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연구

학술연구
이시이 바쿠의 신무용과 한국 유입 알려진 것과 다르다
김채원_춤비교연구가
 필자가 일본에서 귀국한 이후 국내의 무용관련 학술서와 보고서 등을 접하면서 꽤 오랫동안 바로잡지 못한 채 학계에서 펼쳐지고 있는 여러 주의주장들을 보고 있노라면 안타까움을 통감할 때가 종종 있다. 그 하나로 이시이 바쿠의 표현주의 춤세계와 관련한 기록들이다.
 국내에서는 이시이 바쿠(石井漠)가 독일에서 표현주의를 접하고 이를 수용하여 그의 춤세계를 펼쳐나갔으며, 이것이 한국공연을 통해 소개되었다는 주장이 정설인 것처럼 학습되고 있다. 언제 누구로부터 그러한 설이 한국 무용학계에서 당연시되어 왔는지, 그리고 이에 대한 확인과 검증 없이 여러 연구 성과물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며 계속되어 온 이유는 무엇인지 필자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웠다.
 필자가 일본에서 한 때 스승으로 모셨던 가타오카 야스코(片岡康子)씨는 이시이 바쿠를 연구하여 저서를 출간했으며, 그녀의 연구지도를 받으며 확인한 바는 국내에 알려진 사실들과 다소 다른 부분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에 한국에 표현주의 댄스를 선보여 무대예술로서의 춤문화를 이끌어내는 기점이 된 것으로 알려진 이시이 바쿠의 경성공연 전의 행적을 개괄적으로 짚어보고자 한다.
 고찰은 일본의 댄스워크사에서 발행한 하세가와 로크(長谷川六) 편집의 『이시이 바쿠』(1986)를 참고로 했다. 그의 행적을 통해 그동안 잘못 알려졌던 부분들에 대한 재고의 여지가 있으며, 이를 시정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몇 자 옮겨본다. 

 


 우선 일본의 아키타현(秋田県) 출생의 이시이 바쿠(1887~1962)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1912년 10월 일본의 제국극장 양극부에 교사로 온 G. 로시(Giovanni Vittorio Rossi、1867-?)로부터 정통발레를 배운 제1기생이었다. 즉, 일본에서 외국무용의 1세대로 이토 미치로(伊藤道郎、1893~1961), 고모리 토시(小森敏、1892~1951), 다카다 마사오(高田雅夫、1895~1929), 다카다 세이코(高田せい子、1895~1977) 등과 발레의 기초를 배웠다. 바쿠는 제국극장 가극부에서 5년을 몸담고 있었지만 음악보다 무용에 자신의 적성이 맞다고 생각하는 한편, 제국에서 배우고 있던 일본전통춤이나 발레에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청소년기를 말더듬이 문학청년으로 보낸 그는 자연주의 후기의 영향으로 모든 예술활동을 현실생활과의 연관 속에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서양에서 생성되어 발전한 무용을 수입하고 이를 좇아가려는 것 자체를 바보스러운 짓이라고 생각했다. 전승되어온 무용도 아니고 외래의 발레도 아닌 새로운 일본의 것으로서의 무용, 젊은 자신들이 춤추어야 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무용은 적어도 문학에 종속되어서는 안 되는 것임을 그때까지 깨닫지 못한 자신을 보았다. 더욱이 문예방면을 둘러보면 자연주의 이후 나츠메 소세키(夏目漱石、1867~1916)의 활약에 이어 신사조 동인들의 대두기에 있었고, 연극 쪽에서는 예술좌를 비롯해 근대극운동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바쿠는 자신들이 몸담고 있는 분야의 가극이나 무용을 보면 시대의 흐름과 동떨어진 채 오락적인 볼거리로만 머물러 있어 예술로서의 가치가 얼마나 될지 의문을 갖기 시작했던 것이다.
 당시 이들 1기생들은 모두 로시의 창작적 태도가 크게 영향을 끼쳐 정통발레가 아니라 모던댄스계의 기법과 창작정신을 추구했으며, 외국에 나가 자신들의 무용을 선보이고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새로운 무용을 모색해 나갔다.

 서양무용방면에서 전개된 신무용, 즉 일본에서의 무용시운동이 제국극장을 나온 이시이 바쿠와 야마다 코사쿠(山田耕作、1886~1965)에 의해 시작된 것은 1916년이었다. 야마다 코사쿠는 작곡가 겸 지휘자로 서양음악의 보급에 힘쓴 국제적인 음악가이다. 제국극장을 나온 이시이 바쿠는 야마다의 제안으로 아카사카의 ‘도쿄 필하모니’ 스튜디오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야마다의 제안에 따라 자유롭게 자신만의 무용을 창작해나갔고, 얼마 뒤 스튜디오에 〈무용시연구실〉 간판을 내걸었다.
 바쿠 일행은 일본의 전통적 무용과 연을 끊고 당시 서구의 새로운 무용을 표본삼아 아마추어지만 열정적으로 출발했다. 유럽에 유학하여 서양의 근대적 숨결을 목격한 야마다 코사크나 오사나이 카오루(小山内薫、1881~1928) 등은 이시이 바쿠에게 그 숨결을 불어넣어 일본에서의 근대적 무용을 실현하고자 했다. 그들로부터 덩컨, 달크로즈, 니진스키, 디아길레프 등의 기법과 정신을 배워 곧바로 소화해내는 일은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작곡가인 야마다와 극작가인 오사나이로부터 이사도라 덩컨의 모던댄스, 달크로즈의 리드믹 등에 관한 정보를 접한 이시이는 “우리 무용예술은 육체의 운동에 의한 시여야 한다”고 새로운 무용에 대한 가설을 세웠다. 그가 ‘시’라는 단어를 사용한 의미는 무엇일까? 그는 “창작무용 즉, 무용시는 가사에도 문학에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사상감정을 직접 신체움직임으로 표현한다. 기교는 시에서의 언어와 같기 때문에 연마의 필요가 있다. 그것은 일본도 서양도 아니다.” 며 음악가인 야마다와의 공동작업 속에서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세계를 소리와 움직임과 리듬으로 표현하는 무용고유의 기술을 추구해 나갔다.
 그는 일본의 전통적인 가부키무용을 구성하는 대사나 몸짓을 제거하고 문학의 구속에서 독립하여 소리와 움직임과 이들에 생명을 불어넣는 리듬을 하나로 융합하여 예술성을 높이고자 했다. 그러나 이시이가 단적으로 무용시에 대해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그의 무용시를 이해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비평가조차도 근대예술로서의 새로운 무용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한 형국이었다.
 그럼에도 이시이는 작업의 성과를 발표해 나갔고, 대중을 계몽하여 대중 속에 예술과 무용을 보급하려는 뜻을 품고 ‘아사쿠사 오페라’에 입단했다. 하지만 당시 대중들은 그저 오락만을 추구하여 저속화의 길을 걷고 있었다. 이에 이곳에서는 무용예술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고 판단한 이시이는 그곳을 뛰쳐나왔다.
 이시이는 일행을 이끌고 무용시창작에 몰두하면서 지방순회공연에 전념했다. 1922년 3월, 유락좌에서 단독 신무용발표회를 개최하여 무용극 〈도성사의 환상〉, 〈후광은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를 공연했다. 이시이는 아사쿠사 오페라를 나와 순수무용을 추구하는 길을 선택했고, 그 첫걸음으로 유럽행을 결심한다. 

 


 “난 외국에 무용을 배우러 가는 것이 아니다. 난 오직 내가 창작한 무용을 보다 넓은 세계로 나가 그들 앞에서 보여주고 그들로부터 어떤 비판을 받던지 간에 그들의 허심탄회한 인상을 직접 들어보고 싶은 것이다. 만일 내가 외국에서 하는 공연이 어떤 의미에서 내 스스로의 예술에 도움이 된다면 처음으로 나의 외유가 내 인생에 있어 연구과정의 하나임을 말하는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라는 상당한 자신감을 갖고 유럽행을 실행했다.
  1922년 12월 4일 이시이 고나미(石井小浪、1905~1978)만을 데리고 요코하마항을 출발한 이시이 바쿠는 파리를 거쳐 베를린에 도착, 매일신문사의 아베 마노스케(阿部真之助) 사회부장의 소개로 표현파 화가이자 피아니스트인 에리히 와스케와 만나 전람회에 초청받아 그곳에서 시연회를 가졌다. 이때 와스케의 피아노반주에 맞춰 〈멜랑코리〉, 〈포엠〉, 〈적적한 그림자〉 세 곡을 춤췄다.
 이것이 호평을 얻어 베를린에서도 일류 콘서트 매니저인 쟈크 운트 클라크가 본격적인 유럽데뷔 공연을 기획하는 행운을 얻었다. 이시이는 라흐마니노프의 곡에 맞춰 〈수인〉, 〈젊은 목신과 물의 요정〉, 〈명암〉 등을 춤춰 대 갈채를 받았다. 이어 라이프치히, 뮌헨, 드레스덴 등에서도 새로운 공연의뢰가 이어졌다. 

 

 


 이시이 바쿠가 유럽을 돌며 공연을 하던 그 즈음, 베를린에서는 1920년에 혹평을 받았던 뷔그만이 3년 후인 1923년에 설욕의 공연을 올렸다. 때마침 뷔그만의 공연을 접하게 된 바쿠는 그녀의 춤에 충격을 받았다.
 그는 “그녀의 춤은 다듬어지지 않고 거칠며, 결코 호감가는 춤은 아니었다. 그러나 음악을 무용에 종속시켜 무용의 위치를 높이고 있는 점, 군무 구성에 특히 뛰어난 두각을 보이고 있는 것 등, 하나부터 자신이 뜻하는 이상을 향해 나가고 있기 때문에 매우 감동 받았다.” 고 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우리 근대인들이 원하는 새로운 무용형태의 하나가 아닐까.” 라고 했다. 그는 드레스덴의 연구소에 와서 함께 작업하자는 뷔그만의 제안을 거절했다. 이유는 그녀의 춤은 그녀가 추기에 좋은 것이며, 바쿠 자신은 동양인으로서 가야할 길이 있음을 분명히 인식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결국 이시이 바쿠의 무용은 1910년대 전반기에 야마다와 오사나이가 유럽에서 체험한 것에서 영향을 받았고, 외유를 통해 스스로 경험한 1920년대의 요소를 갖추게 되었다. 그는 1923년부터 1925년까지 유럽에 머물면서 표현주의, 다다, 구성주의 등에 영향을 받았으며,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도쿄를 새롭게 보고, 일본인으로서의 자신의 춤을 되돌아보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외국에서의 순회공연을 마치고 귀국한지 얼마 안 있어 제1회 무용시공연을 츠키지소극장에서 5일간 가졌다. 무용시 창작에 자신을 얻고 돌아와 올린 공연이었다.

 이시이 바쿠는 “우리가 창작하는 무용은 모방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일본인의 무용이다.”라고 했고, 훗날에는 “우리 무용을 세상 사람들은 서양무용이라고 부르지만 난 이에 불만이다. 우리가 창작하는 무용은 처음부터 일본인의 무용으로 시작된 것이지 서양무용의 모방으로 시작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말을 꼭 하고 싶었다.”라고 밝혔다.
 가타오카 야스코 교수의 논리에 따르면, “무용의 매체인 육체는 악기나 화구처럼 새로운 것을 구매할 수 없다. 오랜 역사 속에서 기모노를 입고 타타미 생활을 해 온 육체가 구두와 좌식생활문화에서 길들여진 육체를 자기 것으로 만들기는 어렵다. 육체에는 풍토가 배어있다. 육체는 역사적 문화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렇다면 무용에서는 일본어를 쓰지 않으면 안 되는 문학처럼 서양 것을 모방이 아닌 절충주의로 출발했다고 할 수 있다. 엄밀히 말하면, 분명 서양음악이나 서양화처럼은 될 수 없었다. 일본인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의식적으로는 서양의 근대가 추구하는 순수무용을 지향하고, 그 맥락과 구조 속에서 아직까지는 전통적 일본인으로서의 육체를 사용해 다양한 외래의 요소, 즉 음악, 의상, 미술, 조명, 연출 등의 기법을 소화해내려고 했다”는 것이다.

 일본의 연구자들은 1920년대에 이시이 바쿠, 마리 뷔그만, 마사 그레이엄이 태동했고, 이들이 일본, 독일, 미국을 잇는 새로운 춤을 이끌어내어 1930년대 그 확립에 공헌한 현대무용 개척자라고 보고 있다. 이시이 바쿠를 통해 자국의 우월성을 내세우고자 하는 의도가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겠으나, 시기적으로 그들은 동시대에 각각 다른 지역에서 자신들의 새로운 춤세계를 세상에 내놓았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어느 쪽이 먼저 시작했던지 간에 이사도라 덩컨으로부터 촉발되어 서로 지역은 다르나 직간접의 정보를 통해 상호간 영향을 주고받으며 새로운 춤을 갈망했다.
 최승희가 외유공연을 통해 자신의 춤세계에 대한 확신을 가졌듯, 이시이 역시 외유를 통해 자신의 춤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갖게 되었다. 이 둘은 자신들이 그렸던 춤세계를 외유를 통해 확신을 가진 것이지 외유를 통해 없었던 것을 획득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일본으로부터 많은 긍부정의 영향을 받았고, 그 잔재와 흔적 속에서 성장해왔다. 일제강점기가 낳은 문화적 잔류를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과 잔재들이 아직도 곳곳에 남아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가 받아들인 신무용, 그것은 일본인 무용가 이시이 바쿠가 마리 뷔그만에 의해 확립된 표현주의 현대무용을 직접 체득한 것이 아닌, 외국유학을 다녀온 지인예술가들로부터 듣고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일본인 몸을 통해 표현된 새로운 춤이었고, 외유를 통해 다듬어진 무용이었다. 다시 말해 우리는 독일 표현주의 현대무용이 아니라 일본인이 만들어낸 표현주의적 현대무용을 이 땅에 들여왔던 것이다. 일본을 부정하고 싶지만 이는 어쩔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일제 강점기하에서 이미 이전부터 스스로 싹틔우고 있던 우리 문화예술의 근대화는 꽃을 피우지도 못한 채 일제에 의해 유입되어 이식된 문화로 대체되었다. 우리가 무용의 근대화기점을 이시이 바쿠로 보던 시각도 그러한 영향의 일부분이다. 1926년 이전부터 이미 개화의 꽃을 피우고 있던 우리의 문화를 살피기보다는 외부로부터 유입된 문화가 새로운 것인 양 하나같이 같은 목소리를 내었던 것이 불과 얼마 전까지다. 

 


 이시이 바쿠는 최승희나 조택원 등에게 무용의 기술적 기본을 가르치고 무용의 정신을 가르쳤다. 그리고 그들은 “한국인으로서의 춤을 춰라”라고 한 스승의 정신을 이어 자신들만의, 한국인으로서의 춤세계를 확립했을 뿐이며, 춤기법을 그대로 계승하였다고는 할 수 없다. 따라서 이시이 바쿠는 한국에 신무용이라는 새로운 춤장르를 창조한 선구적인 무용가들을 양성한 스승으로서 평가받아 마땅할 뿐, 독일 표현주의 현대무용을 우리에게 전한 무용가로 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여하튼, 우리가 지금껏 독일 표현주의를 수학한 이시이의 현대무용으로 인식해 왔던 부분에 대한 바른 진단이 필요하다. 더불어 독일의 표현주의와 이시이 바쿠의 표현주의적 현대무용의 차이에 대한 명확한 연구도 이어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김채원
한양대를 거쳐 일본오차노미즈여자대학에서 석·박사학위 취득, 이후 교육계에서 후진양성에 힘쓰면서 한일무용인교류와 전통춤 공연 등을 기획, 무용학이론 연구와 공연을 병행하고 있다. 『최승희춤-계승과 변용』, 『한국춤통사』, 『서울공연예술사』 등의 저서와, 『일본 현대무용의 개척자 이시이 바쿠의 무용예술』 등의 편저가 있다. 최승희와 북한춤, 남북한춤 비교, 한일춤 비교연구가 주된 관심사이다.
2017. 07.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