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말
송범은 20세기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우리 무용계에서 한 가지만 성공해도 명예로울 시절에 여러 가지의 명성과 직책을 한 몸에 안은 무용가이다. 그는 조택원, 박용호, 장추화 등 훌륭한 스승들을 만나 한없이 춤을 배웠고, 또 추었으며, 무용계의 선망인 교수가 되어 한없이 춤을 가르쳤고, 명예로운 정년퇴직을 하였으며, 국내 최고의 국립의 무용단장이 되어 한없이 춤을 만들었고, 국수호, 양성옥 등 수많은 정상급 제자 무용가를 길러낸 인물이기에 더더욱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명예로움은 거저 얻은 것이 결코 아님을 그가 남긴 족적을 살펴보면 잘 알게 된다. 송범은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우리나라 신파극 가극 등 연극공연은 거의 다 구경하면서 연극에 관심을 갖고 연극배우가 되는 게 꿈이었던 그가 무용의 길로 접어든 계기는 1942년 중학 2학년 때 최승희 무용공연을 보고 무용에 매력을 느끼게 되면서였다.
당시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와의 운명적인 만남은 출생에서부터 인연이 예고된 듯하였다. 송범 출생은 최승희가 이시이 바쿠의 춤을 배우러 일본을 떠나는 날, 즉 1926년 3월25일에 청주에서 탄생했기 때문이다.
청주가 낳은 ‘근현대 무용의 아버지’ 송범(宋范, 1926~2007) 선생은 1962년 국립무용단 출범하여 1973년 발레단과 무용단이 분리하여 1992년까지 무려 30여년 동안 초대 국립무용단장으로 활동하면서 우리의 전통 춤을 무대예술로 격상시킨 선구자였고, 창작무용인 ‘도미부인’을 탄생시켜 전 세계에 한국무용을 알린 위대한 무용가였다. 그로 인해 청주가 현대 한국무용의 발상지로, 무용예술의 메카로 우뚝 설 자산을 가지게 된 것이다.
송범춤사업회(회장 류명옥)가 2011년 조직되어 2011년과 2012년에는 학술세미나를 개최했으며, 2013년에 <송범 바람에 입맞춤>이란 연제로 추모공연을 한데 이어, 두 번째 공연이 2014년 4월 9일 <송범 춤 그 후> 무대를 펼쳤다.
한편 송범 선생의 예술과 삶을 조명하는 특별공연 <별의 전설 아! 송범>이 2012년 4월 5일 청주예술의 전당 대공연장에서 펼쳐지기도 했는데, 청주시립무용단(예술감독 겸 상임안무 김평호)이 주최하는 공연의 1부는 국수호, 정재만, 손병우, 양승미, 윤성주, 최영숙, 김승일 등 중견 무용인들이 꾸몄는데 이들 모두 송범의 제자였다.
또한 그가 20여년 몸담았던 국립무용단에서는 창단 50돌을 기념해 2012년 11월 16일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2층 로비에서 초대 단장인 고 송범의 흉상을 제막하였다. 2014년 10월1~2일 <송범춤 회고전-7주기 추모공연>(범무회 박숙자 주관)이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국립무용단 출신 제자 무용가들의 송범춤 재현무대를 가졌고, 이어 10월23일에는 <한국 무대무용의 선구자 송범>(서연호 집필)의 출판기념회가 역시 국립극장 송범 선생님 흉상 앞에서 가졌다. 이처럼 송범 선생의 가치와 위대성을 길이 보전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어 송범은 영원히 우리 무용계에 살아 숨 쉬고 있다고 봐야한다.
그래서 차범석은 「송범은 살아있다」(신주희, 『송범, 그 인생과 예술』, 교양사, 1992)라는 글에서 “무용가 송범은 이 땅에 무용계를 일구고, 가꾸고, 지켜온 살아있는 증인이요, 일꾼임에 틀림없다. ... 세월을 애오라지 춤에 바치고, 춤에 취하고, 춤으로 버티어 나왔으니 송범은 바로 한국춤의 맥(脈)이요, 기수(旗手)요, 그 집대성에 기여한 초석(礎石)이라 해도 지나친 찬사는 아닐 것이다.”라고 술회하였다.
다음은 일제강점기 국난의 시기에 태어나 숱한 역경 속에서도 오로지 외길을 걸어온 송범 선생님의 춤인생 여정을 시대별로 구분하여 정리하고, 무용예술적 성향을 분석하고 무용사적 의의를 규명하였다.
2. 송범 춤인생의 여정
1) 무용발아기(1925~1944)
1926년 3월 25일 충북 청주시 영운동에서 부친 송내현씨의 2남3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으며, 본명은 송철교(宋喆敎)이다. 태어난 지 2개월 만에 서울로 이사를 오게 되고 백일이 지난 얼마 후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생활고를 겪게 된다. 이처럼 어려운 유년시절이었지만 송범이 재동보통학교를 입학할 즈음 누님들의 노력으로 점차 가정형편이 나아지게 되었고 착하고 공부도 잘하는 총명한 아이로 성장하였다.
의사가 되고자 하는 꿈을 안고 양정중학교에 입학, 성적 또한 상위권을 유지했다. 이 당시만하더라도 송범이 무용의 길을 선택할 줄은 그 누구도 몰랐었다.
송범은 아홉 살부터 연극에 관심이 많았고, 신파극이 열리는 동양극장의 공연 무대는 언제나 신비한 동경의 대상이었다. 훗날 이 연극무대의 경험이 무용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무대미학과 공간구성 등 많은 면에 도움을 받았다고 술회하였다.
1942년 중학교 2학년 때 최승희의 무용공연을 보고 큰 전환점이 되었다. 휘황찬란한 조명아래 화려한 최승희의 춤은 일순간 송범의 꿈틀거리는 예술적 감각을 자극시켰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송범은 의사의 꿈을 버리고 무용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2) 신진무용가 인정기(1945-1950)
의사가 되고자 했던 송범은 1945년 4월 5년제 양정중학을 졸업, 경성제대 의학부에 원서를 냈지만 시험에 응시하지 않고 음악 감상실에서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을 들으며 지냈다. 송범은 무용가가 되겠다고 결심하고 최승희의 문하생이 되고자 하였다. 하지만 그 당시 최승희는 중국북경 근처에서 활동 중이었기 때문에 송범은 1945년 조택원무용연구소에 입소하여 본격적인 무용의 길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화가이던 형님의 도움으로 조택원의 문하(門下)에 입문하여 조택원무용연구소에 입소한 송범은 이시이 바쿠(石井漠)의 현대무용기본과 조택원의 한국무용기본을 맹연습하면서 발레의 기본동작과 이시이 바쿠(石井漠) 메소드가 혼융된 소위 ‘워킹발레’를 배우다 해방을 맞게 되었다.
1946년 8월 조선무용예술협회 창립기념 공연이 국도극장에서 있었다. 이 공연에서 『박용호(朴勇虎)』의 「해방」이라는 작품을 보고 매력을 느껴 그의 문하생으로 이적하였다. 그러나 예술의 진정한 의미추구보다는 이념(좌익)을 앞세우는 박용호에게 실망하여 3개월 만에 장추화 문하로 옮겨갔다. 장추화는 최승희 문하에서 배출된 무용가로서 최승희로부터 마리 비그만의 현대무용기법을 전수받아 당시 상당한 명성을 갖고 활동하던 무용가였다. 장추화 문하로 옳긴 송범은 현대무용, 발레, 남방무용, 한국 민속무용 등 무용의 단단하고 숙련된 기교를 익히고 있었기에 연구생이라기보다는 조교로서 무용을 가르치는 역할을 했다. 이때 같이 수학했던 남성무용가로는 조광, 김진걸, 이월영 등을 꼽을 수 있다.
1948년에 「습작(習作)」이란 작품을 안무하여 출연하였고, 그 후 김미화 무용발표회, 장추화 무용발표회에 계속 출연하면서 왕성한 활동을 하면서 차츰 신인무용가로서 인정받으며 무용경력을 쌓았다. 당시엔 장추화, 정인방, 한동인, 함귀봉 등 여러 무용가들이 귀국하여 활발히 무용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1949년「출진(出陳)」을 창작하였고, 장추화무용연구소 제2회 발표회 때 「천하대장군」이란 작품에서 스승의 상대역으로 첫 주역 독무를 맡아 무대 출연을 하게 된다.
1949년 11월 27~28일 김막인(金漠人)의 「애착(愛着)」에도 출연함으로써 ‘장래가 촉망되는 당년 22세라는 신진무용가’로 평가하는 기사가 1949년 『예술조선』 1월호에 「신진무용가 송범」이라는 제목으로 사진과 함께 실렸다. 또한 평론가 문철민은 ‘균형 있는 육체와 아크로바틱한 기교에서 미래가 촉망되는 신인’이 등장했다며 송범의 예술가로서의 성공가능성을 예고했다.
3) 무용소품 다작기(1950-1961)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민족적 대혼란과 비극의 참상이 일어났다. 이러한 비극의 파급은 무용계 역시 예외일 수 없었다. 전쟁으로 인해 최승희를 비롯한 장추화, 정인방, 한동인, 함귀봉 등 많은 무용가들이 월북하거나 혹은 행방불명되었다. 이렇듯 무용계는 암흑 속에 놓이는 침체기에 빠져들었다. 이때 그 시기에 송범은 장추화 문하에서 최승희를 원류로 한 현대무용, 한국무용, 발레, 남방무용 등 무용전반에 걸쳐서 기교를 단단히 익혀가며 무용예술가의 꿈을 펼치고자 했었다.
1950년 6·25전쟁으로 인하여 사회전반에 걸쳐 혼란과 대수난이 일어나면서 무용계 역시 큰 타격을 입게 된다. 그러나 송범은 이에 좌절하지 않고 미래 한국 무용계 발전의 꿈을 갖고 서울에서 피난할 수 있었던 소수의 무용가들과 함께 대구로 피난하여「참회」를 창작안무하면서 활동을 계속해 나간다. 1950년 9·28 수복 후 북진하는 UN군을 따라 국군의 사기양양과 시민위안을 목적으로 문화공작대가 조직되어 피랍을 면한 몇몇 신인들이 참여한 가운데 11월 25일 시공관에서 자축공연을 가지게 된다. 이때 송범무용연구소, 김윤학연구소, 헌대무용단 소속의 김경옥, 조동화, 정막, 김문숙, 정혜옥 등이 참가하였다.
1951년 1·4 후퇴하는 국군을 따라 김백봉, 한순옥, 권려성 등이 남하하였고, 송범과 현대무용계 20여 명이 한국무용단을 조직, 다시 조동화 주축으로 국방부 정훈국 소속의 무용대로 개편하여 대구로 피난하게 된다. 피난지에서 주리, 최미연, 김수길, 장순방, 이인범 등을 보강하여 문화극장을 중심으로 부산, 마산 등에서 공연활동을 하였다.
1951년 5월 10일 송범, 주리, 이인범, 임해송 등이 회동하여 클래식 발레 「왕자와 백조」를 비롯한 「양자강」을 비롯한 몇몇 소품을 마련하여 부산 동아극장에서 5월 7~8일 이틀간에 걸쳐 공연하였다. 대구 문화극장에서 송범은 독자적으로 무용생활 10주년 자축공연을 통해 「뱀의 생리학」, 「인도적인 5월」, 「아리랑 환상곡」 등의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송범은 피난지 대구에서 박지홍이라는 전통무용가에게 6개월간 승무를 전수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대구에서 무용연구소를 개설하여 많은 문하생이 몰려들었다.
1952년 「사사(使蛇)의 춤」을 창작하였다.
1953년 피난시절의 어려움 속에서도 인도의 신화를 바탕으로 구성한 「불의 희생」을 성두영의 창작곡으로 제작하여 90분의 무용극 대작을 부산극장에서 하루 5회 이틀간 10회를 공연하였는데 인산인해를 이루어 기마대가 동원하여 교통정리를 하는 등 왕성하고 열정적인 창작열을 불태웠으며 배움에 대한 노력 또한 게을리 하지 않았다.
1953년 10윌 전쟁이 끝나고 한국무용단을 이끌고 서울로 돌아온 그해 11월 11일 「항거」, 「수평선을 밟으며」 등 16편의 작품으로 제1회 송범 신작무용발표회를 개최하면서 서울에서의 활동을 재개한다. 주로 피난지에서 만들었던 작품들을 새롭게 꾸민 무대였다. 그 후 봄, 가을 두 차례씩 발표회를 가지는 등 많은 작품 활동을 하였다. 전쟁으로 인한 혼란 속에서도 무용에 대한 열정은 계속되고 피난지 대구, 부산, 진주, 마산 등에서 활동을 펼친다. 5회에 걸쳐 직접 안무한 작품 「양자강」, 「승전무」, 「영원한 조국」, 「사사의 춤」, 「출진」, 「힘과 선」, 「루장」, 「거미의 생태」, 「무녀무도」, 「자연을 호흡함」, 「파랑새」, 「아다지오의 밤」, 「아리랑환상곡」, 「향토의 정서」, 「토리아나」, 「라오편」, 「인도라」, 「지평선」, 「오월의 인상」, 「불춤」 등을 무대에 올린다. 이로써 6·25전쟁으로 인한 흐트러진 우리 무용계의 맥을 이을 수 있었다. 송범은 이렇게 격동기적 상황에서도 무용에 대한 애착과 집념으로 오늘날까지 무용예술계를 이끌어왔다.
1954년 송범은 한국무용인협회 창립공연에 출연했을 뿐 자신의 작품은 공연하지 않았지만 「불의 희생」을 재구성하여「인도의 연가」라는 대작 위해 1년간의 준비기간을 가졌다.
1955년 4월 8일~10일에 걸쳐 「인도의 연가」라는 대작을 발표했다. 그 해 코리아발레단을 조직하였으며, 무용극 반주를 위하여 해군교향악단 80명을 동원하는 엄청난 기획을 추진하였다. 관객은 줄을 이어 대성황을 이루었고, 한국무용사에 남을 만한 작품이라는 격찬을 받았지만 경제적인 면에서는 많은 적자를 안겨 주었다 흥행성과를 염두에 두지 않은 기획이었기 때문이다.
1955년 공연의 적자로 송범의 결혼 생활은 전적으로 형님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9월에 다시 신작공연을 가져 「생존경쟁」, 「공존지대」, 「벽」 등을 발표했다. 이 공연에서 송범 자신의 새로운 무용세계를 향하여 옮겨가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1956년 11월에 한국무용가협회를 결성한 송범, 임성남, 김백봉 등은 기념공연을 안제승의 연출로 공동안무를 하였고, 「패배자」와 「비련」를 창작하였다.
1957년 10월 19~20일 당시 시공관에서 「환상 교향곡」, 「유쾌한 휴일」 등을 지속적으로 발표하는 등 왕성하고 의욕적인 무대를 쉬지 않고 마련하였다.
1958년에는 「흑의의 여인」, 「밤구름」, 「무도회의 권유」, 「생령(生靈)의 신음(呻吟)」, 「백색의 원무곡」, 「만지(蠻地)의 연가」 등을 발표하고, 10월 25일부터 27일까지 「사랑의 환상곡」, 「열풍지대」 등 신작과 함께 이미 공연하였던 「생존경쟁」 등을 시공관에서 발표했다. 1958년 10월 31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공연평 중 중요한 대목을 살펴보면 「열도와 창의의 결정」이란 제목 아래, “송범은 창작 발레 「사랑의 환상곡」을 주축으로 한 이번 공연에서 마치 하강을 잃은 체온계의 수은주와도 같은 강도의 상승과 육체의 발랄, 그리고 창의로써 의욕의 열도를 기간으로 한 송범 왕국을 선언했다”라고 한 구절이 있다. 이처럼 그는 우리 민속무용을 현대화하는 작업을 시도하였다.
1959년에는 그동안 분열 또는 침체되었던 한국무용예술인협회와 한국무용가협회가 재결합하여 한국무용협회를 결성하여 통합된 단체로 성장하게 되었다. 송범은 1959년에는 「현대인」, 「열풍지대」, 「월광」, 「추억의 야회(夜會)」를 발표하였고, 특히 9월 11일부터 13일에 「영원한 자각」, 「화이트 왈츠」 등을 발표하였다.
1960년 3월 30일에는 송범, 임성남, 주리가 주축이 되어 외국무용계열의 중견 및 신인 53명이 한국발레단을 조직하고 연 2회의 정기공연을 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1961년 1월 8~12일에는 송범, 강선영, 권려성, 김문숙, 김진걸, 이월영 등이 한국무용단이란 이름으로 시공관에서 종합예술제를 열었다. 또한 그 해 7월 임성남 안무의 「공기의 정」, 송범 안무의 「백야」, 주리 안무의 「사랑은 마술사」를 중심으로 창단공연을 가졌으며, 별도로 「기항지(寄港地)」, 「혁명전야」, 「농악」, 「죄와 벌」을 발표하였다.
이 시기 송범의 예술적 정체성은 소품 위주의 현대무용 내지 모던발레로, 당시 혼란한 사회상이 표현성 강한 춤으로 표출되어 주목을 끌었다. 송범의 소유한 춤기량은 선명한 신체선이 강조된 날카로운 포즈와 마임적이면서 그로테스크한 연기, 거칠고 직선적인 선과 한국춤 특유의 곡선이 교합(交合)을 이룬 양감적 느낌의 움직임 미학이 호소력 있게 발현되었다. 작품에서는 현실인식에 바탕 한 극도의 긴장감을 자아내는 작품스타일과 함께 이국적 낭만풍이 서려있는 서정적 작품들도 이 시기 송범의 춤 경향을 대변하는 중요한 특징으로 꼽힌다. 여하튼 송범은 소품 위주의 다작(多作)을 통해 최승희, 조택원의 신무용 예맥을 잇는 한편,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의 창작성을 토대로 6·25전쟁 이후 황무지에 놓인 한국춤을 재건하고 그 토양을 다져가는 역할의 선봉에 서게 된다.
4) 외국무용 창작기(1962-1972)
1962년 국립무용단이 창단되고 단장을 맡으면서 송범은 안정적으로 창작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1962년 3월 21일 첫날 공연의 작품과 안무는 「백(白)의 환상」(임성남), 「영(靈)은 살아있다」(송범), 「쌍곡선」(임성남)이었다. 그러나 아직 정리되지 못한 탓인지 박용구는 “공연은 전체적으로 불성실하고 의욕적인 것도 느낄 수 없었고, 춤이 음악에 쫓겨서 부산하기만 하였다”라는 평을 남겼다.
1963년 3월 13일부터 17일까지 국립무용단 제2회 공연에서 송범은 전5경의 무용극「검은 태양」을 무대에 올렸다.
백인 농장주의 딸을 연모하여 밤마다 밀회를 즐기던 흑인 노예가 결국은 그 현장을 발각 당하게 되고 갖은 학대와 수모를 견디다 못해 반항하다가 투옥되고 3년의 옥고를 치른 후에 복수의 집념을 안고 돌아온다. 그러나 그를 향해 쏜 아버지의 총탄을 몸으로 대신 맞고 죽어가는 백인처녀의 순애, 격정에 못이긴 그는 그 총으로 악독한 농장 감독을 쓰러뜨리고 자신도 칼로 가슴을 찔러 애인의 뒤를 따른다.
그는 프로그램 인사말에 “모든 인간이 받을 수 있는 태양의 빛마저 빼앗기고 어둠 속에서 짧은 인생을 마친 그늘진 인간상을 보조시키기 위해 최고도의 연기력과 무용적 기교를 재삼 희구하며 음악과의 관계를 고려했다”고 밝혔다. 9월 21일 송범은 그의 개인 무용발표회를 갖고 선무(仙舞)를 원형으로 하는 「사파(裟婆)의 유혹」과 현대무용 작품인 「광열의 고독」, 「고요한 찬가」, 「예츄-드」, 「암흑」, 「에레-지」, 「도피자」, 「향수」 등을 발표하였다. 「사파(裟婆)의 유혹」은 고전예술의 현대화를 꾀한 작품으로서 승무를 소재로 하여 이것을 현대무용으로 재구성한 작품이었다.
1964년에는 「검은 태양」, 1965년에는 「심산유곡(深山幽谷)」, 「멍든 산화(山花)」, 1965년에는 「아! 1919년」, 1966년에는 「왕비(王妃) 페도르」, 1967년에는 「종송(鍾誦)」, 「인간투쟁」 등 주로 현대무용적 작품과 스페인 무용, 인도무용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면서도 의욕적인 공연활동이 계속되었다. 이처럼 1962년부터는 직업무용단이 탄생되며 주로 극무용이 위주가 되고, 발레양식에 의한 세련된 무대 공간연출법 등으로 인하여 형식미가 돋보이는 작품이 되었다.
1966년 10월 12~I6일 공연한 「심산유곡」은 송범의 새로운 면모를 말해주는 차원 높은 수작이었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또한 본격적인 한국무용극에 손을 댄 최초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관심을 끈 무대였다. 판토마임에만 의존하지 않은 감정 표현의 생동감 있는 몸놀림, 표현기법에서 감지되는 새로운 동적 요소의 적극적인 도입은 자칫 내향적인 춤사위가 빠져 들어갈 수 있는 전달 미흡의 취약성을 극복하려는 착상의 구체화로 호감이 가는 시도라고 평가되었다. 반면 무용단이 가져야 하는 픽션과 효과적 사용이 무용극의 형성에 결정적 요소이며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을 미처 의식하지 못한 아쉬움이 도처에서 발견된다는 점도 지적되었다.
1967년 9월 13~17일 공연한 「종송(鍾誦)」은 음(音)과 동(動)의 조화라는 측면에서 성공을 거둔 작품으로 평가되었다. 김희조의 곡은 민속적 감미로움이 강하게 풍기며 화려한 극적 분위기를 조성해 갔으며, 음의 흐름과 춤의 기복으로 어울림이 뛰어난 조화를 이룬, 보기 드문 작품이란 평과 함께 음악에 있어서 한국무용에 대한 깊은 조예와 민속악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내포되어 있다고 절찬 받은 작품이었다.
1962년 국립무용단의 창단은 송범의 예술인생에 결정적 전환의 계기를 제공하면서 화려하게 만개(滿開) 된다. 국립무용단의 탄생은 한마디로 6·25전쟁 이후 정치사회적 불안과 열악한 예술환경 속에서 치열한 창작정신으로 한국의 춤을 재건한 무용가들에 대한 일종의 보상이자 댓가였다.
창단이후 약 10년간 국립무용단은 일종의 모색기로 규정된다. 한국춤을 비롯 발레, 신무용, 남방춤, 스페인춤 등 다양한 장르가 공존하는 가운데 인적구성 면에서도 복잡한 양상을 드러낸다. 송범을 비롯 한영숙, 김백봉, 김진걸, 강선영, 임성남, 주리, 이인범 등이 국립무용단 활동에 참여한다. 그런 가운데 재능과 역량 면에서 뚜렷한 우위를 점유한 송범과 임성남이 국립무용단의 실질적 쌍두마차로 부상하게 되었다.
5) 한국무용 전환기(1968~1972)
1968년부터는 한국무용 작품으로 전환점을 맞는다. 1968년 멕시코올림픽의 세계민속예술제에 참여하면서 그는 완전히 한국무용만을 발표하게 된다. 「화관무」, 「선녀춤」, 「부채춤」, 「승무」, 「무당춤」, 「선의 유동」, 「연가」, 「농악무」, 「검무」등 9편 작품으로 멕시코올림픽 참가를 계기로 6개 도시 순회공연을 갖게 되었고, 언론의 지대한 관심을 받았다. 연일 현지신문에는 대서특필의 찬사로 한국무용의 문화적 위상을 드높여 세운 쾌거의 공연이었다.
1969년에는 「달과 여인」, 1970년에는 「전원풍경」, 1972년에는 「강강술래」, 「단오절」 등 한국 민속적인 소재의 작품을 올렸다.
1972년 뮌헨올림픽 한국민속 예술단 참가를 비롯하여 일본, 서구, 북미 등 수차에 걸친 해외공연을 통하여 자신의 신념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신하며 한국무용 발전에 온 심혈을 기울여 정진하였다. 국제무대에서 공감대를 형성하는 예술적 수준과 깊이를 스스로 인식한 해외공연이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국내활동은 빈약하였으나 민속예술단의 멕시코 공연의 성공은 두 가지 측면에서 하나의 전환기를 마련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하나는 우리 무용예술의 우수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언어의 장벽을 모르는 만국공통의 예술이 해외로 뻗어나갈 때 거기서 거둘 수 있는 국위선양과 국제 선전의 효과가 수백 명의 기업의 교관을 동원해서 얻어낼 수 있는 성과에 버금간다는 가치관과 자신감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국립무용단은 차츰 한국무용과 발레로 압축되어 ‘한 지붕 두 가족’ 체제로 자리매김하면서 1972년 국립무용단과 국립발레단 분화되었고, 그해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교수 임명되어 새롭고 변화된 환경이 조성되기에 이르렀다.
6) 한국무용극 전성기(1973-1992)
1973년 명동 예술극장에서 장충동 국립극장으로 이전 개관하면서 한국무용전공으로 구성된 국립무용단이 정식으로 창단되어 초대 국립무용단 단장으로 취임(5월 1일)하면서 첫 번째 작품으로 무용극 「별의 전설」로 1973년 11월 21~25일 공연하였다. 작품 규모가 무대에 걸맞게 대형화되었고, 이제까지의 국립무용단 작품들과는 질에서나 양에서 차원을 달리하는 대작이었다. 새로운 무대 기술의 도입과 기자재 등과 어우러진「별의 전설」은 단원들의 고른 기량과 안정감이 돋보여 한국무용극의 새로운 초석이 시작된 작품으로 평가되었다.
1974년 한국무용제전을 통하여 그동안 같이 활동해온 무용가들의 소품작품을 한 무대에 펼쳐 옴니버스 형식으로 무대화하여 한국무용 소품작품을 정립하고자 했다. 같은 해 11월 27일부터 12월 1일에 공연된 무용극「왕자호동」은 낙랑공주와 호동왕자의 국경을 초월한 사랑이야기를 무용극화 함으로써 남북으로 분단된 우리 현실의 아픔을 극화했다.
1975년 「백의 환상」, 「사의 승무」를 발표하고, 한국무용제전 다음해 종합무용제를 무대에 올림으로써 한국무용의 무용극 작업과 소품공연을 병행하면서 예술적 가치를 높여 한국무용의 전반에 민족의식이 담긴 오늘날 무용으로 발전시켜 정착시키고자 노력하였다.
1977년 2월 3~5일 「춘향전」을 공연했다. 춘향과 몽룡의 신분의 격차를 넘어선 사랑이야기를 변학도라는 탐관오리를 통하여 부패되어가고 권력에 지배당하는 서민들의 힘든 삶을 대변한 작품이었다.
1978년 3월 10~14일 올려진 「마음속에 이는 바람」은 한적한 마을에 사는 분이와 돌이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에 이방인이 찾아들어 각기 다른 사랑을 나누게 되는데, 다음 날 이방인들은 떠나고 하룻밤의 폭풍은 영원히 마음속에 남게 된다는 내용이다. 이 작품은 누구나 새로운 환경과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지만 결코 변하지 않는 것은 진실한 사랑뿐이란 것을 일깨워 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예술이나 문화가 겪고 있는 사회변동의 윤리적 혼미 상태, 전통의식의 단절, 사회 경제구조의 비정상적인 변화에 따른 우리의식 속에 이는 바람일지도 모른다. 1978년 10월 6~8일에 개최된 종합무용제 소품공연이 이어졌다.
1979년 5월 23~27일에 개최된 공연에서는 1부 「백의 환상」, 「봉산탈춤」, 「아름다운 내 마을」, 2부 「꿈·꿈·꿈」을 무대에 올렸다. 1부에서 옴니버스 형식의 소품공연과 2부 「꿈·꿈·꿈」무용극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대신하여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사랑과 속세의 무상함을 표현한 작품이다.
1980년 6월 20~24일 무용극「푸른 천지」는 선비 허생의 이야기로 이 세상의 삶이 금전이 전부가 아님을 깨닫게 해주고 인간으로써 진정한 삶의 방법과 인간의 근본을 깨닫게 해준 작품이다. 그해 9월 25~29일까지「별의 전설」,「심청」, 「시집가는 날」등의 작품을 송범, 김백봉, 최현이 함께 하이라이트부분을 무대에 올렸다.
1982년 3월 21~24일 송범 무용전은 그동안 안무한 소품작품을 한 무대에 올려 그의 작품세계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했다. 송범 무용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국립무용단 단원들이 꾸민 소품무대였다. 1982년 「썰물」은 어느 늙은 어부의 삶을 통해 자연에 순응하며 진실됨과 초연한 삶을 극화한 작품이며 이 작품을 안무하는 동안에 몸이 편치 않은 가운데도 담요를 뒤집어쓰고 안무할 정도로 열의를 갖고 무대에 올린 작품이기도 하다. 그 해 10월 20~21일 양일간에 걸쳐 국립무용단 중남미 순회 귀국공연을 현지 순회공연의 프로그램과 똑같이 선보이기도 했다.
1983년 4월 12~15일 「한국무용전」이 개최되었다. 1부에 부채춤, 사랑가, 파시촌, 참회, 여명, 2부에 영혼의 길, 법열도, 황혼, 농악이 무대에 올랐다.
1984년 5월 24~27일 「도미부인」을 공연했다. 이 작품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도미수와 애란부인)의 사랑이야기를 사당패의 꼭두인 도미와 아내 도미부인으로 설정하여 도미 부부의 설화를 조선시대 배경으로 옮겨 무용극화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한국무용의 전통적 기법을 사용하여 창작되고 소재나 주제 면에서도 한국무용을 재창조한 극예술의 한 형태를 갖춘 작품으로 1984년 LA올림픽 문화축제에 참가하였다.「도미부인」은 송범의 최대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이기도 하다. 또한 한국무용극을 세계에 진출시켜 한국무용의 종합적인 예술형태를 보여준 총체극의 역할을 한 작품이다.
1986년 4월 10일 무용극 「은하수」는 86아시안게임 문화예술 참가작품으로 견우와 직녀의 사랑이야기 전설을 창작하여 만든 작품이다. 천상이라는 이상과 지상이라는 단순한 구분보다는 소녀의 순박한 꿈을 지닌 선녀와 충복 한 농군과의 화합과 이별이라는 숙명을 테마로 삼았다. 직녀에게 초점을 두어 현실적인 감각으로 인간의 희로애락을 우리의 춤으로 표현하고자 한 작품이다. 1986년 10월에서 1987년 1월까지 작품 「은하수」가 3회에 걸쳐 재공연 되었다.
1987~1990년까지 송범은 잠시 창작 작업을 중단하고 제자 조흥동, 국수호에게 안무할 기회를 줌으로써 차세대 무용발전에 기여하고자 했다. 그는 국립무용단을 정년퇴임함으로써 1992년 「도미부인」을 끝으로 무용예술의 긴 여정의 막을 내린다.
송범은 국립무용단 단장직을 맡으면서 안정적이고 보장된 여건 속에서 창작활동의 터전을 갖게 되었으며 그의 정열과 작품에 대한 우수성은 더욱 빛을 발하기 시작하였다. 국립무용단 단원들의 기량과 송범의 뛰어난 안무력에 힘입어 전통적인 우리 고유의 전통무용과 민속무용을 무대예술무용으로 재정립하여 보고 즐기는 시각적 무용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보고 생각하는 사상적 깊이가 있는 무용이 될 수 있도록 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한편 전통과 민속이 접목된 작품, 전설, 설화 등을 소재로 한 줄거리와 내용을 가진 무용극 정립에 주력한다. 그는 「별의 전설」, 「왕자호동」, 「꿈·꿈·꿈」, 「푸른 천지」, 「은하수」, 「도미부인」, 「그 하늘 그 북소리」 등 무용극과 많은 소품 작품을 창작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쏟아낸다. 송범은 한국적인 소재, 춤사위, 음악 등을 현대적으로 재창조하여 새로운 감각과 의미로 재해석하여 한국무용을 종합적인 예술형태인 총체극으로 발전시켰다.
1973~1990년의 시기는 송범의 최고 활동시기이며 그가 무용역사에 길이 남을 중요한 업적을 쌓은 시기이기도 하다. 국내와 국제무대에서 공감대를 형성하는 예술적 수준과 깊이를 인정하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송범의 작품에 담긴 예술적 특성은 다음과 같다.
① 소재와 기법 속에 간직하고 있는 전통 형식의 우수성
② 다양한 가락 속에 담겨진 심오한 민족적 정서와 매력
③ 경이적인 색채의 조화에서 엿볼 수 있는 탁월한 심미감
④ 대형(Formation)과 무적(舞跡, Dancing line)에서 보여주는 횡도(橫道)형상미
⑤ 고전적 기법 속에 재치있게 주입된 현대적 감각
⑥ 정중동의 효율적 융화
이로 인해 20여년의 국립무용단장을 지낸 송범은 한국적 무용극의 정립이라는 미학적 성취를 통해 ‘장기집권’이라는 부정적 협의를 말끔히 희석시킨다. 민속춤과 신무용 레파토리의 나열식 재현이나 인도춤, 스페인춤 등 이국풍의 전시 주의적 공연으로 장충동의 국립극장과 같은 대형무대를 장악하기엔 한계가 있어 서양 고전발레와 같이 드라마가 있는 무용극이 유일한 대안으로 제시되어 한국적 미(美)의 전형을 표상한 송범스타일의 무용극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국립무용단과 송범의 예술세계는 무용극으로 등식화된다. 모던계열에서 벗어나 완전히 한국무용으로 전환한「사바의 유혹」(1963)에서 미학적 가능성을 시사하였고, 그후 국립극장의 장충동 이전 기념공연으로 선보인 「별의 전설」(1972)에서 이른바 ‘국립무용단식 무용극’시대의 성공을 전망케 하였다. 그후 송범은 우리의 신화와 전설, 설화를 소재로 「왕자호동」(1974), 「춘향전」(1977), 「꿈·꿈·꿈」(1979), 「푸른천지」(1980), 「썰물」(1982), 「도미부인」(1984), 「은하수」(1989), 「그 하늘 그 북소리」(1990) 등 대작 무용극을 안무하면서 국립무용단의 예술적 정체성울 더욱 선명하게 다져간다.
7) 무용은퇴기(1993~2007)
1992년 국립무용단 단장직 20여 년간 수많은 소품과 무용극을 위해 청춘과 정열을 바친 무용가 송범이 세월을 뒤로하고 정년이란 사회적 제도에 의해 후배들에게 단장직을 물려주고 떠난다. 그는 늘 ‘해볼 만큼 다 해봐서 욕심이 없고, 사람은 물러날 시기를 잘 택해서 물러나야 사람대접을 받는다.’라는 말처럼 정년 후에 모든 직을 놓고 물러나 손주 보는 재미로 살았다. 하지만 그를 필요로 하는 요청이 있어도 처음에는 사양하였지만, 결국 벽사춤보존회,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중앙대 특임교수 등에서 후학들을 위해 혼신의 열정으로 지도하였다. 그런 모습에서 후학들에게 예술가의 귀감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자녀들을 따라 캐나다로 떠난 후 2007년 6월 15일 82세를 일기로 캐나다에서 작고하였다. 그리고 2007년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3. 송범 춤작품에 나타난 예술적 성향
송범의 춤 생애는 소년기와 청년기와 중년기와 장년기와 노년기를 거치면서 자신만의 춤기법과 예술적 성향은 한국사회가 직면한 혼란과 급변하는 시대흐름에 발맞추어 부단히 정진하였다. 특히 춤에 대한 기본적 역량과 예술철학을 바탕으로 조금씩 변신하면서 무용사조를 따라 정상의 예술가 위치를 구축하면서 직분을 다하여 춤을 창작하여 춤을 추었고, 안무가로서의 굳건한 위치를 구축하여 역량을 십분 발휘하였다.
첫째, 다양한 스승들의 세계적인 춤기법을 섭렵하여 ‘무한한 창작능력과 범장르적 안무력’을 발휘하였다.
조택원의 문하(門下)에 입문하여 발레의 기본동작과 이시이 바쿠(石井漠) 메소드가 혼융된 소위 ‘워킹발레’를 비롯하여, 최승희의 제자인 장추화문하에서 무용시 계열에서부터 현대무용·일본유학파 한동인, 정지수에게 정통발레를 배우고, 또 인도춤과 스페인춤, 나아가 명무(名舞) 한영숙과 박지홍의 전통춤까지 섭렵한 다양한 춤기법과 무한한 역량으로 범장르적인 춤창작과 다양한 주제의 작품을 안무할 수 있었다. 당시 춤평론가 문철민은 “균형있는 육체와 아크로바틱한 기교에서 미래가 촉망되는 신인이 등장했다며 송범의 예술가로서의 성공가능성을 예고”했었다.
둘째, 어린 시절 연극무대의 경험으로 ‘극장무용의 무대미학과 공간구성 능력’이 탁월하였다.
아홉 살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연극에 관심이 많아 신파극, 가극 등 연극공연은 거의 다 구경하면서 연극에 관심을 갖고 연극배우가 되는 게 꿈이었던 송범은 신파극이 열리는 동양극장의 공연 무대는 언제나 신비한 동경의 대상이었다. 훗날 이 연극무대의 경험이 무용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무대미학과 공간구성 등 많은 면에 도움을 받았다고 술회하였다.
셋째, 청년기 송범의 예술적 정체성은 ‘현대무용 내지 모던발레’로 ‘이국적 낭만풍이 서려있는 서정적 작품’ 성향을 보여주었다.
현실인식에 바탕 한 극도의 긴장감을 자아내는 작품스타일과 함께 당시 혼란한 사회상이 표현성 강한 춤작품으로 주목을 끌었다. 선명한 신체선이 강조된 날카로운 포즈와 마임적이면서 그로테스크한 연기, 거칠고 직선적인 선과 한국춤 특유의 곡선이 교합(交合)을 이룬 양감적 느낌의 움직임 미학이 호소력 있게 발현되었다. 이렇듯 현실인식에 바탕 한 극도의 긴장감을 자아내는 작품스타일과 함께 이국적 낭만풍이 서려있는 서정적 작품들도 이 시기 송범의 춤 경향을 대변하는 중요한 특징으로 꼽힌다.
넷째, 중년기 송범은 ‘소품 위주의 다작(多作)’과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의 창작성을 토대’로 한국춤을 재건에 선봉에 서게 된다.
1962년 국립무용단이 출범한 이래 수많은 소품을 열정적으로 창작하였다. 최승희, 조택원의 소품위주 신무용 예맥을 잇는 한편,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의 창작성을 토대로 6·25전쟁 이후 황무지에 놓인 한국춤을 재건하고 그 토양을 다져가는 선봉에 서게 된다. 그 시기에 「사파(裟婆)의 유혹」과 현대무용 작품인 「광열의 고독」, 「고요한 찬가」, 「예츄-드」, 「암흑」, 「에레-지」, 「도피자」, 「향수」, 「검은 태양」, 「심산유곡(深山幽谷)」, 「멍든 산화(山花)」, 「아! 1919년」, 「왕비(王妃) 페도르」, 「종송(鍾誦)」, 「인간투쟁」 등 소품 위주의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다섯째, 장년기에는 서양 고전발레의 서사적 기법을 차용하여 ‘발레기법적인 한국무용극을 완성’하였다.
송범이 가장 관심을 기울인 분야는 고전발레였다. 무용극의 미학적 완성은 서사성에 기반 한 서양 고전발레의 견고한 형식을 원형적 가치로 수용한 결과의 산물이다. 종합예술적 공연양식을 지닌 무용극은 테크놀로지와 연관된 무대적 구조화와 주변 장르와의 조직적인 협업(協業)이 성패를 좌우한다. 명징한 소재와 극적 반전, 기승전결의 짜임새 있는 구조, 사실적 무대장치 등 서양 고전발레는 한국적 무용극의 무대적 창출에 귀중한 교본 역할을 하였다. 또한 송범은 국립극장과 같은 대형무대를 채워야 하는 현실적 필요에 의해 무용극 형식을 지향하게 되었다.
여섯째, 우리 전통춤에는 없는 2인무 즉, ‘듀엣을 양식화(styligation)하여 스타 주인공들의 강한 극성(劇性)을 부각’시키는 공연어법을 발휘하였다.
송범은 국립무용단과 무용극 속에서 우리 전통춤에는 없는 ‘듀엣’이라고 하는 2인무를 발전시켰는데, 이 듀엣은 남녀 사이의 사랑이 중심이 되어 주인공들의 ‘듀엣’으로 양식화(stylization)를 시도했다는 점이다. 특히 송범 무용극에서 남녀 2인무는 고전발레의 ‘파드뒤’의 한국적 차용으로 자연스럽게 정착시켰다. 사실 무용극은 사랑, 죽음과 같은 강한 극성(劇性)을 띤 서사가 없다면 무미건조하게 전개될 우려가 있다. 듀엣의 미학적 양식화는 이렇듯 무용극의 구조와 관계가 깊다. 그 결과 무용극에서 주인공들의 듀엣이 강한 극성(劇性)을 나타내고, 이것이 송범식 무용극의 특성이면서 <도미부인>의 양성옥과 국수호, <그 하늘 그 북소리>의 최정임, 이미미, <은하수>의 윤성주 등과 같은 국립무용단의 주인공 스타들을 양성해 내는 토대가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일곱째, ‘한국적 정서를 표출’하여 ‘대중 눈높이를 맞춰’ 감동을 주는 춤 성향을 보여주었다.
송범의 춤 철학은 전통무용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토대로 창작해 내는 것’이다. 그래서 송범은 ‘우리의 전통을 바탕’으로 해서 창작해야 한다는 것과 다음으로 ‘우리의 정서’를 표출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진정한 무용가는 “옛날 그대로 해서는 절대 안 되고, 예술은 근본적으로 각자의 개성(個性)에 따라, 어떤 주제나 소재를 갖고, 그것을 각자의 사상이나 느낌에 어울리게 표현하는 행위로 그 행위가 제3자(관객)에게 감동을 주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대체적으로 고전설화나 역사적 사실에서 소재를 선택하여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대중들에게 편하게 이해 될 수 있는 내용들로써 작품을 보는 데 이해도를 높이고 관객과의 눈높이를 맞추려는 의도에서였다고 본다.
여덟째, 송범 춤은 ‘유미주의적이면서 스펙터클한 군무위주의 형식’을 표방하고 있다.
송범은 무용극에 발레와 현대무용의 테크닉을 과감하게 도입하여 “우리춤의 특성인 곡선적이고 대칭한 동작을 서양의 직선적이고 정형화된 모습으로 바꾸었고, 무대구성도 라인 위주의 조직성과 통일성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으며, 공간 활용도 무대라는 한정된 틀 속에 묶어 웅장한 효과를 노리고 있다.”고 평가한다. 따라서 그가 안무한 작품들에서는 무용수 개인의 특성보다는 집단의 웅장함이 강조되며, 설명적 서사구조에 대한 의존성이 높은 것이 단점으로 지적 받기도 했다.
4. 송범 춤생애의 무용사적 의의
송범은 천부적인 예술적 감각과 끊임없는 노력으로 수많은 작품과 업적을 남기면서 우리 무용계에 한 획을 그었다. 이 글에서는 오늘날 한국무용을 예술무용으로 이끌어 왔으며 한국무용의 세계화와 한국 무용극을 창출하였다.
이제 송범 춤인생과 춤예술의 한국무용사적 의의를 몇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 20세기 한국의 무용이 무대예술시대를 만들어온 예술무용계 1세대 최승희, 조택원, 장추화 등의 개척자들의 춤을 다양하게 섭렵하여 ‘예술무용 2세대의 주역’으로 자리매김하였다는 점이다.
송범은 1950년 6․25동란으로 스승세대가 국내를 떠난 무용계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한국무용협회 이사장이란 중책을 맡아 당시 신진무용가로서 열정과 투지를 발휘하여 동숭동에 자신의 연구소를 개설하는 한편, 북진하는 국군장병 위문하는 문화공작대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주요출연단체로는 송범 무용연구소와 김윤학 무용연구소와 조동화, 김경옥, 정막, 김문숙, 정혜옥 등이 참여하였다. 또한 대구 피난지에서도 송범이 주축이 되어 국방부 정훈국 소속의 무용대를 조직하여 활동하였고, 전란의 와중에서도 대구, 부산, 마산 등지에서 「불의 희생」작품 등으로 공연활동을 주도하였다. 1953년 전쟁이 종식되자 서울로 돌아와 피난지에서 만든 신작무용발표회를 가졌다. 1955년 코리아발레단을 조직하여 공연활동을 하였고, 1956년 한국무용가협회를 조직하여 임성남, 김백봉과 함께 안제승 연출로 「비련」을 공연하면서부터 1962년까지 왕성하고 의욕적인 무대를 마련해갔다.
둘째, 송범은 1962년2월6일 창단된 국립무용단의 부단장과 단장으로서, ‘국립무용단 40년 역사의 살아있는 화석’처럼 20세기말까지 화려하게 장식한 장본인이 되었다.
1962부터 국립무용단 창단 당시는 임성남단장과 송범, 김백봉부단장 체재로 출범하여 무용활동을 시작하여 1972년 단장으로 부임하여 30년간 국립극장에 봉직하면서 ‘국립무용단은 곧 바로 송범이다’란 등식을 성립시킬 만큼 국립무용단의 역사의 주역으로 주옥같은 작품을 내놓았다. 춤평론가 조동화는 “국립무용단 30년은 한국무용이고, 이는 곧 송범 춤의 시대로서 현대 한국무용사는 송범의 족적”으로 채워져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실로 기념비적인 찬사가 아닐 수 없다. 이는 이른바 ‘국가중심주의’를 표방한 국립무용단이 추구해야 할 예술적 이념이자 좌표였다. 그런 점에서 송범은 춤의 개척자이고 선구자이며, 보기 드문 애국자라 할 수 있다.
셋째, 송범은 현대무용과 발레로부터 춤을 시작하여 작품을 활동을 하였지만 점차 ‘외국무용에서 한국무용가로 변신’하여 성공한 무용가이다.
어떻게 보면 무용시류에 잘 편승한 무용가라고도 할 수 있고, 무용사조를 잘 읽어낸 무용가라고도 할 수 있으나 그는 무용세계가 흘러가는 안목을 누구보다도 잘 예견하고 적절히 대처하면서 남보다 더 노력하고 정렬을 불사른 무용가 이였기에 금자탑을 세운 무용가가 되었다. 또한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한국무용가로서 성공은 전통무용가가 아닌 이상은 성공의 열쇠는 현대무용과 발레의 기법과 공연어법을 잘 터득하고 접목한 결과의 소산이라고도 볼 수 있다. 20여 년간 연마해왔던 현대, 발레, 인도 무용 현대무용, 발레를 비롯한 각 나라의 민속무용의 섭렵은 무조건 외국무용을 선호하고 동경하는 사대주의적 발상에서 연유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무용언어의 습득으로 풍부한 표현영역의 확대를 꾀했던 무용관에 기인하는 것이다. 분명, 다양한 장르의 무용체험이 송범으로 하여금 한국무용을 시도하는 원동력이자 동인이 되어있음은 뚜렷하다.
넷째, 송범은 ‘국립무용단식 무용극의 공연기법과 위상을 정립’한 창시자이며 수많은 명작을 남겼다.
북한이 말하는 ‘우리식 무용’처럼 발레식 극장무용극을 대극장무대에 걸맞은 스펙터클한 한국무용극을 정립하여 「도미부인」, 「은하수」, 「그 하늘 그 북소리」 등 주옥같은 명작을 남겼다. 송범은 한국 근현대무용에서 대극장무용과 무용극을 완성한 무용가이다. 송범의 예술적 업적은 국립무용단을 통해 추구된 한국적 무용극으로 압축된다. 한국적 심성에 기반 한 전형적인 미의식의 창출로 정의되는 송범 무용극은 전통과 민족의 정체성을 화두로 한 예술양식이다.
다섯째, 송범은 그간 숱한 해외공연에 국립무용단 작품을 소개하였고, 소품작품들도 안무하여 ‘세계무대에 한국무용을 알리고 위상을 높이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간 일본, 북미, 중남미, 호주, 유럽, 동남아 등 숱한 해외공연에 국립무용단 작품을 소개하였고, 이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국내는 물론 1968년 멕시코 올림픽 세계민속예술제에 소품 「화관무」, 「부채춤」, 「검무」, 「승무」, 「무당춤」, 「농악무」 등과 1984년 LA올림픽 예술제에 「도미부인」 등의 해외공연을 통해 한국문화의 해외소개의 견인차 역할을 하였으며, 문화사절단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10여 편의 장편 무용극 중에서 「도미부인」은 미국의 올림픽 조직위원회는 2년 전부터 문화올림픽을 기획하면서 의뢰하기를 가장 한국적이며 전통성을 갖춘 한국인의 혼이 깃든 작품이 되기를 원했던 작품으로, 미국의 조간지 LA 타임스는 굉장한 호평을 받은 「도미부인」이 만족한 결과를 내지 못했더라면 송범이란 이름은 ‘아마 10년 전에 우리 무용계에서 사라졌을 것이다’라는 평이 나오기도 했다. 특히 「도미부인」은 미국 3회, 유럽 2회, 중동지역 1회, 아프리카 1회, 동남아 1회, 공산진영을 제외한 모든 지역을 공연했으며 국내의 공연을 통산하여 200여회에 걸친 공연기록을 남겼다.
여섯째, 수많은 ‘3세대 정상급 한국무용가를 길러낸 큰 스승’이다.
수많은 춤꾼들 국수호, 조흥동, 정재만, 양성옥, 손병우, 김향금, 이문옥, 박정목, 장용일, 이미미, 윤성주, 이지영, 최정임, 홍형경, 홍금산, 이화숙, 양승미 등 국립무용단의 중추멤버가 모두 그의 후예이자 이 나라 무용계를 이어나갈 대들보들이다. 이들은 지금도 각기 자기 몫을 해내며 우리무용계를 튼튼한 반석으로 다지며 후학들을 길러내는 교수, 무용단장, 안무가, 지도위원 등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 그들은 송범이 세운 춤왕국의 ‘위대한 전사들’이다.
일곱째, 남성무용가의 터전이 세계에서 가장 척박한 ‘한국의 남성무용계에 활력’을 살려놓고 그들의 삶터를 마련해준 장본인이다.
송범 자신도 남성으로써 1, 2세대보다 더 어려워진 오늘의 3세대의 남성무용가들이 설 땅을 마련하여 무용수와 무용가로 성장하는데 발판을 마련해주고 이끌어준 남성무용가들의 스승이다. 국수호를 비롯하여 손병우, 박정목, 장용일, 김장우 등의 많은 국립무용단 출신과 조흥동, 정재만 등의 거쳐나간 중견남성무용가 등도 불모지의 남성무용계의 대부로서 그리고 보스로서의 어려운 환경에서 출발한 남성무용가들에게 따뜻한 배려와 강한 채찍질과 더불어 후견인 역할까지 해오지 않았던들 그들이 오늘날까지 존재하기 어려웠을 지도 모른다. 이 중 특히 국수호, 정재만, 조흥동과 같은 남성 무용가의 전통은 여성 무용인들에 비해 희소한 상황 속에서 현재 무용계의 큰 거목으로서 각기 자기 위치를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50대로 접어든 제자들을 상당히 굵직굵직하게 길러낼 수 있다는 것은 남성무용가 송범의 인간적 본보기와 그들에 대한 배려의 소산으로 맺어진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송범은 조택원의 타계 후, 실질적인 남성무용계의 대부로서 존재하면서 큰 스승으로 자리매김 해왔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여덟째, 송범은 순수 ‘국내파로서 외래춤과 한국춤의 대표적인 창작무용가’이다.
국내파로서 스스로 척박한 문화토양 속에서 홀로 자생하면서 외래파들이 묻어 들여온 외래춤만 간접적으로 섭렵하면서도 무용가로서의 춤세계를 투지와 자신만의 독특한 무용철학으로 한국적인 무용작품을 잉태해낸 토속적이고 한국적인 정서를 지닌 무대를 꾸며낸 또 하나의 역사적 인물이다. 송범의 윗세대인 무용계 1세대인 최승희, 조택원이나 같은 2세대인 임성남 등이 당시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앞서가는 새로운 시대의 춤을 왜정시대 일본유학이라는 역사적 환경 속에서 춤의 새로운 기법과 사조를 전수 받아 국내에 돌아와 이를 피력하면서 성공한 무용가들이다.
어쩌면 이러한 당시 본인의 척박한 문화 환경적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남다른 노력과 열정을 더 발휘하였고, 그들이 자만할 때 더 겸손하고 겸허하게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의 좌표와 설 땅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송범이 인정받고 더 존경받는 무용가로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일례를 들어 초기 발레무용가로 활약하다가 일본에서 고난도의 테크닉을 배워온 임성남의 춤을 보고는 자존심을 버리고 발레에서 곧바로 손을 떼고 한국무용 중심으로 작품세계를 변신함으로써 1972년 국립무용단이 국립발레단과 분리하여 재창단할 때 국립발레단장에 임성남, 국립무용단에 송범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아홉째, 송범은 ‘대학교수직에 몸담아 후학을 양성하면서 명예롭게 정년’을 맞이한 무용가로 교육무용의 역사에도 한 페이지를 장식한 인물로 기록될 것이다.
1962년 이화여대에 무용학과가 설립된 이래 50여개 넘는 무용학과가 설립되었고, 수많은 교수가 탄생되었지만 그때까지 명예롭게 정년을 맞이한 무용인은 김백봉, 정병호, 송범, 김옥진 등 손가락을 꼽을 정도밖에 없다. 이는 무용계뿐만 아니라 우리대학의 구조적 문제와 대학예술계가 안고 있는 취약점이기도 하지만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정년을 명예롭게 맞이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특히 대학무용교육과 한국무용전공 교수로서 수많은 제자를 양성하였고, 이들이 또한 국립무용단과 한국무용계의 요소요소에 자리 잡고 활동하는 모습은 그 스승이 걸어온 발자취를 엿보게 한다.
열째, 우리 전통무용에는 없는 2인무(듀엣)을 양식화(stylization)하여 ‘한국무용의 영역을 확대’하고 정착시켜 ‘주인공 스타들을 양성해 내는 토양을 구축’하였다.
송범은 국립무용단과 무용극 속에서 우리 전통춤에는 없는 ‘듀엣’이라고 하는 2인무를 발전시켰는데, 이 듀엣은 남녀 사이의 사랑이 중심이 되어 주인공들의 ‘듀엣’으로 양식화(stylization)를 시도했다는 점이다. 그 결과 무용극에서 주인공들의 듀엣이 강한 극성(劇性)을 나타내고, 이것이 송범식 무용극의 특성이면서 <도미부인>의 양성옥과 국수호, <그 하늘 그 북소리>의 최정임, 이미미, <은하수>의 윤성주 등과 같은 국립무용단의 주인공 스타들을 양성해 내는 토대가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욕이 강렬해지면서 발레기법에 의한 작품세계를 갖고 싶었다’는 춤열정으로 결국 발레식 한국무용극의 장르의 창시지가 되었으며, 완성도가 높은 불후의 명작들을 발표하였다.
열한째, 송범은 근현대 ‘무용사회학적 지위와 중심의 인물’로 자리매김하였다.
본인이 타고난 체력과 정력에다 투지와 노력, 그리고 따뜻한 인간미와 포용력, 그리고 자신만의 무용철학 등 4박자가 결합된 결정체가 리더십을 발휘하여 무용계의 인간관계를 순조롭게 맺었으며, 무용계에서 대학교수와 국립무용단장 등 많은 지위를 부여받아 무용사회적 역학구도의 중심에 서서 무용계1세대와 3세대를 이어주는 2세대의 중심인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앞서 밝힌 송범의 족적과 업적은 결코 남을 억지로 딛고 올라선 무용가도 아니며, 욕심 많은 무용인도 아니며, 무용인 모두의 추앙과 존경 속에 중지가 모아져 자연스럽게, 그리고 당당히 결실을 맺은 산물들이다. 이러한 송범의 인품은 수제자 국수호의 말대로 “스승에게서 배워도 배워도 못 배운 일이 하나 있다. ‘부지런함’이다.”라고 스승의 열정이 넘치는 분이었고, 정재만이 술회한 송범 어록에서도 “무용을 가르치실 때의 무섭고 쇳소리 같은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와는 달리, 평상시에는 자상하시고 인간미가 넘치는 분이시다.” 라는 말씀들이 공감이 간다. 이처럼 타고난 성품과 열정으로 송범은 1950년 6․25사변의 혼란기에 젊은 나이로 한국무용협회 이사장이란 중책을 맡아 피난지에서도 투철한 무용정신과 리더십을 발휘하였고, 국립무용단장, 교수 등의 좌표를 몇 가지씩 찍을 수 있었던 것이다.
5. 맺음말
지금까지 송범의 춤인생의 여정과 무용예술적 성향과 근대무용사에 남긴 족적과 의의를 살펴보았다.
송범의 춤인생의 여정에서 예술적 업적의 정점은 무용극으로 집약된다. 송범의 무용극은 명확한 소재와 극적 반전, 기승전결의 짜임새 있는 구조, 사실적 무대장치 등 서양 고전발레는 한국적 무용극의 무대적 창출에 귀중한 교본적 역할을 하였다.
송범은 국립극장과 같은 대형무대를 채워야 하는 현실적 필요에 의해 무용극 형식을 지향하게 되었고, 자연히 솔로와 듀엣을 안무하게 되었다. 사실 무용극은 사랑, 죽음과 같은 강한 극성(劇性)을 띤 서사가 없다면 무미건조하게 전개될 우려가 있다. 듀엣의 미학적 양식화는 이렇듯 무용극의 구조와 관계가 깊다. 한편 종합예술적 공연양식을 지닌 무용극은 테크놀로지와 연관된 무대적 구조화와 주변 장르와의 조직적인 협업(協業)이 성패를 좌우한다. 그런 점에서 국악작곡가 박범훈과 매개된 완성도 높은 미학적 성취는 한국공연예술사에 좋은 선례를 남겼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무용가 송범에 대한 가장 명확한 한마디의 평가는 무용평론가 조동화가 내린 ‘송범은 좋든 싫든 한국무용사 그 자체이다’라는 것이 새삼 수긍이 가면서 필자도 한마디 덧붙이자면 ‘근현대무용사의 중심인물이었고 선두에서 무용계를 이끈 견인차였다’라고 말 할 수 있겠다.
해방 이후 6․25를 거치면서 어려운 시대를 헤쳐 나온 그의 독특한 무용인생 여정과 여러 사회적 지위, 또한 국립 무용단과 국립 발레단의 분화가 있기 훨씬 전인 1962년부터 그는 줄곧 30년간 국립극장에 봉직하면서 ‘국립 무용단은 곧 바로 송범이다’란 등식을 성립시키면서 무용가로서의 열정과 작품창작과 제자양성에 한 평생을 몸 바친 ‘국립무용단의 살아있는 화석’이다. 또한 남성 무용가로서의 무용계 중심에서 버텨온 강인한 생존력과 그가 뿌린 씨앗과 후학 등이 그 모두를 지칭하고 있는 평가라고 할 수 있겠다.
차범석은 “송범에게서 감지한 체취는 한마디로 ‘불’이다. 모든 것을 불살라 먹는 ‘불꽃’이다. 미지의 세계를 향하는 무한한 욕구와 동경에서 머무른 게 아니라, 그 밑바닥까지 샅샅이 훑어내지 않고는 직성이 안 풀리는 야망과 행동의 ‘화신(火神)’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영원한 탐구자이자, 구도자(求道者)로서의 치열한 자기투쟁을 뜻하는 것이다.”
정병호는 “송범이 명실 공히 ‘한국무용계의 대부(代父)’가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그의 예술에 대한 열정과 노력이라 할 수 있으며, 그는 인생(人生)과 예술(藝術)에 전혀 유감없이 살아온 ‘복인(福人)’이라 생각한다.”
성기숙은 “송범의 미학적 성취는 한마디로 무용극으로 귀결된다. 송범 무용극의 미학적 완성은 서사성에 기반 한 서양 고전발레의 견고한 형식을 원형적 가치로 수용한 결과의 산물이다.”
이처럼 송범은 주변의 유혹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오로지 춤꾼으로서 외길 인생을 살았다. 송범 자신도 “춤은 신앙이었고 생명이었으며, 사랑이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이는 격동의 세월 궁핍한 시대를 통과하면서 자연스럽게 체득된 예술가적 삶의 방식이었을 것이다. 송범이 시대적 불운과 개인적 절망에도 좌초되지 않고 예술적으로 질주할 수 있었던 것은 창조에의 열망이 간절했기 때문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