚어 사물들을 만들었다. 그래서 존재들의 형태와 역능을 사물들 속에, 즉 자신의 작품 속에 구현(embodyment)하는 것이다. 이러한 플라톤의 세계관은 제작적 세계관이다. 한마디로 이 세계는 만들어진 것이지 우연히 형성된 어떤 산물이 아니라는 말이다.
 조물주가 우주를 만든 방식은 예술가가 작품을 만드는 방식과 똑같다. 플라톤의 우주는 곧 작품(work)이고 이렇게 만들어진 작품은 아름답다. 이러한 작품에서 일차적인 것은 창작자나 재료가 아니라 영원한 동일성으로 존재하는 아름다움 그 자체, 즉 아름다움의 이데아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 자체로는 아름다울 수 없다. 곧 모든 구체적 물체, 신체, 생물체가 아름다운 원인은 그것들 자체 속에 있지 않다는 말이다. 그것들이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움의 이데아가 그것들에 ‘거기 있음’으로써 아름다운 것이다. 아름다움의 이데아가 구체적 작품 속에 침투함으로써만, 또 반대로 말해 작품들이 아름다움의 이데아에 참여함으로써만 그것들은 아름다운 것이다. 아름다움의 이데아는 초월적 틀로 존재하며 언제나 예술작품을 규정한다. 그러기에 플라톤에게서 예술작품은 닫힌 체계이다. 이것이 서구예술론의 지배적인 주류 관념이었다.
 플라톤의 예술창작 모델에서 가장 중요한 미학적 개념은 모방(mimesis) 혹은 재현이다. 조물주가 이 세계를 만드는 방식은 근본적으로 모방의 방식이다. 초월적 차원의 이데아를 모방해서 현실적 차원의 질료를 빚었기에 이렇게 만들어진 사물들은 아름다운 것이다. 시간과 공간 속에서 모든 것이 변화하며 생성, 소멸하는 이 덧없는 세계를 영원부동의 이데아로 설명하는 것이 플라톤 사유의 핵심이다. 초월성의 사유에 기대서 예술에 관해 설명하는 이러한 모델은 이후로도 오랫동안 서구사회를 지배한다.
 그런데 플라톤의 철학에는 묘한 역설이 숨어있다. 곧 영원한 이데아가 코라를 완전히 제압하지 못하고, 오히려 코라가 최후의 승리자가 된다는 것이다. 거푸집 혹은 프레임에 해당하는 이데아가 작품을 창조하기 위해 질료-재료인 코라를 찍어 누르지만 언제나 프레임을 빠져나가는 잉여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코라는 “일체의 생성의 수용자(자궁)인 것으로, 이를테면 유모와 같은 것으로 이해해야만 한다.”4) 그러나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코라는 “언제나 모든 것을 받아들이면서도, 자기 속으로 들어오는 것 중의 어떤 것과도 어떤 식으로건 닮은 형태를 보이는 일도 결코 없다.”5) 곧 코라는 “물의 상태로 되는가 하면, 불의 상태로 되기도 하고, 흙과 공기의 모습들을 받아들이기도 하며, 이것들에 동반하는 하고많은 그 밖의 상태들을 겪게 됨으로써 보기에 온갖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 닮지 않고 균형이 잡히지 않는 힘들(dynameis)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그것의 어떤 부분에서는 평행을 이루지 못하고 그것들(힘들)로 인해서 그것이 균형을 잃고서 온갖 방향으로 기우뚱거리며 흔들리게 되는가 하면, 또한 그것이 운동하게 됨으로써 다시 그것들을 흔들어 놓게 된다.”6) 이처럼 코라는 심하게 운동하는 ‘방황하는 원인’으로 온전히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언제나 잉여물을 남기는 능동적인 힘이다. “방황하는 원인은 데미우르고스의 지성과 독립해서 작용하는 힘이다.”7) 코라는 이데아의 구현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코라는 언제나 조물주-창작자에 저항한다. 플라톤은 이러한 질료-재료의 저항을 “아낭케(ananche)”라는 말로 표현한다. 창작자에 대한 질료-재료의 저항과 남아 있는 잉여물이 항상 존재하는 것이다. 코라는 아낭케의 원리를 따른다. 그러니 하나의 작품은 이성의 원리와 아낭케의 원리의 합작품이다. 그리고 이는 신체가 그 자신의 외부에서 주어지는 초월적 힘에 의해 완전히 제압당하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들뢰즈가 말하는바 이 아낭케의 원리가 플라톤 철학 내부에서 플라톤 철학을 전복할 수 있는 요소인 것이다. 들뢰즈의 생성 존재론의 논리는,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에서 코라에 관한 ‘서술 논리’처럼 질료-형상 도식에 앞서는 다른 ‘체’나 ‘그물’을 찾고 있다.”8) 더불어, 우리가 보기에 동시대의 춤 공연은 재현이나 모방이기 이전에 아낭케의 힘, 곧 물질적이고 신체적인 힘들을 긍정하며 재현의 공연을 전복한다.

 그런데 인류 역사에서 가장 큰 두 번의 문명 변동기에 신체와 연관이 깊은 두 기계 개념이 등장했다. 서구 사상은 18세기를 분기점으로 고중세로부터 벗어나 근대적인 사상으로 전환된다. 이 과정에서 고중세 사상의 핵을 이루었던 생명, 영혼 혹은 정신, 신 등의 위상이 크게 흔들리며 기계론이 일반화된다. “모든 물질은 연장이다,”라는 데카르트의 언명은 인간의 몸이 기계에 불과하다는 의미이다. 인간의 신체나 생물체, 물체를 포함한 모든 ‘~체’는 다 기계이다. 그리고 근대적인 신체가 활용되는 방식은 재현 공연의 토대가 된다.
근대에서 탈근대로 넘어가는 동시대에는 질 들뢰즈와 펠렉스 가타리의 기계 개념이 등장했다. 이들의 ‘기계’ 개념은 기관들이 특정 목적을 위해 기능한다는 전통 형이상학의 통념과 부분들이 전체에 조화롭게 복무한다는 전제를 비판한다. 그 대신, 접속을 통해서만 작동하는 거대한 흐름의 체계를 내세운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는 'machine'으로서의 기계는 실체론적이고 본질주의적으로 정의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체’들을 다 포함하는 개념인 기계는 접속과 분리를 통해 정의된다. 우리는 두 기계 개념을 통해 춤 공연에서 신체가 활용되는 방식을 또렷이 알 수 있을 것이다.


근대적 신체와 춤

데카르트가 모든 사물은 연장이라고 외치는 순간, 인간의 신체는 기계가 되었다. “나는 얼굴, 손, 팔 및 모든 지체로 된 기계 전체를 가지고 있다. 이 기계는 시체에서도 볼 수 있는 것으로 나는 이것을 신체란 이름으로 불렀다.”9) 그러나 인간은 영혼 혹은 정신과 신체의 결합체이다.10) 곧 인간의 신체는 다른 모든 ‘체’들과 다르다. 데카르트에 의하면, 인간의 경우, 뇌에 있는 송과선에 의해 정신과 신체는 반비례 관계로 연결된다. 정신과 신체는 간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정신이 무엇인가를 하면 신체는 겪고, 반대로 신체가 무엇인가를 하면 정신이 그것을 겪어야 하는 관계가 성립한다. 그런 맥락에서 인간이란 능동성과 수동성을 모두 갖는 이중적 존재로 간주한다. 그렇다고 해도 신체가 운동의 자율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정념에 대해 절대 권력을 얻을 수 없을 정도로 약한 정신은 없다.”11) 정신이 신체에 대해 ‘절대적’ 권력을 가진다고 말할 때에도, 그 통제는 송과선을 매개로 한 것이기에 간접적이고 제한적일 수밖에 없겠지만, 운동의 주도권은 여전히 정신에 있다. 곧 신체가 지나치게 정념에 사로잡힐 때 영혼에만 속한 의지는 이를 순화한다. 코키토 주체는 신체를 제약하고, 파토스 주체는 이에 순응한다. 결국, 신체는 언제나 정신에 순응한다.
 그런데 데카르트 철학에서 보이는 정신과 신체의 위계 관계는 근대적 춤 공연에서의 안무가와 춤꾼의 관계와 닮았다. 근대적 춤 공연에서 안무가는 춤꾼의 배후에서 그들을 조정하는 주체로 등장한다. 안무가는 마치 기계의 작동 스위치를 켜고 끄는 기술자처럼 춤꾼들 뒤에서 그들을 조정한다. 여기서 춤꾼의 신체와 움직임은 도구화되고 개성은 억압된다. 춤꾼은 안무가의 의도를 구현하기 위해 자신의 감각적이고 현상적인 신체를 기호 운반체나 물질적 기호로 복무할 수 있도록 가능한 한 기호적인 육체로 전환해야 한다. 근대적 춤 공연에서 춤꾼의 신체는 외부적 힘에 포획되며 자율성을 상실한다. 춤꾼의 신체는 통제 가능한 신체가 되고, 안무가의 의도를 잘 따르는 순응적인 신체가 된다. 또한, 안무가가 춤꾼의 신체를 지배하는 것도 당연하게 여겨진다. 춤꾼의 신체는 근대적 기계와 닮았고, 그럴 때 춤추는 몸은 획일화된다. 이는 먼저 춤꾼에게 춤을 추는 데 적절한 신체를 갖출 것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춤과 판토마임이 채 분리되지 았았던 2세기 경 로마의 루키아노스는 「판토마임에 대하여(Orchesis)」에서 춤꾼이 갖추어야 할 신체의 조건에 대해 말하고 있다. “몸에 있어서 그는 완벽한 비율을 가져야 한다. 지나치게 키가 크지도, 난장이같이 작지도 않아야 하며, (그 직업에서 가장 미덥지 않는 특성 중 하나인) 살집이 너무 많지도, 송장처럼 마르지도 않아야 한다.”12) 무용수는 춤을 추는 데 적정한 신체 비율과 균형 잡힌 몸매와 긴 팔다리을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이런 몸을 가진 무용수들이 같은 의상을 입고 같은 동작을 일사불란하게 수행하며 전문적인 고도의 테크닉을 구사하며 춤을 춘다. 이런 몸을 일러 마치 기계 같다고 말할 수도 있으리라. 수학적으로 구도가 잘 잡힌 몸, 시각성에 어필하는 몸, 질이 제거된 무미건조한 몸, 중립적인 몸이 만들어지고, 삶과 기억이 제거된 몸이 춤의 전면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근대춤은 근대성의 산물이다. 근대적 형태의 춤이 서양의 주류 춤으로서 정착하는 과정은 신체에 근대성의 도식이 새겨지는 과정일 뿐만 아니라, 플라톤에서부터 데카르트까지 이어져 온 제작적 세계관이 춤 공연의 창작 모델로 자리 잡게 되는 과정이다. 곧 비물질적인 설계도로서의 안무가의 의도가 먼저 있고, 이것이 신체로 이루어진 공연 행위를 통해 구현된다. 이렇게 춤 공연은 자신의 외부에서 주어지는 어떤 의미를 다시 나타내는 재현 춤이 되었고, 이럴 때 춤 공연이 일어나는 공간은 재현의 공간이 되었다. 재현의 공간이란 대본이 가진 문학적 의미나 안무가의 의도 등 공연 외부에서 주어진 것을 다시 나타나게 하는 장이다. 이러한 재현의 공간에서 춤꾼은 자신의 현존과는 다른 인물로 프로그래밍 된다. 곧, 재현 춤에서 춤꾼의 신체는 포획된다. 춤꾼은 자기 흥이나 임기응변 능력, 재치 혹은 인기를 끌기 위한 목적에 따라 춤을 춰서는 안 된다. 춤꾼의 역할은 오로지 작품 속에 안무가가 표현하고자 한 의미를 관객에게 전달하는 데 있다. 그러기에 그의 운동은 자유롭지 못하고, 홈 파인 길을 따라 일어날 뿐이다. 이미 정해진 길을 따라가는 운동이기에, 즉흥성도 우연성도 개입할 여지가 없다. 이러한 경향과 더불어 춤에서는 기하학적 패턴의 선을 강조하는 안무법이 등장한다. 무대는 V자나 역 V자, 원이나 직선, 사선, 곡석, 혹은 지그재그 등의 선으로 구획되고, 2차원적 조형성을 띤 형상은 조화와 질서를 중시하는 미적 이데올로기를 구현한다. 이 시기는 서양에서 극장춤이 형성되는 시기이며, 이는 당대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상황을 반영한다. 근대춤의 미적 토대가 되는 이데올로기는 이러한 환경에서 자라난다. 근대춤의 패러다임은 근대성의 산물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 자신의 육체나 정신으로 축소시켜 규정할 수 없고, 정신과 육체가 싸우는 전쟁터로 규정해서도 안 된다. 정신이란 육체 없이 존재할 수 없고, 언제나 신체 안에서 그리고 신체로써 표현된다.”13)


공연과 신체

니체는 그 누구보다도 행위 이전의 주체. 즉 행위의 안정적 토대로서의 주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한 철학자이다. 그는 실체적 주체의 허구성을 비판하며 주체의 실재적 출발점으로서 ‘몸’을 제시한다.

“그러나 깨우친 자, 아는 자는 말한다. “나는 철두철미 몸이며, 그 이외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영혼은 몸에 딸린 무언가를 나타내는 말일 뿐이다.” 몸은 하나의 커다란 이성이며, 하나의 의미를 지닌 다수성이고, 전쟁이자 평화이며, 무리이자 목자이다./ 나의 형제여, 그대가 ‘정신’이라고 부르는 그대의 작은 이성 또한 그대 몸의 도구, 그대의 커다란 이성의 작은 도구요 장난감이다./ 그대는 ‘자아’라 말하고 이 말을 자랑스러워한다. 그러나 더욱 위대한 것은 – 그대는 믿지 않으려 하지만 – 그대의 몸이요 그 커다란 이성이다; 이는 자아를 말하지 않고 자아를 행한다. (...) 나의 형제여, 그대의 사상과 감정의 배후에는 강력한 명령자, 알려지지 않은 한 현자가 있다 – 그것은 자신이다. 그는 그대의 몸속에 살며, 그대의 몸이 바로 그이다./ 그대의 최고 지혜 속보다 그대의 몸속에 더 많은 이성이 들어있다. 도대체 누가 알랴, 무엇 때문에 그대의 몸이 꼭 그대의 최고 지혜를 필요로 하는지?”(ZⅠ, “Von den Verachtern des Leibes”: 35-37쪽)

 몸은 실체적 본질을 지닌 항구적 존재가 아니라 생성변화하며 새롭게 구성되는 ‘체’이다. 몸은 전체로서 하나이지만, 실체로서의 단일한 하나가 아니라 하나-다수로서의 다양체이다. 곧, 다양한 뉘앙스들 및 미처 알려지지 않은 미분적 요소들 간의 관계-비, 힘들 간의 갈등과 투쟁, 관계맺음과 위계지음을 통해 임의적으로 구성되는 하나이다. 이들이 서로 분리되고 접속하며 재구성되는 생성변화의 모든 과정은 주체의 ‘의식’에 알려지지 않거나 혹은 알려진다고 해도 모호한 채로 알려질 뿐이다. 그러한 ‘커다란 이성’의 영역이 바로 몸이다. 니체에게 이런 몸은 더 이상 환원불가능한 최종 근거이며 실재적 조건이다. 몸에서 일어나는 작용들의 관계-비를 주체의 의식이 알 길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작용들의 배후에 관해 더 이상 물어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춤에서 신체는 그 시작이자 끝이다. 어쩌면 춤 공연에서 안무가나 연출의 의도, 혹은 목적이 무효화되는 까닭도 이 말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춤 공연은 연행자와 관객이 같은 시공간에 참여함으로써 성립한다. 춤 공연이 성립하기 위한 일차적인 조건은 신체의 관계 맺음이다.14) 곧 춤 공연은 연행자와 관객의 신체가 관계 맺음으로써 드러난다. 드러남은 어떤 것에 대한 모상이나 재현이 아니라 현시다. 설사 이 관계가 연출의 의도나 생각을 재현하는 것일지라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지금-여기 공연 현장에서 실현되는 순간 무효화 되고, 새로운 신체 관계로 즉시 탈바꿈한다. “일반적으로 공연 전에 무엇이 논의되고 정해지고 계획되었는가와 무관하게 공연 중에 실제로 드러난 것만이 피드백 고리의 자동 형성성에서 유효성을 갖는다.”15) 공연을 미리 전제하는 것으로 여기며 거기서 바로 의미를 찾거나 해석을 하는 것은 공연의 발생 그 자체에는 애써 눈을 감는 것이다. “공연에서 나타나는 실제적인 것의 난입”16)을 고려하며 신체의 관계를 통해 발생하는 공연 이후에야 우리는 재현으로서의 공연을 논할 수 있다. 공연은 일차적으로 신체의 관계를 통해 성립하지만, 그런 공연을 와해시켜 생성변화로 이끄는 것도 또한 신체다. 들뢰즈의 용어법으로 말하면, 신체는, 혹은 그것들의 관계는 ‘차이와 반복’의 운동을 지속하며 공연을 생성 변화하게 하는 조건이다.

 신체는 삶과 공연의 주체이다. 대지에 굳건하게 발 디딘 몸의 일상적 관계가 우리의 삶을 구성하고, 비일상적인 의도적 관계를 통해 공연은 성립한다. 니체에 따르면, 몸은 ‘미지의 세계’이고, 스피노자에 따르면 우리는 우리의 몸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라이프니츠의 신비스러운 미세지각17)의 세계는 우리가 끝없이 알아가야 할 미지의 영역이다. 공연을 통해 우리는 미세지각의 세계를 탐험하며 새로운 감각과 만난다. ‘사유하는 자아의 확실성’에서 출발하는 데카르트 이후의 기존 철학은 인식과 행위가 소급되는 안정적인 근원으로서의 ‘주체’를 미리 상정한다. 그러나 인간의 행위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고 있다는 생각은 어불성설이다. 우리의 거의 모든 실제적 행위는 우리가 전부 알아챌 수 없는 미세지각에서의 관계-비들의 결과로서 나타난다. 여기에서의 수많은 심리적, 신체적 동기들의 갈등과 투쟁이 어떤 결과로 나타나는지는 전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기계(machine)로서의 춤꾼

춤 공연은 다양한 ‘기계’18)들의 접속과 일탈을 통해 끊임없이 변화해가는 미적 장이다. 춤 공연은 춤꾼와 관객, 여러 오브제와 대소도구 등 무수한 개‘체’들로 구성된다. 그리고 이러한 ‘체’들의 접속과 일탈로 춤 공연은 역동적으로 출렁이는 장이 된다. ‘체’는 공연을 살아 있게 만드는 주체이다. ‘체’가 있기에 공연은 행위, 관계, 사건 등이 발생하며 생성 변화하게 되는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에 의하면 이러한 ‘체’들은 모두 ‘기계’이다. 그리고 모든 기계는 ‘욕망 기계(desire machine)’이면서 ‘기계적 배치(machinal agencement)’이다. 이 말은 모든 기계가 어떤 역능 혹은 역량을 가지고 끝없이 접속과 이탈의 운동을 하고 있다는 이들 나름의 표현이다. 곧, 춤 공연을 구성하는 모든 ‘체’들, 곧 기계들은 어떤 역량을 가지고 살아있으며 생성변화한다.

“우리는 어떤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의식과 정신에 대해 언급하고, 이 모든 것에 대해 떠들어대지만, 하나의 신체가 어떤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 어떤 힘들이 그것에 속해 있는지, 그리고 그 힘들이 무엇을 예비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19)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에게 신체는 그것이 가진 역량들 또는 힘들과 같다. 더 나아가 신체들의 이러한 역량 혹은 힘은 언제나 외부의 다른 힘들과 관계 맺는다. 들뢰즈의 신체론이 참조하는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1677)의 존재론에 따르면, 신체들은 신의 역량을 특정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양태들 즉 일정 크기의 역량들이다. 그런데 이런 신체들의 차이는 역량의 차이에 의해서 규정된다. 그렇다면 각각의 신체들의 역량은 무엇을 기준으로 크거나 작다고 할 수 있는가? 스피노자는 이 차이를 복합성(complexity)의 차이로 설명한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존재하는 모든 ‘체’는 여러 부분으로 구성된 복합체이다. 복합체란 모든 ‘체’의 각 부분 역시 하위의 ‘체’의 결합체, 즉 어떤 기관들로 이루어져 있고, 다시 이 기관들 역시 하위의 ‘체’로 이루어져 있고, 이것이 무한히 계속되는 구조를 갖는다. 가령 인간의 신체는 심장, 뇌, 허파, 위, 창자, 근육, 신경계 등등 수많은 기관이 하나로 결합하여 개체화된 것이다. 허파는 수많은 허파꽈리가 결합하여 개체화된 것이고, 허파꽈리는 수많은 혈관과 근섬유 등이 결합하여 개체화된 것이며, 근섬유는 수많은 세포로 이루어지고, 세포는 세포 소기관들로 이루어진다. 세포소기관 또한 마찬가지로 하위의 ‘체’들로 이루어지며, 이러한 과정은 무한히 계속된다. 따라서 이 복합성의 정도가 ‘체’들 사이의 차이를 결정한다. 요컨대, 신체가 아주 다양한 부분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복합성의 정도가 크면, 그 신체는 더욱 많은 외부 사물들과 더욱 다양한 방식으로 소통할 수 있다. 바로 이 점에서 한 신체의 역량은 다른 신체의 역량보다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춤 공연을 구성하는 모든 ‘체’들 또한 역량을 가진다. 그것은 첫째, 춤 공연을 구성하는 모든 기계는 어떤 하나의 고정적인 동일성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구성하는 발생적 요소를 통해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A라는 것은 없다. 어떤 A도 반드시 dA20)이다. A가 반드시 dA인 것은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 또한 x, y …가 아니라 dx, dy …이기 때문이다. 그 어떤 x도 dx로 이해되어야 한다. 둘째, 따라서 춤 공연을 구성하는 모든 기계는 생성의 장 위에서 성립한다. dx, dy …는 생성하는 것들, 미결정의 것들이다. 어떤 한 춤꾼의 신체는 하나의 동일성이 아니다. 그것은 d(춤꾼-신체)이다. 이것은 춤꾼의 신체가 d(허파), d(간), d(위) 등의 상호 작용으로 생산되기 때문이다. 셋째, 생성의 장 위에서 동일성이 성립하는 이런 과정은 단층적인 과정이 아니라 무한히 누층적인 과정이다. 한 춤꾼의 신체가 d(허파) 등의 결과물이지만, 춤꾼의 허파 또한 무수한 d(허파꽈리)들의 결과물이다. 그리고 ‘체’들이 엮어내는 상위의 장면들 상황들 또한 잠재적 층위에서 발생하는 무한한 누층적 운동의 결과물이다.21) 생성의 이런 누층적 구조는 춤 공연을 구성하는 모든 기계가 역능, 역량을 가질 수 있게 하는 초월론적 조건이다. 춤 공연을 구성하는 모든 기계는 잠재적 층위의 기계들의 상호 작용에 의한 현실적 결과들이고, 또한 그것 자체는 그보다 상위의 기계들을 생산하는 발생적 요소들로서 작용한다. 잠재적이라는 것은 현실적인 것들을 발생시키는 근거가 되고, 모든 발생은 잠재적인 것이 현실화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들뢰즈가 잠재적 차원의 생성을 강조한다고 하여 현실적 층위의 신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들뢰즈는 어느 하나의 형상에 붙들린 신체가 아니라, 그 신체의 잠재적인 수준에 해당하는 생성을 일차적으로 고려하여 신체를 사유하고자 하는 것이다. 결국 춤꾼의 신체는 현실적 층위와 잠재적 층위로 이루어져 있고, 두 차원의 신체는 다르게 작동한다. 이를테면 현실적인 층위의 신체가 일상적 지각을 통해 세상과 소통한다면 잠재적 층위의 신체는 미세지각을 통해 세상과 소통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바다의 소리 또는 모인 군중의 소리를 파악하지만, 이것을 구성하는 각 파도의 속삭임 또는 각 사람의 속삭임을 파악하지는 못한다.”22) 그러나 춤꾼의 지각 능력은 평범한 사람들과는 사뭇 다른 듯하다. 이는 마치 교향곡을 지휘하는 지휘자가 평범한 관객들이나 연주자들과는 달리 악기 소리 하나하나와 미세한 음들을 그의 미세지각을 열어 다 포착할 수 있는 역량을 지녔듯이, 춤꾼도 미세지각의 차원에서 모든 기계와 접속하며 각종 ‘되기’를 실행하는 존재자이기 때문이다. 뛰어난 춤꾼은 일상적인 지각 작용을 넘어 생성의 양상을 포착하는 능력이 발달한 사람이다. 그리고 재현의 공간에서보다 사건의 공간에서 춤꾼의 이런 능력은 더욱 활성화된다고 볼 수 있다. 춤 공연에서 춤꾼의 신체는 더 예민하고 더 먼 곳까지 감응하고자 한다. 신체의 감응 능력이 활성화되는 것이다. 들뢰즈는 이렇게 “지각을 분해하는 예술적 잠재력”을 “전체구조인 ‘그램분자(molar)’와 대비되는 ‘분자(molekular)’, 입자들의 ‘탈주선’이라고 표현했다.”23) 그런데 들뢰즈는 잠재적 층위의 신체를 ‘기관 없는 신체’24)라 부르는데, 이 개념은 아르토에게서 빌려 온 개념이다. 들뢰즈-아르토의 기관 없는 신체, 곧 유기적 조직화에 저항하는 신체는 유기체의 고착된 상태로부터 탈주해 생성과 변화의 장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춤의 윤리학

<자아-미완성>에서 자비에르 루아(Xavier Le Roy)는 남성성과 여성성, 인간과 동물, 주체와 객체 등 닫힌 개념을 통해 주체를 정의하는 것을 비판하며, 이러한 개념들을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는 ‘되기’의 연속들로 교체한다.

“르 루아의 퍼포먼스 공간으로 들어가자마자 우리는 그가 검은색 바지와 셔츠를 입고 자신의 책상에서 관객들을 맞이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다음 그는 세 가지 종류의 연속적인 행위를 한다. 첫째, 단순한 검은색 바지와 셔츠를 차려입은 그가 입으로 기계음을 내면서 로봇과 같이 유머러스한 태도로 움직인다. 그 후에 그는 신발과 바지를 벗고 셔츠를 펼쳐서 마치 여성들이 튜브톱같이 다리 아래까지 늘어뜨린다. 이러한 여성되기는 그가 그의 몸을 아래위로 뒤집어진 브이 자 형태로 만들 때 순식간에 용해된다. 이제 그는 네발짐승처럼 움직인다. 네 발로 르 루아는 뒤쪽 벽으로 가서 잠시동안 서 있는다. 그리고 어깨를 버팀목 삼아 벽을 바라보고 옷을 벗기 시작한다. 계속해서 어깨로 버티고 있는 그는 이제 알몸이 되었다. 그리고 그의 양팔은 공간적인 장소와 균형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엉성한 기관으로 재정비된다. 그의 몸은 알아볼 수 없는 형체가 되었다.”25)

 레페키는 이런 르 루아의 춤추는 몸이 들뢰즈와 가타리의 ‘기관 없는 신체’ 개념을 연상시킨다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르 루아의 <자아-미완성>은 근대성에 의해 제약된 몸의 개념에 도전하는 몸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안한다.”26) 곧, “몸은 주체를 위한 안정적인 살이 아니라 예측할 수 없는 내재성과 일관성의 평면을 획득하기 위해 계속되는 실험, 즉 역동적인 힘이다.”27) 새로운 삶은 습관화된 우리의 신체를 바꾸어 나가는 데서 시작한다. 공연은 자유로운 유희의 시공간을 창출한다. 놀이의 순수함은 목적과 의도에 얽매이지 않는 해방을 의미한다. 공연 행위 속의 참여자들은 일상적 삶을 사는 우리와 아주 다르다. 기존의 문화에 의해 굳어진 신체를 창조적 시간으로 열어 변형하는 것, 습관화된 신체를 탈구축하는 역능의 발현이 춤 공연에 내재해 있다. 신체는 몰적인 부분과 분자적인 부분의 합성이다. 몰적인 신체란 판에 박은 듯 한정된 신체의 스테레오 타입이다. 반대로 분자적인 신체는 신체를 성립시키는 관계의 다발이 한정되지 않고 열려 있는 상태다. 춤꾼(dancer)의 춤은 행동의 스테레오 타입이 아니다. 그것은 규범적 행동을 탈특권화하여 다른 조합 가능성을 열어놓는 것이다. 일상의 공간에서 형성된 관계에서 그 관계를 이루는 각각의 구성요소는 몰적인 신체를 고수한다. 이 신체는 코드화되고 영토화된 신체다. 하지만 이는 결코 안정적이지 않다. 탈코드화와 탈영토화 운동이 잠재해 있다. 탈영토화, 탈코드화의 운동이 최대로 발휘되는 곳이 공연 공간이다. 춤 공연 공간에서 몰적인 신체는 분자화 된다. 신체의 분자-되기.28) 신체의 강도-되기, 춤 공연에서는 신체가 분자화되고, 탈유기화되어, ‘기관 없는 신체’, 곧 강도=0의 잠재성으로 향한다.29) 강도적 공간은 일상의 습관화된 신체뿐만 아니라 “현상학이 기술한 ‘체험된 신체’의 형식 너머로 우리를 데려가는 것이다.”30) 강도적 공간으로 향하는 이러한 신체의 운동은 퇴행이 아니다. 외려 이는 새로운 신체로 생성변화하기 위한 창조적 역행이다.

 실존하는 신체는 '지금-여기'에 거주한다. 신체는 구체적인 공간과 시간에 속한다. 달리 말하면 '지금-여기'를 떠난 신체는 없다. 자기가 속한 세계를 초월한 신체는 없다는 말이다. 때때로 혹은 잦게 정신 혹은 의식은 세계를 초월하지만, 신체는 언제나 이미 '지금-여기'의 국지적 장소에 거주한다. 그러기에 몸짓에 세심히 주의를 기울이면 그 신체가 속한 '지금-여기'가 드러난다. 그런 신체와 신체가 일련의 관계를 맺으며 의미 있는 행위를 펼칠 때, 우리는 그것을 일컬어 공연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여기'를 떠난 신체는 없지만 포획된 신체는 있다. 아니 우리 대부분 신체는 포획되어 있다. 신체가 일상적인 삶을 사는 데 편리하고 유용하게끔 습관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체는 기존의 가치들이 기재된 코드화된 신체다. 이데올로기와 담론, 자본과 권력 등은 신체를 코드화하는 거푸집 혹은 프레임이다. 구조화된 신체, 곧 코드화되거나 습관화된 신체는 최소치로 축소된 의미 영점의 경험을 받아들이는 신체다.
 여기서 우리는 춤 공연의 감성학과 동시에 윤리학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일례로 니체에 의하면, 춤을 춘다는 것은 삶을 가볍게 하는 것이다. 권력과 자본, 이데올로기와 담론이라는 상징적 구조가 부여하는 현행가치들의 짐을 내려놓고 새로운 삶의 가치들을 창조하는 것이 춤이다. 그러기에 춤추는 자는 짐을 지는 자와 대립한다. 짐을 지는 자의 신체는 무겁고, 칙칙하다. 그러나 춤의 경쾌함과 가벼움은 포획된 신체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의미한다. 기실 춤은 신체가 지닌 잠재적 역능을 일깨우는 운동이다. 춤은 신체가 저 스스로 변화하는 역능의 발현이다. 차이를 만들어내며 자신의 정체성을 계속 바꾸어 나가는 신체의 역능이 최고로 발현될 때 춤은 윤리로 향한다. 이러한 춤을 일러 니체는 ‘정오의 춤’이라 부른다. 인간의 신체로 추되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춤, 나와 내가 속한 삶을 바꾸고, 그럼으로써 세계를 변혁하는 인간해방의 춤이 바로 ‘정오의 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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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에리카 피셔-리히테 지음, 김정숙 옮김, 『수행성의 미학』, (서울: 문학과 지성사, 2017), 447쪽.
2) Deux régimes de fous. Textes et entretiens 1975-1995, Paris: Les Èditions de Minuit, 2003(David Lapoujade 편집), 145쪽.
3) 플라톤 지음, 박종현 외 옮김,『티마이오스』, (서울: 서광사, 2008), 27d-28b, 74-76쪽.
4) 위의 책, 135-6쪽.
5) 위의 책, 140쪽.
6) 위의 책, 147쪽.
7) 위의 책, 148쪽.
8) 존 라이크만 지음, 김재인 옮김, 『들뢰즈 케넥션』, (서울: 현실문화연구, 2005). 116쪽.
9) 데카르트 지음, 최명관 옮김, 『성찰』, (서울: 서광사, 1983), 82쪽.
10) 데카르트에 따르면, 물체나 동물 신체와 달리 영혼과 결합한 인간 몸에서는 능동과 수동, 영혼의 의지와 몸의 정기 운동이 뇌의 송과선을 매개로 상호 소통이 일어난다.
11) 르네 데카르트, 김선영 옮김, 『정념론』 50항, (서울: 문예 출판사, 2013), 62쪽.
12) Lucian, “Of Pantomime”, The Works of Lucian of Samosata, trans. H. W. Fowler andF. G. Fowler (Oxford: Clarendon Press, 1905), http://www.gutenberg.org/ebooks/6585
13) 리히테, 위의 책, 222쪽.
14) 공연이 정신의 관념이 구현된 것이라는 의미에서, 공연에서 1차적인 것은 정신이 아닌가라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공연의 원인이라고 여겨지는 정신의 관념도 경험이다. 들뢰즈는 이렇게 말한다. “그것[정신]은 정신 안의 관념과 동일하다. 관념이란 주어지는 바대로 주어진 것이다. 그것은 경험이다. 정신은 주어진다. 정신은 관념들의 콜렉션이지 하나의 체계가 아니다.”(들뢰즈 지음, 한정헌, 정유경 옮김, 『경험주의와 주체성』, (서울: 도서출판 난장, 2012), 20쪽. 흄을 주석하며 들뢰즈는 정신은 촉발 후에 주체로 구성된다고 본다. 그리고 바로 이 ‘촉발되는’ 것에 관하여 끝까지 생각한다. 그리고 촉발하고 촉발되는 것이란 무엇보다도 신체인 것이다. 정신이 그릇이 아니듯이 공연도 무엇인가를 담는 용기가 아니다. 정신이 관념들의, 지각들의 다발이듯이, 공연도 관계들의 장이다.
15) 리히테, 앞의 책, 364쪽.
16) 한스-티스 레만 지음, 김기란 옮김, 『포스트드라마 연극』, (서울: 현대미학사, 2013), 187쪽.
17)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1716))에 따르면, 그 어떤 생명체일지라도 의식을 갖지 않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지각 활동을 하는데, 이러한 의식되지 않는 무수히 많은 지각은 미세지각이라고 부른다. “무리로부터 골라낼 수 없는 이 미세지각들에 대한 더 분명한 관념을 제시하기 위해 우리가 해변에 서 있을 때 우리에게 인상을 주는 바다의 아우성치는 소리를 예시로 사용하도록 한다. 우리가 이 소리를 듣는 듯이 들으려면, 우리는 이 전체를 구성하는 부분들을 들어야 한다. 즉 각각의 파도 소리 말인데, 비록 이 각각의 작은 소리들은 단지 다른 모든 파도 소리와 혼란스럽게 결합하였을 때 자신을 알린다. 그리고 만약 소리가 만든 파도가 혼자였으면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New Essays on Human Understsnding, Edited and translated by Peter Remnant and Jonathan Bennett,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6, 54~55쪽)) 미세지각은 우리의 의식적 현상을 설명하는데 출발점으로 주어진다. 각각의 미세지각은 그 자체로 의식되지 않지만 다른 미세지각들과 결합하면 전체로서 의식된다. 다시 말해 우리의 의식적 현상은 의식되지 않은 부분들의 합으로 나타난다. ‘자연은 도약하지 않는다’라는 라이프니츠의 말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모든 의식은 문턱이다.”(질 들뢰즈, 이찬웅 옮김, 『주름』,문학과 지성사, 2004, 161쪽). 특정한 관계 하에서 이 문턱을 넘어설 때만 미세지각들은 의식적 지각의 “발생적 요소들”(들뢰즈, 『주름』, 162쪽)이다. 그러나 미세지각들은 명석한 지각의 부분이 아니라 그것의 근거라는 점을 잊지 말자. 곧 명석한 지각은 모호한 지각이 근거가 되어 새롭게 나타난 결과, 새로운 나타남이다. 미세지각에 대한 라이프니츠의 또 다른 독특한 생각은 인식이 “모두 모호한 방식으로 무한한 곳, 즉 전체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관계의 확장은 미세지각을 통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신의 눈과 같이 꿰뚫어 보는 눈은 가장 등급이 낮은 실체 안에서도 우주의 전체 사건의 연쇄를 읽을 수가 있다.” 이는 “미세지각들은 각각의 존재가 나머지 모든 우주와 가진 연결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의식적 자아 이하의 분자적 자아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미세지각은 사물의 알갱이 하나하나를 다 지각한다. 이를테면 파도 소리를 구성하는 물방울 소리 하나하나를 다 지각하는 것이 미세지각인 것이다. 파도 소리는 물방울 소리 하나하나를 다 지각하는 미세지각의 종합을 근거로 해서만 비로소 의식에 드러나게 된다.(New Essays on Human Understsnding, Edited and translated by Peter Remnant and Jonathan Bennett,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6, 참조..
18) 라캉의 구조 개념을 비판하면서 제시한 개념이다. 모든 주체적 움직임을 규제하는 구조 개념에 대항하여,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른바 ‘구조’라는 것은 사실상 다양한 부품들이 조립되어서 작동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기계는 ‘작동(operation)’을 강조하는 것이고, 이들은 결정론적인 의미의 기계학(mecanism)과는 달리 이러한 기계적 작동을 강조하기 위해 기계론(machinisme)을 내세운다. 기계론은 기계들의 접속에 초점을 맞추고, 그래서 기계들이 서로 밀어내고 선택하고 배제하는 새로운 가능성의 선을 출현시키지만, 기계학은 상대적으로 자기 폐쇄적이고 외부 흐름과 단절된 코드화된 관계만을 지닌다. 기계(機械)는 일상어에서의 기계 ‘메카닉’과 구분된다. 개체들은 물론, 건물, 도시 등도 기계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기계는 다른 기계들과 접속해서 배치를 형성할 때만 구체적인 의미를 띠게 된다. 때문에, 이들에게 기계란 항상 개별적 기계가 아니라 여러 이질적인 기계들이 접속해서 형성되는 기계이다. 이 점에서 기계는 언제나 ‘기계적 배치’이다.
19) 질 들뢰즈 지음, 이경신 옮김, 『니체와 철학』, (서울: 민음사, 2003), 85쪽.
20) 여기서 ‘d’는 ‘differentiation’, 곧 차이 생성을, 또는 수학적으로 ‘differential’, 즉 미분적 변이를 가리킨다. (이정우, 『천하나의 고원, 소수자 윤리학을 위하여』, 돌베개, 2008, 19쪽).
21) 이러한 논의를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 4장에서 아주 정치하게 다루고 있다. 좀 더 쉬운 논의로는 이정우, 「들뢰즈와 meta-physica의 귀환」, 『들뢰즈 사상의 분화』, (서울: 그린비, 2007), 95-144쪽이나 이정우, 위의 책, 219쪽 참조.
22) 질 들뢰즈, 이찬웅 옮김, 『주름』, (서울: 문학과 지성사, 2004), 160쪽.
23) 레만, 위의 책, 157쪽.
24) 기관 없는 신체 개념은 앙토냉 아르토의 말로부터 온 것이다. “입도 없고, 혀도 없으며, 치아도 없고, 후두도 없는, 식도도, 배도, 항문도 없는 나는 나인 사람을 재건할 것이다.” 이를테면 오로지 뼈와 피로 되어 있으면서, 기관이 없는, 용접한 유동성의 신체를 말한다. 아르노 빌라니 외 지음, 신지영 옮김, 『들뢰즈 개념어 사전』, (서울: 갈무리, 2012), 70쪽.
25) 안드레 레페키, 문지윤 옮김, 『코레오크래피란 무엇인가』, (서울: 현실문화, 2014),94-95쪽
26) 위의 책, 99쪽
27) 위의 책, 97쪽
28) 되기(becoming)는 내 신체와 결합하는 새로운 관계, 내 신체가 할 수 있는 새로운 변용을 찾아내려는 행동학적 실험이다. “되기의 현상은 모방이나 동화가 아니라 이중포획, 비평행적 진화, 두 계 사이의 결혼입니다.”(질 들뢰즈 지음, 김종호 옮김, 『대담』, (서울: 솔, 1993), 8쪽) 되기는 신체적 감응의 과정으로서 모방이나 ‘타자의 입장이 되어 보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되기는 다른 신체와 식별 불가능한 블록을 형성하며 새로운 변용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되기는 항상 다른 신체의 변용을 수반하며, 모든 되기는 분자-되기다.
29) 강도(intensity)는 차이 그 자체의 누층적인 관계로부터 생겨나는 역동적인 힘을 말한다. 이는 항상 이행하고 생성하는 방식으로 표현되는 즉자적 차이의 힘이자 사건이다. ‘기관 없는 신체’는 이런 강도의 집약체이자 연속체를 가리키는데, 그것은 오직 변용과 기능을 통해 그 잠재력을 발휘한다. 강도=0로 표시되는 기관 없는 신체는 모든 것으로서의 생성의 잠재성을 지닌 힘이며, 그런 한에서 순수한 질료들의 흐름 자체로 표시되기도 한다.
30) 존 라이크만, 앞의 책, 222쪽.

최찬열

인류학과 미학을 전공했고, 여러 대학과 대학원에서 춤과 공연예술, 미학과 관련된 과목을 강의했다. 지금은 몸의 예술과 인문학에 기반한 통섭적 문화연구에 몰두하며, 춤문화연구소에서 미학과 춤 역사를 강의한다.​

2021. 12.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