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동시대 무용계 일각에서 이야기발레를 시대착오적인 양식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야기야말로 춤으로 전막 공연을 가능케 한 요소이자 일반 관객과 접점을 확보해 온 근본적 동력이다. 장 조르주 노베르나 미하일 포킨과 같은 개혁가들이 움직임의 조형성 못지않게 극적 전달력을 강조한 것은 그 때문이다. 신체와 움직임 자체에 대한 탐구가 무용계의 주류 담론을 점하는 오늘날에도 전국을 누비는 민간발레단들이 끊임없이 이야기발레를 개발하고자 하는 현상은, 이야기가 발레의 대중적 생명력과 분리될 수 없음을 방증한다.
댄스시어터샤하르는 이런 흐름 속에서 이야기발레에 특화된 단체로 자리매김해왔다. 안무가 지우영이 2003년 창단한 이래 발레에서 드물게 다루어진 문학 및 고전 텍스트를 소재로 삼거나(〈레미제라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사운드 오브 뮤직〉, 〈나이팅게일과 장미〉 등), 기존 발레 레퍼토리를 동시대적 시각으로 재해석하는(〈한여름 밤의 호두까기 인형〉, 〈지젤이 지그프리드를 만났을 때〉, 〈돈키호테의 사라진 기억들〉 등) 작업을 이어왔다. 그중에서도 〈돈키호테의 사라진 기억들〉(2024)은 돈키호테의 환상을 노인 치매 문제와 접합하여 현실적 함의를 확장하는 동시에, 국내 발레계 원로들을 주요 배역으로 기용해 화제를 모은 바 있다. 이번에 선보인 〈안네 프랑크〉는 서울문화재단의 다년지원을 받아 2025년 10월 초연된 후 6개월 만에 재공연된 작품으로, 전자, 즉 새로운 소재를 발레화하는 계열에 속한다.
〈안네 프랑크〉는 제2차세계대전 중 나치를 피해 은신했던 소녀 안네의 일기를 원작으로 한다. 발레로선 세계 초연이라는데, 이 사실이 되려 놀라울 정도로 소재 선정의 선구성이 돋보인다. 다만 이스라엘을 둘러싼 분쟁이 심화된 현재의 정치적 맥락을 고려할 때, 작품이 피해자-가해자 구도를 고정한 채 역사적 비극을 재현하는 방식에 머무른 점은 아쉬움을 남긴다. 물론 작품의 개발은 수년 전부터 진행되었음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키호테의 사라진 기억들〉에서 치매라는 문제를 경유해 원작을 재해석했던 안무가 특유의 창의성이 본 작품에도 적극적으로 작동했더라면, 단순한 재현을 넘어 동시대적 발언으로서의 무게를 획득할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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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스시어터샤하르 〈안네 프랑크〉 ⓒ댄스시어터샤하르 |
공연은 암흑과 침묵 속에 객석으로 들이닥친 게슈타포로부터 시작된다. 군복차림의 인물들이 플래시로 관객 사이를 비추며 누군가를 색출하려는 몸짓은, 극적 장치를 넘어 실제적 긴장을 유발하며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일시적으로 해체한다. 이는 작품 전반에서 관객과의 거리가 가장 좁혀진 지점이었다. 이후 작품은 총 12개의 장면으로 구성되는데, 안네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미시적 현실과 게슈타포 및 유대인 군중이 표상하는 거시적 역사가 교차하는 구조를 취한다. 이러한 구성은 관객으로 하여금 개별적 비극과 집단적 비극을 관조적으로 조망하게 만든다. 그러나 교차 구조가 반복되면서 초반에 형성된 긴장감이 점차 희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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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스시어터샤하르 〈안네 프랑크〉 ⓒ댄스시어터샤하르 |
〈안네 프랑크〉의 가장 두드러진 미학적 장치는 안네의 일기장을 의인화한 설정이다. 안네가 붉은 체크무늬 일기장에 '키티'라는 이름을 붙인 것을 착안하여, 같은 무늬의 원피스를 입은 여성 인물(스테파니 킴)로 구현했다. 이는 환상성과 서정성을 동시에 확보하면서도 과도한 인위성을 피하는 데 성공한다. 더불어 동일한 패턴으로 제작된 프로그램북이 관객과 작품 사이의 감각적 연결을 형성하는 세심한 연출로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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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스시어터샤하르 〈안네 프랑크〉 ⓒ댄스시어터샤하르 |
위기가 닥친 안네 가족은 좁은 은신처로 이동한다.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의 광활한 무대 위에 창고 은신처의 밀폐감을 구현하기란 쉽지 않으나, 삼각형 모양의 무대장치와 문틀·창문 등의 오브제가 공간을 설득력 있게 분절한다. 안네의 네 가족과 판단 씨네 세 가족, 치과의사 뒤셀 씨 등 은신처 구성원의 여덟 명의 캐릭터는 구체적으로 조형되어 있다. 화장실 하나를 여럿이 나눠 써야 하는 곤혹,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유행가에 맞춰 잠시 현실을 잊고 춤추는 순간, 어렵게 구한 빵 한 덩이를 아껴 나눠 먹는 장면, 숨죽여야 하는 순간의 재채기 등 소소한 에피소드들이 절제된 서정으로 포착된다. 이 장면들이 축적되었기에 이후의 텅 빈 무대가 전달하는 여운이 더욱 짙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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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스시어터샤하르 〈안네 프랑크〉 ⓒ댄스시어터샤하르 |
재공연에서는 몇 가지 변화가 도입되었으나, 아쉽게도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는 크게 기여하지 못했다. 우선 안네 역을 학생 무용수(김하은)가 전담하면서 친구들 역할이 추가되고 이는 잘 훈련된 예술학교 학생들이 동등한 비중의 춤을 추는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그 결과 춤의 비중은 높아졌을지 몰라도 드라마적 자연스러움이 약화되고 기존 서사와의 유기적 연결도 느슨해졌다. 또한 게슈타포의 폭력성과 유대인의 희생이 강화되었는데 그 방식엔 문제가 따른다. 특히 게슈타포가 음주와 유흥에 빠지는 장면은 서사적 필연성이 결여된 삽화에 가깝다. 나치 체제의 폭력은 도덕적 방종이 아니라 이념적 훈육과 제도적 강제의 산물이었다. 게슈타포 장교(정민찬)를 개인적 일탈에 빠진 인물로 형상화하는 것은 악의 기원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위험을 내포한다. 히틀러(서기범) 역시 구체적 인물로 등장시키는 선택 역시 연기적 성취와는 별개로 극의 구조적 필요성과는 거리가 있다. 한편 유대인 희생 장면은 분량이 늘어난 데다, 어머니의 죽음을 애도하는 어린이가 한 명에서 두 명으로 늘어났다. 비극의 강조를 넘어 고통의 장면을 길고 직설적으로 노출하는 방식은 그 자체로 스펙터클로 소비되며 관객의 윤리적 감수성을 오히려 무디게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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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스시어터샤하르 〈안네 프랑크〉 ⓒ댄스시어터샤하르 |
전반적으로 〈안네 프랑크〉는 한국 창작 이야기발레로서 탄탄한 서사 구성과 안정된 제작 역량을 보여주었다. 시간순 전개를 기본 구조로 삼으면서도 안네 중심의 개인적 서사와 집단적 서사를 병치하는 방식은 역사적 감각을 효과적으로 구축한다. 당시 유행가와 사료 영상의 과감한 활용, 의인화된 일기장이라는 장치, 무대 오브제의 효과적 운용은 전통적 발레 문법을 확장하려는 시도로 평가할 수 있다. 오토 프랑크 역의 강준하는 열연으로 극의 중심을 잡았으며, 조연 캐릭터들 역시 각자의 극적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며 작품에 다채로움과 핍진성을 부여했다. 개별 장면을 끌고 가는 드라마적 호흡이 다소 덜컹거리는 점만 보완된다면 한국 이야기발레의 성취로서 자리매김할 것이다.
정옥희
춤 연구자 및 비평가. 이화여자대학교 무용학과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를, 미국 템플대학교에서 무용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유니버설발레단과 중국 광저우시립발레단의 정단원으로 활동했다. 현재 Dance Chronicle 자문위원이며 이화여자대학교 무용학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대표 저서로 『진화하는 발레클래스』(2022), 『이 춤의 운명은: 살아남은 작품들의 생애사』(2020)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