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연구

이북5도무형문화재인 화관무와 부채춤은 전통춤인가 신무용인가?
김영희_전통춤이론가

1.
전통무용, 전통춤의 개념을 다시 생각하고, 이 용어의 등장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현재 전통춤의 공연양상에 대한 문제의식이었다. 더불어 꾸준히 전개되고 있는 ‘신전통춤’의 현상들을 어떻게 정위(定位)하여 개념화하며, 전통춤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를 정리할 필요성이 계속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관한 글은 춤웹진 2020년 1월호에 ‘전통무용 용어 등장에서 두가지 초점’이란 제목으로 게재했다.)
  그러한 과정에서 근래의‘신무용’역시 애매한 위치에서 전통춤과 애매하게 관계지어지고  있음을 확인했다. (여기서 신무용이란 좁은 의미의 신무용으로, 최승희 조택원 등에 의해 양식화된 춤을 말한다.) 신무용의 애매(曖昧)한 위치라 함은 신무용이 근래 장르적으로 자기 위상이나 영역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무용은 1930년대에 최승희ㆍ조택원에 의해 양식적으로 정립된 이후 20세기 중반 한국춤계를 풍미하다가, 1970년대 후반 한국창작춤이 시작되면서 1980년대부터 관심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마침 민속춤 중심으로 전통춤이 위상을 되찾아 활기를 띠었고, 신무용 양식(style)을 베이스로 했던 국립무용단은 무용극을 지나 한국 창작춤으로 넘어가면서 신무용의 맥은 이어지지 않았다. 그런 중에 몇몇 신무용 소품들은 1960, 70년대 관객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으니, 부채춤, 장고춤, 무당춤, 화관무, 오고무, 사랑가와 같은 작품들은 꾸준히 추어졌다. 한편 한국무용협회는 1992년부터 신무용 대표작들을 선정하여 15개의 명작무(名作舞)를 지정했다. 이는 20세기 중반 한국춤계를 이끌었던 신무용가들에 대한 예우의 의미도 있었는데, 신무용을 유산으로 남길 필요성이 있지만, 다른 예술적 발전 가능성은 미지수이다.


2.

이렇게 신무용의 자기 위상이 미미하다 보니, 신무용은 전통춤과 애매하게 관계지어지고 있다. 전통춤 공연에 이따금 한 작품 정도 포함되거나, 무형문화재 지정을 신청하기도 했다. 전통춤 무대에 신무용 작품이 가끔 포함되는 원인은 무엇보다 외형적으로 신무용이 전통춤과 유사하기 때문일 것이다. 한복 의상에 국악 반주로 춤추며, 부채라든가 장고, 북, 방울 등과 같은 한국의 전통적 소품을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전통춤과 신무용은 태생부터 다르다. 전통춤은 전통시대 - 조선시대로 본다면 유교를 정치철학으로 삼았던 왕정(王政)과 농업 중심의 경제활동과 농업 중심 공동체의 사회체계에서 행해지던 춤이다. 궁중무의 경우 궁중 연례(宴禮)와 제례(祭禮)의 사상체계와 절차 속에서 추어졌다. 농악춤의 경우 정월의 보름굿부터 섣달의 매굿까지 일년 간 진행되는 농경의 중요한 절기에서 농악의 진행구조와 절차에 따라 행해졌다. 탈춤의 경우도 민간의 중요한 서사(敍事)들을 인물의 춤과 극에 담아 중요한 절기에 추어졌었다. 불교의식무와 무속춤도 각각의 의례에서 종교적 체계와 과정 속에서 의미 부여된 춤들을 추는 춤이다. 다만 교방춤은 의례나 절차가 아닌 사대부들의 풍류 놀음에서 추어졌다.
  반면 신무용은 근대 시기의 춤으로 극장과 흥행이라는 자본주의적 유통체계에서 출발한다. 계급계층적 구분 없이 불특정 대중을 대상으로 극장 메커니즘에서 모던댄스의 기법으로, 전통춤을 재구성하거나 새롭게 창작한 춤이다. 그 선구자인 최승희와 조택원은 1920년대 후반에 이시이바쿠에게 수학 후, 최승희는 〈에헤야 노아라〉를, 조택원은 〈승무의 인상〉을 1933년에 초연하면서 신무용 양식으로 춤추기 시작했다. 이어서 전통춤을 소재로 한 작품들을 발표하였고, 조택원은 1937년에 유럽 공연을, 최승희는 1938~1940년에 세계 공연을 하면서 신무용을 정립했다. 신무용은 의례나 놀이와 결합하지 않은 예술적 표현을 지향하며, 프로시니엄 무대를 전제 조건으로 형상화되었고, 각 작품들은 저마다의 창의성을 갖고 있다.
  조택원․최승희의 신무용 작품에 대해 무용평론가 고 강이문은 다음과 같이 분석한바 있다.


  이 젊은 신진들로 운전되던 현대 민족무용 초기의 형태는 어떠한 것이었을까. 대략 3구분할 수 있다. 其 1은 과거 고전(민족무용) 단편들에 단지 어렌지함에 불과한 형태(영산조, 진양조, 검무, 가면무 등), 其 2로는 테마만 빈 것(꼭두각시, 만석중놀이 등 인형극, 또는 궁중처용무, 산대무극, 기외 사화 중에서 착상한 신라왕무, 황진이승무, 화랑검무 등), 其 3은 순수창작에 속하는 것(한국적인 향취를 핵심한 민요조의 춤들)이 그것이다.

  … 그들은 우선 무용을 독자적인 예술로서 가꾼다는 뜻에서 타의 속성에서의 이탈을 꾀했고, 동시에 기교면에서는 고전에서 채취한 개개의 기교들에 뜻을 담아보려고 했다. 이것은 그들 초기 舞人들의 공통된 특징이라 하겠는데 ① 마임의 교묘 ② 소재로서의 육체의 자유로운 구사 ③ 자신의 육체의 선을 살린다는 점 등에 그들은 최대 치념하였으니, 그럼으로써 그들은 그들의 원활한 표현을 위해 신흥무용의 수법을 수련 도입했던 것이다.(강이문, 「고전무용과 현대무용」, 『부산일보』 1958. 6. 22~29 중에서)
 

  강이문이 말한 현대 민족무용의 초기 형태는 초창기 신무용을 말하며, 신무용의 여러 측면을 언급했다. 우선 최승희ㆍ조택원의 신무용의 형태를 세 가지로 구분했는데, 이는 창작 모티브이기도 했다. 첫째는 고전 단편들의 춤의 외형과 음악에서 가져오거나, 둘째 고전 단편들에서 테마를 가져오거나, 셋째 춤이 아니더라도 한국적인 향취나 정조, 민요 등에서 가져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무용의 표현적인 특징에 대해 마임을 교묘하게 사용하며, 움직임에 있어서 자유로우며, 춤 동작 과정에서 드러나는 육체의 선을 보여준다고 했다. 최승희ㆍ조택원의 신무용은 대개 인물(character)들이 설정되며, 인물의 특정한 상황을 표현하는 마임이 춤 동작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또한 모던댄스의 자유로운 동작으로 다양한 움직임을 보여준다. 이러한 표현들을 위해 ‘신흥무용의 수법을 수련 도입했다’고 보았다. 즉 고전작품에서 여러 아이디어를 가져왔으나, 신흥무용 즉 모던댄스의 기법으로 몸을 사용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전통춤과 신무용은 춤추는 방법도 다르다. 신무용은 상체를 반듯이 세우고 팔과 손을 길게 뻗어낸다. 다리도 쭉 뻗으며 무릎 굴신이 많지 않고, 시선이 높고 몸의 중심도 가슴 부위에 있다. 움직임의 전개에서 정지동작(포즈)이 분명하다. 이러한 기본적인 방법은 전통춤의 방법과 다르다. 구체적으로 비교하면 춤사위의 각도나 높낮이 속도의 운용 범위가 전통춤보다 넓다. 이러한 차이점을 20세기 중후반에 한국춤계를 주도했던 무용가들과 종사자들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3.
 그런데 신무용 작품이 이북5도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바 있다. 〈화관무〉가 이북5도무형문화재 4호(소재지 황해도)로 2011년에 지정되었고, 〈부채춤〉이 이북5도무형문화재 3호(소재지 평안남도)로 2014년에 지정되었다. 그동안 전통춤 중심으로 무형문화재를 지정하던 흐름에서 신무용 작품을 지정한 점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그 이유는 첫째, 화관무와 부채춤은 전통춤이 아니라 신무용 작품이기 때문이다. 화관무와 부채춤은 김백봉이 1954년에 서울의 시공관에서 초연한 춤이다. 화관무는 당시에 〈고전형식〉이라는 제목으로 공연되었으나, 후에 화관무로 명칭이 바뀌었다. 안무가인 김백봉은 최승희의 제자로, 남한에서 신무용을 발전시킨 대표적 인물이다.
  두 번째로 화관무와 부채춤이 북한 지역에서 발생하거나 전승된 춤이 아니기 때문이다. 〈화관무〉의 경우 황해도 전통예인이었던 민천식(1898~1967) 류라는 설정으로 지정되었다. 민천식은 사리원 출신으로 월남하여 1967년에 봉산탈춤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고, 인천에서 활동했다. 〈부채춤〉도 김백봉의 창작으로 지정되었는데, 김백봉은 평양 출신으로 한국전쟁 시기에 월남하였다. 즉 두 춤이 남한에서 창작되어 추어진 춤임에도, 민천식과 김백봉의 출생지가 황해도와 평안남도라는 점에서 이북5도문화재로 지정된 것이다. 창작지나 실제 춤이 연행된 곳과 상관없이 민천식과 김백봉의 출생지에 의해 이북5도문화재로 지정된 점은 지역과 관련하여 문화재를 지정하는 원칙에도 맞지 않는다.
  현행 전통춤 중심으로 지정하는 무형문화재 제도하에서 이러한 지정은 춤 작품의 시대적 배경이나 지역적 배경, 예술적 특징 등을 이해하고 정립하는데 혼란을 야기한다. ‘신무용 작품이 왜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는가?’ ‘〈화관무〉와 〈부채춤〉이 전통춤인가?’라는 의문를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시대의 문화와 예능을 중심으로 지정하는 문화재제도에 준해서 본다면, 이 춤들은 이 제도에 부합하지 않는다. 젊은 무용학도들은 신무용 작품을 전통춤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종종 있으니, 화관무와 부채춤의 지정은 전통춤의 범주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시대별로 다른 양상으로 추어졌던 한국춤의 역사도 흔들리게 되는 상황이니, 매우 우려할 일이다.
  
4. 
문화재청은 문화유산들을 여러 부류로 구분하는데, 국보ㆍ보물ㆍ사적ㆍ명승ㆍ천연기념물ㆍ국가무형문화재ㆍ국가민속문화재ㆍ국가등록문화재ㆍ시도무형문화재ㆍ시도유형문화재ㆍ시도기념물ㆍ시도민속문화재ㆍ시도등록문화재ㆍ문화재자료ㆍ이북5도무형문화재가 있다. 그리고 어느 문화유산이든 시대를 구분하고 있으며, 일제강점기의 유물은 근대문화재로서 관리되고 있다.
  예를 들어 1918년 건축된 원주 ‘기독교의료 선교 사택(宣敎 私宅)’은 일제강점기 주거 숙박시설로 분류되어 국가등록문화재 제701호로 2017년에 지정되었다. 1911년에 석지 채용신이 그린 ‘화순 춘산영당 최익현(和順 春山影堂 崔益鉉) 초상’은 일제강점기 초상화로 분류되어 전라남도 시도유형문화재 제313호로 2011년에 지정되었다. 1905년에 건립된 ‘부산진 일신여학교(釜山鎭 日新女學校)’는 대한제국 시기 학교시설로 분류되어 2003년에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55호로 지정되었다. 1917년에 건축된 ‘이배원(李培源) 가옥’은 일제강점기 근대가옥으로 분류되어 2012년에 전라북도 민속문화재 제37호로 지정되었다.(이 내용들은 문화재청 사이트 www.cha.go.kr 에서 발췌한 것이다.)
  즉 유형의 문화재나 유물을 중심으로 근대문화의 유산이 영역화되어 있는 것이다. 문화재제도의 시행 초기에 전통(傳統)을 담지한 시대의 하한선을 1910년으로 설정하고 보호했으나, 1910년 이후 지난(至難)했던 20세기를 겪은 근대의 유산 역시 우리가 기억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문화재청은 〈화관무〉나 〈부채춤〉의 경우도 어정쩡하게 미분류로 분류하지 말고, 근대문화의 유산으로 구분하고 설명해야 한다. 그리고 무용가들도 전통문화 중심의 문화재제도에 편승해 전통춤의 전승 틀거리에 신무용 작품을 맞추려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신무용은 신무용대로, 전통춤은 전통춤대로 역사적 맥락을 분명히 해야, 각 춤들의 본래적 특성을 온전히 보존하면서, 후손에게 다양한 유산을 전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통춤이든 신무용이든 창작춤이든 앞으로 어떤 춤이 시대의 명작으로 남을지는 모를 일이다. 전통춤은 전통시대(가깝게는 조선시대와 대한제국 시기)로부터 추어지고 향유되면서 전승되고 기억되면서 현재에 이르렀다. 신무용 작품도 마찬가지이다. 시대의 장면으로 남아있는 춤들이 있고, 그렇지 않은 춤들도 있다. 신무용의 시대를 춤의 역사에 남기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김영희

전통춤이론가. 김영희춤연구소 소장. 역사학과 무용학을 전공했고, 근대 기생의 활동을 중심으로 근현대 한국춤의 현상에 관심을 갖고 있다. 『개화기 대중예술의 꽃 기생』, 『전통춤평론집 춤풍경』을 발간했고, 『한국춤통사』를 책임편집하고 공동저술했다. 전통춤의 다양성과 현장성을 중시하며, 검무의 역사성과 다양성을 알리기 위해 ‘검무전(劍舞展)’을 시리즈로 기획하고 있다.​ 

2020. 3.
사진제공_문화재청 이북5도위원회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