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아함무브먼트 〈바르나르다 알바의 집〉
이야기 발레의 힘
정옥희_춤비평가

이야기는 발레에서 오랫동안 핵심적인 미적 자원이었다. 이야기는 발레가 오페라로부터 독립된 예술 장르가 될 수 있던 근거였으며, 상승과 외전(turn out), 기하학적 조형성과 함께 발레의 핵심이라 여겨졌다. 그리스 신화와 설화, 동화부터 당대 유행하던 소설까지 흡수한 이야기 발레는 정형화된 캐릭터와 선형적인 서사로 관객의 이해를 돕고 작품의 감정적 밀도를 높였다.

그러나 20세기 초 모더니즘의 영향으로 예술춤은 이야기 대신 형식과 신체성에 주목했다. 발레가 주로 다루어온 이야기가 전제군주제의 서사라는 비판과 더불어 각 예술 장르가 매체적 본질에 충실해야 한다는 근대 미학적 관점이 주류가 되면서 춤에서도 몸의 움직임 외의 요소는 부수적이라 여겼다. 문학은 물론 음악, 미술까지 제거한 마리 뷔그만의 절대무용 개념이 이데아로 군림했고 이야기 발레는 진부한 장르로 전락했다.

오늘날 무용계에선 ‘절대무용 거대서사’가 무너졌다. 안무가들은 더 이상 이야기를 백안시하지 않는다. 대신 선형적 서사를 해체하고 서양-백인-남성-상류층의 서사를 의심한다. 고전을 새롭게 해석하거나 주변화된 존재들의 이야기를 부각하는 이유이다.



아함무브먼트 〈바르나르다 알바의 집〉 ©허웅(Ugly Art Company)



스페인 작가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의 희곡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은 고전이되 진부하지 않고 다양한 여성 캐릭터가 등장하는 서사라는 점에서 재해석의 가능성이 풍부한 이야기이다. 먼지가 자욱한 스페인 시골을 배경으로 억압적인 어머니 베르나르다와 자유를 갈망하는 다섯 딸이 살아간다. 베르나르다가 두 번째 남편 장례식 후 딸들에게 8년 상을 치룰 것을 명령하며 딸들은 외부 세계와 단절된다. 첫째 딸 앙구스타스가 건실한 청년 페페와 결혼을 준비하나 넷째 마르티리오와 막내 아델라가 그에게 빠져들고, 아델라가 페페와 밀회를 하다 결국 죽음에 이른다. 감정과 욕망을 억누르는 공간인 집에서 서로 다른 개성과 욕망을 지닌 인물들이 충돌하고 폭발한다. 발레에서도 여러 번 해석되었다. 케니스 맥밀란(1963), 마츠 에크(1986)의 버전이 있고 국내에서도 발레블랑에서 김나영(2004)의 안무로 선보인 적 있다. 그리고 아함아트프로젝트의 대표이자 안무가인 함도윤이 이 이야기에 도전했다.



아함무브먼트 〈바르나르다 알바의 집〉 - 재즈 뮤지션 임태웅 ©허웅(Ugly Art Company)



함도윤은 베르나르다와 두 번째 남편 안토니오의 만남부터 막내딸 아델라의 죽음까지의 긴 이야기를 선형적인 열 개의 장면으로 구성했으며 한 시간으로 압축하여 전개했다. 그런데 원작에 충실한 이야기를 흔들어 놓는 게 음악이다. 재즈 뮤지션 임태웅과 그의 밴드 둘라밤의 레퍼토리를 주크박스로 활용해 각 장면을 구성했다. 임태웅은 무대에서 직접 노래하고 반주음악을 만들고 주요 캐릭터인 하녀 폰시아 역까지 소화했다. 고음과 가성을 넘나드는 미스테리하고 묘한 음색, 토속적이고도 이국적인 사운드의 음악이 작품에 숨 막히고도 몽환적인 톤으로 일관성을 부여했다면, 진한 눈매와 강한 턱선, 큰 키로 재킷과 긴 치마를 병치해 입은 양성적 외모는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화자로서 무대에 흥미로움을 더했다. 그간 발레 작품에서 클래식 기반의 라이브 연주를 활용한 사례는 간간이 있었으나 작품에 어울리는 동시대 국내 음악가를 선별해 작품의 중심적 요소로 활용한 점이 참신했고 효과적이었다.





아함무브먼트 〈바르나르다 알바의 집〉 ©박상윤



길고 긴 희곡의 이야기는 어떻게 전달되었을까. 고전발레가 전형적인 캐릭터와 약속된 마임으로 이야기를 전달했다면 함도윤은 각 장면을 시적 재현으로 추상화하는 대신 아예 노골적인 음성어를 사용했다. 솔직한 선택이다. ‘발레엔 의붓엄마가 없다’던 조지 발란신의 말처럼 마임이나 제스처는 추상적 개념과 복잡한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제시하기 어려우니 마임을 길게 이어가는 대신 음성어로 짧고 굵게 처리한 것이다. 전작에서도 나레이션을 주요 장치로 사용한 바 있는 함도윤은 작품 초반에 성우의 해설을 도입해 각 인물의 역사와 성격을 압축적으로 제시했다. 남성 성우의 연극적인 톤이 작품에 어두운 색채를 더해주었으며, 초반 이후로는 음성 언어 사용을 절제하여 움직임이 끌고 나갈 수 있도록 한 점도 현명했다.



베르나르다 & 안토니오 ©박상윤



호세파 & 마르티리오 ©허웅(Ugly Art Company)



아델라 & 페페 ©허웅(Ugly Art Company)



이야기를 전달하는 또 다른 요소는 캐릭터이다. 함도윤의 작품에선 하녀들이 돋보였다. 원작의 중심인물은 베르나르다와 다섯 딸이지만 안무가는 이들의 내면을 보여주고 스토리를 전개하는 장치로 하녀를 적극 활용했다. 하녀 중 리더라 할 수 있는 폰시아를 임태웅이 맡았으며, 그 외 안무가를 포함한 남성 무용수 다섯 명이 하녀 캐릭터와 조연 캐릭터(안토니오, 페페, 할머니 호세파)를 병행했다. 마치 대저택을 배경으로 귀족들의 세계와 하인들의 세계가 이중적으로 공존하고 얽힘을 보여주는 드라마 〈다운튼 애비〉처럼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은 하녀들이 딸들의 내면이자 사건을 진행하는 행위자로서 역할 하면서 챔버 발레의 경제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극의 입체성도 증폭시켰다.

그런데 하녀가 돋보인다는 것은 다섯 딸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무기력하게 페페와 결혼하려는 앙구스타스, 페페를 흠모하나 외모 콤플렉스가 있어 동생을 질투하는 마르티리오, 언니들 몰래 페페와 만나며 자유를 꿈꾸는 아델라 등 서로 다른 개성과 욕망을 지닌 인물들이 서로 얽혀들어야 플롯이 전개된다. 하지만 작품에선 딸들이 주로 엄마와 대조되는 존재로서 군무를 출 뿐 각각의 개성이 드러나지 않는다.



아함무브먼트 〈바르나르다 알바의 집〉 ©허웅(Ugly Art Company)



그러고 보니 캐릭터를 살려 줄 장치가 마땅치 않다. 고전발레처럼 전형적 인물상이나 마임에 의존하지도, 작품 초반의 음성 해설이나 프로그램북의 해설에 계속 기댈 수도 없다. 오직 춤밖에 없는데 분량이 너무 짧고 이마저도 남성 무용수들이 분한 하녀들로 대체된다. 안무가는 프로그램북에서 여성 무용수들과 작업해 보고 싶어 이 원작을 선택했다고 하지만 작품에선 여성 무용수들이 충분히 캐릭터를 쌓기도 전에 ‘젠더프리’ 캐스팅된 남성 무용수들로 대체되어 버린다. 여성 서사에서 여성 무용수/캐릭터가 가져야 할 역할 분량을 젠더프리 조연 캐릭터에게 빼앗긴 셈이다.

여남 무용수, 그리고 주조연 캐릭터의 비중이 전복된 원인을 짐작건대 체현된 지식의 차이를 들 수 있다. 안무가가 구사하는 움직임 어휘는 발레와 모던댄스, 대중춤과 뮤지컬을 넘나들지만 발레 움직임만 보자면 당스 데꼴(danse d’école) 어휘에 머무른다. 대부분의 동작들이 당스 데꼴 움직임과 타 장르 움직임을 물리적으로 결합했기에 발레 움직임 자체를 실험하는 화학적 변용이 부족하다. 특히 페페와 아델라의 파 드 되는 이전의 장면들과 달리 관습적인 발레 동작을 나열하면서 나머지 장면에서의 움직임과도 괴리되어 보인다. 이는 안무자가 남녀 파트너링을 구현할 때 남성 무용수(국립발레단 주역무용수인 허서명)의 움직임 어휘에 의존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라포(rapport)의 차이도 있다. 안무가는 전작들에서 주로 남성 무용수들과 작업해왔으며, 여성 무용수들과는 남성 버전의 작품을 여성 버전으로 파생시키는 방식으로 작업했다. 이번 작품에 출연한 남성 무용수들은 안무가가 기존에 작업해 온 친밀한 관계임에 반해 여성 무용수들은 그만큼의 관계성을 결여했다. 그렇다 보니 무용수로부터 캐릭터를 끌어내는 데 더 힘들었을 것이다.



아함무브먼트 〈바르나르다 알바의 집〉 ©허웅(Ugly Art Company)



아함무브먼트 〈바르나르다 알바의 집〉 ©박상윤



이런 아쉬움은 있지만 아함아트프로젝트의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은 함도윤의 안무가 커리어나 한국 창작발레의 맥락에서나 고무적인 작품이다. 작품의 기저에 흐르는 개성적인 음악, 음성 언어와 하녀 캐릭터의 활용에 힘입어 만만찮은 원작의 무게를 견디어냈다. 안무는 물론 직접 연출하고 출연까지 해낸 점에서 안무가의 열정이 돋보이며 대본부터 음악, 무대미술, 연출까지 아우르며 작가적 지배력을 발휘한 점에서 단단한 맷집을 읽어낼 수 있다. 특히 이번 해 지원금을 받지 못했음에도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제작비를 마련해 공연을 진행한 점은 예술가로서의 자존심과 소명을 보여준다. 음악적 색채와 연출적 구조가 단단한 작품인 만큼 이야기적 개연성과 안무적 완성도를 높인다면 한국 발레씬을 이끄는 좋은 레퍼토리로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정옥희

춤 연구자 및 비평가. 이화여자대학교 무용학과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를, 미국 템플대학교에서 무용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유니버설발레단과 중국 광저우시립발레단의 정단원으로 활동했다. 현재 Dance Chronicle 자문위원이며 이화여자대학교 무용학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대표 저서로 『진화하는 발레클래스』(2022), 『이 춤의 운명은: 살아남은 작품들의 생애사』(2020)가 있다.​​​​

2025. 5.
사진제공_박상윤, 허웅(Ugly Art Company) *춤웹진

select count(*) as count from breed_connected where ip = '18.222.132.108'


Table './dance/breed_connected' is marked as crashed and should be repair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