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2013년도 ‘창작산실’ 발레부문에 선정된 네 작품이 연달아 무대에 올랐다. “창작부터 유통까지 공연제작의 전 과정을 경쟁을 통해 단계별로 지원하고 이를 통해 대표 공연 레퍼토리를 육성하고자 한다”는 지원 방식은 2008년 시작된 ‘창작 팩토리’로부터 시작되었다. 서류심사나 사후 작품심사보다 체계적인 지원방식이다. 기존의 두 심사 방식과 함께 공연 준비상황을 한 번 더 평가 받음으로써 구성이 보다 치밀해질 것이고, 특히 실연 심사를 위한 출연자 확보 노력은 ‘창작산실’의 대표적 장점이다. 그러나 창작의 중심체인 안무자의 소양은 누가 지켜본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수 있는 능력이 아니므로 회를 거듭하며 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관찰하는 과정에 있다.
이번에 선정된 조윤라 이원국 문영철 이상만은 발레계에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 중인 무용가들이라 무대를 어느 정도 예단할 수 있었다. ‘창작산실’ 작품의 공통점은 우선 화려하다. 무대장치나 조명, 영상, 의상 등 평소에 제작하기 어려웠던 고비용 장식을 장만할 수 있는 지원금 덕분일 것이다. 관객에게 슬픔을 전하는 가난한 무대 문제는 확실히 해결해 준 사업이다.
‘창작 산실’이 보다 가치 있어 보이는 측면은 무용 전공자들의 저변층을 두텁게 만드는 효과다. 대학 졸업생들이 넘쳐나고 있지만 직업발레단의 문은 너무 좁다. 대다수가 과거에 비해 크게 향상된 기량을 지녔으나 그것을 발휘할 기회조차 얻기 어려운 현실에서 이런 무대는 작은 돌파구 역할을 한다. 개인무용단원들에게 보다 안정적인 활동 기회를 제공하는 현황이 가장 큰 장점으로 부각되며, 직업단체를 떠난 무용가들을 재 등용하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공연 무대 증가, 전문가 집단의 활동 증가, 그로 인한 접근성 확대와 친밀감 형성이 대중화에 도움을 준다. 그러나 이런 장점이 지원제도의 최종 목적은 아니므로 ‘창작품’과 ‘레퍼토리’라는 명칭에 걸맞은 결과물 완성에 박차를 가해야 할 것이다.
2013년도에 선정된 네 단체는 12월에 모두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공연했다. 조윤라(13-14일)의 <스크루지>는 찰스 디킨즈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을 연극적 마임과 현대적 발레 어휘로 옮긴 작품이다. 요점은 스크루지의 등퇴장, 연인과의 대무, 군무의 조화로운 연계에 있었고, 이를 위해 연기자 강선구와 전 국립발레단 스타들인 김주원, 이원철을 주역으로 내세웠다. 무언 배우처럼 등장한 노인 스크루지를 따라 집 모형이 앞뒤로 이동하는 장치가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고, “마을사람들이 악덕 주인이라 조롱하는 모습, 악령에 이끌려 미래의 죽음의 모습을 바라본 스크루지의 반성과 감사”같은 여러 상황이 묘사된다. 이광석 유회웅 문신하 등의 솔리스트가 활력을 더했고, 안무자 조윤라가 평소 즐겨 쓰던 동작구가 김주원의 몸을 통해 나오는 솔로가 인상적이었다.
이원국발레단(17- 18일)의 <스코틀랜드의 꽃>은 셰익스피어의 ‘맥베스’ 이야기다. 총 2막 8장으로 맥베스의 집, 마을사람들의 춤, 왕이 된 맥베스, 궁전, 뱅코우의 죽음 후, 마녀들의 동굴, 피의 저주, 맥베스의 최후로 나뉜다. 숲에서 만난 세 마녀는 맥베스가 왕이 될 것이며 뱅코우는 왕을 낳을 것이라는 예언을 한다. 맥베스 역 이원국은 부인 역 최예원의 부추김에 용기를 얻어 던컨 왕을 죽이고, 뱅코우 장군과 아들 플리언스의 암살을 명한다. 그러나 맥베스 부인은 자살하고, 폭군이 된 맥베스도 결국 던컨의 아들 멜컴 왕자에게 죽는다.
<스코틀랜드의 꽃> 출연진은 30명이 넘는다. 맥베스 부인 역을 더블 캐스팅해 이틀 공연 중 하루는 김주원이 출연했고, 기량 과시를 위해 투입된 것으로 보이는 암살자 역 윤전일과 전령 역 이원철도 보였다. 던컨 왕과 주변 귀족 역할은 후원자들의 우정출연으로 보였고, 다수의 군인들이 무대를 가득 채웠다.
이처럼 대규모 단원을 이끈 이원국의 능력은 뛰어났다. 여러 발레단 주역 경력을 통해 얻은 상황묘사력이 도처에서 빛을 발했다. 자객들의 살인 장면에서 쫒는 자와 쫒기는 자가 차례로 무대에 등장해 긴장감을 높일 때, 왕비가 자신의 손에 피가 묻었다며 공포감을 표할 때, 유령을 등장시킨 사실적 묘사와 감정 선이 연결된 기교까지, 열정과 실력이 조화를 이뤘다. 특히 여자주역 최예원의 요염한 발레리나 연기는 시종일관 눈길을 사로잡았다. 지원금이 합리적으로 지출되었다고 느낄 정도로 여러 장식적 요소들이 적재적소에 배치된 구성이다.
문영철 발레 포에마(21-22일)의 <파랑새>는 벨기에 작가 마테를링크의 희곡 ‘파랑새’를 소재와 주제로 삼았다. 원작은 남매 이야기로, 꿈속에서 파랑새를 찾기 위해 여행하다가 결국은 현실에서 키우던 새가 파랑새였음을 깨닫게 된다는 내용이다. 발레 <파랑새>는 총 3장 구성으로 주인공은 안나라는 이름의 소녀다. 1장 꿈속에서 안나는 요술쟁이, 빛의 요정, 물의 요정을 만나고 파랑새가 든 새장을 얻는다. 2장에서는 파랑새가 가짜임을 알고, 다시 새로운 파랑새를 만나지만 죽어버린다. 3장은 현실이다. 집에 있던 새장의 새가 바로 파랑새임을 알게 된다. ‘행복은 우리 곁에 있다’는 메시지는 원작과 동일하다. 이주희 조원석 염정우 등 한양대학교 동문발레단의 주역들이 열연했다. 첫 장면과 마지막에 등장한 파랑새 군무는 내용과 무관하게 들어간 추상적 춤이지만 줄거리 묘사를 압도하는 화려한 환상을 연출했다.
이상만 발레단(26-27일)의 <무상>은 ‘조신의 꿈’을 각색한 작품이다. 삼국유사 제3권 중 ‘낙산의 두 보살 관음, 정취와 조신’ 편 끝의 내용이다. 스님 조신이 한 여자를 좋아했으나 시집을 가버리자 관음보살을 원망하다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그 여인을 만나 아이를 다섯 낳고 50년을 살며 온갖 고생을 하고 결국 부인과 헤어져 꿈에서 깨니 수염과 머리가 하얗게 세었다. 이에 세속을 탐하던 마음을 버리고 절을 세웠다는 내용이다.
안무자 이상만이 대본을 쓴 <무상>은 내용이 많이 다르다. 도박장과 순경이 나오고 파계한 스님이 재즈 바에서 춤을 춘다. 물론 마지막 귀로는 불가를 향한다. 1948년생 이상만은 한국발레를 대표하는 남성 무용가들 중 한명이다. 1977년 미국 유학, 한국 남성 최초로 외국 직업발레단에 입단한 경력자로 임성남 김성일 이상만으로 이어지는 계보에서 여전한 현역이다.
이상만 발레단은 1985년 창단 이후 지속적인 공연 활동을 통해 전공자들에게 무대를 주는 전문 커뮤니티 역할을 해 왔다. 이상만은 최근까지 여러 작품에서 주역을 맡았고, 이번에도 주지 스님으로 출연해 대단원을 장식했다. 프랑스의 한 노장이 끊임없이 무대에 출연한 영상을 보며 ‘역사가 깊다’는 부러운 생각이 들었는데, 이제 한국의 이상만을 그에 견줄 수 있게 되었다.
2013년도 ‘창작산실’ 선정 작품들은 모두가 드라마틱한 내용을 다뤘다. 소설, 희곡, 설화의 스토리텔링이다. 이 공통점은 소재와 형식의 획일화라는 문제를 안고 있다. 한 시간 이상의 긴 작품이 필요하다면 가장 쉽게 접근하는 방식이 무용극 패턴이다. 흥행이 주목적인 발레단들에서는 이 방식이 현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세계적 명성의 안무가들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백설공주> 등을 새롭게 제작하는 이유는 대중성과 통일성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창작산실’에서는 형식의 다양성이 보다 중요하다. 획일화된 패턴이 반복된다면 새롭거나 독특한 작품은 그만큼 얻기 힘든 때문이다. 현대의 작품들은 줄거리 묘사보다는 감각의 세련미로 관객을 사로잡는다. 킬리안의 <프티트 모르>(1991)는 그의 대표작으로 인기가 높지만, 길이는 20분이 안 된다. 소품 제작은 3년간 연속지원이 가능하도록 하고, 새로운 구성형식을 제시한 계획서와 실연 출품작에 가산점을 주는 등 창작의 요점을 집어준다면 이 지원사업이 보다 활성화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