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2030세대가 경험하고 인식하는 한국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언론 매체와 정책 과제에서 청년 문제가 끊임없이 다뤄지고 굳이 뉴스와 기사를 접하지 않더라도 그 심각성을 체감할 수 있다. 고착화된 노동시장 이중구조에 따른 낮은 고용률, 서열화된 시스템 아래 과도한 경쟁 구도, 주거 불안정 심화와 같은 문제는 결국 청년들의 삶의 질적 저하뿐 아니라 미래에 대한 절망으로 이어지고 있다. 청년이 삶에 대한 희망과 기대를 포기하게 만드는 주된 이유 중 하나로 종종 주거 문제가 제기된다. 주거에 대한 경제적, 심리적 부담은 결국 혼인과 출산의 포기, 생활비 절감에 따른 낮은 생활 수준, 자아실현과 분리된 경제활동 등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필자는 청년의 주거 문제를 마주할 때면 떠오르는 영화 한 편이 있다. 전고운 감독의 2017년작 〈소공녀〉 속 주인공 미소(이솜)는 일당 4만 5천 원을 받고 가사도우미로 생계를 해결하며 살아간다. 5만원이라는 월세 인상으로 인해 일상의 행복이었던 매일 한 잔의 위스키와 담배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미소는 집을 포기하는 선택을 한다. 여러 지인의 집에 머물면서 떠돌아다니는 삶을 살지만 그녀는 끝까지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선택한 삶을 놓지 않는다. 현실은 벼랑 끝이라고 할 만큼 각박하지만 또다른 ‘미소’들이 있길 바라는 건 필자의 헛된 바람일까? 〈소공녀〉와 마찬가지로, 무버(예술감독 김설진)의 〈안녕2025〉(2025. 4. 24 ~ 27., 대학로극장 쿼드)은 주거를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는 청년의 삶을 그려낸다. 하지만 〈안녕 2025〉에는 미소같이 순응하지 않는 인물보다는 현실의 잔인함에 초점을 맞춘다. 무버의 첫 데뷔작이기도 한 〈안녕〉이 초연된 2015년 이후 지금 무대에 다시 올려진 〈안녕 2025〉가 더 뼈아픈 이유는 십년이 지난 후 2030세대들이 마주한 세상에는 달라진 것이 없어서, 아니면 희망이 더 사라졌다고 느껴져서일지 모르겠다.
작품은 극장 안내 방송을 전하는 여성과 함께 시작되는데 이 여성은 알고 보니 무용수(배소미)였다. 작품에서조차 투잡을 하는 그녀는 마치 앞으로 펼쳐질 험난한 현실을 은유하듯 마이크, 조명과 음악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원했던 회사원 생활을 시작했으나 안주하고 싶지 않아서 무버의 〈풍경〉 오디션을 보고 출연하게 되었음을 그녀는 당시 상황을 재현하는 움직임과 함께 설명한다. 무대라는 허구적 세계에서 무용수는 실제 자기 자신으로서 현존함으로써 작품 속 청년의 삶에 실재성을 더한다.
장면은 전환되고 작품은 청년의 삶을 포착하는 에피소드들을 몽타주 방식으로 펼쳐낸다. 직장인의 출퇴근하는 삶을 상징하는 공간인 지하철에서 줄지어서 모두 같은 방향으로 이동한다. 홍보 풍선처럼 청년들을 유혹하는 청년안심주택과 로또 청약의 꿈을 꾸며 열심히 경쟁적으로 앞만 보고 달려간다. 공동의 공간이지만 혼자만의 시간을 즐길 수 있는 카페에서조차도 눈치와 압박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일과 삶이 분리되기 어려운 프리랜서의 근로 특수성으로 인해 뒤쳐지지 않기 위해 쉼없이 일할 수 있는 로봇이 된다.
무버 〈안녕 2025〉 ⓒBAKi |
타인과의 교류 없이 단칸방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저녁 시간을 보내는 이들에게 삶이란 양육강식의 논리가 작동하는 정글과 같은 곳이다. 눈 깜짝하는 사이에 뺏고 뺏기는 세상에는 경쟁자들만이 존재한다. 격투기 링에 올라선 선수, 스트릿 파이터 게임 속 캐릭터, 〈제5원소〉 영화 속 외계인과 사이보그 인간과의 결투, 그리고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처럼.
무버 〈안녕 2025〉 ⓒBAKi |
이렇게 차가운 현실 속에서 그들이 아늑함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은 집이다. 겨우겨우 집을 마련해 그곳에서 행복한 일상을 즐기는 것도 잠시, 쏟아지는 폭우로 그들의 집은 침수되고 또다시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되어버린다. 집은 더 이상 거주가 아닌 자본 증식의 수단이 되어 버린 지금 그들에게 집은 결국 가질 수 없는 허망한 꿈일 뿐이다.
위의 에피소드들은 김설진 안무가 특유의 극적 연기, 마임적 표현, 현대무용과 스트릿댄스 움직임이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구현되었다. 각 장면의 구체적인 상황은 연극적으로 묘사되는 동시에 추상화된 움직임을 통해 인물들의 상황을 은유적으로 재현하였다. 예를 들어, 대형 춤추는 홍보 풍선처럼 몸을 흔들며 내 집 마련의 꿈을 유혹하고, 엘리베이터와 엘스컬레이터를 오르내리는 듯한 마임 움직임을 활용하여 경쟁적으로 살아가는 반복적 일상을 연출하였다. 이러한 신체적 표현은 상황과 딱 맞는 대중가요와 맞물여 그 정서가 극대화되었다. 자신의 꿈을 찾아 떠나라고 말하는 장미여관의 “퇴근하겠습니다”를 들으며 위안을 받고 이디오테잎의 EDM 음악에 맞춰 왁킹, 힙합 춤을 추면서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폭발적으로 해소했다. 지하철 안내방송, 테트리스 게임 BGM, 부동산 관련 뉴스 등과 같은 구체적 상황과 내용을 연상시키는 사운드를 사용하여 장면의 구체성을 더했다. 작품 속 몽타주식 구성에서 각 에피소드를 연결하는 핵심의 방법은 박스의 활용이었다. 크기가 다른 두 개의 직육면체 나무 박스는 해체되고 재조합되기를 반복하면서 변화무쌍하게 변주되었다. 의자, 테이블부터 지하철 승강장, 1인 가구 원룸, 이삿짐 트럭, 공동 주택까지 그 형태와 기능을 기발하게 바꿔가면서 구체적인 공간과 상황을 구현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댄스시어터 형식 아래 극적 연기와 표현적 움직임으로 특징지어지는 김설진의 안무적 특성이 시작되는 데뷔작이었던 〈안녕〉은 10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의 독자성이 유효함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구체적 상황을 재현하는 방식이 클리셰적으로 다가오는 장면도 종종 포착되었다. 테이블 위에 올라서서 서로를 밟고 더 높이 올라가려는 장면이나 격투기장, 게임, 경마장과 같이 승부가 결정되는 상황을 묘사하는 방식은 다소 전형적이고 직접적이어서 관객의 상상력과 해석이 들어갈 여지가 없었다. 오히려 가구를 재조합하는 방식은 그 결과물이 보여주는 의미가 명징하나 그 과정이 보여주는 의외성과 기발함은 작품의 재미와 창의적 연출에 크게 기여했다.
청년이 마주한 삶의 현실을 이미 다양한 매체를 통해 익히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을 통해 이러한 현실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면 그 가치는 현실을 관통하는 안무가만의 직관적 시선과 미학적 독창성에 있을 것이다. 〈안녕 2025〉는 관객이 그동안 몰랐던 청년의 냉혹하고 처절한 현실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들 현실의 비극성은 폐부를 꿰뚫는 듯한 날카로움으로 전해지지 않는다. 작품 전반에 깔려있는 유머와 위트 탓을 하는 것이 아니다. 블랙코미디가 그러하듯 웃음을 유발하면서 사회 문제의 급소를 겨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작품의 문제는 현실의 처절함이나 현실 이면에 작동하는 복잡성을 보여주는 시대비판적 시선과 미학적 접근이 다소 평이하게 전달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무버 〈안녕 2025〉 ⓒBAKi |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참담한 청년의 현실 속에서 안무가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쏟아지는 빗속에서 또다시 떠돌아다니게 된 이들은 이내 웃으면서 현실을 받아들인다. 이들이 박스의 앞문을 열어 꿈같은 방 미니어처를 보여주면서 작품은 끝이 난다. 작품 시작과 끝에 울려퍼지는 화이트의 “네모의 꿈”은 네모로만 만들어진 현실에서 벗어나 둥근 세상을 꿈꾼다. 〈안녕2025〉은 둥근 세상을 꿈꾸는 것이 아닌 ‘미니어쳐 방’을 꿈꾸는, 현실에서 작은 저항조차 불가능한 청년의 현실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씁쓸한 미소를 남긴다.
한석진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에서 무용이론 전공 예술사 과정 후 영국 서리대학교에서 무용학 박사 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이론과 조교수로 재직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