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연구

2017 한국춤비평가 신인상 발표/ 수상소감 · 심사평 · 입선작품
가작 입선: 이상헌(李相憲)

춤작품론: 창작춤 〈paradox〉 – 아감벤의 잠재성 개념으로 본 순수한 춤의 가능성

춤작가론: 허경미 – 〈진화〉의 춤 길에서 〈外치다〉





■ 수상소감

84년이었던가?
처음 춤 공연을 본 후
20년 정도를 무대미술로, 10여년은 기획자로 홀린 듯 춤판 주위를 서성였습니다.
여전히 춤판의 경계에서 서성이면서,
동작과 이미지의 행간에 가득한 무한대의 것에 대해 말해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의욕만 앞서 설익은 글을 내어놓고 말았습니다.
반 푼어치의 글을 가작으로라도 뽑아주신 것은
이렇게 시작해서 제대로 된 춤글을 써보라는 채찍과 격려라고 여깁니다.

언젠가 부끄럽지 않은 춤글을 쓸 때가 있겠지요.
여기까지 함께 한 춤꾼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 수상자 약력

(현) 무용단 Redstep 기획
민주주의사회 연구소 ‘정치·미학연구회’ 연구위원
「성찰과 전망」 편집위원
부산무대예술위원회 회원

부산대학교 예술대학 미술과 졸업
부산대학교 대학원 예술문화와 영상매체 협동과정 박사수료(공연학)
(사)민족미학연구소 사무국장 역임



■ 〈2017 춤비평 신인상〉 심사평

 해마다 있는 ‘춤비평신인상’은 숨은 비평가를 발굴하여 국내 춤비평의 자산을 돈독히 하려는 취지를 갖는다. 춤비평은 자체의 선도(鮮度)를 간직하는 한 방편으로서 자신의 언어로 남다른 시선을 환기하는 신인 비평가의 역할을 기대할 것이다. 올해 ‘춤비평신인상’에는 2편의 응모작이 접수되었다. 올해는 전문지 편집자를 역임하고 등단한 경력의 춤애호가와 개인 무용단의 기획자이자 인문 계열 연구소에 소속한 문화 활동가가 응모하였다. 두 편의 응모작 가운데 이상헌의 응모작을 심사위원들은 ‘가작’으로 정하는 데 의견 일치를 보았다.
 이상헌은 춤작품론(창작춤 〈paradox〉: 아감벤의 잠재성 개념으로 본 순수한 춤의 가능성)과 춤작가론(허경미: 〈진화〉의 춤 길에서 ⟨外치다⟩)을 응모작으로 제출하였다. 춤작품론은 철학자 조르지오 아감벤의 잠재성 개념에 준해 〈paradox〉를 풀이하였다. 아감벤의 잠재성에 동시에 내재된 ~할 잠재성과 ~하지 않을 비잠재성에 착안하여 그는 〈paradox〉가 비잠재성의 일면을 얼마간 보여준 것으로 평한다. 비잠재성의 몸으로 표출되는 잠재성의 춤은 순수성을 담지한 작품이라 진단하면서 그는 권위(법)에 휘둘리지 않는 새로운 춤이 도래할 가능성을 전망한다.
 춤작가론의 대상인 무용가 허경미는 이상헌이 같은 무용단의 기획을 맡고 있어 지근거리에서 관찰한 무용가의 작가론이다. 무용가의 이력과 작품 경력을 좇으면서 무용가 내면의 심적 동기에 맞추어 작품 활동을 조리있게 조명해 보인다.
 또 다른 응모작은 현대무용 안무가의 작품을 대상으로 작품론을 전개하였다. 논의 대상이 되는 작품의 전개 내용 및 제작 과정을 두루 소개하면서 응모자 자신의 소감을 곁들였다. 이 작품론에서는 해당 작품에 대해 여러 의문이 제기되며 응모자의 날카로운 시선도 간혹 발견된다. 그리고 작가론에서는 다른 현대무용가의 작품 경력을 주요작을 줄기로 정리하면서 해당 무용가 개인의 성향과 연관시키는 방식을 취하였다. 두 편의 글에서 응모자가 자료 섭렵을 위해 애쓴 흔적이 보이지만, 오히려 인터뷰 기사 인용과 같은 장치에 과도하게 의존하고 유보적 언술을 남용함으로써 응모자 자신의 조리정연한 해석은 빈약한 편이었다.
 두 편의 응모작에서는 장문의 글들임에도 불구하고 해당 작품이나 작가가 춤계에서 가질 의의가 소략하거나 부재하였으며 해당 작품을 춤계의 전반적 동향과 비교하는 상대적 언급은 사실상 전무하였다. 비평이 작품과 작가를 춤계의 흐름에 견주어 논하는 것이 보다 객관성을 띠는 동시에 춤계 내 기여도도 높다는 인식을 환기하고 싶다.



2017 춤비평 신인상 심사위원
이순열 김태원 김채현 장광열 이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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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 춤비평 신인상〉 응모작- 춤작품론


창작춤 〈paradox〉[1]

아감벤의 잠재성 개념으로 본 순수한 춤의 가능성





프롤로그: 도래하지 않은 춤의 미래

 춤의 미래, 도래하지 않은 춤은 어떤 것일까? 미술을 비롯한 다른 장르의 예술이 ‘모던’, ‘포스트모던’을 지나 ‘포스트 포스트모던’과 그 이후를 이야기하는 시대에도 춤은 여전히 ‘모던’이라는 19세기의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어린 학생은 대학입시를 위해서 정형화한 춤을 배우고, 대학에서는 자신의 춤을 고민하고 탐색하기에 앞서 스승의 동작을 배운다.
 ‘모던 댄스’가 미래의 무용이고 미래 무용은 스승으로부터 대물림되는 ‘과거의 혁신’이 아닌, 각자가 스스로 찾아내는 ‘변화의 발현’이라고 한 이사도라 덩컨의 선언은 이런 현실에서는 이미 무색하다. 더한 사실은 이사도라 덩컨의 선언이 ‘모던 댄스’를 말한 것이라는 데에 있다. 19세기에 태어나 20세기를 추동한 ‘모던’이 유독 춤에서만 21세기에 이르러서도 그 영향을 잃지 않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여전히 춤의 미래는 ‘모던’인가?

 다시 한 번 질문을 던져보자. 도래하지 않은 춤의 미래는 어떤 것일까? 여기서 ‘미래’란 선형적인 시간 개념에서 앞으로 구현될 어떤 특정 방향이 아니라, 관점의 지평에서 계속해서 생성되는 가능성의 임박한 현현(顯現)이다.[2] 우리가 미래에 대한 이 개념을 받아들인다면 춤의 미래는 현현을 준비하는 가능성의 지평이 되어야 한다. 춤 혹은 춤추는 몸이 잠재성 상태에서 현현과 비현현을 능동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비)잠재성의 지평 말이다. 그래야만 춤의 미래에서 ‘모던’의 그림자를 지울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 연작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우리 시대 가장 중요한 철학자 중 한 명이다. ‘예외상태’, ‘벌거벗은 삶’, ‘잠재성’과 같은 개념들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그의 사유는 철학, 정치학, 법학, 사회학, 종교학, 문학 이론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에 큰 영향을 주었다.[3] 아감벤은 2000년 이후 매년 한 권 이상의 저서를 발표하면서 본인의 사유 경계를 확장해 나가는 현재진행형의 철학자이므로 아감벤 사유의 핵심을 섣불리 요약하기는 쉽지 않지만, 이 글에서는 그의 사유에서 중요한 개념 중 하나인 ‘잠재성’을 토대로 논의를 전개해 보고자 한다. 아감벤은 『유아기의 역사』에서 모든 글쓰기는 아직 쓰이지 않은 글쓰기의 서문으로 생각할 수 있다[4]고 말한 바 있다. 이는 그의 작업이 갖는 미완의 성격을 잘 드러낸다. 그의 작업은 영원히 완성될 수 없는 작업이고, 그렇기에 잠재성이다. 이 같은 아감벤의 사유는 정치철학만이 아니라 미학에도 유효하다. 모든 예술작업은 완성될 수 없고, 그렇기에 예술작업은 근원적으로 잠재성의 영역에 머무른다. 예술작업의 잠재성은 예술가를 충동하며 예술가의 행위가 예술이게 하는 계기이기도 하다. 이제 아감벤의 (비)잠재성 개념을 빌려 도래하지 않은 춤의 미래를 그려보자. (비)잠재성이라는 충동과 근원의 계기가 춤의 미래를 예비하고 있는지 말이다.



1. 잠재성(potential)

 아감벤의 잠재성은 ‘할 수 있다는 동사의 의미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서 시작된다. 이 물음에 대해 아감벤은 잠재성이란 결여와 비존재를 환대하는 근본적인 수동성(능동적 수동성)이라고 답한다. 아감벤은 이 개념을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영혼론』과 하이데거의 1931년 세미나를 참조해서 만들었다. “이 세미나에서 하이데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의 몇 구절을 논평하면서, 힘의 곁에는 무력(無力, im-potentia)도 있으며, 여기에서 접두사 im-은 단순한 부정이 아니라, 결여(sterēsis), 박탈된 상태에 있음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무력은 힘과 함께 가며, 반대로 힘, 능력(dunamis)은 결여에 노출되어 있고, 그것과 밀접하게 연관된 것이다. 예를 들면 어둠은 빛의 결여이고, 침묵은 소리의 결여이다. 여기에서 하이데거가 말한 ‘결여에 노출됨’은 아감벤에 의해 ‘비존재를 환대하는 근본적인 수동성’의 잠재성으로 발전된다.”[5]

 아감벤은 자신의 책 『목적5없는 수단』에서 몸짓의 잠재성, 그리고 그것의 정치성에 주목한다. 그에 따르면 무능력에서 능력으로 전화되는 가운데 우리가 경험하는 잠재성은 ‘목적론’을 비판하고, ‘순수 수단’을 강조함으로써, 보이지 않는 것, 부재한 것을 보이거나 보고, 나아가 언어 자체, 소통 가능성 자체를 교환하게 해준다.[6]
 ‘무능력의 능력’이란 ‘~ 할 수 없음’의 능력이라기보다는 ‘~ 하지 않음’(능동적 수동성)의 능력에 가깝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능력/무능력 또는 잠재성/비잠재성이 아니라 (무)능력 또는 (비)잠재성만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 아감벤의 주장이다.[7] 아감벤은 이 두 번째 경우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데, 왜냐하면, 바로 ‘...이지 않을 수 있음’을 행하는 것이야말로 예술이나 인간 사유 활동에 고유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를 ‘무능력의 능력’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어둠으로 보이지 않는 무대 위 춤꾼은 아마도 현실태로 이행하지 않은 잠재태, 즉 ‘무능력의 능력’을 표현하는 단적인 예라고 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에서 신적인 사유의 아포리를 논하면서, 결국 최고의 사유는 사유 자체를 사유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사유가 무엇을 사유함으로써 사유의 대상에 종속되지 않고, 진정 아무것도 사유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유 능력 자체를 사유하는 것이다. 잠재성인 사유가 마치 텅 빈 서판(tabula rasa)과 같을 때, 서판에 아무것도 새겨지지 않고 서판 자체가 하나의 백지가 될 때, 그것은 궁극의 잠재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예술이 이런저런 작품을 생산하는 활동이 아니라, 텅 빈 서판과도 같은 예술 그 자체가 되는 아이러니 속에서 우리는 잠재성에 대해 경험을 할 수 있다.
 “이것은 ‘무위(inoperosità/inoperative)’[8] 개념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아감벤은 여러 저작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를 언급하는데,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가 ‘무위를 하는 자’, 자신의 비잠재성을 행하는 자라는 사실이다. 그것의 대표적인 사례는 허먼 멜빌의 소설, 『필경사, 바틀비』에 나오는 바틀비다. 무위는 바틀비의 ‘나는... 하지 않는 것을 선택한다(I would prefer not to ...)’라는 정식을 통해 하나의 저항 방식이 된다. 아감벤은 이 정식이 ‘...할 잠재성과 ...하지 않을 잠재성의 비구분 지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덧붙인다. 바틀비의 정식은 동시에 A이면서 not-A인 상황, 혹은 A가 not-A보다 낫지 않은 상황을 보여주는데, 이것은 A와 not-A의 등가성을 말한다기보다, A나 not-A를 필연적으로 선택해야 하는 이유에서 벗어난 잠재성의 존재 방식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바틀비는 ...이거나 ...이거나라는 ‘구분 자체를 구분’하면서 그 경계 위에 있게 된다. 현실성 속에서 언제나 A이거나 not-A이지만, 잠재성 속에서는 그 둘이 동시에 존재한다.”[9]

 아감벤은 『예외상태』 4장에서 무위를 이해할 수 있는 설명을 하고 있다.

 언젠가 인류는 마치 어린이가 쓸모없는 물건들을 가지고 노는 것처럼 법을 갖고 놀 것이다. 이는 법을 경전에 따라 사용하는 상태로 되돌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그런 사용에서 법을 해방하기 위해서이다. 법 이후에 발견되는 것은 법에 선행하는 더 적절하고 원래적인 사용가치가 아니라 법에 따라 오염되어온 사용법도 반드시 자신의 가치에서 해방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해방이 바로 궁리나 놀이의 임무이다.[10]

 무위는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기존의 법을 아예 지우는 일이 아니라 기존의 사용(법)을 멈추게 하여 법의 활력을 빼앗는 일, 즉 법을 다르게 사용하는 것이다.[11]

 춤꾼이 춤을 배운다는 것은 몸을 사용하는 다양한 사용법을 익힌다는 것이다. 그 사용법은 오랜 시간을 거쳐 권위(법)를 확보하였고, 권위를 벗어나는 움직임은 항상 배제와 무시의 위험을 감수해야만 한다. 그래서 대부분 춤은 권위(법)의 그림자를 밟는 것이고, 그래야만 권위로부터 춤출 자격을 부여받았다. 하지만 춤추는 데 무슨 자격이 필요한 것인지, 설혹 자격이 필요하다고 해도 누가 그것을 부여한다는 말인가. 춤출 자격은 ‘생명이 있음’이고, 그 자격을 부여하는 것은 ‘생명’ 자체이다. 이렇게 정당하지도 않고 필연적인 것도 아닌 권위로 인해 춤은 춤 자체를 잃어버리고 오로지 목적을 위한 메시지와 표현에 몰두하게 된 것이 아닐까. 이런 상태에서 춤의 가능성은 볼 수도 찾을 수도 없고, 단지 시도할 때마다 권위에 포획되는 규범집의 한 장면이 될 뿐이다. 그렇다면 춤이 새로운 가능성에 자신을 위치시킬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우선 기존 사용법의 활력을 빼앗고 작동을 멈추게 해야 한다. 그렇게 법(권위)으로 인해 오염된 사용법과 자신의 가치에서 해방되고 궁리와 놀이가 되는 것이야말로 춤이 꿈꾸는 ‘순수한 춤, 춤의 가능성의 지평’을 경험할 수 있는 길일 것이다.



2. 〈paradox〉 : 잠재성의 춤

 은은하고 울림이 깊은 큰 종소리와 딸랑거리는 방울(카우벨) 소리에 맑고 묵직한 울림의 여성 스캣이 2분이 넘게 천천히 울려 퍼진다. 소리 이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 상태이다. 조명이 연하게 사각을 그리며 게으르게 켜지고 조명 끝으로 춤꾼의 뒤꿈치가 슬쩍 묻어난다. 그동안 어둠에서 누군가가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는 순간이다. 보이지 않았지만, 어둠 속에서 저 뒤꿈치의 주인은 움직이고 있었다. 그제야 사각이며 옷깃 스치는 소리를 들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일어나지만, 이내 춤꾼의 뒤꿈치와 종아리가 조명 밖 어둠 속으로 모습을 숨긴다. 빛은 사라지는 몸의 흔적을 천천히 쫓고 조명을 벗어나는 춤꾼의 발걸음도 느긋하다. 단지 보이지 않을 뿐, 감각하지 못한다고 어떤 존재가 없는 것이 아니다. 어둠과 소리에 묻힌 춤꾼은 어떤 현실태로도 드러나지 않은 채 잠재성의 상태로 그곳에 존재하고 있었다. 보려는 자와 보이고 싶지 않은 자 간의 신경전이 시작되는 지점, 관객과 춤꾼 사이에 긴장이 시작하는 순간이다.

 음악 트랙이 바뀌고 행드럼(Hang Drum, Handpan Drum) 연주가 시작되면서 무대 중앙의 어둠을 제외하고 좌우와 앞(객석 쪽)으로 사각의 조명이 밝아진다. 세 방향으로 밝아진 조명이 바닥에 반사되어서 어둠 속 춤꾼의 몸 일부가 희미하게 드러난다. 검은색 의상을 입은 춤꾼의 몸은 얼굴과 팔의 일부분 그리고 종아리로 분절된 듯이 보인다. 아니,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어른거린다는 표현이 적당하지 싶다. 연결이 없어 보이는 부분은 각각이 하나의 유기체처럼 흐느적거리면서 서로가 숨겨진 관계를 맺고 있는 듯하다. 분절된 것의 규칙을 알 수 없는 움직임 때문에 관객의 감각은 점점 예민해지고, 움직임을 포착하려고 동공은 커진다.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가?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관객의 의문과 불평만 더욱 깊어진다. 보여주지 않을 것을 보라고 한단 말인가? 춤꾼의 의도가 아직 관객의 기대와 만나지 못하고 있다. 이제 무대는 보이지 않는 춤꾼과 불편한 관객의 감정적 긴장감이 음악과 조명을 압도하는 상태로까지 치닫는다. 서서히 빨라지는 리듬에 따라 춤꾼이 몸을 앞으로 굽히면서(굴신 屈身) 몸의 높낮이가 변하고, 앞으로 나아가던 움직임이 진폭을 넓히면서 어둠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새기기 시작한다. 굴신과 함께 손은 좌우로 사위를 만들어 낸다.
 하지만 얼핏 얼핏 보이는 분절된 춤꾼의 움직임을 춤이라고 느끼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첼로의 선율과 함께 팔이 천천히 어깨로 올라간다. 조명 조도가 높았다, 낮았다 하면서 춤꾼의 몸은 드러나고 사라지고를 반복한다. 조명의 변화를 타는 듯 타지 않는 듯 계속 흐느적거리는 몸짓을 보면서 관객은 춤추는 존재를 그제야 확신하게 되고, 어느 정도 움직임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로 조금씩 긴장을 풀게 된다. 하지만 언뜻 몸이 드러나는 춤꾼은 애써 춤추려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기껏해야 자신의 주위를 어루만지고 음악에 몸을 실어 흔들거릴 뿐이다. 왜 이러고 있는 것일까? 춤꾼은 이렇게 말한다. ‘이때까지의 기준과 시각으로 지금·여기에서 추는 나의 춤을 파악할 수 없다. 춤을 보려 하지 말고 춤 자체를 사유하라.’ ‘새로운 지각과 인식을 가능하게 해주는 춤의 잠재성을 사유하라.’ 형식과 내용을 전달(표현)하기 위한 춤, 그래서 춤 자체는 사라지고 남은 메시지와 형식만으로는 춤 자체를 사유할 수 없다. 춤은 인간 몸짓의 영역을 장치(푸코:dispositif, 영:apparatus)[12]로부터 구출하는 목적 없는 수단이어야 한다.



3. 〈paradox〉 : 비잠재성의 몸

 춤꾼은 춤으로 말한다. 무대에서 춤으로 말하기 위해서는 조명을 이용해서 자신만의 맥락을 만들 필요가 있다. 그런데 〈paradox〉에서 춤꾼은 조명을 의도적으로 피해 다니고 어둠 속에서 어렴풋이 보이는 몸의 실루엣은 관객의 답답함을 풀어주기에 역부족이다. 그렇다면 춤꾼은 왜 무대에 올랐는가? 춤추는 몸을 보여주지 않을 거라면 다른 무대장치나 효과로 관객에게 메시지를 전달해야 할 것이 아닌가. 친절하고 충실한 메시지 전달을 받기 원했던 관객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진다. 무엇인가 현실적인 것으로 나타나라는 것이 관객의 기대인 데 반해 춤꾼은 좀처럼 잠재성의 상태에서 벗어날 생각이 없다. 필경사 바틀비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바틀비는 그의 고용주에게 ‘나는 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겠다.’(I would prefer not to.)라는 말로 자신이 해야 하는 업무마저 거부하겠다는 의사를 밝힌다.[13] 〈paradox〉에서 춤꾼은 마치 ‘나는 드러나지 않는 것을 선택하겠어요.’라고 말하는 것 같다.

 춤이 일종의 의사소통이라면 발화자와 수신자가 그 역할을 계속 바꾸면서 소통이 이루어져야 한다. 일반적인 춤 공연에서 발화자의 역할을 먼저 맡는 쪽은 춤꾼(안무자)이다. 춤꾼은 자신이 준비한 이야기를 몸짓, 표정, 음악, 무대장치를 빌려 관객에게 표현한다. 춤꾼이 무대에서 이야기하고 있을 때 수신자인 관객은 끼어들 수 없다.(한국 전통연희에서는 관객이 극에 개입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춤 공연에서 관객이 개입할 여지가 매우 좁다고 할 수 있다.) 발화자-춤꾼이 이야기하는 동안 수신자-관객은 발화자가 보낸 정보를 분석하고 정리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드디어 발화자-춤꾼의 이야기가 끝이 나면서 막이 닫히면, 수신자-관객이 자신이 기대했던 역할 바꿈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런 불균형한 소통 형식이 일반적인 공연과 관람(감상) 형식이다. 공연 따로 감상 따로. 그런데 발화자와 수신자의 역할이 바뀌지 않고 일방적인 상태에서 끝나버리는 것을 과연 소통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리고 이런 불균형한 상태가 공연과 관람이라는 상황에만 있는 것일까?
 안무자는 소통의 불균형한 상태를 공연만이 아니라 일상에서 자주 느꼈던 것 같다. 안무자는 작품 제목 〈패러독스(paradox)〉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밝은 곳에서 상자 안을 보면 어두운 곳이라 말한다. 어두운 곳에서 상자 안을 보면 어두운 곳이라 말하지 않는다. 세상의 눈. 그리고 그 색. 그 시선들은 시간을 가로지르고 나는 그 시간을 침묵으로 횡단한다. 밝은 곳에서도, 어두운 곳에서도 상자는 그대로 존재할 뿐이다.“
 안무자는 ‘밝은 곳에서도, 어두운 곳에서도 상자는 그대로 존재할 뿐’인데, ‘세상의 눈. 그리고 그 색.’이 상자가 어둡거나 밝다고 판단한다고 말한다. 상대적인 시각이 관여할 수 없는 고유의 가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눈과 색은 고유의 가치를 무시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을 안무자는 ‘paradox’라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밝은 곳에서 보는 상자 안을 어둡다고 하고, 어두운 곳에서 보는 상자 안은 어두운 것이라 하지 않는다는 그 상황이 바로 역설적 상황이라고 말한다. 얼핏 모순되어 보이지만 어느 것이 잘못되었다고 판단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어느 편이 옳다고도 판단할 수 없는 상황이다. 세상의 눈과 색으로 자신을 재단해서 네가 옳다 그르다 혹은 맞다 틀리다고 판단하는 시도들이 싫지만 그렇다고 그 판단과 시도가 잘못되었다고만은 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예술적 저항으로서의 춤이 〈paradox〉라는 제목으로 태어났다. 안무자는 자신이 생각하는 마땅한 현실과 실제 현실 사이의 괴리가 불러오는 상황을 역설적이라고 여기고 있다.

 〈paradox〉에서 역설적 상황은 작품의 주제만이 아니라 무대 형식적 측면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무대공연에서는 출연자가 조명을 찾아 들어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조명은 공간을 밝음과 어둠으로 나누어 작품의 전개상 불필요한 공간과 맥락을 정리하는 역할을 한다. 안무자는 조명의 이런 고유기능을 활용해서 자기가 표현하고 싶은 주제에 맞는 공간과 맥락을 만들어 낸다. 그런데 〈paradox〉에서는 조명의 이러한 일반적 활용이 뒤집어진다. 춤꾼은 조명의 밝음을 역이용해서 지속해서 몸을 숨기고, 조명을 찾아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명을 밀어내거나 조명을 벗어나는 동작을 통해 자신의 존재가 섣불리 읽히게 하지 않게 하면서 맥락의 구축을 끊임없이 방해한다. 이러한 조명의 역이용이 조명의 활용을 포기한 듯 보이기도 하겠지만, 이것은 결국 조명의 역설적 활용이라는 조명기능의 확대활용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조명을 밝히는 지점이 관객의 시선이 머무는 곳이었지만 〈paradox〉에서 조명은 어둠을 어둠의 가치로 빛나게 만드는 역설적 효과를 주는 역할을 한다.

 7분가량 지나면서 행드럼의 리듬은 현악기의 선율과 어울림이 깊어지고, 동작은 다소 빠르고 커지지만, 동작의 에너지가 무대 공간으로 번져 나오지는 않는다. 무대 공간은 행드럼의 울림이 채우고 있다. 공명이 좋은 행드럼 연주 음악을 선택한 이유가 공간을 채우는 음악의 효과를 이용하기 위한 것일 거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다. 반주 음악을 선택하면서 작품 안에서 춤과 음악의 역할 균형을 섬세하게 고려하고 있다. 춤이 음악을 이미지화한 것이라는 극단적인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춤에서 음악은 거의 절대적인 요소이다. 그런 면에서 안무자가 선택한 반주 음악은 그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다. 반주 음악의 박자가 두드러지게 빨라지면서 조명은 무대의 네 귀퉁이에 사각의 밝은 지점을 만들고 네 개의 밝은 사각 사이를 어둠이 십자형의 길을 만든다. 춤꾼은 어둠의 길을 밟고 이리저리 빠르게 움직이고, 역광상태에서 언뜻 보이는 춤꾼의 어두운 실루엣은 빠르게 자취를 감추었다 드러내기를 반복한다. 작품이 2/3 정도 진행되는 동안에도 관객 누구 하나 춤꾼의 몸과 동작을 정확하게 포착하지 못했다. 타인의 시선에 포획되지 않겠다는 안무자의 의도가 이런 결과를 가져오게 하였다. 그로 인해 관객은 끝내 답답함을 시원하게 풀지 못한 상태를 유지하게 된다.

 관객이 춤꾼 찾기를 포기할 즈음 밝음은 어둠의 길을 잠식하면서 춤꾼을 조여 온다. 이제 춤꾼이 설 곳은 사방의 밝음에 갇힌 작은 어둠의 사각이다. 아니 빛의 틈이 만들어 낸 미지의 지점이라고 말하는 편이 적절할 수 있겠다. 모든 곳이 밝다면 밝은 곳이 없다는 말이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밝음이 밝음으로 가치를 가지려면 어둠의 지점이 그 곁에 있어야 한다. 밝음은 어둠을 예비하고 어둠은 밝음을 잉태하고 있다. 밝다는 것의 기준이 어둠이고 어둠의 기준이 빛이다. 그러므로 빛의 틈이 만들어 낸 어둠은 빛이 만들어 낸 한 부분이며, 어둠에 서 있는 춤꾼은 빛의 한 부분에 서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여기서부터 빛과 어둠을 나누어 보는 것은 무의미해진다. 그렇게 어둠 속 춤꾼은 빛의 한 부분인 어둠에 존재하는 비잠재성의 몸이 되고 만다. 다시 한 번 바틀비의 대사가 떠오르는 장면이다. ‘나는 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겠어요.’(I would prefer not to.) ‘나는 드러나지 않는 것을 선택하겠어요.’

 이런저런 모양으로 어둠과 그 속의 춤꾼을 쫓아오는 조명의 여러 시도 속에서도 춤꾼은 계속 조명을 피해 뛰어다니다가 막바지에 이르면서 춤꾼은 스스로 조명의 밝음에 몸을 드러낸다. 어둠의 몸은 갑작스러운 밝음을 감당하지 못하고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돌린다. 몇 차례 손을 뿌리치다가 결국 얼굴을 들어 밝음을 대하지만 뻗은 손의 그림자로 기어이 얼굴을 가린다. 한번 두 번 얼굴을 가린 손 그림자가 치워지고 온전히 빛을 마주한 춤꾼은 조용히 팔을 들어 산란하는 빛의 어지러움 속에서 자신만의 균형을 잡는다. 타인의 시선과 판단을 피할 수만은 없는 현실에 대한 표현일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드러내지만, 당신들이 기대하는 춤은 추지 않을 거라고 말하는 듯하다. 춤을 추는 것이 아니고, 애초 한 걸음씩 비켜왔던 빛을 이제 두 팔로 중심을 잡은 채 한 걸음씩 밀어 나간다. 조명은 춤꾼의 의도대로 한 칸씩 밝음을 넓혀간다. 잠시 빛의 길에 나왔던 춤꾼은 다시 처음의 자리에서 흔들리면서 빛에서보다 더욱 매혹적으로 빛났던 어둠으로 돌아간다. 다른 것이 될 가능성인 잠재성과 어떠한 것도 되지 않을 비잠재성의 지평 속으로 말이다.



4. 에필로그: 순수한 춤의 가능성

 채희완은 춤과 삶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은 왜 춤추는가. 이런 질문은 왜 사느냐 하고 느닷없이 묻는 것처럼 황망한 바가 없지 않지만 춤에 관한 한 가장 원초적이고 또 궁극적인 물음이 될 터이다. 살아있기에 춤춘다. (……) 춤은 살아있음을 자기 확인케 한다. 나아가 춤추지 않고서야 어찌 인생을 알리오 라는 잠언도 있듯이 춤은 삶의 방도를 깨우치게 하는 계기도 된다. (……) ‘삶’의 질을 적극적으로 확대재생산 하는 춤은 죽음에 대립하는 ‘살아있음’의 의미 지평과 맞물려 있을 때 더욱 생생한 현실감을 얻는다.[14]

 인간은 어떤 동일성/정체성이나 소명으로도 고갈시키는 게 불가능한 순수 잠재성의 존재이다. 채희완의 춤에 대한 언급은 죽음에 대립하는 살아있음의 의미와 맞물려 생생한 현실로 삶을 추동하는 원천으로서의 춤을 이야기한다. 이것이 곧 ‘어떤 동일성/정체성이나 소명으로도 고갈시키는 게 불가능한 순수 잠재성의 존재’인 인간이고, 그런 인간의 순수한 춤이다.

 〈paradox〉에서 춤꾼은 현실성으로 드러나라는 요구를 끝내 거부하면서 ‘어떤 춤’의 형식이나 캐릭터로 드러나지 않는다. ‘어떤 춤’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떠한 춤’으로도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가능성은 결국 춤의 잠재성이고 잠재성의 춤을 말한다. 어떠한 것도 될 수 있는 춤인 동시에 어떠한 것도 되지 않을 수 있는 춤은 그야말로 순수한 가능성의 춤이라고 할 수 있다. 잠재성의 순수한 춤 말이다.
 그렇다고 〈paradox〉가 백퍼센트 잠재성의 춤(혹은 가능성의 춤)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paradox〉는 춤에서 ‘~이지 않을’ 비잠재성의 일면을 어느 정도 보여 준 작품이었다고 할 수는 있다. 안무자가 설정한 ‘역설적’인 상황이 어느새 춤의 잠재성을 엿보게 하는 데로까지 나아가게 된 것은 〈paradox〉에서 보여준 몸의 비잠재성 때문이다. 비잠재성의 몸은 목적 없는 수단으로서의 몸을 말한다. 춤의 순수성, 순수한 춤의 가능성을 위해서는 춤추는 몸이 목적 없는 수단이 되어 자유로운 가능성을 창출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paradox〉는 어둠에서 매혹적으로 빛나는 비잠재성의 몸이 보여준 잠재성의 춤이고 이 때문에 춤의 순수성을 담지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아감벤의 잠재성 개념으로 하나의 춤 작품을 살펴보면서, 춤꾼의 몸과 춤이 잠재성으로 충만해지는 것이 가능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지속적인 실천으로 이어지거나 나아가서 그 춤꾼의 삶이 되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몇 개의 작품, 몇몇 순간의 춤이 잠재성으로 충만할 수 있겠지만, 이들이 집요한 기존의 춤 사용법에 어떻게 포섭되지 않고 지속해서 잠재성으로 남아 있을지는 자신할 수 없다.
 하지만 아감벤의 주장대로 무위의 상태에서 맞이하는 구원의 순간이 연대기적 시간의 연속 선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그때마다 도래하는 것이라면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구원은 완결이 아니고 아주 미세한 변화에서 찾아오는 순간의 연속이다. 그렇다면 춤의 미래를 위한 몸의 새로운 사용법은 춤이 ‘권위(법)’으로 작동하게 되는 순간마다 비잠재성의 몸이 되어 춤이 ‘권위(법)’으로 되는 것을 끝없이 지연시켜야 하는 운명에 처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크게 바뀌는 것은 없고, 기존의 권위(법)에 반응하지 않는 사소한 변화가 필요하다. 순수한 춤이란 그런 것이고 그래야만 한다. 아주 미세한 변화가 기존 권위(법)의 사용을 무효화시키며 그렇게 하여 새로운 춤의 잠재성과 가능성이 만들어질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로서 순수한 춤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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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창작춤 〈paradox〉는 권수정이 안무, 출연한 작품으로, 2016년 11월11~12일(부산민주공원 소극장) 무용단 Redstep 정기공연 〈춤 추는 몸 – 사유의 순수한 이미지〉에서 처음 공연하였고, 2017년 5월 19~21일까지 같은 장소에서 열린 무용단 Redstep 기획공연 〈2017 Remember That〉에서 재공연하였다. 이 글은 2017년 재공연한 작품을 바탕으로 작성하였다.
[2] 서현석, 김성희 『미래 예술』 작업실유령, 2016, p.11
[3] 조르주 아감벤, 김영훈 譯 『벌거벗음』 인간사랑, 2014, p.183
[4] 조루주 아감벤, 조효원 譯 『유아기의 역사』 새물결,2010, p.11
[5] 양창렬, 『진리, 자유』, 연세대학교 진리자유편집실, 2006년 여름호(61호)
[6] 조르주 아감벤, 김상운, 양창렬 譯 『목적없는 수단』 도서출판 난장, 2016, pp.67~72
[7] 앞의 책 p.75, 218
[8] 아감벤의 외국어본에서 inoperosità(이), inoperative(영), otium(『The Open』) 등으로 사용하는 개념을 한국어본에서 김상운, 양창렬 등은 ‘무위’로 번역하였다. 그런데 ‘무위’가 노자의 ‘무위자연(無爲自然)’과 한글 표기가 같고 뜻이 비슷한 부분이 있어서 논란을 부르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노자의 ‘무위’와 아감벤의 개념을 번역한 ‘무위’는 서로 등치 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이 글에서는 이 부분에 대한 논의가 글의 취지에 필요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하고, 아감벤의 개념 ‘무위’를 ‘작동하지 않음’의 뜻을 가진 영어 ‘inoperative’와 함께 표기한다.(필자 주)
[9] 양창렬, 『진리, 자유』, 연세대학교 진리자유편집실, 2006년 여름호(61호) p.59-61
[10] 조루주 아감벤, 김향 譯, 『예외상태』 새물결출판사, 2009. p.124
[11] 앞의 책, p. 123
[12] 아감벤은 푸코의 장치 개념을 더 확장해서 자신만의 장치 개념을 설정하는데, 아감벤은 장치를 ‘생명체들의 몸짓, 행동, 의견, 담론을 포획, 지도, 규정, 차단, 주조, 제어, 보장하는 능력을 지닌 모든 것을 문자 그대로 장치라고 부를 것이다. 따라서 감옥, 정신병원, 판옵티콘, 학교, 고해, 공장, 규율, 법적 조치 등과 같이 권력과 명백히 접속된 것들뿐만이 아니라 펜, 글쓰기, 문학, 철학, 농업, 담배, 항해(인터넷 서핑), 컴퓨터, 휴대전화 등도, 그리고(왜 아니겠는가마는) 언어 자체도 권력과 접속되어 있다. 언어는 가장 오래된 장치인지도 모른다.’(『장치란 무엇인가? 장치학을 위한 시론』 조르조 아감벤, 양창렬 역. 난장. 2010년. p.33)고 설명한다.
[13] 허먼 멜빌, 한기욱 譯 『필경사 바틀비』 창비, 2010, p. 30
[14] 〈부산민족문화〉2집, 부산민족문화운동협의회,1990년. 채희완 『지기금지, 지극한 기운이 이곳에 이르렀으니』 도서출판 전망, 2013년.pp 227-228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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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 춤비평 신인상〉 응모작- 춤작가론


허경미[1] - 〈진화〉의 춤 길에서 〈外치다〉



1. 프롤로그

 현재진행형인 작가를 갈무리한다는 것은 매우 조심스러운 일이다. 설익은 갈무리로 한 예술가가 섣불리 평가될 수도 있는 일이고, 작가가 미처 도달하기 전인 어떤 지점을 미련한 뒷발질로 뭉개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늘 곁에 있던 춤꾼 한 사람을 새삼스레 살피는 일은 그의 미세한 자기체험을 같이 느끼는 일이다. 그런 만남은 무딘 일상을 벗어나게 한다. 그러다 보면 한 예술가와 작품이 피그말리온의 조각상처럼 어느 순간 불쑥 내 삶에 걸어들어 올 수 있지 않을까.

 40대 중반은 안무자로 활동하기에는 농익은 나이지만 춤꾼으로 활동하기에 벅찬 나이라 할 수 있다. 춤꾼에게 무엇보다 우선하는 것이 일상적 범위를 넘어서는 신체 활용이기 때문이다.
 부산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허경미(1973년 生)는 안무자이자 여전히 다른 사람의 작품에 출연하는 춤꾼이기도 하다. 경남 통영 출신으로 부산에서 대학(한국 춤 전공)을 나오고 부산시립무용단에서 10년간 단원 생활을 하였다. 1996년 제2회 젊고 푸른 춤꾼한마당(이하 ‘젊춤’, 주최 (사)민족미학연구소, 부산 태양아트홀)에 〈언젠가 별을 보았다〉(안무, 춤 허경미)를 무대에 올리면서 처음 이름을 알렸다. 이어서 99년 제5회 젊춤(경성대 소극장)에서 〈써브웨이〉(안무, 춤 허경미)를, 6회 젊춤(부산민주공원 소극장)에서 〈공무도하가〉(안무 허경미, 2인무)를 선보인다. 이 세 작품은 각각 ‘사랑’(⟨언젠가 별을 보았다⟩), ‘일상’(⟨써브웨이⟩), ‘한의 신명’(⟨공무도하가⟩)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 이 작품들에는 이후 허경미가 지속해서 다루는 주제와 표현기법이 드러나 있다. 젊춤 무대를 벗어난 허경미는 2001년 〈눈물〉 〈꽃〉, 2005년 〈걸음-네 여자이야기〉, 2008년 〈진화〉, 2009년 〈KISS〉, 2011년에는 〈외치다〉, 2012년 〈To Somebody〉, 2013년 〈夢-사이의 유희〉 〈신곡(身哭)〉, 2014년 〈고백-길을 잃다〉, 영상과 춤 협업작품 〈쿰바카〉, 2015년 야외춤 〈April,품〉, 2017년 미디어 융합공연 〈Streaming City〉(안무) 등 2001년부터 10여 편의 굵직굵직한 작품을 창작하였다.

 2005년 허경미는 작품 하나를 남기고 인도로 떠난다. 10년을 근무한 시립무용단 단원 생활이 제법 안정감을 주었고 30대 초반에 부수석 단원으로 몇몇 작품에 주역을 맡을 정도로 기량을 인정받고 있었지만, 이 모두를 미련 없이 접는다. 2년 동안 인도에서 인도의 전통춤 까딱(Kathak Dance)을 배우고 요가수련을 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후 본격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걸고 작품 활동을 재개한다.
 허경미의 작품은 인도 유학을 기점으로 전과 후가 확연히 달라진다.



2. 허경미의 작품세계

 2017년 10월 14일, 부산 중앙동의 밤은 여느 밤과는 달랐다. 40개의 계단에 부딪힌 제주도 말 모는 소리와 피리 소리가 아련하게 밤공기를 채우고 떠날 채비를 하는 춤꾼 한 명이 서 있다. 2007년 처음 무대에 올랐던 허경미 안무작 〈진화〉가 10년을 걸어 나와 부산 사람의 삶의 역사가 쌓인 원도심을 걸어간다. 어머니를 여의고 자책과 슬픔으로 지낸 시간을 춤으로 녹인 〈진화〉가 10년 동안 안무자가 의도하지 않았던 여러 의미를 덧입었다. 5명의 춤꾼과 예닐곱의 일반인이 따라붙은 이날 공연은 각자의 진화 길이 엇갈리고 겹치면서 삶과 작품이 변해가는 이미지를 그대로 녹여내었다. 허경미의 〈진화〉가 의미를 벗고 이미지의 몸짓으로 거듭나는 장면이었다.

 - 처연한 관능, 지독한 능동의 몸짓

 2002년 창무국제예술제와 함께 진행된 드림 앤 비전 댄스페스티벌(6.30-7.8. 포스터극장)에서 선보인 〈눈물〉은 평론가들의 극찬을 받는다.
 평론가 故 김영태는 “극단 자갈치 단원 손재서가 장구를 치고 물 한 바가지 떠서 허경미에게 내미는 〈눈물〉에서 찬란한 신인을 만났다.”(2002년 8월 『몸』)고 하였고, 이근수는 “슬픔과 희망, 체념과 의지란 복합적인 감정을 한 얼굴에 동시에 표출하는 표정 구사 능력이 탁월하다. 이 표정과 작은 체구에서 터져 나오는 당당한 끼만으로도 무대는 터질 듯 하고 작은 여인의 솔로에 소극장 관객들은 손쉽게 제압당하고 만다”(2002년 8월 『몸』)고 평했다.
 이후 〈눈물〉은 고수를 바꿔가면서(손재서, 이성원, 박광호, 박세준) 여러 차례 재공연 된다. 2013년 허경미의 춤으로는 마지막 공연을 하였고, 2014년 무용단Redstep 기획공연에서 엄효빈으로 춤꾼을 교체하고 공연하였다.

 〈눈물〉에서 허경미는 ‘자아를 찾는 당당한 몸짓으로, 때론 여성성을 되찾고자 하는 처연한 몸짓으로, (...)당당하게 울고 싶다. 눈물로 위안 받고 편안함을 얻으며, 나의 위선을 벗어놓고 진정한 나를 찾고 싶다’(2001년 젊춤 서울공연 팸플릿 소개 글)라고 말한다. 진정하고 참된 자기 고백으로 자아를 찾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여인의 숙명’(이근수)이고 ‘시름’(김영태)일 것이다. 자신의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하게 훼방하는 모든 것은 살(煞)이다. 허경미는 제대로 된 삶을 가로막는 살(숙명, 시름)을 능동의 눈물로 풀어낸다. 역설이다. 격렬한 반항도 아니고 격한 감정을 실은 고함도 아니다. 넙죽 엎드리다가 어느새 쪽박을 깨부수고 항아리가 넘치도록 온몸을 적셔 내는 것으로 자기 방식의 살풀이를 한다. 당당한 울음, 넘치는 눈물 앞에서 어떤 살도 버틸 재간이 없다. 살이 깊을수록 신명은 고조된다. 항아리마저 깨어버리지는 못했지만 〈눈물〉은 처절한 관능과 지독한 능동의 몸짓이 불러오는 신명이다.
 〈눈물〉에 이어 김춘수의 동명 시를 모티프로 안무한 〈꽃〉 역시 여성성을 되찾고자 하는 능동의 몸짓을 〈눈물〉과는 다른 느낌으로 풀어내었다. 이 시기 허경미의 주제는 여성성, 자아 찾기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허경미의 작품이 인도 유학을 기점으로 전후로 나뉜다는 점을 앞서 말한 바 있다. 2005년 허경미는 모든 것을 정리하고 인도로 떠나기로 한다. 10년의 직장생활이 한편으로 생활하는데 안정을 주었지만, 예술가이기보다 작품을 위한 하나의 소모품으로 춤꾼을 취급하는 무용단의 분위기에서 끊임없이 소비되고 탈진하는 자신을 느꼈을 것이다. 또한, 자신만의 작품을 하고 싶다는 예술가의 욕심이 현실과 부딪히고 서로를 조율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것이다. 이도저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순간을 만났을 때, 허경미는 모두를 놓고 아무것도 계획하지 않은 가능성의 상태로 돌아가고 싶었다. 실제로 그녀가 인도에 가기로 결심했을 때 미래에 대한 아무런 계획이 없었다고 한다. 주위의 만류와 걱정도 만만치 않았지만, 본인의 결심은 확고했고, 인도로 떠나기 직전 예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작품 하나를 올리게 된다. 〈걸음 – 네 여자 이야기〉(이하 ‘걸음’, 2005년 4월2일~5일, 부산 엑터스 소극장)가 그 작품이다.

 〈걸음〉은 총 네 걸음(마당, 장)으로 구성되었다. 작품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정시가인 ‘공무도하가’의 내용을 깔고 있다. 감성적 여성(백수광부의 처)을 그린 첫 번째 걸음과 이성적 여성(백수광부의 처 이야기를 전해 듣고 그 내용을 음악으로 만들어 연주한 여옥)을 그린 두 번째 걸음은 공무도하가의 내용을 품은 춤사위로 풀어낸다. 세 번째 걸음은 감성과 이성을 모두 거부하고 부정하는 여성상을 꽃으로 형상화하였다. 이 부분은 몇 년 전에 창작한 〈꽃〉의 안무 대부분을 가져왔다. 마지막 걸음에서는 이 세 가지 모습 전부의 주체가 여성이라고 말한다. 허경미는 이 작품이 ‘여성의 삶의 문제에 대한 도전적 질문제기가 아니라 사는 모습의 현재진행 과정을 잠시 보여준 것일 뿐’이라고 한다.
 〈걸음〉은 허경미 작품연대기에서 전환점이 되는 작품이다. 〈걸음〉에는 앞서 안무한 작품의 중요한 부분이 녹아있다. 〈꽃〉 안무 대부분을 사용하였고, 〈눈물〉에서 보인 처연한 관능과 지독한 능동이라는 표현이 녹아들어 있다. 한편으로 앞으로 창작할 작품에서 볼 수 있는 허경미만의 요소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나중에 〈진화〉에서도 사용하는 제주도 말 모는 소리 등 표현 도구와 무대에서 특정한 방향으로 계속 나아가는 저항적 관성이 느껴지는 구도와 몇몇 특징적인 몸짓이 그것이다. 허경미는 〈걸음〉을 통해 지난 시간을 정리하고 자신이 의식하지 못한 채 다가올 창작의 단서를 남겨두었다.
 이로써 허경미 작품 주제의 첫 번째 연결고리를 ‘정체성 찾기 – 처연한 관능 – 능동의 몸짓’으로 정리해볼 수 있다.

 - 회한, 슬픔의 거름

 인도에서 전통춤인 까딱과 요가 수련에 몰두하던 허경미에게 비보가 날아든다.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이다.

내일은 탈상/ 오늘은 고추모를 옮긴다./ 홀아비 꽃대 우거진 산기슭에서/ 바람이 내려와/ 어린 모를 흔들 때/ 막 옮기기 끝낸 고추밭에/ 편편이 몸을 누인 슬픔이/ 아랫도리 서로 묶으며/ 고추모 사이로 쓰러진다./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남녘땅 고추밭/ 햇빛에 몸을 말릴 적/ 떠난 사람 자리가 썩는다/ 붉은 고추가 익는다. (허수경 시집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중 「탈상」 전문)

 그렇게 어머니의 죽음은 허경미에게 씻기 힘든 회한과 슬픔이면서 창작의 거름이 되었다.

 인도유학을 마치고 선보인 첫 작품이 〈진화〉이다. 인도 전통 까딱(Kathak)춤의 발동작을 응용해서 자신만의 춤 언어를 얹은 작품이다. 인도 전통춤 까딱은 신의 이야기를 춤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진화〉에는 신에 관한 이야기 대신 허경미의 회한이 녹아들어 있다. 까딱춤의 발동작에 비나리 음악을 중심으로 삼고 아메리칸 인디언 플루트와 제주도 말 모는 소리 등을 엮어 사람의 감성을 기가 막히게 건드린다. 무엇보다 특이한 점은 시작부터 끝까지 객석에 등을 돌리고 춤을 추며 나아간다는 점이다. 이를 두고 조봉권(국제신문 문화부기자)은 “도저히 눈을 뗄 수 없는 '뒷모습의 카리스마'를 뿜어낸다. 이 카리스마는 영적인 느낌을 풍긴다”(2008년 7월 월간 『몸』)라고 표현한다. 처음부터 뒷모습만 보이면서 추는 춤의 강렬함이 대단하다. 잊히지 않을 뒤태이다.

 〈진화〉는 어머니의 죽음을 대하는 개인적 감성(회한)이 죽음과 진화로 보편적 정서화 하면서 관객에게 다가간다. 〈진화〉의 포인트는 마지막 부분 잠시 돌아선 채 주머니에서 꺼내 불어 날리는 흰 가루에 있다. 이 가루는 어머니의 유골을 상징한다. 가루를 불어 날리는 행위는 어머니를 떠나보내는 자신만의 의식인 것이다. 티격태격하는 흔한 모녀 관계처럼 허경미와 어머니 또한 그랬고, 자기 삶을 추스르느라 여유가 없어 어머니에게 제대로 따뜻하게 해드리지도 못했는데 난데없는 이별을 맞았으니 그 회한이야 오죽하겠는가. 할 수 있는 것은 춤으로 어머니와 자신의 회한을 해원하는 것이 전부였다. 허경미에게 〈진화〉는 어머니와 자신을 위한 해원의 춤이다. 하지만 허경미는 노련하고 품위 있게 자기의 속내를 감추었고, 관객은 저마다의 진화를 화두 삼아 해석의 즐거움을 만끽했다. 독무로 시작한 〈진화〉는 2007년 새물결 춤 작가전 초연(부산문화회관 중극장)에 이어 2008년 금정문화회관 대극장에서 군무로 공연하였다. 2012년,13년 남성 독무(허종원, 박재현)로 재공연 하였고, 2017년 10월 거리공연에 이르기까지, 초연 이후 10년에 걸쳐 그야말로 진화를 거듭하였다.

 〈진화〉에서 드러내지 보이지 않았던 회한의 정서는 2013년 〈신곡(身哭, weeping body)〉에서 중심주제로 드러난다. ‘몸의 울음 혹은 우는 몸’으로 해석할 수 있는 제목에 걸맞게 〈신곡(身哭)〉의 처음은 어머니의 죽음이 슬퍼서 저미는 가슴을 치는 것을 상징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검은 옷을 입은 두 명의 춤꾼이 엎드린 채 바닥을 양 손바닥으로 탁탁탁 내려치는 첫 장면에서 관객은 자연스럽게 그녀가 펼친 어머니를 위한 굿판에 들어서게 된다. 마치 장례에서 초혼(招魂)을 행하는 것처럼 희고 긴 천을 허공으로 높이 던지는 마지막 장면은 이 작품이 해원굿이었음을 분명하게 알려준다. 〈진화〉와 〈신곡(身哭)〉은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거름 삼아 만든 작품이다. 이렇게 회한과 슬픔은 허경미 창작세계에 중요한 주제로 자리 잡게 된다.

 이쯤에서 2009년 작품 〈KISS〉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KISS〉는 허경미가 인도에서 돌아온 후 두 번째 만든 작품으로 ‘죽음’ ‘사랑’ ‘술’ ‘눈물’ ‘신’의 다섯 토막의 옴니버스 형식이다. 다섯 토막 중 ‘죽음’ ‘사랑’ ‘신’을 허경미가 안무하였다. ‘죽음’은 향을 피우고 망자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 형식인데 이 내용이 2013년 〈신곡(身哭)〉으로 발전하게 된다. ‘신’에서는 나약한 인간의 구원을 신과의 키스로 설정하였다. 이 작품은 2012년 60분 길이의 군무작품 〈To Somebody〉의 바탕이 된다. 〈KISS〉의 다섯 꼭지는 허경미가 천착하는 주제가 어떤 것인지를 알려주는 표지이다.
 여기서 허경미 작품 주제의 또 하나의 연결고리인 ‘죽음 – 회한 – 해원’을 만나게 된다. 이 고리에 사랑과 눈물이 녹아들었다.

 - To Somebody, 구원을 갈구하다.

 개인적 슬픔과 회한을 〈진화〉, 〈신곡(身哭)〉 연작을 통해 어느 정도 해소한 허경미의 관심은 구원, 소통과 같은 관념적인 주제로 향한다. 2011년 부산무용제 참가작인 〈外치다〉는 허경미 작품의 주제 변화를 예고하는 중요한 지점을 차지한다. 〈外치다〉는 제19회 부산무용제에서 "말의 허망함과 말이 전달할 수 없는 참뜻을 치밀한 구성과 독특한 몸짓, 뚜렷한 주제의식과 때론 영상 이미지를 사용한 색다른 몸의 움직임이 인상적"이라는 평을 받고 심사위원 전원 찬성으로 대상을 받는다. 이어 열린 제20회 전국무용제에서도 은상을 안겨주었다.
 티벳불교 의식을 빌린 인상적인 여러 장면과 적절한 영상 사용 그리고 독창적인 몸짓 언어의 구사를 통해 한 개인이 자신의 진정성을 담아 모든 걸 표현하지만 말이나 상황에 따라 진심이 왜곡되고 변형되는 것을 얘기하고 있다.

 〈外치다〉에서 허경미가 불교사상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고 있음을 보여주었다면, 이듬해 만든 〈To Somebody〉는 종교적 느낌을 최대한 배제하고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갈구하는 마음과 행위 자체를 표현한다. 해탈이던 메시아적 구원이던 구원은 현실의 모든 질서가 무력화한 순간에 찾아온다. 현실 질서의 영향이 남아있는 동안 구원은 오지 않는 미래로 지연될 뿐이다. 〈外치다〉에서 그렇게 안타까워했던 진정한 소통도 현실에서는 지연된 기대의 누적이다.
 〈To Somebody〉는 갑갑한 현실의 창 너머로 구원을 갈구한다. 창 너머를 향한다고 등 뒤의 현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현실을 짊어진 채 구원은 가능한 것일까? 원하는 답은 어디에 있을까? 누가 답을 알고 있을까? 어쩌면 그 누군가가 자신일 수 있지 않을까? 왜 그토록 구원을 갈구하는 것일까? 〈To Somebody〉는 답을 제시하지 못한다. 현실은 여전히 유효하고 구원은 요원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구원에 대한 갈망을 포기할 수는 없다. 어쩌면 우리는 구원의 순간 보다 갈망과 간절함 자체로 현실을 버티고 있는 것은 아닐까.

 - 꿈과 현실 사이에서 길을 잃다.

 2013년 창작한 〈夢 - 사이의 유희〉(이하 ‘몽’)는 파격적인 무대 활용으로 주목을 받았다. 민주공원 소극장 무대와 객석의 구조를 전면적으로 바꾸고, 무대에 마른 모래 1톤가량을 쏟아 부었다. 꿈은 현실에서 억압된 욕망이 분출하는 지점이다. 즉, 꿈에는 어느 정도 현실이 반영됐다는 의미이다. 꿈과 현실을 분별하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 필요한 것인지조차 명확하지 않다. 다만 꿈과 현실 사이를 오가며 유희적으로 현재를 누리는 것이 현실이자 꿈인 지금이 아닐까. 〈몽〉은 이러한 비결정 혹은 결정 불가능의 상태를 정교한 조명과 몽환적인 음악 그리고 모래의 산란하는 이미지로 표현한다.
 〈몽〉은 만들어 나가기 어려운 작품이었다. 작품 이미지 자체가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 대한 표현이었고, 그런 이미지를 다른 사람(출연자)의 몸을 통해 드러내야 했다. 에너지가 엄청나게 소모되었다. 이 작품 이후 허경미는 군
2018. 01.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