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작은 크기의 팸플릿 첫장을 펼치니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이 큰 활자로 박혀있다. 노자의 《도덕경》 첫 구절이다. “도가 말해질 수 있으면 영원한 도가 아니며, 이름이 이름 지어질 수 있으면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로 해석하는. 여기서 진영아는 도는 ‘우주만물의 근원이자 어떤 관념과 이미지의 가장 바탕으로, 그 어떤 언어로도 규정될 수 없는 깨달음의 세계’로 인식, 〈이루 말할 수 없는...〉(24년11월15일, 부산시민공원 백산홀)에서 춤사유로 발전시킨다. 더하여 ‘생각과 관념을 내려놓고 언어화의 순간에 잠식된 비언어의 은밀한 감각과 존재들을 인식하고 몸으로 체화하는 춤의 사유를 그리’는 작업이라 의도를 밝히고 있다.
노자의 언어관, 말하자면 언어가 존재를 표현할 경우 간섭하여 왜곡한다는, 즉 이름짓기가 존재의 파악을 가로막는다는 데 이론적 틀을 두고 춤사유의 장을 펼친 것이다.
작품제목을 보자. 〈이루 말할 수 없는...〉.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에서 두 번째 도道 ‘말하다’라는 뜻의 동사에 부사 ‘이루’를 붙인 것이라 짐작되는 이 형용사는 표현이 불가능한 진정함을 의미한다. 이는 알아도 말하지 않는다는 장자의 ‘지이불언(知而不言)’가 닿아있다.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언어라는 소통의 차원을 벗어나 침묵을 요구함으로써 오히려 그 의미가 확장되기도 하는데, 그렇다면 진영아가 말하는 춤의식의 틀을 허물고 춘다는 춤은 어떤 형태로 춤이 확장될까. 애써 꾸며추지 않는, 추지 않건만 저절로 춤이 일어나는 춤?
여기서 역설은 표현이 불가능함을 강조한 노자의 말이 언어에 의해서 설명될 수밖에 없듯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춤 작업 또한 마찬가지라는 것. 춤이란 그것이 내면이든, 현상이든 어떤 부분만을 포착하는 불완전한 인식과 추고자하는(표현) 욕구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이와 달리 진영아는 감정에 의해 사물의 좋고 나쁨을 분별이 아니라 생각과 관념을 내려놓고 추는, 말하자면 현상계의 사물에 대한 지적인 의식지향의 춤의 사유를 그려내는 춤의 확장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가능할까 모르겠다.
진영아 〈이루 말할 수 없는...〉 ⓒRandom Art Project 작은방 |
〈이루 말할 수 없는...〉 춤의 사유는 (타말파)치유프로그램으로 훌쩍 건너뛰며 형태를 얻는다. ‘밤의 여행’이라 이름한, ‘싱잉볼의 소리와 파장을 이용한 강제공명을 통하여 몸과 마음을 이완시킴으로써 견고한 의식의 틀을 허무’는 내면으로의 여행을 타말파 치유프로그램을 적용, 춤을 풀어낸다.
사람의 목소리, 싱잉볼, 거문고, 해금 등이 내는 소리를 체화, 몸의 명상으로 발견-직면-해소-성장-치유의 단계로 풀어내는 작업이다. 진영아의 말, ‘최초의 순간을 만나 배운말 하나 없는 상태에서 나를 만나는’ 창의적 경험을(으로) 하게 될 것이다,는 마치 나(진영아)가 그 경험으로 ‘이끌 것이다’로 들린다. 그리고 덧붙인다. 개개인의 ‘마음챙김’이라는 단어에 이어 ‘알아차림’, ‘자기 연민’, ‘수용’으로 새로운 에너지가 생기고(일어날 것이고) 그것은 곧 노자가 말하는 물과 같다는 안내 말이 뒤따르며 춤이 시작된다.
진영아 〈이루 말할 수 없는...〉 ⓒRandom Art Project 작은방 |
흰색 모래가 원의 형태로 깔려있는 평면마루 무대. 오른 쪽, 흰색구조물로 단을 높인 곳에 검정색 의상의 싱잉볼과 해금, 거문고 연주자가 앉아있고, 사운드퍼포먼스가 서 있다. 흰색의 구조물과 모래, 검정색 의상의 무용수들. 내면으로의 여행이 시작되는 흰색모래와 마루바닥의 경계를 나누는 모래알이 그려내는 선의 대비는 사실과 관념, 세계의 구획처럼 보인다.
무용수들이 모래주위를 돌며 서성인다. 한참이 지나도록 모래안으로 아무도 발을 들여놓지 않는다. 싱잉볼소리가 신호인 듯, 하나 둘 발을 들여놓으며 움직임이 시작된다.
안선희가 발을 끌며 이동하며 모래에 흔적을 낸다. 상처를 헤집고 들여다봄, 이어 진입할 준비로 보이는 발견단계로의 움직임. 모래를 잡아 손안에서 흘러내리기를 반복한다. 그(안선희)의 움직임과 접근이 춤(몸)으로 치유의 과정을 잘 이행하고 있는 듯, 발가락 사이의 모래, 묻어난 기억을 털어낸다.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 모래무대에 이언주가 네발로 긴다. 거문고와 해금소리가 들어오고 소음에 가까운 현을 뜯는 소리에 활발한 움직임이 일어난다. 무용수들이 모두 들어온 둥근 흰색 모래무대.
박종수의 상처(내면)는 상투적 춤이 가린다. 아니 어쩌면 그의 모든 춤(몸)이 그가 마주해야 할 그의 정체성이자 내면인지도. 모두들 직면의 단계로 진입하지 못하고 서성인다. 해소의 단계로 넘어가지 못하고 정체되어 있는 춤. 남자 세 명이 마이크를 들고 “틀렸어”라는 말을 중얼거리며 들어온다. 모래를 끼얹는 여자 둘의 엉킴. 좋아하는 관계의 폭력을 다른이가 이어 춘다. 계단위를 남자가 거꾸로 기어오르고, 한껏 멋을 부린 머리를 한 남자가 마치 공이 튀듯 뛴다. 어떤(기억이) 그를 뜨겁게 폭발하게 하였을까.
진영아 〈이루 말할 수 없는...〉 ⓒRandom Art Project 작은방 |
전문 무용수로 오랜시간 무대에서 춤춰온 박종수와 신승민의 춤. 재능이 흰색 모래무대에서 그 효력이 빛을 잃는다. 자신의 내면을 직면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으면. 끊임없는 거문고 소리.
염승훈의 움직임에서 묻어나는 여린 내면과 공허함. 둥근 모래판 뒤 흰색 구조물은 타인의 춤(삶)을 관망하는 자리이거나 아무도 영접하지 못하는 계단. 여자무용수들이 끊임없이 몸을 위아래로 접고 펴고 들어올린다. 남자는 발로 계단을 오르는 방법을 잊은 듯, 손으로 거꾸로 오른다. 생각과 표현사이에 팽팽한 그물을 설치하여 사실세계와 관념세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춤(몸)에 자국을 내야 하건만. 의식의 틀을 허물어야 한다니. 해소의 단계에서 성장의 단계로 이르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상대의 가슴을 두르리며 위로하고 해소하는 놀란 감정은 엉성하다. 타인을 향한 공격적인 움직임이 이어진다.
발을 모래에 묻은 채 잔걸음으로 모래무대를 돈다. 오리걸음도. 모래가 내면이라고 하자. 여자 세 명이 끊임없이 발로 모래바람을 일으키고 돈다. 그런가하면 어떤 남자와 여자는 무릎과 손으로 모래무대를 따라 긴다. 원을 따라. 어떤이는 발로 모래를 툭툭 찬다. 마치 별것 아니라는 듯 모랫바람을 일으킨다. 9명의 무용수들이 흰배경 벽에 낙서를 한다. 의미없다.
마지막, 무용수들 모두 모래무대에 눕는다. 싱잉볼과 명상으로 이끄는 말소리에 따라, 관객도 바닥에 눕는다. 몸을 이완시키라는 소리. 이제부터 어느 곳이든 여행할 수 있다고,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는 말소리를 따라 찬바닥에 누워 파도소리와 싱잉볼, 말소리를 따라 다닌다. 내면으로의 여행을 위해.
진영아 〈이루 말할 수 없는...〉 ⓒRandom Art Project 작은방 |
찬 마루바닥에 누워있자니 질문이 피어오른다. 무용수의 춤들이 관객들을 적극적으로 자극하였을까. 정작 춤춘 이들은 ‘무의식적인 움직임의 연상을 통해 자신의 심연을’ 들여다보았나. 하여 보편적인 무의식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춤이 관객들에게 공명을 일으키는 공간을 제공하였나? 성장과 해소의 단계로 채 발전시키지 못한 춤이.
작가 진영아는 치유(통합예술치료)프로그램에 적용한 춤으로 노자의 도(道), 큰 정신의 춤을 말하고 있다. 큰 것은 작은 것 속에 있기에, 가능하다. ‘무의식적인 움직임의 연상’이라든가 ‘몸과 마음이 공명하는 공간’처럼, 작고 작은 내면의 상처와 기미를 감지하는, 다시 말해서 작은 것을 진지하게 바라보기를 그치지 않는 정신의 한 태도에 큰 것이 있듯. 그런데 작품은 이상한 상태로 끝을 맺었다.
작품 〈이루 말할 수 없는...〉은 전문 무용수들의 공부가 더 필요한 작업이었다. 알아도 말하지 않는다의 전제는 ‘안다’에 있다. 더욱이 개인의 치유작업이 아니라 관객을 대상으로 한 작업이라면. 먼저 작가(진영아)와 무용수들간의 소통(앎)이 충분하여야 한다. 작품 의도는 물론 일반적인 즉흥춤과 달리 예술의 형태로 잘 다듬어진 연출로 보는 이의 마음을 끌고 들어갈 수 있다. 극장의 공기, 사람의 호흡, 온기와 냉기, 고요함과 잡음 등 기다리며 귀 기울여 들어야 할 것과 깨뜨리고 나가야 할 때를 읽지 못하는, 싱잉볼 너무 길었다.
진영아 〈이루 말할 수 없는...〉 ⓒRandom Art Project 작은방 |
진영아는 ‘마음챙김안에서 몸을 알아차림하며 자연과 예술의 치유력을 바탕으로 한 회복과 존재의 가장 깊은 차원으로 접근해가는 과정을 춤으로 만나’는 작업으로 춤전망의 길을 다시 낸 듯하다. 이전 바다 위 바지선상에서의 춤이라든가, 장시간에 걸친 해변에서의 춤 등 춤을 자연에 옮겨놓는 작업을 해온 작가다. 그가 실내로 춤 작업 공간을 옮겨 온 것은 그의 공부(박사)와 관계가 있어 보인다. 더 깊어질 춤의 사유, 그 여정을 기대한다.
모든 경험적 세계의 인식은 그 절대성에 대한 인식이 아니며, 이를 한정하고 분별해서 개념화, 의미화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노자의 가르침에 기초하여 춤으로 제 본래의 면목을 되찾는 작업. 사실 그것들은 바로 그것들이어서 어떤 해석의 말도 필요없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모두 제 구원을 제 안에 가지고 있어서 어떤 소리도 필요없는지도. 춤 또한 마찬가지, 춤의 한가운데 서 있는 사람도 어쩌면 이르러야 할 본성의 자리에 이르렀는지도.
권옥희
문학과 무용학을 공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