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2013 창작산실 현대무용 우수작품전_ 이경은 차진엽 예효승
창작산실 사업 추진전략이 없었다
이지현_춤비평가

 지난 8월 13일 ‘창작산실 현대무용분야’ 2차 면접심사를 통과한 8개의 작품들이 15분 길이로 시범공연 심사를 거쳐 그 중 3개의 작품이 완성작을 향한 ‘창작산실사업’ 지원을 받도록 결정되었다. 그 후 약 네 달이 흐른 뒤인 12월 17일부터 ‘2013 창작산실 현대무용 우수작품전’이란 이름으로 한 개 작품씩 3일 동안(1일 1회)에 걸쳐 공연이 진행되었다.
 작년에 발레부터 시작된 창작산실사업(이하 산실사업)은 올해 현대무용과 한국무용 분야로 확산되어 창작의욕을 자극하고 우수한 작품을 생산하겠다는 국가적 의지를 춤계 전체에 담아낼 수 있게 되었고, 많은 무용인들은 소액다건의 지원금제도로 갈증을 느끼던 중 (장르별로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약 5,000만원에 이르는 지원금을 한 작품에 투여할 수 있게 된 것에 가볍게 흥분하였다.
 그 만큼 경쟁은 치열했으며 안무가들의 의욕도 넘치는 듯 했다. 그러나 현대무용분야에서 선발된 3개 작품의 공연이 모두 끝난 지금 독립된 작품에 대한 생각과 더불어 사업과 작품을 연관시켜 되짚어 보게 되는 것은 어찌 보면 이 산실에서 태어난 작품의 운명일 것이다.


 

  


​객체에서 주체로 되어가기- 이경은의
 
〈행, 간(PA, USE)〉

 우수작 공연 무대에 오른 3개의 작품 리케이 댄스의 〈행, 간(PA, USE)〉(이경은 안무), Collective A의 〈Fake Diamond〉(차진엽 안무), 〈I’m so tired〉(예효승 안무) 등은 8월 15분 길이의 시범공연에서 봤을 때와 비교했을 때 이경은의 작품을 제외하고는 처음부터 설정된 주제를 시범공연에서의 방식을 유지한 채 지속적으로 물고 늘어진 흔적이 보인다.
 이경은 안무의 〈행, 간(PA, USE)〉을 시범공연에서 봤을 때 제목과 작품의도는 다분히 상식적인 수준이었으나 주제를 다루는 기법에 있어서 이전까지 현대무용에서 흔히 볼 수 없었던 인간 내면의 사악함과 표리부동함에 대한 예리한 시선을 비수처럼 꽂는 풍자방식과 거기에 확대경을 들이대는 듯한 속도의 지연 기법이 표면이 아닌 행간을 들춰보겠다는 작가의식을 발랄하게 담고 있어 적지 않은 기대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15분 버전의 지나친 기대 때문이었는지 완성작은 놀랍도록 예측에서 어긋나 있었다. 일단은 ‘행간’을 들춰내는 예리한 부분의 한 예였던 장면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으며, 그렇다고 그것을 대신할 만한 혹은 보다 발전된 ‘행간’ 들춰보기는 보이지 않았다.
 전반부는 조명 batten을 무용수 가까이 내리거나 올리면서 무대장치 효과를 내면서 흰색의 획일화되고 어떤 틀을 상징하는 뻣뻣한 질감의 옷으로 온 몸을 감싸고 건조하고 파리한 장면을 펼친다. 후반부와의 대조를 위해 필요했을 법한 이 장면은 필요이상으로 길었고 상투성을 벗어나지 못해 지리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전반부와는 달리 무용수들이 그 옷을 하나씩 벗어 젖히면서 한 여성무용수(권령은)가 머리를 풀어 가슴은 가려지게 한 채 거의 벗어 버린 나신으로 춤을 추는 장면까지의 발전은 작가에 의하면 “…부속이 아닌 주인으로서 삶을 재조합 하고자 하는 의지를…” 담아낸 장면으로 강한 대비를 이루는 흐름이다.
 이 작품의 핵심적인 기법은 ‘옷을 입고 있다- 옷을 벗는다’가 ‘객체’에서 ‘주체’가 되어가는 상징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이 방식은 후반부에서 옷을 벗어 던지고(무대에 벗은 옷이 뒹군다) 모든 무용수들이 배경에 얇은 초록의 천이 휘날리는 가운데 몸에 몸을 닿거나 닿을 듯한 덩어리를 이루며 추는 원무를 향해 가며 전반적으로 상당히 고조되고 벗은 몸의 살냄새를 진하게 풍기려는 의도의 것이긴 했으나 이분법적인 두 상태의 연결을 유추하기에는 어떤 구조적, 미학적 디딤돌도 마련되지 못했다.
 그래서 이경은 안무의 기존 스타일로 봤을 때 스스로는 상당히 파격적인 시도를 했을 것으로 생각되나 보는 이들은 목욕탕에 갑작스러운 화재로 도로로 튀어나오게 된 여탕 손님을 보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당혹감 그리고 안쓰러움에 먼저 젖어 버리고 말았다. 대중매체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일반여인들 마저 하체실종의(衣)를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것이 더 이상 시선을 끌지 않는 상황에서 무용수의 몸, 일상을 떠나 무대란 공간으로 옮겨진 몸이 벗고 춤을 춘다는 것이 어떻게 의미를 획득해야 할 것인가는 현대 춤예술의 기출문제이긴 하나 명답을 내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상황이다.
 옷을 걸친 몸이냐, 걸치지 않은 몸이냐는 껍질에 불과한 현상의 문제일 뿐이다. 왜 어떤 옷을 입게 되었으며, 왜 어떻게 벗을 것인지를 섬세하게 사유하고 그것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가 문제라면 문제일 것이다. 나신으로 반짝 충격을 주던 시대는 지났다. 오히려 옷을 벗어 충격을 주던 사람들은 옷을 입고 추기 시작하고 있다. 이경은이 시범공연에서 시도했던 것처럼 바로 현대인이 처한 “톱니바퀴를 빠져 나왔다. 시계가 멈추었다. 조각들이 튕겨져 나와 흩뿌려졌다”는 상황과 그 시간을 무한분할 해서 내면을 담아 낼 수 있는 몸을 보여줬다면 그 장면은 아주 달라졌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
 경륜이 만만치 않은 안무가가 자신의 가던 길을 망각한 듯 보이는 연유는 무엇일까? 과도한 압박감인가? 아니면 파격의 용기를 내고 싶었을까? 답이 잘 찾아지지 않는다.


 

 

풍자된 것과 풍자 되어진 것의 혼돈- 차진엽의 〈Fake Diamond〉


 차진엽 안무의 〈Fake Diamond〉는 출세지상주의, 신분상승, 배금사상 등의 현대인들이 겪어내고 있는 허영심에 관한 통찰을 안무가 내면에도 무엇인가를 추구하려는 욕망과 연결시켜 풀어내고 있다.
 세계의 문제를 나와 연결시켜 소화해내고 그것을 다시 내 몸을 통해 세계에 토해 놓는 방식은 차진엽의 주제에 대한 진정성을 인정하게 한다. 그리고 “허물 벗은 인간들의 나약한 본 모습만 남게 된다. 아니면 허물을 벗었을 때 진정 자유로워 질 수 있는 건 아닐까?”의 물음으로 허영스러운 의상들을 벗고 간결한 원피스 한 벌 혹은 내복 한 벌로 자유로운 본 모습을 드러낸다.
 ‘적과 흑’, ‘이수일과 심순애’를 바탕으로 욕망과 관련된 전형적 인물들을 끌고 들어오는 방법을 썼으나 15분 버전에서 보다 오히려 극적 토대는 추상화 되어져 버렸다. 김지욱의 역할은 강조되지 못한 채 제스처를 과장해서 만든 춤동작은 맥락에서 탈출하여 그저 동작이 되어 감흥을 격감시켰다. 풍자하기 위해 과시적인 의상은 거북할 정도로 리얼하게 허영스러워 무엇이 풍자고 무엇이 풍자의 대상인지 혼돈스러운 웃지 못할 전도가 일어났다. 허영과 교만을 드러낸 팔다리 긴 여성무용수의 몸과 동작도 예리한 포착과 묘사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의도되지 않은 동작의 미적 쾌감에 빠지게 했다.
 도로와 속도를 영상으로 담아내고, 자신을 찾아 허물을 벗듯 욕망을 벗고 두루마리 휴지를 천정부터 당겨 옷 속에 구겨 넣어 몸이 부풀어 오른 것처럼 그로테스크하게 왜곡시킨 형상은 프란시스 베이컨의 그림을 연상시키며 결말의 시각적 강렬함으로서는 역할을 하였으나 전체적인 맥락에서는 흐름이 매끄럽지는 않았다.
 15분 버전부터 이 작품의 관건은 얼마나 ‘스토리 베이스드(story-based)’에 충실할 것이며 동시에 어떻게 자유로울 것이냐 였다. 19세기 스땅달의 통찰을 21세기의 상황을 더욱 설득력 있게 하기 위해 가져올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면 욕망-욕망의 추구-좌절-살인으로 이어지는, 절정을 향해 가는 긴장감을 포기하지 말고 어떻게든 다루었어야 했는데 도입에만 활용하는 데 그쳐 이후의 구조는 안무가가 주제를 설득해 나가는데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 채 용두사미로 끝나 버렸다. 그러다보니 결말에선 의도하지 않았을 테지만 신파가 되었고, 그것은 곧 여태까지의 것들에서 하나도 새로울 것이 없었다는 걸 뜻한다.
 그러다 보니 보기 좋은 신체조건, 개성적인 동작스타일 등 안무자의 장점이라 할 수 있는 습관 속으로 다시 빠져 들에 되어 차진엽의 솔로 작품을 보는 양 별반 발전한 것이 없는 평작이 되고 말았다.


 

 

상황, 반응하는 몸, 그 몸으로부터의 동작- 예효승의 〈I’m so tired〉
 

 〈I’m so tired〉(예효승 안무)에서 가장 크게 달라진 것은 음악이다. ‘3호선 버터플라이’의 음악은 이후에 영상 스크린으로도 쓰이는 격자무늬의 벽 뒤에서 라이브로 동시 진행된다.
 무대 위에 옷걸이, 상자, 의자 등 온갖 일상의 기물과 자연스러운 움직임들이 침투하기 시작한다. 그저 크루들처럼 움직이는 자연스러움이 무대에 기물이 쌓여가면서 납득되어지지 않음은 긴장감을 높여낸다. 음성의 중첩, 리듬화 그리고 ‘3호선 버터플라이’의 노골적인 노래까지 그들이 만들어 내는 소리들은 그런대로 무대 위의 상황에 윤기를 더해주며 춤과 더불어 흐른다.
 무용수들은 찌그러진 곤혹스러운 자세에 머물고 그로부터 탈피(脫皮)를 한다. 우리의 일상이 어떻게 피로를 몰고 오는지, 우리가 어떤 꼬라지로 가해 당하고 있는지가 테이프로 몸을 감아 바닥에 묶어 놓는 시도로 보여진다. 서로 모이고 서로 줄을 서 몸을 밀착시킨 위로 또 다시 개입하고 엉겨드는 테이프의 끈적함은 저항하나 이미 피곤해진 나약한 몸을 보여주기 위한 반대항이다. 그 위에 터져 나오는 “… 해봤어, 그런데 별일 없었어!”를 반복하며 자신이 이 사회의 기준을 따랐으나 어떤 것도 이룰 수 없었음에 대한 넋두리에서 이 작품은 귀여운 솔직함으로 유머와 자조 사이를 오가며 절정을 향해간다.
 엔트로피를 높여가며 난장판이 되어가는 흐름은 굿판의 논리와 닮아 있다. 무대에서 예의를 준수하며 전반적으로 귀엽게 행해지는 난장과 넋두리, 화가 난 듯 몸에 힘을 주며 뿌리거나 내리치는 동작들은 정확히 상황에 대한 묘사와 그 상황에 반응하는 몸, 그리고 그 몸으로부터 나온 동작이라는 논리성을 갖춰가며 설득력을 갖는다. 그리고 피로사회에 대한 짜증과 탈선, 그 극한에서 도달하게 되는 낙원을 향한 꿈은 적절한 해원(解怨)의 카타르시스가 되고 현실에선 절대 이뤄질 수 없기에 아파트 옥상에라도 텐트를 치는 그 심정과 같은 마지막 장면은 통쾌함과 좌절감을 반반씩 섞인 여운을 남기는데 성공한다.
 〈I’m so tired〉의 미덕은 구조의 논리성이다. ‘현실, 현실에 대한 감각과 반응, 피로에 대한 규정, 피로의 형상화, 문제에 대한 개념화와 발화, 감정적 극점으로의 치달음과 그 뒤에 자청한 낙원과 평안’의 구조는 적절한 긴장과 해소를 오르락 내리락 하며 결론에 안착하는 안정감을 주었다.
 그러나 진행에 있어서 자신 없음, 밋밋함, 나약함이 작품 전체의 힘을 떨어뜨린 요인이 되었다. 이는 예효승이 주제에 대한 확신은 뚜렷하였으나 그것을 다뤄내는 것에 대해 아직은 경험이 부족해 자신만의 방식을 확신하지 못하는 것에서 온 것 같다. 그것을 가장 미심쩍게 만드는 것은 아마도 음악이었을 것이다. 음악은 많은 부분 장르적 충돌의 긴장감을 선사하거나 춤의 사이를 메우고, 춤이 채워주지 못하는 즐거움을 안겨 주었으나 춤과 더불어 놀지 못하고 삐죽삐죽 튀어 나오거나 불협화음을 만들어 냈는데 이 문제가 해결된다면 협업의 장점을 훨씬 많이 누리는 좋은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인공 산실(産室), 무엇이 있고, 무엇이 없었나?

 이 산실사업은 지방자치시대 이래로 문화재단을 통한 창작지원과는 달리 문화부가 직접 지원을 하는 중앙정부의 사업에 속한다. 그런 만큼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Arm Length(팔길이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지원 측의 간섭을 최소화하려는 정책의지)’를 견지하되 상대적으로 문화재단의 지원금보다는 좀 더 공공적인 방향성과 목표가 뚜렷해야 하는 사업성격을 갖는다. 그래서 인지 다른 지원심사절차와 다르게 정교한 진행과 방향성에 대한 점검이 진행되었고, 특히 국립현대무용단의 주관 하에서 안애순 신임예술감독의 첫 사업이 되다시피 한 조건으로 인해 어느 사업보다도 공들여 진행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제 열정과 관심이라는 추상적인 수준에서 한발 더 앞으로 나아가야 할 필요를 느낀다. 한 집안의 자식의 문제라면 엄마의 정성만으로도 세상에 나가 멋진 일을 할 수 있겠지만 한 나라의 사업일 경우 공공적인 출발점으로부터 기본적인 사업의 비전과 목표, 몇 가지 추진전략의 틀 속에서 사고하는 것이 이 사업의 차별성을 확보하게 해줄 것이다. 그것이 내부적으로 정리되고 진행될 때 사업의 결과는 물론이고 응모자나 참가자들 역시 이 과정을 통해 성장하게 될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한국의 현대춤에 부족한 것은 이번의 우수작 세 작품에서도 여실히 보여지듯이 대극장 무대를 아직도 소박하게 안무가 한 명의 상상력과 능력으로부터 채우려 한다는 점이다. 1시간 정도(〈Fake Diamond〉는 1시간 20분에 육박했다)의 작품으로 관객의 하룻밤을 책임지는 역량이 겨우 스태프 20명에도 미치지 못한다면(물론 수량의 문제는 아니다) 창작자들의 천재성을 논하기 전에 대극장 무대를 채울 창작적 협업을 구성하지 못하는 작업과정과 방식을 돌아봐야 할 때이다.
 춤 공연은 종합예술의 성격이 짙다. 1시간짜리 대극장 작품을 만들기에 지원금 5,000만원은 결코 넉넉한 돈이라고도 할 수 없지만 그리 적은 돈이라고도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번 사업에서 결과물에 흡족함이 떨어지는 이유는 투입된 물량 대비 공연시간이 너무 길었거나, 준비기간이 짧았거나 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시간을 줄이던가 투입량을 양적, 질적으로 늘려야 해결 될 문제라는 결론이 나온다.
 산실사업은 창작적 협업을 풍요롭게 할 수 있도록 예술가들의 네트워킹을 통해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안무가가 그것의 중심에서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맞다. 안무가가 원한다면 약점을 분석하고 그것을 강화할 수 있도록 개별적인 컨설팅도 해줄 수 있어야 할 것이고, 국제무대의 기준도 적절히 고려해가며 해외에서 호감을 가질 작품을 만들고 유통시켜 국가 정책적 의미도 살려나갈 필요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바탕에 두어야 할 방향성은 ‘국내의 관객들이 즐겨 볼 수 있는 작품생산’이라는 목표일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 안무가들의 강점과 약점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해결해줄 수 있는 산실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산실이다. 

2014. 01.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