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연구
전통무용(傳統舞踊), 전통(傳統)춤이란 용어는 언제부터 사용했던 것일까.
이 용어는 ‘전통(傳統)’에 무용 또는 춤을 합한 용어이다. 전통은 집단이나 공동체에서 지난 시대에 이미 이루어져 계통을 이루며 전하여 내려오는 사상·관습·행동 따위의 양식을 말한다. 우리 문화에서 외래에서 수입된 새로운 것에 대응하는 용어로 쓰인다. 전통이란 용어가 서양문물에 대응하는 의미로 사용된 시기는 1920년대 무렵이다. 개화 이후 지속적으로 서양문물을 수입하는 와중에 ‘조선적인 것’에 대해 재인식하게 되었고, 그 즈음 사상과 문화의 지형은 이미 조선적인 것과 수입된 서양 것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춤에 있어서도 서양의 사교춤(social dance), 민속춤(folk dance), 학교무용, 레뷰댄스 등이 이미 수입되어 추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에 이왕직 아악부나 기생들, 재인들, 일반인들이 추던 조선의 춤을 전통춤, 전통무용이라 하지 않고, 조선춤이라 했었다.
1920년대에 논한 전통의 대상은 주로 고적(古蹟)과 유물(遺物)이었으나, 1930년대 들어서자 민족의 서사(敍事)에서 조선 문화의 고유성을 모색하면서 과거의 고전(古典)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1933년 조선어학회가 한글맞춤법통일안을 제정하고, 학계에서 『조선한문학사』 『조선소설사』 『조선연극사』 『조선사회경제사』 등이 간행되었고, 정약용과 박지원의 문집이 출간되었으며, 『고려가사』 『청구영언』 『이조가사』 『원본춘향전』 『조선민요선』 등도 간행되었다. 또 일간지들은 특집으로‘조선 고전문학의 검토' ‘조선문학의 독자성’ ‘고전부흥의 이론과 실제’ ‘서구정신과 동방정취’라는 주제를 다루기도 했다.
1930년대는 고전(古典)부흥운동의 시기였으며,1) 이때 고전무용(古典舞踊)이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최승희 조택원 등의 신무용가들은 고전무용을 참고하여 자신의 무용을 추겠다 했으며, 일간지들은 한성준의 조선음악무용연구회 공연에 대해 ‘고전무용의 호화판’이라는 제목을 뽑아냈다.
물론 이러한 흐름과 활동은 조선총독부의 관할 하에서 진행되었다. 일제는 일찍부터 조선의 문물을 조사하고 있었으니, 식민지 조선에 놓인 철도를 따라 지속적으로 고적(古蹟)을 조사하고 유물이나 민속자료들을 수집했던 것이다.
전통이 좀 더 본격적으로 논의된 시기는 한국전쟁 이후였다. 분단 이후 한국전쟁의 참혹한 상처를 딛고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재건해야 할 상황에서 정신적 원천 내지 원동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일제치하에서 민족적 자존은 땅에 떨어져 있었고, 일본을 대체한 미국이 물질적 정신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했으며, 서구적인 것과 한국적인 것, 보편적인 것과 특수한 것 등의 이분법 속에서 민족 주체성의 확립을 위해 발굴, 탐구되어야 할 대상으로 전통이 다시 거론된 것이다.
특히 문학계에서 195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진행된 전통에 대한 논쟁은 이후 전통문화에 대한 연구ㆍ정책 등에 큰 영향을 미쳤다. 문학계는 분단과 전쟁 이후 일본을 대체한 미국의 영향력 하에서 서구적인 것에 대응할 한국적인 것 즉 민족 주체성을 확립하고, 새로운 문학 전통을 세워야 한다는 절박함에서 전통 논의를 전개했다. 진정한 전통이 있는가라는 의문부터 일제강점기에도 전통은 계승되었다는 주장, 진정한 전통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논란, 전통이 지배 이데올로기에 이용되기도 하고 저항 이데올로기의 한 요소가 되기도 하는 현상 등을 논쟁하였다.2)
그리고 학계 문화계 예술계는 각 영역에 ‘전통’을 붙여 전통문화, 전통예술을 칭하고 설명했다. “고유의 전통문화를 현대화하는 일을 정부에서 힘써야겠다는 것입니다.”3), “전통예술의 정화(精華) 무형문화재 - 일차로 일곱 가지 지정 처음으로 공개시연회 갖기도”4), “自國文化ㆍ外來文化 이혜구 - 민족문화의 성장 내지는 창조에 대한 초조한 마음과 전통문화의 공백화의 가공할 결과를 생각할 때의 전율을 금할 수 없기 때문이다”5), “전통예술의 계승자들 首弟子 (6) 정재무 尹鈴 여사”6), “현대 예술과 미학의 과제 전통예술문화 발굴 앞서야”7) 등에서 알 수 있다. 결국 1950, 60년대에 전통론의 전개과정을 통해 전통이란 용어가 본격적으로 사용되었고, 1963년 문화재보호법의 시행에 있어서 전통은 매우 중요한 기준점이 되었던 것이다.
전통무용이란 용어도 이즈음 사용되기 시작했다.
“전통예술의 정립 (2) 무용 … 전통무용도 예술이라면 그것은 응당 세계의 어느 발레리나나 겪어야 하는 초인적인 훈련과 창작과정을 거쳐야 한다.”8), “내가 겪은 20세기. 관재 성경린씨 (48) … 권번은 동기를 교육하는 기생학교를 두었는데 여기서 시조 가곡 검무 가야금 등을 가르쳐 전통무용도 주로 여기서 전승된 셈입니다.”9)고 했다. 일제강점기까지 조선춤이라 불려졌었고, 1930년대에 고전무용이라는 용어도 등장하여 사용되었으나, 1960년대 중반 이후부터 조선춤도 고전무용도 아닌 전통무용으로 교체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70년대 후반에 ‘전통춤’이라는 용어도 같이 사용되었다. 일본에서 수입된 ‘무용’이라는 외래어가 아니라, 우리의 고유어인‘춤’을 사용하자는 의견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2.
이렇게 1950, 60년대 전통 논의가 진행되고, 전통무용이라는 용어가 등장하는 과정에서 어떤 전통을 계승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1950년대에 문학평론가 최일수(1924~1995)는 향가와 같은 고대의 문학보다는 춘향전과 같은 조선후기의 평민문학의 정신에 집중해야 한다10)고 했다. 조지훈은 “문화가 아무리 복합되어도 그 문화소(文化素)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즉 민족문화의 원본적인 문화소는 외래문화를 섭취하는데 늘 앞장서는 상류계급 혹은 지식인층이 아니라 하층에 짓눌려 있으니, 이 하층의 향토문화를 관류하는 ‘고유소'(固有素)를 발굴 탐색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과제이다”11)라 했다. 즉 한국의 고대로부터 왕조를 거듭하면서 상류계급과 지식인들이 도교, 불교, 유교의 사상체계와 문화들을 수용했고, 외래 사상과 문화들이 제도와 문화를 외형적으로 변형시키더라도, 면면히 유지되었던 본래적이고 고유한 문화요소를 발굴하고 연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조동일은 새롭게 건설해야 할 민족적 근대문학의 직접적인 원천을 두 가지 제기했다. 하나는 일제하에서도 재창조를 계속해 왔으며 아직도 중요한 잠재적인 전통으로 작용하고 있는 중세 평민문학의 전통이고, 또 하나는 식민지적 근대문학의 일부이지만 민족적 입장을 견지하고 항거를 계속해온 민족적 근대문학의 싹이다. 더불어 전통 계승의 방향을 식민지적 잔재를 청산할 것, 반봉건적 잔재를 극복할 것, 새로운 문학창조의 담당층으로 민중에 주목해야 하며, 여기에 민족적 전통을 보존하고 발굴하기 위한 운동이 필요하다는 부록을 달았다.12)
즉 이 시기 전통에 대한 논의에서 지배계급이 아닌 평민의 문학, 봉건사회에서 계급적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던 조선후기의 근대적 잠재력, 식민지배를 극복하고자 했던 근대문학 등에서 계승해야 할 전통의 핵심을 찾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방향성은 전통의 발굴과 연구에 바로 반영되었다. 공연예술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전국의 민속 현장을 찾아다니며, 탈춤, 판소리, 농악, 놀이 등을 조사했다. 그 결과 주로 국문학에서 이 분야들에 대한 연구성과가 1970년대부터 도출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화재제도가 시행된 이후 1964년부터 1969년까지 지정된 중요무형문화재 종목에서도 이러한 방향성을 확인할 수 있다. 1호 종묘제례악ㆍ2호 양주별산대놀이ㆍ3호 남사당놀이ㆍ4호 갓일ㆍ5호 판소리ㆍ6호 통영오광대ㆍ7호 고성오광대ㆍ8호 강강술래ㆍ9호 은산별신제ㆍ10호 나전장(螺鈿匠)ㆍ11호 농악ㆍ12호 진주검무ㆍ13호 강릉단오제ㆍ14호 한산모시짜기ㆍ15호 북청사자놀음ㆍ16호 거문고산조ㆍ17호 봉산탈춤ㆍ18호 동래야류ㆍ19호 선소리산타령ㆍ20호 대금정악ㆍ21호 승전무ㆍ22호 매듭장ㆍ23호 가야금산조및병창ㆍ24호 안동차전놀이ㆍ25호 영산쇠머리대기ㆍ26호 영산줄다리기ㆍ27호 승무ㆍ28호 나주의샛골나이ㆍ29호 서도소리ㆍ제30호 가곡이다. 30종목 중 궁중악무는 3종목(종묘제례악, 대금정악, 가곡)이고, 민속연희는 22종목이며, 민속 공예는 5종목이다. 피지배계급이었던 평민들의 민속예능에 대한 발굴과 연구로 쏠려있음을 확인할 수 있고, 춤 분야에서 탈춤이나 승무 등의 민속춤들이 먼저 지정되었다. 무형문화재제도와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를 통해 가시화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궁중무인 처용무와 학연화대합설무는 1971년에 지정되었다. 궁중악무는 국립국악원을 통해 유지되고 있었으나, 조선조와 같은 규모나 구성을 갖추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조선조 궁중악무의 온전한 복원을 위해서는 문헌의 발굴과 번역, 그리고 전모를 비교할 수 있는 연구성과가 선행되어야 했으나, 그러기에는 연구 역량도 연주 인원도 부족했다. 김천흥(1909~2007)이 1979년부터 국립국악원 정기연주회를 통해 궁중무 복원작업을 진행했지만, 홀기를 토대로 궁중무만 무대에 올렸었다. 궁중의 악무와 문화에 대한 연구가 축적되면서 2000년 즈음부터 연례(宴禮)의 과정 전반을 재현한 연례악(宴禮樂) 공연에서 궁중무가 추어지게 되었다.
3.
그리고 1950, 60년대 전통 논의에서 ‘조선적인 것’을 담지하고 있는 전통의 하한(下限) 시기는 어느 때인가에 대해서도 논의했다. 즉 서양문물이 수입정착되는 과정에서 전통의 단절과 계승 여부에 대한 논란 중에, 과거의 전통이 지속되고, 옛 모습을 갖고 있는 마지막 시기를 정(定)한 논의이다. 이에 대한 의견은 꾸준히 제기되었다. 최남선은 “전통의 연면성(連綿性)이 조선 역사의 최대 특점이며, 조선의 전통이 일본 통치 기간에 끊어졌으나 대체로 조선이 역사적 전통은 조선 민족의 손으로 붙들고 내려왔음이 분명한 사실”13)이라고 했다. 또 문화재위원으로 활동했던 민속학자 임동권은 “우리의 문화전통은 역사의 변천 속에서도 그런대로 전통의 원형을 유지해오다가 1910년 일제의 침략을 계기로 변화를 일으켜 일본적 요소, 서구적 요소의 작용을 받게 되었다. 문화재는 민족의 문화적 소산이기 때문에 전통적이고 순수해야하므로 1910년을 기준으로 해서 그 이전의 것은 넓은 의미의 문화재가 될 수 있고, 그중에서 예술적 가치가 있으며 민족생활의 추이를 알 수 있는 것을 골라 문화재로 지정하고 있다.”14)고 했다. 일제 강점의 시기에 정치적 압력과 제도변화, 그리고 서구의 영향으로 전통이 단절되었다고 보았으며, 대략 1910년 무렵을 조선의 전통이 유지된 하한선으로 설정했던 것이다. 1910년은 대한제국이 사라진 해이며, 일본제국이 새로운 제도로 지배하기 시작한 해이다. 또한 개화 이후 서양 문물이 본격적으로 수입된 시기이기도 하다.
1950, 60년대 전통논의에서 전통의 시기를 이렇게 설정했던 배경을 짐작해보면, 첫째, 1910년 무렵의 변화가 매우 급변하였기에 조선적인 것과 서양적인 것이 단적으로 대비되기 시작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조선시대부터 이어진 전통의 핵심적 요소가 유지되면서 서서히 변화하는 과정을 겪은 것이 아니라, 1910년 무렵부터 서양문물로 개조(改造)될 정도의 변화를 겪었기에 전통과 전통 아닌 것을 대별적으로 구분할 수 있는 시기였던 것이다. 둘째, 1950, 60년대 전통논의의 참여자들은 전통의 요소를 일부 경험하거나 전승된 흔적들을 식별할 수 있는 세대였다. 전통의 요소를 연구하고 복원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셋째, 한국전쟁 후 미국을 중심으로 다양한 서구문물이 도래하였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문화의 정체성에 대한 결핍감이 매우 깊었을 것이다. 한민족의 자기 정체성을 찾고자 했던 절박감이 컸던 것이다.
이러한 논의과정을 통해 20세기 중반 이후 전통의 개념이 형성되었고 사용되었지만, 개화와 일제강점 이후 100년도 훌쩍 넘어 왕정과 농촌공동체의 흔적이 거의 사라진 21세기 현재에 전통의 논의와 전통춤을 둘러싼 제도들은 모순을 노정하고 있다. 전통이란 개념은 사실 시기적 한정을 포함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전적으로 ‘전통(傳統)은 집단이나 공동체에서 지난 시대에 이미 이루어져 계통을 이루며 전하여 내려오는 사상·관습·행동 따위의 양식’15)이다. 전통의 시기는 기준에 따라 상대적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통은 시대에 따라 변화할 수 있는데, 어찌 고정된 형태만 고집하느냐라는 문제제기가 지속되는 것이다.
1950,60년대에 설정한 전통의 개념으로 본다면, 현재 전개되는 전통춤계의 현상들은 이변(異變)이라고 하겠다. 교방춤, 탈춤, 농악춤 등의 민속춤의 경우 20세기에 지속적으로 무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변화(축소 확대 변형)하였다. 민속춤들은 액자무대에 맞추어 연행되었고, 공동체의 축제나 통과의례가 아닌 공연물로서 연행되었으며, 현대사회의 미의식과 정서를 반영하면서 춤의 구성이나 인원이 변화되었다. 변화된 현재 전통춤의 모습이 1910년 기준의 전통으로는 부합할 수 없는 것이다. 즉 전통의 개념 자체와 1960년대 이후 한국문화에서 통용된 전통의 의미가 상충하고 있기 때문에, 전통춤 분야에서 여러 문제들이 제기되고 있으며, 개념과 실제가 다른 상황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엄밀히 한다면 1950, 60년대 전통논의에서 설정한 전통은 근대가 시작되기 전인 조선시대 후반 내지는 19세기의 후반, 그리고 그 이후의 전통으로 수정해야 할 것이다. 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조선 후기의 춤, 그리고 20세기 초 일제강점기의 전통춤, 한국전쟁 후 20세기 후반의 전통춤, 현재 21세기 초반 전통춤의 현상을 별도로 구분하고 정립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과거의 전통춤과 현재의 전통춤이 뒤섞이지 않고, 각각의 특징과 미적 가치를 우리 춤의 역사에 선명하고도 풍성하게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4.
그렇다면 각 시기에 다른 현상을 보여주는 전통춤들을 ‘20세기 초 일제강점기의 전통춤’ ‘한국전쟁후 20세기 후반의 전통춤’ ‘21세기 초반의 전통춤’이라는 용어로 칭할 것인가. 이러한 표현은 일정한 현상을 총괄하는 용어로 사용하기에는 적절치 않은 듯하다. 그리고 전통이라는 용어가 시한(時限)은 없는 개념이지만, ‘전통시대’나 ‘전통문화’라는 용어가 이미 통용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용어들이 서양문물이 수입되기 전 조선시대까지 존재했던 우리의 고유한 문화와 시대를 일반적 전반적으로 일컫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합의 내지는 통용 속에서 이를 대체할 다른 춤 용어를 제시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고 각 시기별로 다른 양상을 보여주는 전통춤들을 하나로 뭉뚱그릴 수도 없다. 왕정과 농촌공동체에서 추어졌던 전통춤의 현상과, 춤의 토대(왕정과 농촌공동체)와 공연 환경이 전혀 달라지면서 21세기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새로운 전통춤의 현상들은 엄밀히 다르므로, 후자의 경우에 새로운 용어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관찰과 문제의식에 의거해 2007년 무렵 무용평론가 김태원은 ‘전통춤 재구성무’ 혹은 ‘신전통무’를 제시했고16), 이후 김영희도 전통춤 무대화의 또 다른 양상으로 ‘신전통춤’을 언급하고 분석한 바 있다.17) 그런데 이 신전통춤의 용어에 대해 전통춤에 신(新)이 붙을 필요가 있는가라는 다른 의견이 있었다. 이러한 이견은 전통춤을 고정불변의 것으로 인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설명했듯이 전통이란 용어에서 시대성은 상대적인 것이며, 실제로 시대의 변화에 따라 전통춤의 양상이 변화했었다. 21세기 초 전개되고 있는 새로운 전통춤이 바로 그 증거인 셈이다. 그러므로 우리 춤의 근간이며 핵심을 담고 있는 전통춤과, 전통춤의 기법으로 새롭게 안무되거나 재구성되는 신전통춤의 영역을 엄정하게 구분해야 할 것이다. 또한 신전통춤을 범주화하므로써 이에 대한 논의를 적극적으로 전개한다면, 새롭게 만들어진 전통춤을 무리하게 전통춤의 영역과 틀에 끼워맞추려는 경향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
1) 김병구, 「고전부흥의 기획과‘조선적인 것’의 형성」, 『민족문학사연구』31호, 민족문학사학회 민족문학사연구소, 2006. 25p 참고.
2) 서영채, 「민족, 주체, 전통 - 1950~60년대 전통 논의의 의미」, 『민족문학사연구』 34호, 민족문학사학회 민족문학사연구소, 2007. 20p 참고.
3) 『동아일보』 1963. 1. 1. 11면
4) 『경향신문』 1965. 1. 18. 5면
5) 『동아일보』 1965. 3. 9. 5면
6) 『동아일보』 1968. 3. 19. 5면
7) 『경향신문』 1971. 5. 20. 5면
8) 『동아일보』 1970. 9. 21. 5면
9) 『경향신문』 1973. 5. 26. 5면
10) 최일수, 「우리문학의 현대적 방향 – 전통의 올바른 계승을 위하여」, 『자유문학』, 1956. 12. 184~185p 참고.
11) 조지훈, 조지훈전집 6권 『한국문화사서설』, 일지사, 1973. 209p.
12) 조동일, 「전통의 퇴화와 계승의 방향」, 『창작과 비평』, 1966. 7. 377~378p 참고.
13) 최남선, 『조선상식문답』, 동명사, 1946. 84p.
14) 임동권, 『전통문화 한국민속문화론』, 집문당, 1983. 53~54p.
15)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검색. https://stdict.korean.go.kr/search/searchView.do?word_no=481527&searchKeywordTo=3
16) 김태원, 「한국 창작춤의 세 단계 변모와 전통재구성무 영역의 필요성」, 『공연과 리뷰』 2007년 가을호(현대미학사, 2007), 16p.
17) 김영희, 「21세기 초입 전통춤의 스타일」, 『춤비평』 26호, 한국춤비평가협회, 2010. 161p.
*이 글은 <공연과리뷰>(2019. 겨울호)에 동시 게재되었다.
김영희
전통춤이론가. 김영희춤연구소 소장. 역사학과 무용학을 전공했고, 근대 기생의 활동을 중심으로 근현대 한국춤의 현상에 관심을 갖고 있다. 『개화기 대중예술의 꽃 기생』, 『전통춤평론집 춤풍경』을 발간했고, 『한국춤통사』를 책임편집하고 공동저술했다. 전통춤의 다양성과 현장성을 중시하며, 검무의 역사성과 다양성을 알리기 위해 ‘검무전(劍舞展)’을 시리즈로 기획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