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2026 SPAF
부유하는 존재들의 것이며, 날 것으로, 어설프다가,
그래도 함께 해요로 다가 서는 춤
이지현_춤비평가

몇 년 전부터 서울국제공연에술제(이하 스파프)에서 공연을 본다는 것이 새로운 관람 경험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체험했다. 해외에서 공연을 보거나, 해외축제에서 작품을 관람할 때는 극장도, 분위기도, 관객들도 모두 달라지기 때문에 그런가 했었고, 그 해의 주제가 무엇인지, 큐레이팅의 주안점이 무엇인를 중심으로 작품을 보는 것이 대화의 내용이기도 해서 축제와 작품을 연결해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가도 국내로 들어오면 대다수의 축제는 공공지원금을 분배하는 플랫폼 기능에 무게를 두는 경우가 많아서인지 축제의 컬러와 주제보다는 예년에 비해 각 안무가들이 어떻게 변화하는가에 중점을 두고 보게 된다.

규모가 크고, 관주도의 축제라는 위상때문인지 언제부턴가 현장에서는 스파프가 부실하면 다른 일보다 더 실망감이 크고, 스파프에서 좋은 작품을 만나면 더 뿌듯하고 기분 좋은 일이 된다. 사실 축제가 작품 제작을 많이 할 수 없는 형편 속에서 축제와 선정작들의 연관성은 크지 않은 게 현실이고 보니 선정작들은 연때가 맞아서 라는 운이 더 많은 지배력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축제를 통해 축제가 감지하는 현재에 대한 감수성과 그것이 반영된 슬로건, 그리고 작품들을 연결시켜 보는 걸 경험하게 된다는 건 여러 상황상 희유한 일이긴 하다.

그러니 스파프가 열리면 올해 주제가 뭔가부터 궁금해진다. 2022년 ‘전환(Transforming)’이라는 주제로 시작하여, 경계없는 질문들(2023), 마주하는 시선(2024) 등으로 국제적 흐름을 의식하며 동시대 감각을 키워가던 스파프는 2025년부터는 ‘얽힘과 마찰’이라는 주제로 ‘우리’를 의식하는 또렷하게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관점과 형식의 차이를 하나의 축제에 담게 되면 생길 여러 얽힘과 마찰을 예견하고 그럼에도 기꺼이 그렇게 해보겠다는 지향이 보이니 괜히 축제가 궁금해지게 만들었다.

그러다 올해는 “함께 상상하고 서로 연결되는 ‘예술의 다중우주’”로 보다 ‘공존’에 방점을 찍고, 그 공존을 어디까지 ‘확장’할 것인가를 보여주겠다 하니, 다중우주라는 어찌 보면 별 특색이 없는 용어임에도 스파프가 어디까지 담아낼까, 어떻게 서로를 연결시킬까라는 질문으로 치환하며 극장을 찾게 된다.1)







마틸드 모니에르&도미니크 피가렐라의 〈소아페라, 인스톨레이션〉 ⓒ서울아트마켓



올해 아비뇽 축제의 한국어 초청 언어 프로그램과 연결되어 ‘페스티벌 아비뇽 @SPAF 2026’으로 온 무용 섹션의 작품은 마틸드 모니에르&도미니크 피가렐라의 〈소아페라, 인스톨레이션〉(10.9-10. 국립극장 하늘극장/ 이하 소아페라)이다. 마틸드 모니에르가 몽펠리에 국립 안무 센터 감독 당시 몽펠리에 페스티벌에서 초연된 이 작품은 2012년 역시 스파프의 초청으로 한국에서 공연을 올렸었다.

공연이 시작되면 무대 중앙 천정의 비누거품 제조기에서 작동 소음과 함께 거품이 무대 위로 떨어지기 시작하고 거품은 이내 산처럼 쌓이기 시작한다. 그 사이 어느 틈에 출연자 몇몇은 거품 안에 들어가 있다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가벼운 일상 등산복과 같은 기능성 의류를 입은 4명의 출연자들은 각자의 공간을 점유한 채 거품 속에서 혹은 거품과 함께 움직여 나간다.

“매번 비누 거품을 만들어 연습을 하며, 거품이 온도와 습도에 예민하기 때문에 많은 고려를 해야하는 애로사항”을 얘기했으며(관객과의 대화 중에서) 가장 중요한 건 거품과 퍼포머와의 관계이고, 모든 일이 그렇듯이 그 관계에서의 핵심은 “뜻대로 다뤄지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고 안무가는 전한다.

내가 볼 때 이번 내한공연에서 가장 애로 사항은 하늘극장의 공간적 특색과 구조에 있었던 거 같다. 높은 천장과 넒은 공간의 공기들은 상대적으로 거품을 빨리 사라지게 하는 압력이 높은 공간이었고 거품은 그 안에서 환상적인 풍만함과 신비함을 충분히 드러내기 전에 애처롭게 꺼져갔다. 행위자가 뜻대로 다룰 수 없는 사물과의 공존은 또한 더 있기를 바라도 소멸되어 가는 예상된 측면이 더 부각되었다. 그 상황은 곧 공연 시간을 결정하는 요인이 되었고, 공연은 아쉽게도 45분을 채우지 못하고 거품과 함께 사라졌다.

거품을 섬세하게 다루는 퍼포머의 솜씨, 우연과 필연이 겹쳐 드러나는 어떤 거품의 형상들, 꿈 속인 듯한 몽환적인 분위기는 인생살이를 은유하기에 아름다운 장치인 것은 분명했고, 마틸드의 2026 신작 〈Silence〉와 페미니즘 작품인 〈블랙 라이츠〉(2023)가 투어 공연의 대부분을 채우고 있는 상황에서도 〈소아페라〉가 투어 리스트에서 빠지지 않는 걸 보면 이 작품이 갖고 있는 매력은 분명히 있어 보인다. 하지만 마틸드의 오랜만에 한국에서의 공연을 기대했던 관객에게는 아쉬움이 있었을 거 같다.


발레 애호가들이 사랑하는 따뜻한 발레 〈메타 발레: 비(非)-코펠리아 선언〉

제목에 선언이라고 들어가 있으나 이 작품은 시종 아기자기하고 싱싱하고 풋풋하다. 2024년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에서 제작, 초연된 〈메타 발레: 비(非)-코펠리아 선언〉(10.18. 4시. 국립극장 달오름/ 이하 메타 발레)는 초연 멤버 7명 중 2명이 교체되어 이민진, 신민이 빠지고 김혜인, 남선희, 박미용, 이가경, 임다운, 지혜경, 최윤희의 출연으로 2년만에 공연되었다.

컴퍼니 이름 ‘떵샤의 모던댄스’의 윤상은이 움직임 가이드 및 안무를 맡은 이 작품은 안무자의 발레 워크샵 〈모든 몸을 위한 발레〉에서 모여 자연스럽게 탄생한 작품이다. 발레의 정형화된 미적 기준을 깨고 자신만의 발레를 시작한 이들은 가이드가 소개하는 발레의 형식과 동작 위에 자신의 이야기와 감각을 덧붙여 자기의 이야기를 담아 발레를 가지고 유쾌하게 놀이를 한다.







떵샤의 모던댄스 〈메타 발레: 비(非)-코펠리아 선언〉 ⓒ서울아트마켓



그 놀이의 가장 큰 규칙은 솔직함과 자연스러움이다. 공연을 지배하는 아기자기한 감성이 살아있는 것은 자신의 이야기에 뿌리를 두고, 자신의 몸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발레를 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이 감성을 단단하게 뒷받침하는 것은 한정원(작곡 및 연주)의 피아노 반주이다.

고되기로 말하면 최고의 난이도를 가진 발레 수업이 가장 매력적인 것은 피아노 연주자의 라이브 반주 때문이다. 피아노 한 대로 모든 근육을 훈련하고 그것을 넘어 감성을 동작에 담아내는 훈련을 자연스럽게 해주는 것이 피아노 반주이다. 역사적으로 음악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발레라는 장르는 이런 특성으로 무대 위에서뿐 아니라 무대 전과 무대 밖에서의 감성까지 지배하는 힘이 강하여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우리의 삶 속에서 펼쳐지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많은 발레 애호가를 만들고 그 중심엔 역시 클래식 음악과 그 감성이 있다.

〈메타 발레〉는 피아노를 하수 뒤쪽에 놓아 발레 워크샵 분위기를 그대로 옮겨 오니 출연자들이 무대에 위축되지 않고 현장의 분위기를 그대로 잘 보존해 보여주어 필요없는 긴장이나 과장없는 모습을 볼 수 있어 좋았다.

발레 용어에 대한 설명과 의미로 이어지는 7장으로 나뉘어 이어지는 구조도 상당히 탄탄했고, 그 안에서 출연자들은 그것이 요구하는 관습에 자신의 모습으로 툭툭 불거진다. 특히 발레 동작에서 요구되는 기준을 허무는 방식으로 구불구불한 그랑 바뜨망, 난폭한 아라베스크, 졸린 피루엣 등 동작 용어에 역설적인 수식어 붙여 한 명씩 지나가는 장면은 신선한 풍자로 꽤 긴 여운을 남겼다. 그 여운은 놀이 삼아 하는 날 것의 발레 수업 같지만 이들의 발레 사랑과 자신에 대한 애정 중 어느 것으로도 밀리지 않으려는 팽팽한 긴장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씨름〉에 더 필요한 것


초연에 이어 스파프에서 두 번째로 모든 컴퍼니의 〈씨름〉(10.14-15. 서강대 메리홀)을 봤다. 출연자는 전원 교체(강성룡, 김도현, 김현진, 노은희, 박서현, 이어린)되었으나 작품은 거의 초연의 구조를 유지했다. 씨름에 대한 역사적이고 문화사적 접근을 다큐 형식으로 만들고 관객의 눈 앞에서 씨름판을 만들어 직접 씨름 관람을 경험을 느끼게 하는 참여형 작품이다.







모든컴퍼니 〈씨름〉 ⓒ서울아트마켓



메리홀의 객석을 모두 접어 넣어 버리고 씨름판을 만들어 넣고 3면의 객석을 개축하여 만든 공연장은 여전히 신선하다. 그리고 여전히 엿을 나눠주고, 출연자가 스마트 폰을 들고 나와 관객을 촬영하며 진행하는 관객의 눈씨름, 손가락 씨름 등은 여전히 편하고 재밌다. 그럼에도 참여를 끌어내는 자연스러움과 매끈함 뒤에 작품의 본론으로 다시 돌아갈 때 관객의 그 감정을 끌고 가지 못하는 단절은 여전히 아쉬웠다.

이 작품이 씨름판을 실제와 거의 비슷하게 재연하고 씨름도 재연한다는 것은 특색이라기 보다는 작품을 시작할 때의 주요한 장치로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이 자주 재연되기 위해서라도 이 실제성과 출발 지점은 어떻게든 공연 작품 안에 녹여내는 과정이 필요해 보인다. 그때에야 이 작품은 씨름판이 실제로 들어오지 않아도 다큐성으로 탄탄하게 떠받쳐지면서 공연 예술로의 빈 부분을 메워 나갈 수 있을 거 같다. 이 작품의 발전은 그래서 새로운 영역에 대한 개척이 될 소지가 분명하다. 씨름판 특유의 공동체적인 놀이성과 신명을 관객과 함께 하며….


완결된 서사를 거부하며 미끄러질 때

히히히는 웃음 소리이고, 스토리는 이야기의 스토리다. 히를 두 번해서 히히-히스토리여도 상관없고 히히히-스토리여도 별 상관은 없을 거 같다. 어쨌든 기타를 맨 그녀가 혼자 나와서, 연주와 소리와 춤으로, 뭔가를 보여주겠다는 무거움은 싹 빼고 히죽거리는 그 정도의 무엇을 해보겠다는 작품 〈히히히스토리〉(10.15-17.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는 스파프의 25-26 협력예술가 황수현의 작품이다.





  

황수현 〈히히히스토리〉 ⓒ서울아트마켓



오렌지색으로 배색된 자그마하고 예쁜 전자 기타를 매고 흰색 남방과 통이 있는 면 바지에 운동화를 신은 황수현이 락커의 포스로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등장한다. 원형으로 의자와 방석을 놓은 객석과 그 객석 가까이 3군데에 마이크를 놓은 구조속에서 몸을 낮춰 바닥에 구르면서 관객에게 다가와 귓속말로 “언젠가는 잘 칠 수 있을지 모른다고 전해주세요”라고 하며 이야기를 전하고, 그 이야기를 전해들을 때 관객은 이 귀여운 속삭임에 무장해제 된다.

기타 초보자의 어색함은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양해 된다. “1974년 12월 7일 눈이 오락가락하는 날 태어났다고 전해주세요”, “1977년 겨울 눈이 많이 와서 눈을 먹었다고 전해주세요”라며 자신의 이야기인 듯한 내용을 관객과 공유하면서는 관객은 정서적으로 공감할 준비도 충분히 된다.

리드미컬하게 연주하고 그 연주를 녹음해 다시 음악으로 만들거나, 미리 만들어 놓은 듯한 음악을 기타 연주의 반주 음악으로 쓰거나, 목을 가다듬으려고 소리를 내거나 과장해서 생목의 괴성을 만들어 내는 모습이 사실인 듯 연기인 듯 딱 그 중간에 선을 놓고 줄타기를 한다. 이 과정에서 소소한 웃음을 때때로 선사하면서 관객의 공연의 ‘무엇’에 대한 기대는 슬슬 풀린다. 작품을 끌고 가는 것은 연주하는 행위와 소리, 노래 등이다. 전작 들에서 호흡과 구음, 진동 등에 천착했던 흐름과 맞닿아 있으나 더 과감해졌고 관객의 의지나 기대를 무력화시키는 방법은 더 부드럽고 애교스러워졌다.

관객 안에서 구조로 성립하려는 의도와 완성으로 나가려는 생성 과정을 해체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분절적 구조는 안무가가 의도한 대로 하나의 스토리로 나아가지도 않으며, 전달시킨 말은 발화자의 시발점과 다르게 돌아오는 게임으로 완성되지도 않는다. 잠시 기억의 정거장을 만들 뿐이다. 그것마저도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린다. 그래서 관객의 습성과 노력은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간다. 그런 허탈함을 깔고 무대와 만들어져 버린 거리감 이후의 공기는 처음의 그것과는 상당히 달라져 있다.

스토리를 제목에도 넣고 작품의 시작도 자신의 이야기인 듯한 문장을 관객에 흘리는 것으로 시작해 스토리, 이야기를 관객이 처음 설 자리로 설정했다는 것, 좁은 거기에 서 있는 관객에게 나 잡아 봐라 하며 꼬리를 감추는 전략은 전략이라 하기에는 퍼포먼스의 암묵적 계약으로는 상호성이 충분하지 않아 의도치 않은 혼란을 낳는 어설픈 해체가 된다.

많은 부분 관객의 반응에 대해 계산된 이 작품에서 계산되지 못한 것은 계산된 여러 가지와 퍼포머의 현존감의 컬러, 실존적인 톤의 관계로 보인다. 공연에 나와서 잘 쳐야 한다는 것이 언젠가는으로 ‘지연’된 연주, 구전된 말들의 자연스런 ‘실종’, 조화롭지 않은 소리와 ‘맥락과 분리된’ 춤동작들과 밝고, 능청스러워 보이는 퍼포머의 실존적 감정선은 위태롭게 공존했다. 그래서 차라리 다른 퍼포머를 써서 그 부분까지 계산했다면 훨씬 의도한 것이 잘 느껴졌겠다는 상상을 하게 된다.


춤연주 드라마라는 새로운 형식이 가진 Ecology

바리나모의 〈건져올렸지만 가라앉으려는 경향〉(10.9-10.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은 2시간에 육박하는 큰 작품이다. “어떤 주된 경향도 존재하지 않는 다주체(多主體)의 세계를 찾아 나서는 여정”을 담은 작품은 당연히 굽이굽이 길고 많은 이야기가 담길 수밖에 없다. 빠른 속도의 바깥 세상의 호흡과는 다르게 바리나모가 만든 무대에서 오브제들은 시시콜콜하고 섬세하게 그 시간으로부터 벗어나 존재한다.







바리나모 〈건져올렸지만 가라앉으려는 경향〉 ⓒ서울아트마켓



무대 위 5군데의 지점에 고물상에서 온 것 같은 맥락없는 살림살이 도구와 사물들이 군집으로 놓여있다. 전화기 2대와 의자, 촛대, 수조, 종이, 비닐 등으로 연주 드라마라는 형식의 소리 질감은 그 사물에서 생성된다. 연줄 주나모가 존재감을 깨우는 이 독특한 방식의 사물들의 숨쉬기와 용트름은 그렇게 시작되고 그 존재감이 이내 무대에 살아난다. 사물을 다루는 퍼포머들의 존재는 주재자도 아닌 겸손하고 사물과 동등해 보이는 연출은 이 작품의 묘수 중의 묘수이다. 그래서 그들의 춤은 “인간 중심의 세계관”을 따르지 않는다. “결코 고정되거나 독점될 수 없다”

오래 구상된 흔적, 기계적으로 사고하지 않는 사고의 시간성이 이 작품을 보는 관객에게 마법처럼 작용하여 바리나모의 ‘건져올렸지만 가라앉으려는 경향’의 세계로 데려간다. 그리고 그 세계는 충분히 여유 있고, 다양하며, 구석구석이 살아나는 마술을 보여준다.

“해부학, 인지학, 생리학, 발생학 등 신체에 대한 다각도의 연구”가 오래 묵혀 발효된 힘이 이 작품의 스케일이 만만치 않음을 보장한다. 그리고 이 힘과 스케일이 관객을 그곳에 오래 머물 수 있게 담아내(containing)준다. 오랜만에 “부유하는 존재들‘의 솔직한 경향을 차분하고 성숙한 시어(詩語)로 만나 본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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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용 섹션의 통합적인 방향성에 대한 글은 이 글을 바탕으로 추가, 보완되어 스파프 웹사이트 블로그에 실릴 예정이다.

이지현

1999년 춤전문지의 공모를 통해 등단했다. 2011년 춤비평가협회 회원이 되었으며, 비평집 『춤에 대하여 Ⅰ, Ⅱ』를 출간했다. 현장 춤비평가로서 왕성한 비평작업과 함께 한예종 무용원 강사를 역임하고, 현재 아르코극장 운영위원과 국립현대무용단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2026. 11.
사진제공_서울아트마켓 *춤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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