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연구

제일 사랑스러운 춤, 〈춘앵전〉
서정록_춤연구가

서론

지난 번에 우리는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학자인 박지원이 제시한 이론을 중심으로 당시의 예술 창작 방식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박지원이 제시한 이론은 크게 두가지로 각각 ‘법고창신’과 ‘합변지기’다. 또 창작에서 신비한 부분이라 할 수 있는 창작의 순간을 ‘천기(天機)’라고 부르는 것도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 신비한 창작의 순간 즉 ‘천기’는 그냥 드러나는 것이 아니며, ‘성(誠)’이 전재가 되어야 하다는 것도 아울러 알아보았다. 이제 박지원이 제시한 이 두가지 개념 가운데 먼저 ‘법고창신’이 어떻게 당시 춤 창작에 적용되었는지 〈춘앵전〉을 사례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춘앵전(春鶯轉)〉은 뒤에 살펴볼 〈무산향(舞山香)〉과 함께 다른 궁중 정재 작품들과 비교하여 여러가지로 특이한 점이 많이 있다. 먼저 춤추는 인원이 독특하다. 일반적으로 궁중 정재 작품들은 2명, 4명, 5명, 6명 등등 춤추는 사람이 여러 명 등장한다. 그런데 이 두 작품은 혼자 춤을 추는 독무(獨舞)다. 춤을 추는 무대도 독특하다. 대부분의 정재 작품에는 딱히 정해진 무대가 없는데 반하여, 〈춘앵전〉의 경우 ‘화문석(花文席)’을 바닥에 깔고 춤을 추며, 〈무산향〉의 경우 ‘대모반(玳瑁盤)’이라는 독특한 무대 위에서 춤을 춘다. 왜 이들 작품들은 독무일까? 또 왜 이런 독특한 무대 공간이 〈춘앵전〉과 〈무산향〉에서 사용되었을까?

여기에 〈춘앵전〉의 경우, 춤동작을 칭하는 용어들이 다른 정재 작품들과 차이가 있다. 대부분의 정재 작품들은 춤 동작에 있어, “이수고저(以袖高低)”, “염수족도(斂手足蹈)”, “무진무퇴(舞進舞退)”, “상배이무(相背而舞)”, “상대이무(相對而舞)” 등등과 같이 동작을 직접 설명하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여기서 “이수고저”는 소매 그러니까 팔을 위아래로 움직이는 동작, “염수족도”는 손을 모으고 걷는 동작, “무진무퇴”는 춤을 추며 앞으로 갔다가 다시 뒤로 움직이는 동작, “상배이무”는 춤추는 이들이 서로 등을 대고 춤추는 동작, 그리고 “상대이무”는 서로 마주보고 춤을 추는 동작을 뜻한다.

그런데 〈춘앵전〉의 경우 다른 용어를 사용한다. 예를 들어 “회란(廻鸞)”, “비리(飛履)”, “탑탑고(塔塔高)”, “타원앙장(打鴛鴦場)”, “전화지(轉花持)”, “낙화유수(落花流水)”, “연귀소(燕歸巢)”, “화전태(花前態)” 등등이 있다. 이는 동작을 직접 지시하는 용어가 아니다. 오히려 시(詩)에서 볼 수 있는 단어들이 사용되고 있다. 그렇다면 왜 효명세자는 기존의 정재 작품의 용어와 구별이 되는 시어(詩語)들을 〈춘앵전〉에 사용하였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효명세자가 창작 당시 어떤 생각을 하였는지 알아보아야 한다.


효명세자와 조선 후기 교육 문화

예술 작품을 이해하고 감상하기 위해서는 그 작품의 시대와 사회 배경, 맥락 그리고 작가가 가지고 있는 사고방식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는 예술 작품이 당시의 가치나 사고 방식과도 긴밀한 관련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19세기 프랑스의 문예 비평가인 샤를 오귀스탱 생트뵈브(Charles Augustin Sainte-Beuve, 1804–1869)는 이를 “그 나무에 그 열매(tel arbre, tel fruit)”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이러한 접근은 작품을 이루고 있거나 영향을 주었던 작가의 환경, 사고방식, 시대 상황 등등을 중심으로 작품을 이해해 보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접근에 한계도 있다. 작품 자체에 집중하기 보다는 작품을 둘러싼 외적인 요소에 치우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인과 환경이 같으면 결과도 같은가?”라는 역설이 생기는 경우도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접근은 여전히 작품을 이해하는데 유효하다. 작품이 창작될 당시의 상황과 가치와 사고 방식에 대한 이해가 없이 그저 인상만으로 작품을 감상하는 것은 창작자의 의도와 전혀 무관하게 제멋대로 작품을 해석하고 감상하는 등 자칫 작품에 대한 큰 오해를 불러올 수도 있다.

현재와 비교하여 조선후기는 여러가지 면에서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사고방식 그리고 추구하는 가치가 상당히 다르다. 근대화되고 서구화된 현재 우리는 효명세자를 비롯한 당시 사람들이 공유하였던 지식이나 가치에 익숙하지 않다. 이것에는 여러 요인이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식민지 시대를 거치며 근대화를 우리 스스로 하지 못하고 또 급격한 산업화 가운데 전통과의 단절이 생긴 것이 한 몫 한다. 지금 우리는 ‘한국의 전통’이라고 하는 많은 것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전승하고 있는 것일까? 혹시 겉모습만 알고 있고 그 내용이나 맥락은 잘 알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이유로 그들의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사람들은 어떤 지식이나 사고 그리고 가치를 가지고 있었는지 살펴보는 것은 중요하다. 이를 알아보는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당시 사람들이 받은 교육을 살펴보는 것도 손쉬운 방법 중 하나일 것이다. 특히 〈춘앵전〉같이 창작자가 분명한 경우 그런 것 같다. 효명세자와 같은 사람들은 당시 어떤 교육을 받고 창작 환경은 어떠하였는지 살펴본다면, 그의 정재 작품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오늘날에도 그 작품의 가치를 새롭게 되새길 수도 있겠다.

우리가 조선시대 교육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곳은 서당이다. 서당은 7-8세에 입학하여 15-16세에 공부를 마치는 것이 보통으로 현재 초등학교와 중학교 정도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서당에서는 어떤 것들을 배웠을까? 학생들은 예절과 도덕 교육을 받았으며, 편지 쓰기, 축문 작성 등 생활에서 필요한 글쓰기, 그리고 〈천자문(千字文)〉과 같은 것을 통해 한자의 기초를 익혔다. 그리고 서당은 유교적 가치관을 심어주는 데 중점을 두었다. 이를 위해 〈동몽선습(童蒙先習)〉, 〈명심보감(明心寶鑑)〉, 〈사자소학(四字小學)〉을 시작으로 〈논어(論語)〉, 〈맹자(孟子)〉, 〈대학(大學)〉, 〈중용(中庸)〉 등 사서(四書)와 〈시경(詩經)〉, 〈서경(書經)〉, 〈역경(易經)〉 즉 〈주역(周易)〉과 같은 삼경(三經) 그리고 역사서인 〈사기(史記)〉, 〈통감(通鑑)〉 등을 가르쳤다.

여기에 서당에서는 기초적인 문예 교육도 이루어졌다. 다양한 서체를 익히고 시와 산문을 공부하기 위해 당나라의 유명한 시들을 모은 〈당음정선(唐音精選)〉, 두보(杜甫)의 시를 풀이한 주석서인 〈우주두율(虞註杜律)〉, 주나라부터 송나라까지의 고시(古詩)와 고문(古文) 중 뛰어난 작품들을 모은 〈고문진보(古文眞寶)〉와 같은 서적들이 널리 사용되었다. 이러한 서적들은 오늘날의 교과서와 유사한 역할을 했으며, 당시 서당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이 책들의 내용을 대부분 잘 알고 있었다. 서당 교육은 사대부는 물론 조선 사회의 가치관과 사고방식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효명세자의 책 〈학석집(鶴石集)〉의 서문에서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읽는 여가에 두루 시학에 비쳐서”라는 말은 아마도 효명세자가 이런 책들을 기본적으로 읽고 공부하였다는 의미일 것이다. 효명세자의 정재 작품에는 아마도 이들 서적이 담고 있는 지식과 미적 가치가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조선은 서적을 매우 중시하는 나라였다. 예를 들어 정조(正祖)는 이러한 전통 속에서 학문적 발전을 도모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정조는 외국 문물에 대한 깊은 관심을 바탕으로 외국 서적의 수입과 편찬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청나라 시기에 편찬된 방대한 백과사전인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과 같은 서적을 구입하여 조선의 학문적 기반을 강화했다. 그는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해 학문 연구와 토론을 장려하며, 조선 지식인들이 다양한 서적을 접하고 연구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이러한 노력들은 정조가 학문과 문화의 부흥을 이루고자 했던 강한 의지를 반영하며, 조선 후기 학문과 문화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외국 문물과 서적에 관심이 많았던 북학파 역시 사신으로 베이징에 가게 되면, 서적 목록을 중국 황제에게 제출하여 책을 구하는 것이 중요한 목적 중 하나였다. 예를 들어, 북학파에 큰 영향을 준 김창업(金昌業, 1658–1821)은 1713년 베이징에 갔을 때 강희제(康熙帝, 재위 1661–1722)에게서 〈연감유함(淵鑑類函)〉, 〈전당시(全唐詩)〉, 〈패문운부(佩文韻府)〉, 〈고문연감(古文淵鑑)〉 등 모두 370권의 책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 서적들은 왕실 도서관이자 학술 연구 기관인 규장각에 소장된다. 또 이들은 베이징의 서점거리라 할 수 있는 유리창(琉璃廠)에 방문하는 것도 주요 행사 중 하나였다. 이곳에서 청나라 문인들과 교류하며 다양한 서적과 자료를 수집하고, 이를 조선에 소개함으로써 조선 지식인들의 학문적 발전을 촉진했다.

또 이렇게 축적된 지식을 바탕으로 당시 여러 종류의 백과사전식 저서들이 편찬되었다. 이러한 종류의 서적을 ‘유서(類書)’라고 한다. 대표적인 서적으로 〈지봉유설(芝峰類說)〉,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 〈성호사설(星湖僿說)〉,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와 같은 것을 꼽을 수 있다. 그래서 조선 후기에 북학파를 중심으로 이렇게 폭넓은 지식을 추구하는 것 이른바 ‘박학(博學)’이 크게 유행하였다.

이들 유서들은 사대부는 물론 중인이나 양인 계층 사이에도 영향을 주어서 학문, 문화, 예술에 대중화에 기여했다. 이를 “여항(閭巷) 문화”라고 한다. 이런 맥락에서 북학파는 계몽주의의 시발이 되었던 18세기 프랑스의 백과전서파(Les Encyclopédistes)와 비슷한 점이 많다. 아마도 당시 북학파와 깊은 연관이 있었던 효명세자 역시 ‘유서(類書)’와 중국에서 수입된 서적들에 관심이 많았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이런 시대 배경을 고려하면서 효명세자가 창작한 〈춘앵전〉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순조무자진작의궤〉의 〈춘앵전〉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춘앵전〉은 다른 정재 작품들과 차별화된 여러 요소를 지니고 있다. 우선 춤을 추는 자리에 화문석을 사용한다는 점은 매우 독특하다. 또 춤사위 용어들에 시어(詩語)가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독특한 점에도 불구하고, 왜 〈춘앵전〉에는 이런 특징이 있는지에 대한 연구는 현재까지 쉽게 찾아볼 수 없다. 다만 화문석 사용에 대해 한정된 공간에서 섬세한 춤 동작을 선보인다는 식의 인상에 근거한 해석 정도가 있을 뿐이다. 이것은 작품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 없이 단순히 인상만으로 감상하는 사례일 것이다. 예술이라는 것은 열려 있는 개념이기 때문에, 이런 식의 감상이 전혀 틀린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방식은 창작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작품을 해석할 위험이 있으며, 자칫 작품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그래서 먼저 "〈춘앵전〉에는 왜 화문석이 사용되나?"라는 질문을 가지고 〈춘앵전〉에 대해 살펴보겠다. 그 다음으로 춤사위에 시어가 사용된 이유에 대해도 차례로 알아보도록 하겠다.

〈춘앵전〉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가장 먼저 살펴볼 기록은 〈순조무자진작의궤(純祖戊子進爵儀軌)〉다. 이 문서는 1828년 6월 창덕궁 연경당(演慶堂)에서 거행되었던 진작례에 관한 국가 공식 기록이다. 효명세자는 〈춘앵전〉을 비롯한 자신이 창작한 여러 춤을 이 진작례에서 선보였다. 그러니까 이 기록은 이들 정재 작품들이 창작될 당시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순조무자진작의궤〉에 〈춘앵전〉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예제(睿製) 〈춘앵전(春鶯囀)〉 〈연감유함(淵鑑類函)〉에, "당 고종(唐高宗)이 꾀꼬리 소리를 듣고 악공(樂工) 백명달(白明達)에게 명하여 이를 묘사하게 하였다."라고 하였다. 자리를 설치하고, 무동 1인이 자리 위에 서서 진퇴 선전(進退旋轉)하면서 자리 위를 떠나지 않고 춤춘다. (睿製春鶯囀 淵鑑類函 唐高宗聞鶯聲 命樂工白明達寫之. 設單席 舞童一人 立於席上 進退旋轉 不離席上而舞).”

여기서 “예제”는 효명세자가 직접 창작하였다는 의미한다. 이 기록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첫번째 부분에서 〈춘앵전〉의 창작배경이 된 고사의 출처가 청나라 유서(類書) 중 하나인 〈연감유함〉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기록을 보면 당 고종과 악공 백명달의 〈춘 잉 쯔완〉 즉 〈춘앵전〉 창작 고사가 효명세자가 만든 〈춘앵전〉의 시작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연감유함〉은 중국 청나라 1710년 장영(張英)을 비롯하여 130여 명의 학자가 펴낸 일종의 백과사전이다. 이 서적은 여러 고사(故事)를 분류하여 설명한 것으로 주로 글이나 시를 짓는 데에 도움을 주는데 목적한 것이다. 그리고 이 서적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1713년 김창업이 사신으로 베이징에 갔을 때 강희제에서 받아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었다. 효명세자는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던 것을 접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 역시 당시 북학파와 마찬가지로 ‘박학(博學)’에 관심이 많았던 것이다.

화문석 사용과 관련하여서 주목할 부분은 두 번째 문장이다. 여기서 돗자리 즉 ‘석(席)’에 관한 그 유래에 대한 설명은 없고, “돗자리를 설치하고, 무동(舞童) 1인이 자리 위에 서서 진퇴 선전(進退旋轉)하면서 자리 위를 떠나지 않고 춤춘다.”고 언급하며, 돗자리가 사용되는 이유만을 밝히고 있다. 바로 돗자리는 춤추는 공간을 한정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춤추는 공간을 한정하는 생각을 효명세자는 어떻게 생각한 것일까? 아쉽게도 〈순조무자진작의궤〉의 기록에는 이 이유에 대해서 언급이 없으며 또 참고한 문헌도 밝히지 않고 있다. 그러면 참고 문헌이 없다는 것이 과연 효명세자의 순전한 창작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순조무자진작의궤〉의 기록을 살펴보면, 효명세자가 창작한 상당수의 정재(呈才) 작품들이 당나라 혹은 송나라의 춤 관련 고사를 창작동기로 밝히고 있다. 이들 작품들 가운데 심지어는 한국의 춤이라 할 수 있는 〈고구려(高句麗)〉의 경우도 참고로 사용된 문헌은 정조가 수입한 중국의 백과전서인 〈고금도서집성〉이다. 또 이 춤 가운데 부르는 노래 즉 창사(唱詞)도 당나라 시인인 이백(李白)의 시를 참조하고 있다.

이런 사실을 고려해 보면, 이 당시 효명세자가 〈춘앵전〉을 비롯한 여러 정재를 창작할 때, 고전 속에 등장하는 작품 특히 중국에서 문화가 가장 융성하였던 당나라 혹은 송나라의 작품을 조선에서 새롭게 재현해 보려는 시도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 볼 수 있다. 〈춘앵전〉의 춤추는 공간 즉 화문석도 효명세자가 아무 근거 없이 그냥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혹시 당나라 춤의 특징이 되는 어떤 것을 가지고 새롭게 창작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확실히 〈춘앵전〉은 앞서 살펴본 〈순조무자진작의궤〉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당나라 춤과 관련이 있다. 이러한 사실에서 당나라의 춤추는 공간은 어떠하였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무연(舞筵)과 당나라의 춤

당나라 시대 춤추는 공간에 대해서 우선 당시의 기록과 그림들을 통해서 그 형태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먼저 당시의 기록에서 나타나는 당나라 시대 춤추는 공간에 대한 것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당나라 시대 춤 공간을 언급하고 있는 기록들의 상당수는 시(詩) 작품들이다. 대표적인 예로 두보(杜甫)의 작품인 〈성서파범주(城西陂泛舟)〉를 들 수 있다. 이 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푸른 눈썹 흰 치아의 미인들 다락배에 있고 靑蛾皓齒在樓船
피리와 단소 소리 먼 하늘에 구슬프다. 橫笛短簫悲遠天
봄바람에 상아 돛대 움직임을 맡겨두고 春風自信牙檣動
늦은 햇살에 천천히 비단 닻줄 끌리는 것을 바라본다. 遲日徐看錦纜牽
물고기가 잔물결 뿜어내며 부채를 흔들면서 노래 부르고 魚吹細浪搖歌扇
제비가 차고 날아가니 무연 위에 꽃이 떨어지는구나. 燕蹴飛花落舞筵
작은 배 노 젓기를 아니하면 不有小舟能蕩槳
수 백 항아리에 샘처럼 많은 술을 어떻게 보낼 수 있으리. 百壺那送酒如泉.

두보의 〈성서파범주〉는 서당에서 교과서처럼 사용하였던 〈우주두율〉에도 수록되어 있다. 즉 당시 서당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이 시를 알고 또 암송하였다. 이 시에서 “물고기가 잔물결 뿜어내며 부채를 흔들면서 노래 부르고(魚吹細浪搖歌扇), 제비가 차고 날아가니 무연 위에 꽃이 떨어지는구나(燕蹴飛花落舞筵).”라는 부분에 주목하여 보자. 이 구절에서 먼저 “물고기(魚)”는 노래 부르는 사람 즉 가객(歌客)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가객(歌客)이 손에 부채를 흔들며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을 물고기가 잔물결 뿜어내는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다음에 등장하는 “제비(燕)”는 춤추는 사람 즉 무희(舞姬)를 의미하는데, 이 구절에서 당나라 시대에 춤추는 자리를 “무연(舞筵)”이라고 부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연’과 관련하여서는 〈전당시(全唐詩 卷454)〉에 수록되어 있는 백거이(白居易)의 시 〈청전장이십운(靑氈帳二十韻)〉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시(詩)에 “옆에 설치된 낮은 노래 자리, 평평하게 펴 놓은 작은 춤 자리(側置低歌座 平鋪小舞筵)”라는 구절에서도 역시 “무연”이란 용어가 보인다. 또 다른 백거이의 시 가운데 유명한 〈자지기(柘枝妓)〉에서도 이와 유사한 것을 찾아볼 수 있다. 이 시에는 “펼쳐진 비단 자리 순식간에 접히더니(平鋪一合錦筵開), 연이어 세 번의 북 장단 빨라지네(連擊三聲畫鼓催)”라는 구절이 있는데 여기서는 “금연(錦筵)” 즉 “비단 자리”라는 용어가 보인다. 여기서 “금연(錦筵)”은 “무연(舞筵)”의 또 다른 명칭이다. 이러한 당나라 시대 시(詩)에서 당시 춤을 출 때 ‘무연’을 널리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榆林窟第25窟 ⓒ敦煌硏究院 홈페이지



莫高窟第112窟 ⓒ敦煌硏究院 홈페이지



그렇다면, 당시 그림은 ‘무연’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무연’과 관련하여 당나라의 춤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로 〈그림 1〉과 〈그림 2〉과 같이 둔황(敦煌) 석굴의 벽화들을 들 수 있다. 이 그림들에 의하면, ‘무연’은 당나라 시대 그림들 보이는 춤추는 사람들 밑에 깔려 있는 카펫(Carpet)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연’ 그러니까 카펫은 원산지라 할 수 있는 페르시아(Persia, 波斯國)나 아라비아의 사라센(Saracen, 大食國)에서 전래된 사실이 〈구당서(舊唐書 卷198)〉의 기록에 있다. 당 현종(玄宗)때 10명의 사신이 중국에 방문하여 바친 선물 가운데 무연이 있다. 또 이들 지역과 더불어 무연은 중앙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을 통해서도 중국에 전래되었다.



莫高窟第231窟 ⓒ敦煌硏究院 홈페이지



莫高窟第130窟 ⓒ敦煌硏究院 홈페이지



카펫은, 본래 용도가 그러하듯이, 중국에서도 단순히 춤만 추기 위한 용도는 아니었다. 다음의 그림은 이와 같은 사실을 잘 보여준다. 당나라 시대 그림인 〈그림 3〉 와 〈그림 4〉 에서는 춤을 추고 있는 장면이 아님에도 ‘무연’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중국에서는, 앞서 이야기한 〈구당서〉의 기록에 보이는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처음 카펫이 유입될 때, “춤을 추는 자리” 즉 “무연(舞筵)”으로 소개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카펫 즉 ‘무연’이 실크로드를 통해 아라비아와 페르시아 그리고 중앙아시아에서 중국에 소개될 때에 물건만 유입된 것은 아니다. 카펫과 함께 그 위에서 추는 춤들도 함께 소개가 되었다. 그리고 이런 춤들은 당시 중국은 물론 한국에서도 크게 인기를 끌었다. 이러한 춤의 대표적인 예로 중앙아시아에 위치한 강국(康國) 오늘날 우즈베키스탄(Oʻzbekiston)에 위치한 사마르칸트(Самарқанд)에서 유래한 〈호선무(胡旋舞)〉를 들 수 있다. 〈전당시(全唐詩 卷419)〉에 실려 있는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의 유명한 시 〈호선녀(胡旋女)〉는 중앙아시아의 춤이 중국 당대(唐代) 크게 유행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이 시를 보면 이 춤을 당나라 사람들이 사마르칸트에서 온 무희보다 오히려 더 잘 춘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이 당시 〈호선무〉를 가장 잘 추는 인물로 안록산(安綠絲)과 양귀비(楊貴妃)를 들고 있다.

중앙아시아의 문화는 당나라에서 크게 유행하며, 동아시아의 종교와 생활은 물론 춤 문화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런 사실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원진(元稹, 779-831)의 〈법곡(法曲)〉 이라는 작품이 있다. 이 작품 역시 〈전당시(全唐詩 卷419)〉에 수록되어 있다. 이 시는 중국 고유의 악(樂)과 풍습이 사리지고 호악(胡樂)과 호풍(胡風)만을 따르는 당나라 사회를 한탄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시의 “여자는 서역 사람 부인이 되기 위하여 서역 화장을 배우고(女爲胡婦學胡妝), 가무하는 여인은 서역 음악과 춤을 열심히 익히네(伎進胡音務胡樂). 서역의 음악 서역의 기마술 그리고 서역의 복장(胡音胡騎與胡裝), 오십 년 이래로 다투어 요란하네(五十年來競紛泊)”라는 구절은 당시 당나라에서 서역의 풍습이 얼마나 인기가 있었고 또 영향이 대단하였는지 잘 보여준다. 그런데 이 시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이 구절 바로 다음에 “〈춘앵전〉도 그치니 오래도록 쓸쓸하네(春鶯囀罷長蕭索).”라는 대목이다. 이 시는 〈춘앵전〉이 서역에서의 유래하여 중국에서 크게 유행하였던 호악(胡樂)의 대명사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화려주췌수(畫麗珠萃秀)〉 공손대랑(公孫大娘) 부분 ⓒ타이완 고궁박물관 홈페이지



‘무연’은 당나라에서 크게 유행하여 나중에 가서는 한족(漢族)의 춤에도 영향을 주었다. 예를 들어 〈그림 5〉는 청(淸)대 유명한 그림책인 〈화려주췌수(畫麗珠萃秀)〉에 수록된 당나라 시대 검무(劍舞)로 유명했던 무희(舞姬)인 공손대랑(公孫大娘) 부분이다. 이 그림은 검무(劍舞)가 서역 전래 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당나라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이유로 춤 추는 자리에 ‘무연’이 놓여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당나라 시대 검무(劍舞)는 “검기혼탈(劍器渾脫)”이라 부르고 있는데 여기서 ‘혼탈(渾脫)’이라는 단어에서 본래부터 전승되어 오던 중국의 검무 역시 당시 중앙아시아 춤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혼탈(渾脫)’이라는 춤 형식은 인도의 산크란티(Sankrānti) 의식과 관련이 있는데, 이것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 기회로 다루기로 하겠다. 여기서 눈 여겨 볼 점은 ‘무연’은 후대에 당나라 춤의 상징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림 1〉, 〈그림 2〉는 당나라 시대의 그림으로, 춤을 추는 자리에 ‘무연’이 깔려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그림들은 모두 불교와 관련이 깊다. 이 그림들이 그려진 둔황 석굴이 불교와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또 ‘무연’ 즉 카펫은 아라비아와 페르시아에서 유래하여 중앙아시아를 거쳐 들어온 것이다. 당시 중앙아시아에서 불교가 번성했던 사실을 감안하면, ‘무연’의 도입과 확산이 불교 문화의 교류와 함께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순조무자진작의궤〉에서 언급하고 있는 당나라의 악사(樂師) 백명달(白明達)에 간한 기록도 흥미롭다. 그에 관한 기록은 〈순조무자진작의궤〉에서 인용하고 있는 〈연감유함〉 이외에도 여러 역사 문헌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인 역사 문헌으로 〈수서(隋書 卷15)〉 와 〈당회요(唐會要 卷34)〉과 같은 기록을 들 수 있다. 백명달의 본명은 “아콰리 만다(Aqqari Manda)”다.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본래 한족(漢族) 출신이 아니고 구자국(龜玆國) 출신이다. 구자국은 타클라마칸(Taklamakan) 사막의 북쪽 가장자리 무자트(Muzart) 강의 남쪽에 위치한 중앙아시아의 대표적인 고대 불교국가다. 그러므로, 〈춘앵전〉이라는 당나라의 춤은 본래 구자국(龜玆國)의 춤 즉 구자기(龜玆技)와 연관이 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백거이의 시 〈호선녀〉에 등장하는 ‘무연’과 관련이 깊은 〈호선무〉와 같은 많은 춤들이 당나라에서 유행하였다. 이렇게 중앙아시아에서 유입된 혹은 영향을 받은 춤과 음악을 “호악(胡樂)”이라 불렀다. 그리고 원진의 〈법곡〉에서도 알 수 있듯이, 〈춘앵전〉은 “호악(胡樂)” 가운데 가장 대표로 꼽히는 작품이었다. 아마도 효명세자가 〈춘앵전〉을 창작할 때, 이와 같은 내용을 다양한 문헌을 통해, 중앙아시아에서 유래한 ‘무연’에 대해 알고 있었고 이를 창작에 고려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법고창신과 〈춘앵전〉 창작: 몸으로 쓰는 시(詩)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있다. 만일 효명세자가 창작한 〈춘앵전〉에서 중앙아시아에서 유래한 당나라의 ‘무연’을 재현하고자 하였다면, 왜 양털로 제작된 카펫이 아니라 대나무로 제작된 화문석을 사용한 것일까? 이에 대해서 몇 가지 가능성을 가지고 생각해볼 수 있다.

첫번째는 효명세자가 '무연'을 고증할 만한 그림 자료를 보지 못하였고, 다만 문자로 기록된 자료에서 '무연'이라는 단어를 보고 이를 화문석으로 상정했을 가능성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혹시 '무연(舞筵)'에서 '연(筵)'이라는 글자의 부수가 '대나무(竹)'인 점에 착안하여, 이를 토대로 '무연'을 대나무로 만든 자리인 화문석인 것으로 이해하였을 수 있다. 게다가 중국 후한(後漢) 시대에 허신(許愼)이 편찬한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자전(字典)인 〈설문해자(說文解字)〉는 "’연’은 대나무 자리이다(筵竹席也)"라 정의하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자전의 기록을 참고하여 효명세자가 화문석을 선택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지만 이 가능성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설득력이 약하다. 앞서 언급한 ‘무연’이라는 단어가 처음 보이는 〈구당서(舊唐書 卷198)〉의 기록에는 ‘무연’이 털로 만든 것이라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구당서〉는 중국의 정사(正史) 중 하나로 역시 왕실 도서관인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었다. 무엇보다도 〈순조무자진작의궤〉에서 역시 효명세자가 창작한 작품인 〈보상무(寶相舞)〉 부분에 〈구당서〉를 인용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러므로 효명세자도 〈구당서〉의 이 기록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즉 효명세자도 당나라의 ‘무연’이 양털로 만든 카펫임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한국에는 카펫이 없었을까? 한국에도 카펫 제작 기술이 조선 전기까지는 존재하였다. 이를 ‘모담(毛毯)’이라고 불렀으며, 일본에서는 이것을 “조선철(朝鮮綴)”이라고 하였다. ‘모담’ 역시 카펫에서 유래한 것으로 털실과 면실을 엮어서 짠 것으로 바닥에 까는데 용도였다. '모담’은 조선 중기까지 널리 사용되었으나, 17세기 이후부터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된다. 많은 학자들은 그 원인에 대해 아마도 온돌 문화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기원전 4세기부터 한국에서 사용된 온돌은 조선 중기까지 대략 서민 문화로 인식하였다. 그런데 상류층은 주로 화로를 사용하였기에 온돌을 잘 사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17세기 전지구적으로 소빙하기가 도래하면서, 난방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온돌은 본격적으로 상류층에도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모담’의 제작 기술이 점점 사라지게 되었다. 효명세자 시대에는 아마도 ‘모담’을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효명세자가 ‘무연’이 카펫이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할지라도 이를 제작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 대신 당시 조선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화문석을 사용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현실적인 이유에 더하여 효명세자는 박지원이 주장한 ‘법고창신’을 〈춘앵전〉 창작에 적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중국의 고사를 조선의 현실에 맞게 변용하여 새롭고 독창적인 작품을 창조하였다. 지난번 살펴본 김홍도의 〈삼공불환도(三公不換圖)〉와 비슷한 경우라 하겠다.

효명세자는 단순히 당나라의 〈춘앵전〉을 모방하고 모작한 것이 아니다. 당 고종과 백명달의 고사에서 그의 구상이 시작되기는 하였지만, 그가 창작한 〈춘앵전〉은 당나라의 〈춘앵전〉과는 전혀 다른 작품이다. 이런 사실은 당장 일본 궁중 춤인 〈슌노덴(春鶯囀)〉과 비교하여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슌노덴〉 즉 일본의 〈춘앵전〉은 당나라에서 고대 일본 궁중에 전래된 춤이다. 당나라의 춤이 현재까지 일본 궁중에서 전승되어 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춤을 효명세자가 창작한 〈춘앵전〉과 비교하여 보면, 여러가지 면에서 다르다. 우선 춤추는 인원부터가 다르다. 일본의 〈춘앵전〉은 6명 또는 4명의 무인(舞人)이 춤을 춘다. 여기에 반주 음악과 의상도 전혀 다르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춤사위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효명세자가 창작한 〈춘앵전〉의 춤사위 명칭은 매우 시적(詩的)이다. 이 춤사위 가운데 대표적인 몇몇의 명칭과 의미 그리고 실재 춤 동작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와 같은 춤사위 용어는 다른 한국 춤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춘앵전〉만의 특징이다. 일본의 〈춘앵전〉과 비교하여 볼 때 그 춤사위도 매우 다르지만, 일본의 〈춘앵전〉 역시 춤사위에 이와 같은 시적 용어는 사용하지 않는다. 또 당나라의 〈춘앵전〉 춤과 그 고사는 시와는 직접 관계가 없다.

이런 점에서 효명세자가 창작한 〈춘앵전〉은 시(詩)를 춤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춘앵전〉이 가지고 있는 독창성이며, 바로 효명세자가 창안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춘앵전〉은 춤 동작 하나 하나가 시구절이라 말 할 수 있다. 지난 번에 살펴본 바와 같이 효명세자가 자신의 문집인 〈학석집〉 서문에서 그가 시와 시 창작에 관한 지대한 관심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그는 당나라와 송나라의 시들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의 독창적인 면모는 〈춘앵전〉의 춤사위 용어에서 엿볼 수 있듯이 그는 춤을 시(詩)의 궁극의 형태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러한 것은 〈모시(毛詩)〉 서문의 첫 구절에서 당장 찾아볼 수 있다.

“시라는 것은 뜻이 가는 바이다. 마음에 있으면 뜻이 되고, 말로 나오면 시가 된다. 감정이 마음에서 움직여 말로 나타나고, 말로도 부족하여 탄식하며, 탄식으로 부족하여 길게 노래하고, 길게 노래하는 것으로 부족하여 자기도 모르게 손이 춤추고 발을 구른다(詩者志之所之也 在心爲志 發言爲詩. 情動於中而形於言 言之不足 故嗟歎之 嗟歎之不足 故永歌之 永歌之不足 不知手之舞之足之蹈之也).”

이 구절은 시(詩)가 어떻게 춤으로 연결되는지 설명하고 있다. 마음에서 시(詩)로 그리고 시(詩)가 음악을 거쳐 궁극에 이르면 춤이 된다는 것이다. 아마도 효명세자는 저 유명한 〈모시대서(毛詩大序)〉의 이 구절을 적극적으로 재해석하여 창작한 것이 〈춘앵전〉이 아닐까 추정해 볼 수 있다. 〈춘앵전〉의 춤사위들은 하나하나가 모두 시 구절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효명세자의 〈춘앵전〉은 몸으로 쓰는 시(詩)”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현대 무용의 창시자 중 하나인 이사도라 덩컨(Isadora Duncan, 1878–1927)이 자신의 춤을 시(詩)라고 묘사한 것과 비슷하다. 또 최승희(1911–1969)와 조택원(1907–1976)의 스승인 이시이 바쿠(石井 漠, 1887–1962)가 자신의 춤을 “무용시(舞踊詩)”라 명명하였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이러한 점에서 〈춘앵전〉은 현대무용(Modern Dance)의 창작 방식과 비견 될 수 있다.

또 효명세자가 시를 춤으로 표현한 것은 마치 칸딘스키(Kandinsky)가 음악을 그림으로 표현하면서 시각 예술에서 ‘추상화(Abstract Art)’라는 새로운 개념을 창안한 것과도 유사하다. 칸딘스키는 이와 같은 공감각 개념을 독일의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Wilhelm Richard Wagner, 1813–1883)의 오페라 〈로엔그린(Lohengrin, 1850)〉을 감상하다 체득한 것이다. 칸딘스키의 이런 경험은 사실 바그너가 그의 여러 작품에서 의도한 것으로 바그너는 예술들 간에 통합을 주장하였다. 그는 예술 장르 하나하나를 따로 떼어놓으면 그 표현력이 쇠퇴하며, “총체예술(Gesamtkunstwerk)”로 합쳐져야 비로소 참된 완성에 이른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런 개념을 그의 오페라 작품에 투영하였다. 바그너의 “총체예술” 개념은 〈예기집해(禮記集解)〉의 시와 음악과 춤의 관계에 관한 구절과 유사한 점이 있다. 그 구절은 다음과 같다.

“시는 그 뜻을 말하는 것이다(詩言其志也). 노래는 그 소리를 읊는 것이다(歌詠其聲也). 춤은 그 모양을 움직이는 것이다(舞動其容也). 시, 노래, 춤을 하나로 합한 것이 악이다(詩也歌也舞也一者合而爲樂).”

이 구절은 시와 음악과 춤을 합한 것이 “악(樂)”이라고 하면서, 시와 음악과 춤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고 연결되어 있으며 이는 모두 악(樂)에 속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바그너의 “총체예술(Gesamtkunstwerk)”은 동아시아의 “악(樂)”과 통하는 부분이 있다.


결론

효명세자는 〈춘앵전〉을 창작할 때 중국의 〈춘앵전〉 고사를 참조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중국의 〈춘앵전〉을 똑같이 복원하려 하거나 그대로 모방하려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정재 작품들을 근거 없이 순전히 상상과 자의(自意)로만 창작한 것도 아니다. 고전 문헌들에 충실히 근거하되 이를 토대로 적극적인 재해석을 통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그는 당나라의 전형적인 춤 자리인 ‘무연(舞筵)’을 한국적으로 해석하여 카펫 대신에 한국의 화문석을 사용하였다. 여기에 중국의 〈춘앵전〉에서는 볼 수 없는 시의 창작 기법을 춤 안무에 적용하여 전혀 새로운 춤 형태를 만들어 냈다. 그가 아마도 〈모시대서〉의 구절을 자기 나름대로 재해석하여 춤이 곧 시가 되는 방식을 고안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이전에 없던 형태의 춤 창작 방식이다. 이런 점에서 그림이 음악이 되는 칸딘스키의 추상화 개념과 유사한 면이 있다. 〈춘앵전〉의 창작은 바로 예전 것을 예술가의 입장에서 새롭게 재해석하여 옛것과 다른 독창적인 것을 만들어 내는 ‘법고창신’의 정신이 담겨있다.

이런 점에서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법고창신’은 예술에서 외국 작품이나 고전의 줄거리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세부 사항을 해당 문화권의 풍습, 시대 배경, 언어 등에 맞게 바꾸어 고치는 번안(飜案)과는 분명 차이가 있다. ‘법고창신’은 고전을 기반으로 하되, 이전에는 없던 전혀 다른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창작 방식은 현재 새로운 한국 춤과 더 나아가 한국 예술 창작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춘앵전〉은 지금까지 다룬 내용 이외에도 여전히 살펴볼 것이 많이 있다. 〈춘앵전〉에서 부르는 창사(唱詞)와 의상 같은 것이 그것이다. 창사를 살펴보면 그 가사가 서정적이면서도 또 한편으로 〈춘앵전〉이 초연된 진작례(進爵禮)의 주인공인 효명세자의 어머니 순원왕후(純元王后)의 만수무강(萬壽無疆)을 기원하는 내용이 함께 담겨있다. 다만 지면 관계상 모든 요소를 자세히 다루지 못한 점이 아쉽다. 〈춘앵전〉은 그 깊이와 아름다움 덕분에 한국 전통 예술의 높은 수준을 보여주는 작품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그래서 효명세자 스스로 〈춘앵전〉을 “무중최애(舞中最愛)” 즉 “춤 중에 제일 사랑스러운 춤”이라고 하였다.

서정록

현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이론과 교수. 태국 Mahidol 대학교 국제대학 강사, 국립대만대학교 초빙교수, 런던대학교 SOAS 연구원을 역임하였다. 한국춤을 비롯한 동북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춤문화 역사 연구를 하고 있다.​ ​​​

2026. 6.
*춤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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