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김보라 〈숨은 존재들〉
폐허가 된 몸, 생의 놀라운 힘
김혜라_춤비평가

김보라의 〈숨은 존재들Minor Beings〉(10.3~4. 아르코예술극장대극장)은 전작(〈내가 물에서 본 것〉)에서 이어진 사유가 한층 깊게 몸 안으로 들어간다. 김보라는 알아차림, 오염, 폐허, 난잡한 돌봄, 포자, 교란의 단어를 프로그램에 굵은 글씨로 강조한다. 그러나 막상 무대에서 이 단어들은 설명되지 않는다. 무용수 몸의 상태를 따라가다 보면 개념은 언어적 정의를 벗어나 새로운 감각과 사유로 다가온다. 몸은 개념을 재현하는 대신, 기존 언어로는 포착할 수 없었던 의미를 생성한다.







김보라 〈숨은 존재들〉, 아트프로젝트보라 제공 ⓒ윤관희



무대 중앙에는 대충 내던져진 천 위에 풀더미가 덩그러니 놓여 있고, 주변에도 메마른 잡초와 여러 질감의 천, 실, 비닐이 뒤엉킨 더미가 있다. 더 이상 쓰임을 갖지 못한 것들만 남은 건조하고 황폐한 무대풍경이다. 무대 위에 객석이 마련되어 관객은 무용수들의 미세한 몸짓과 소리까지 가까이에서 느끼기에 적합한 거리를 유지하게 된다. 낮은 조도 속에서 돌 부딪치는 소리가 불규칙하게 들리고, 무용수들은 불현듯 모습을 나타내지만 쉽게 포착되지 않는다. 관객의 시선은 한곳에 머물지 못하고 공간을 더듬는다. 수도승을 연상시키는 긴 망토형 옷을 입은 무용수들이 곳곳에서 조용히 마치 그곳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처럼 공간에 스며든다. 객석 의자 사이로, 관객석과 바닥의 틈으로, 무대 기둥 주변을 서성인다. 존재감을 드러내기보다 들키지 않으려는 듯한 모습이다. 제목 그대로 ‘숨은 존재’ 혹은 ‘숨겨진 존재’의 모습이라 짐작되는, 감춰진 몸이다.





김보라 〈숨은 존재들〉, 아트프로젝트보라 제공 ⓒ윤관희



무용수 일부가 뒤엉킨 더미(내 눈에는 쓰레기 더미로 보인다)로 다가와 함께 중앙으로 서서히 이동한다. 약 30분 동안 이어지는 행위에는 뚜렷한 목적성이 없어 보인다. 무용수들은 더미의 일부가 되기도 하고, 그 안에 몸을 기대거나 포개기도 한다. 그들은 더미를 옮기는 주체에 머물지 않고, 몸과 오브제가 하나의 환경을 함께 구성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누가 누구를 움직이는지 분명하지 않다. 몸이 더미에 닿고, 더미가 몸의 움직임을 제한하면서 움직임의 방향도 달라진다. 관계가 지속될수록 몸과 사물 사이의 경계는 흐려지고, 둘은 서로 다르지만 유사한 존재성을 가진 것으로 감각된다. 천더미와 뒤엉킨 무용수 몸은 어느 순간 폐허 그 자체처럼 감각된다. 천더미 사이에서 몸도 함께 허물어져 있다. 몸의 형상은 이미 기능을 잃은 물질이 된다.



김보라 〈숨은 존재들〉, 아트프로젝트보라 제공 ⓒ윤관희



망토를 벗은 뒤 무용수 움직임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무용수의 몸은 둥글게 말리고, 손가락 관절과 어깨 마디는 꺾이며 바닥에 짓눌린다. 바깥을 향해 뻗기보다 자신 안으로 더욱 깊이 침투하는 모양새다. 개별적으로 일련의 움직임을 고수하던 몸들은 서로를 향해 얽히기 시작한다. 서로 붙고 틈새를 비집어 들어간다. 긴장감이 극도로 고조되면서 더욱 밀착했다가 서로를 밀어내고, 겹겹이 포개진 몸들은 더욱 팽팽하고 치열한 관계를 만들어간다. 마치 어둡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생명체들이 조용하지만 필사적으로 군집을 이루는 것처럼 말이다. 얽힌 몸들은 어떻게든 함께 존재하려는 형상처럼 보인다. 생존하려는 몸이다. 이때 무대가 천천히 회전하며 관객의 시선을 한곳에 고정하지 않게 한다. 내 시선이 닿는 곳에서는 몸과 사물의 관계가 달라지고,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도 또 다른 움직임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이다.





김보라 〈숨은 존재들〉, 아트프로젝트보라 제공 ⓒ윤관희



불완전하고 우연적인 무용수의 몸은 무엇인가를 감추려는 듯 말리고 숙이고 웅크리고 있지만 숨과 소리는 완벽히 감춰지지 않는다. 참으려 해도 목과 가슴 사이에서 새어 나오는 신음은 몸이 자신의 상태를 더 이상 감출 수 없을 때, 말보다 먼저 나오는 신호다. 그래서 이 신음이 고통스럽다. 짓이겨지고 해진 몸 안에 있던 숨으려는 몸과 드러나는 몸이 동시에 존재한다. 몸 내부에서 어쩔 수 없이 새어 나오는 소리가 관객 저마다의 ‘숨은 존재’에 닿았을 가능성이 있다. 적어도 나는 내 안에 꾹 누르고 있는 무엇을 순간적으로 생각했다. 이즈음에 이르면 폐허의 풍경은 포착할 수 없으나 어딘가에서 여전히 살아가는 존재들의 세계로 다가온다. 폐허는 더 이상 버려진 공간이 아니라, 보이지 않은 존재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세계가 된다. 뭉쳐있던 무용수들은 다시 시작과 유사하게 공간속으로 흩어지며 마무리된다.



김보라 〈숨은 존재들〉, 아트프로젝트보라 제공 ⓒ윤관희



김보라의 작업은 그동안 동시대적 개념을 적극적으로 창작에 적용해왔다. 그 과정에서 개념이 춤보다 앞서며 감각적 표면에 머무르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물에서 본 것〉에서부터 그의 사유는 개념에 경도되기보다 그것을 몸으로 끌어안으려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숨은 존재들〉은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전작보다 훨씬 깊은 상실과 절망을 품고 있다. 전작에서 ‘돌봄’이 회복을 향했다면, 이번 작업에서 ‘돌봄’은 회복과는 거리가 먼 상태로 드러난다. 오히려 무너진 몸의 상태를 그대로 바라보고, 그 안에 남아 있는 무엇인가를 알아차리는 시간이 된다. 몸은 그렇게 스스로를 느끼고 관찰한다. 작품은 해결점을 내놓지 않는다. 아니 내놓을 수 없는 상태다. 그 과정에서 개념은 몸 안에서 숙성되어 간다.

형식 면에서도 사유를 촉진한다. 빛의 변화와 음향, 속도와 강도, 밀도 있는 움직임이 결속하면서 몸과 오브제의 경계는 흐려진다. 특히 신음은 말과 몸의 언어 사이에서 언어로 규정되지 않는 감각을 드러낸다. 회전하는 무대는 하나의 대상을 온전히 포착하려는 시선을 끊임없이 어긋나게 한다. 이처럼 형식은 주제를 전달하는 수단에 머물지 않고, 무엇을 보고 무엇을 놓치는지 관객의 지각 방식과 감각의 질서를 흔든다. 너덜해진 더미가 천장으로 올라가는 순간, 더미와 뒤엉켜 있던 몸의 상태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버려진 물질의 상태와 몸의 상태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눈앞에 놓인다. 인간과 비인간,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공존하는 세계로 감각된다. 안무는 관객의 감각으로 전유되며 생각의 지평을 확장한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춤이다.

요즘 현대춤을 보다 보면 개념이 앞서는 경우가 있다. 페미니즘, 생태, 물질, 비인간 등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읽는 여러 담론이 춤 안으로 들어와 춤의 말을 넓혀왔다. 춤이 동시대의 문제와 만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렇지만 춤이 이미 알고 있는 담론과 이성의 틀을 확인하는 데 머문다면, 굳이 몸으로 할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내가 춤에서 기대하는 것은 오히려 그 틀로는 아직 닿지 못한 곳까지 몸이 나아가는 것이다. 몸의 감각으로 세계를 발견하고, 삶을 다시 발견하며, 그 안에서 나 자신마저 새롭게 발견하는 것. 앎으로 변하는 춤 말이다.

이번 작업에서 김보라가 제시한 ‘폐허’와 ‘난잡한 돌봄’이라는 개념은 작은 몸의 움직임에서 먼저 감지된다. 물질을 다루는 방식과 타인의 몸 틈새를 파고드는 행위는 가시적 공간과 비가시적 공간이 공존하는 복층적 세계를 드러낸다. 그럼에도 이 음습한 춤은 삶을 포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오히려 흩어지고 사라지고 무너진 자리에서 다시 꿈틀거린다. 자신의 상태를 알아차리려는 의지로 움직임을 멈추지 않는 것, 어쩌면 그것이 이 작업에서 말하는 ‘돌봄’이지 싶다. 〈숨은 존재들〉은 숨겨진 존재의 정체를 밝히기보다, 존재를 알아차리고 다시 살아갈 가능성을 찾아가는 몸의 잠재적 복원력을 드러낸다. 삶이 몸을 통과하고, 몸이 다시 그 삶을 사유한다. 이번 작품은 김보라의 창작적 진전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김혜라

<춤웹진>​ 편집장. 현장 비평가로 2012년 한국춤비평가협회를 통해 등단했다. 월간 <춤웹진>과 <더프리뷰>에 정기적으로 컨템퍼러리 창작춤을 기고하고 있으며, 국공립을 비롯하여 여러 문화재단에서 심의와 평가도 병행하고 있다. 세종시문화재단 자문위원이며 중앙대에서 비평관련 춤이론 수업을 하고 있다.​​​​​​​​​​​​​​

2026. 11.
사진제공_아트프로젝트보라, 윤관희 *춤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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