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이가영 안무 〈성인물〉은 오늘날 성인이 감내해야 하는 실존적 상황을 그리되, 대량생산 소비 사회를 그 배경으로 한다(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3. 27~29.). 앤디 워홀의 팝아트 그림 〈Spam〉(스팸, 1980)을 주요 소재로 활용한 점이 이를 힘 있게 뒷받침한다. 아다시피, 워홀의 〈스팸〉은 그 미학적 의의와 함께 획일적 소비 행태에 대한 비판 또는 비평 사례로서도 의의를 띤다. 국내 춤계에서 팝아트를 등장시킨 경우가 잘 기억나지 않는 그런 점에서 우선 공연작 〈성인물〉은 이채를 띠었다.
공연 시작 전 관객은 입장할 때부터 두 가지를 먼저 보게 된다. 하나는 기다란 컨테이너 같은 박스 구조물이다. 객석을 향한 벽면은 투명 아크릴로 처리되었고 이미 그 안에서 4명의 남녀가 정장에다 가운을 걸치고 서서 미동도 않은 채 가만히 객석을 응시하는 모습을 지속한다. 또 하나는 박스 구조물 위로 스크린처럼 설치된 대형 모니터에 여러 가지로 투사되는 워홀의 〈스팸〉 이미지들이다. 그 이미지들 사이로 두 개의 문구, 즉 ‘당신이 원하지 않아도 매일 도착합니다’ ‘영양은 모르겠고 일단 채워 드립니다’가 번갈아 반복해서 나타난다. 점차 공연이 임박해지면 ‘오늘도 저희 성인물을 찾아주신 관객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사원 여러분 오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퇴근할 때 매장을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이어 매장 점검 세칙이 나열된다) 즐거운 퇴근길 되시기 바랍니다’ 투의 상냥한 멘트가 두어 차례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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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므로살롱 〈성인물〉, MOMURO SALON 제공 ⓒSang Hoon Ok |
공연이 시작할 때 네 사람은 단정한 가운 차림으로서 연구원 같아 보이고 컨테이너 박스도 그 안에 튼튼한 안전 방호 캐비닛이 부착된 칙칙한 개발실의 인상을 준다. 하지만 공연이 좀 진행되어 그들이 가운을 벗어버릴 때부터 그들의 신원은 유동적이게 되고 컨테이너 박스도 굳이 그 현장의 구체적인 의미를 특정할 필요가 없어진다. 말하자면 그 사람들의 그 현장은 그냥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그것처럼 바뀌면서 공연이 진행된다. 공연 중 네 사람은 컨테이너 박스(안에서 쳇바퀴 돌 듯 하면서) 바깥으로 나오지도 않았고, 공연은 사실상 컨테이너 박스 안에서 펼쳐졌다. 이 공연을 ‘성인물’이라 이름 붙인 이유를 안무자는 “감정을 억누르고 책임을 감내하며 하루를 마친 보통의 어른들”에게 고요한 해방과 위로의 순간을 건넨다는 뜻이라 밝혔는데, 성인은 물론 곧 성인이 될 사람들 또한 그런 처지에 놓이기 마련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성인물〉은 우리 시대, 소비 사회에서 성인이나 아이들이나 할 것 없이 인간 존재가 겪을 실존을 그린 공연으로 확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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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므로살롱 〈성인물〉, MOMURO SALON 제공 ⓒSang Hoon Ok |
공연 중에 먼저 그들은 박스 안 벽의 조그만 컨트롤 박스에서 스팸 캔을 꺼내어 빨아 먹는다. 이어 휴식 시간인지 엘가의 피아노 독주곡 〈사랑의 인사〉가 들리고 그들은 풍선을 꺼내 불어서 그걸 들고 앉아서 체조를 하는 등의 모습을 보인다. 이 행동들을 서로 호흡을 맞추며 하다가 가운을 벗고 컨트롤 박스에서 커피잔-받침 세트를 꺼내어 앉아 자장가, 팝송 〈언체인드 멜로디〉 등의 선율을 따라 몸을 기우뚱하는 등 여러 자세로 커피를 마신다. 그후 정장을 내리고 돌아앉아 배변 자세를 취하며 아랫도리를 벗은 채 리드미컬한 타악에 맞춰 함께 일사불란하되 다양한 스텝을 한참 동안 똑같이 밟다가 정장 상의도 벗는다. 푸른색 속옷이 드러나고 과장된 붉은색 넥타이가 머플러로 되자 웅장한 시네마 음향이 분위기를 고무하고 그들은 잠시 영화 이미지로 흔했던 슈퍼맨 같은 모습이 되어 양팔을 의기양양하게 치켜올리기를 반복하고 탑돌이를 하듯이 대형을 맞춰 돈다. 그 사이에 헬맷을 쓴 배달원 같은 남자가 컨테이너 박스 앞에 플라스틱 상자를 놓고 당근 몇 뿌리를 심어 물을 주었고 박스 안은 점차 어두워졌다. 헬맷의 그 남자는 컨테이너 박스 속이 잘 보이도록 하려는 의도에서인지 창을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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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므로살롱 〈성인물〉, MOMURO SALON 제공 ⓒSang Hoon Ok |
배달원이 퇴장하자 박스 안의 네 사람은 캡에다 카키색의 잠바와 붉은 핫팬츠를 입은 차림으로 기계적이며 규칙적인 스텝을 리듬에 따라 자세를 바꿔가며 행진하듯이 반복한다. 그들은 훈련생이나 조교 같은 모습들이다. 동시에 모니터에는 인체 흉곽 엑스레이 사진이 비춰진다. 그후 분위기는 돌변해서 박스 안에는 공중전화 부스 같은 좁은 구조물(벽과 바닥이 온통 붉은색!)이 설치된다. 그 속에서 한 남자가 배낭 속 물건들과 벽에 탈부착이 가능하도록 고안된 소품들을 갖고 인터폰 소통, 접이의자에 앉기, 용변 보기, 식구통(교도소에서나 보는 것)으로 제공되는 스팸 빨아먹기, 책보기, 전자담배 흡연, 샤워, 팔굽혀펴기, 얼굴 매무새 다듬기 등등의 행동을 매우 자연스럽게 이어나간다. 동시에 그 구조물 속에서는 바퀴벌레가 돌아다니고 생선 모형이 팔딱거린다. 이 모든 사적인 상황은 버젓이 대형 모니터로 중계된다. 그런 끝에 남자가 벽에 부착된 구식 카메라의 자바라 같은 장치를 사진 찍듯이 들여다보자 박스 안은 암전되고 모니터에는 어느 장발 청년의 이미지가 나타난다. 청년은 머리가 덥수룩하고 반짝이 스커트를 입어 단정치 않은 인상을 주며 하나였다가 여럿으로 불어나고 분할되기를 되풀이하면서 빠르게 바뀌는 그 청년 이미지는 현란하게 출현했다가 사라지는 이미지가 그러하듯이 흐트러지고 덧없는 찰나의 연속으로 다가온다. 이 청년 이미지들과 함께 들리는 음악은 어떤 응어리를 절규하는 분위기의 팝송이다. 마지막으로 모니터에는 공중전화 부스 같은 그 구조물 속에서 정장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남자가 커피잔-받침 세트를 들고 조용히 서성이는 모습들이 흑백의 분할 화면으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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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므로살롱 〈성인물〉, MOMURO SALON 제공 ⓒSang Hoon Ok |
〈성인물〉에서 소비 사회의 증상은 공연 전의 스팸 이미지로 예고된 터이고 공연에서는 빨대로 빨아먹는 스팸에서부터 점차 증식해나갔다. 동물원 우리나 쇼윈도우처럼 노출된 업무 공간, 집단무의 획일성과 반복성, 개성은커녕 감정조차 찾기 어려운 마네킹 부류의 무표정뿐만 아니라 비중 높게 등장하는 단색조의 네가티브 영상(陰畫) 등으로. 박스 속의 사람들을 생중계하는 모니터 화면은 때때로 네가티브 영상으로 처리되어 사람들의 획일적인 모습에다 익명성과 비주체성(非主體性)을 더하는 효과가 있었다. 대량생산되고 규격화되는 사회에서 주체성이 지워지고 급기야는 아주 비현실적인 좁작한 부스를 견뎌야 하는 사람은 사람이라기보다는 그저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분열되는 원자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공연에서 사람들이 한 무리로 밀착해서 슈퍼맨처럼 의기양양함을 보인 것은 잠시였다. 컨테이너 박스 앞에다 당근을 착착 심은 후 윈도우를 닦는 그 남자는 컨테이너 박스 바깥에서 행동한 드문 존재로서 그의 행동거지는 매사가 규격화되고 기계적이며 노출을 쫓는 사회가 컨테이너 박스를 에워싸고 있음을 감지하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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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므로살롱 〈성인물〉, MOMURO SALON 제공 ⓒSang Hoon Ok |
네 사람이 캡을 쓰고 균일한 집단무에 몰두할 동안 모니터로 보여지는 흉곽 엑스레이는 그 사람들의 은밀한 내면을 드러내 보이는 이미지일 것이다. 게다가 부스 같은 구조물 속의 지극히 사적인 행동도 낱낱이 노출된다. 이처럼 사생활과 내면마저 소비되는 사회에서 사람의 존엄은 으스러진다는 것을 〈성인물〉은 말한다. 처절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오늘의 양상을 〈성인물〉이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은 그 상황을 견뎌야 하는 사람들을 위하고 어루만지는 시발점이 될 것이고, 그래서 안무자의 문제의식은 각별해 보인다. 오늘의 양상을 파헤친 안무자를 기다리는 것은 이후에도 많을 듯하다. 일테면, 감정을 내색하지 않고 견뎌야 하는 상황을 사람들이 딛고 서는 대안의 모습 같은 것이 그에 속할 것이다. ‘영양은 모르겠고 일단 채워드린다’는 정크 푸드 사회에 일격을 가한 기개 또한 강조되어야 하겠다.
김채현
춤인문학습원장.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명예교수. <춤웹진> 편집장. 철학과 미학을 전공했고 춤·예술 분야 비평 수백 편과 저서 『춤과 삶의 문화』 『춤, 새로 말한다 새로 만든다』 『뿌리깊은 나무 샘이깊은 물』(1)을 비롯 다수의 논문, 공저, 『춤』 등의 역서 20여권을 발간했다. <국립무용단 60년사>(2022년 간행, 국립무용단)의 편집장으로서 편집을 총괄 진행하고 필진으로 참여하였다. 지난 30년간 한국의 예술춤과 국내외 축제 현장을 작가주의 시각으로 직접 촬영한 비디오 기록물 수천 편을 소장하고 있으며 한국저작권위원회, 국립극장 자료관, 국립도서관 등에 영상 복제본, 팸플릿 등 일부 자료를 기증한 바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