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크리스탈 파이트 〈어셈블리 홀〉
공감각으로 맛보는 휴머니즘적 서사
이지선_춤연구가, 비평가

막이 오르면 무대는 지극히 소박하고 스산한 어느 동네 마을회관(Assembly Hall)이다. 그 곳에는 존폐위기에 몰린 중세 마니아 동호회 ‘자애와 보호의 기사단’ 정기모임이 열린다. 크리스탈 파이트(Crystal Pite)와 조너선 영(Jonathon Young)의 〈어셈블리 홀〉(2026.6.5-7, LG SIGNATURE홀)은 일상의 회합 공간을 관객의 오감을 깨우는 공감각의 장으로 치밀하게 펼쳐 보인다. 숏폼의 파편화된 자극에 익숙해진 동시대 관객들을 객석에 가득 채우고, 1시간30분이라는 대서사의 호흡으로 오늘날 춤이, 예술이, 그리고 공동체가 우리에게 왜 필요한가를 단호히 이야기한다.


〈어셈블리 홀〉: 현실과 신화, 감각이 교차하는 멀티버스

작품은 회원 수 감소와 재정난에 따른 모임 해체를 논의하기 위해 열린 ‘회의’를 핵심 소재로 다룬다. 역할이 모호한 데이브를 포함한 여덟 명의 위원들이 등장하고, ‘마지막 회의’로부터 ‘부재자’에 이르기까지 10개의 정교한 장면들이 유기적으로 맞물려 서사를 이끌어 간다. 개회를 선언하고 의제를 올리고 표결에 부치고 찬반을 표명하는 의례적 회의 과정에서 그들은 ‘존폐위기’라는 난제에 봉착한 공동체의 의견충돌 속에 갈등, 대립, 모순, 비난, 위선, 허구, 위로, 인정, 화합, 공감, 슬픔, 상실, 경쟁, 나약함, 사랑, 기쁨, 유머 등 보편적인 인간의 감정들을 엮어내고자 한다.

이 모임과 회의의 당위는 그들이 재현해온 ‘퀘스트 축제(Quest Fest)’다. 중세 문학에서 기사들이 성배를 찾거나 명예를 증명하기 위해 떠나는 고독하고 숭고한 여정 혹은 모험을 상징했던 퀘스트에 대한 은유이다. 모임에서 존재감 없던 데이브가 ‘이름 없는 기사’ 역할을 맡아 현실과 신화적 공간을 넘나들며 버림받은 회합을 구원하기 위해 분투하는 모습은 현대인이 마주한 공동체의 현실을 절묘하게 비춰낸다. 회의 장소를 상정하는 8인의 채워진 의자와 함께 남겨진 1개의 빈 의자는 부재(absence)를 상징한다. 위원들은 부재하는 존재를 애도하고 공동체의 위기를 구원할 인물을 상정하며 그를 기다린다. 그리고 그 자리는 있어도 없는 사람 취급 받던 연약하고 무기력한 데이브가 채워 나간다.

축제가 묘사되는 ‘무대 안의 또 다른 액자형 무대’는 극 속 현실의 마을회관과 신화적 세계의 축제를 오고 가는 문(portal)으로 열려 있다. 그 공간의 열림은 시간의 축을 이탈해 미끄러지며, 우리가 마주한 현실의 LG아트센터 SIGNATURE홀의 무대, 작품이 그려내고 있는 마을회관과 회관 속 극장 무대 공간을 넘나들며, 가늠할 수 없는 가상의 가상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또한 중세 기사의 갑옷과 투구는 아마추어 동호회 회원들의 몸짓을 중세 기사단의 웅장한 전투와 명예라는 신화적 판타지로 전환하는 핵심 장치로 작동한다. 그 정지와 지속, 존재와 부재의 오고감은 성실한 복원과 유머러스한 묘사로 진정성과 위트를 녹여낸다.





크리스탈 파이트 <어셈블리 홀> ⓒLG아트센터



존폐 논의를 유보하자는 안건에 대한 회의의 갈등은 극장 공간에 쏟아져 나오는 내레이션 소리와 함께 춤으로 시각과 청각에 호소한다. 내레이션 대사의 내용, 동기, 신경질적인 억양, 리듬, 대화 사이의 미세한 숨소리와 망설임을 춤은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춤의 힘과 모양과 속도와 무게와 관계로 조응한다. 회의 중 격해지는 말다툼에 무용수의 관절은 기괴하게 뒤틀리고, 누군가의 고함에 보이지 않는 파장으로 무용수는 저 멀리 나가떨어진다. 음악의 시각화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인간 언어에 숨겨진 권력관계와 심리적 마찰을 물질적 사건과 춤으로 체화하여, 연극과 문학이 담당해온 언어적 텍스트의 장을 움직임 텍스트의 장과 접속시켜 ‘춤을 듣게’ 한다.

회의와 축제를 이루는 춤과 제스처, 마임, 혹은 그 사이의 틈 어딘가를 오고가는 일사불란한 안무는 일순간 정지된 인물들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타블로 비방(tableau vivant)처럼, 중세의 영웅적 우화를 담은 고전주의 회화의 명장면을 떠올릴 법한 시각적 황홀경을 그려 내기도 한다. 춤의 전개를 빠르게 감거나 느리게 함으로써 액션영화의 한장면처럼 한껏 긴장된 감정의 촉각을 자극하기도 한다. 그녀의 안무는 매우 묘사적인 (내레이션의 내용을 직접 움직임으로 직역하는) 부분과 다소 추상적인 (인물의 감정과 정서, 또는 관계를 움직임으로 의역하는) 부분들이 구별되어 배치된다. 그리고 내레이션에 의해 춤이 촉발되는 부분과 전적으로 춤으로 추상화되는 부분들 간의 연결이 매우 정교하게 직조되어, 관객은 그 어떤 부분에서도 서사의 감정을 놓치지 않고 안무가의 의도를 읽어 나갈 수 있다. 관객은 추상적인 몸짓을 완벽한 서사의 구조를 타고 명확한 인과관계를 가진 입체적인 줄거리로써 춤춰지는 ‘이야기를 보게’ 된다.





크리스탈 파이트 <어셈블리 홀> ⓒLG아트센터



그러나 빼어난 연출로 내러티브와 안무를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강력한 서사를 전면에 내세움에도 불구하고, 감각에 강렬하게 남는 것은 작품 후반부에 주로 배치된 ‘내레이션이 사라진 춤들’이다. 퀘스트 축제 속 이름없는 기사와 흐느끼는 여인의 2인무와 사이사이에 배치되는 솔로 춤들은 과한 호흡으로 리듬을 부여하거나 정지된 자세나 동작을 억지스럽게 잡아내지 않으면서도 사지 끝까지 온 에너지를 사용하여 움직임을 매끄럽게 이어가는 기교의 절정을 보여준다. 무용수 한 명을 들어올려 나머지 무용수들이 마리오네트처럼 움직임을 조정해 발휘하는 집단적 움직임 장면과 개인이 집단의 일부가 되고 집단이 다시 개인이 되는 군무의 구성방식, 극의 결말에 기사의 갑옷 조각을 하나씩 각자 들고 그 조각들을 모아 하나의 커다란 기사 형상을 움직임으로 일궈내는 장면은 구구절절한 이야기의 침투 없이도 오직 춤으로 동시대 공동체의 단면을 직관적으로 간파해 낼 수 있도록 한다.





크리스탈 파이트 <어셈블리 홀> ⓒLG아트센터



파이트 & 영: 작품들을 관통하는 휴머니즘적 비전

〈트라우마(Betroffenheit)〉(2015), 〈검찰관(Revisor)〉(2019) 그리고 〈어셈블리 홀〉(2023)로 방점이 찍히는 파이트와 영의 협력작업에는 춤에 대한 그녀만의 확고한 철학이 점철된다. ‘무엇이 우리를 춤추게 하는가’라는 동시대 춤의 예술철학적 질문에 대해 그녀는 개인의 트라우마와 고통, 권력과 시스템의 타락, 공동체의 연대를 통한 구원이라는 휴머니즘의 비전을 완성해냈다. “춤은 언어이며, 우리는 모두 무용수일 뿐만 아니라, 몸은 장소(location)로서 존재를 담아내며, 예술은 희망처럼 사랑의 한 형태”1)라는 파이트의 메시지는 작품 속에 선명한 논리로 확립되었다.

‘춤이 언어’라면 소통을 전제하며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내러티브는 필연적이다. 또한 동시대 춤이 포스트모던 이후 춤의 내재적 언어와 보편의 언어 사이의 갈림길의 귀로에 하나를 선택하고자 했다면, 그녀는 “미끄러지는(slippage)”2) 방식으로 그 사이를 오고가는 방식을 택했다. 미끄러지기 위해 신체 언어와 음성 언어(spoken language)를 안무를 통해 결합하여 움직임의 출발을 서사의 내용과 감정에서 출발하도록 한다. 물론 그 서사는 타인의 것이지만 극작과 안무의 과정에서 무용수의 몸으로 여과하여 예술적 타당성을 획득한다. 타이밍과 모양을 맞춰 입을 놀려 수행하는 체 하는 것이 립싱크라면, 무용수 몸으로의 여과는 발화되는 언어의 근원을 몸으로 상정하고 발화된 결과의 내용을 체화의 방식으로 몸을 싱크해 진실로 수행한다. 따라서 그녀의 춤은 내러티브를 모방하거나 재현(represent)하기보다 “몸을 통해 누군가의 이야기를 다시 살아내는 재연(reenactment)의 행위”3)로 간주된다. 따라서 춤은 몸을 통해 인간의 삶을 반영하고 드러내는 ‘장소’가 된다.

재연의 문법은 활동 초기 클래식 발레단에서 쌓아올린 전통적 기교와 프랑크프루트 발레단(Frankfurt Ballet) 활동에서 얻는 윌리엄 포사이스(William Forsythe)의 해체적 아이디어 사이를 미끄러지며 파이트가 찾아나간 구불구불한 길 위에 확립된다. 문법은 혁신적이고 자유로운 움직임의 발견이기보다 치밀한 분석과 되새김에서 끌어올려진 타당성과 논리를 바탕으로 한다. 그러하기에 내러티브를 재연한 춤은 고도의 기교적 완성미를 만족시켜준다. 그러나 동시에 움직임의 완벽한 기교는 나약하고 게으르며 부조리한 보편적인 개인들의 발화와 행위를 토대로 함으로서 ‘우리는 모두 무용수’라는 그녀의 믿음을 실현시킨다.

미끄러지기 위해 그녀가 선택한 내러티브는 프로시니움 극장 테두리 여기저기에 설치된 스크린에 말하는 속도로 쏟아지는 번역 자막과 동시에 무대 공간을 활주하는 ‘들리는 춤’과 ‘보이는 이야기’를 90분간 추적해야하는 비영어권 관객에게, 어림잡아 15분 남짓 할듯한 춤의 시퀀스들은 다소 장광설과 드라마에 짓눌려 왔던 춤의 역사를 되짚게 하는 아이러니로 귀결될 수도 있다. 또는 송로버섯이나 캐비어처럼 평범한 파스타를 미슐랭 3스타의 요리로 탈바꿈 시켜주는 비법재료로 춤이 양념된 휴머니즘 예술의 성찬으로 읽혀질 수도 있다. 다만 합의되는 것은 동시대에 유효한 방식(Kidd)으로 자짓 평범해질 수 있는 낡은 극장예술(Pivot)을 설득력있게 재연해 냄으로써 우리가 직면한 제도적 모순과 갈등을 따뜻한 시선으로 위로하고 화합과 희망을 모색하고자 한다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이것이 그녀를 영민한 또는 천재적인 안무가로 불리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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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rystal Pite (2026.4.29). 세계 춤의 날 기념 메시지. ITI 세계 춤의 날 공식 홈페이지. https://www.international-dance-day.org/pdfs/2026/IDD%202026_Message_by_CrystalPite_EN.pdf (검색일: 2026.6.22.)
2) Sadler’s Wells Theater(2024). Choreographer Convesations-Cristal Pite and Jonathon Young, https://www.sadlerswells.com/digital-stage/choreographer-conversations-crystal-pite-and-jonathon-young/ (검색일: 2026.6.23.)
3) Ibid.

이지선

춤연구가, 비평가. 성균관대학교 무용학과 초빙교수, 댄스&미디어연구소 연구원으로 동시대 춤 미학과 비평을 가르치고 연구하고 있다. 실천연구에 관심을 갖고 공연현장에서 크리에이티브 퍼실리테이터로서 안무리서치, 기획 및 아카이빙 등에 참여하고 있다. 2004년 국제공연예술제 제1회 젊은비평가상으로 등단하였으며, 춤웹진, 몸, 춤과사람들, 춤in 등에 기고하였다.​

2026. 7.
사진제공_LG아트센터 *춤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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