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국립무용단이 국가브랜드의 하나로서 국립극장 해오름에서 12월 6일-8일 올린 <묵향>은 전통적인 문인화의 주요 소재였던 4군자를 붓이 아니라 네 여인의 몸으로 그려내 선비의 기품과 풍류, 섬세한 품격을 보인 <군자무>(1993년 최현 안무)를 재창작한 것이라 한다.
새로운 작품 <묵향>은 한국춤의 특성을 현대감각으로 시각화하여 몇 가지 새로운 이미지를 형상화해 내었다.(여기서 한국춤이란 근대초기 신무용의 흐름을 이어받으면서 전통춤과 창작춤의 갈등 속에서 좀 더 개성적으로 자기세계를 구축해온 일련의 후기 신무용을 일컫는다. 최현의 <군자무>도 그러한 경향의 근대 한국춤의 한 예이다.)
이는 옛것에서 새로움을 찾아 현대 시지각(visual)의 틀에 넣어보려는 연출 및 디자인(정구호)과 안무(윤성주) 사이에 의기투합한 한 성과다. 한쪽은 한국춤에서 호사스런 동적 기세를 걷어내고 단순 명료하면서 정갈한 정적(靜的)인 데에 강세를 두어 미니멀리즘으로 한국춤의 무대구성 상 현대성을 간취해내었고, 한쪽은 서사(敍事)와 에피소드를 버리고 손놀림, 발디딤, 호흡에서 기본으로 충실히 환원하여 이에서 한국춤을 해체하고, 재조립하는 데서 현대성을 얻어내려 하였다.
한쪽은 특장인 의상과 무대 디자인에서 전형적이고도 반짝이는 볼거리를 장만하였고, 한쪽은 음전한 품성으로 호화로운 몸놀림이나 장식을 배제하고 선비의 단아하고 고결한 자태를 엮어내려 하였다. 그 모두는 아무런 장치도 없이 네 폭의 하얀 색막이 무대 상부에서 바닥에까지 펼쳐진 채 두께나 깊숙함보다는 병풍을 가로로 펼치듯 파노라마 같은 평평한 전개방식을 채택하였다. 이러한 옴니버스식의 연산(連山)구조가 여기선 안성맞춤이었다.
서막은 북소리가 나고 거문고에 콘트라베이스가 섞어지면서 12명의 남자춤꾼이 하이얀 도포에 학체형상으로 다듬어낸 학들의 인사굿이자 판열음이었다.
종막은 후들거리는 가야금에 바이올린이 이를 고조시키면서 검은 저고리에 회색치마로 한 무리의 여자춤꾼이 판을 쓸고 가면 같은 색감의 남자군무가 이어져 남녀교집합의 마지막 인사굿으로 마무리되었다. 이 사이 매, 란, 국, 죽, 네 마당에선 한사람의 중심 춤꾼을 두고 6~9명의 남녀 군무로 동일한 구성이 되풀이 되었다.
매화마당에선 김미애와 7인 군무가 청아한 가곡에 맞춰 붉은 저고리에 검은 치마로 겨울을 뚫고 꽃망울 터뜨리는 매화형상의 손놀림, 어기찬 매화등걸의 꺾어진 팔짓에 청아한 붉은 봄맞이가 되었다.
난초마당에선 이석준과 7인의 여자군무가 가야금과 거문고의 난만한 중중머리를 타고선 초록빛 도는 검은 옷을 추스르며 도포에 난을 치는 형상과 함께 열두 가지 난초향을 그윽하게 또는 보란 듯이 품어내는 자태를 그렸다.
국화마당에선 정소영과 6명의 남녀 맞춤이 진양조의 해금가락에 묻혀 검은 저고리에 풍성한 노랑 치마를 치켜 잡고선 여백에 흩뿌리는 즉흥가락을 과시하면서 청초한 가을 기운을 짓노랗게 불러 물들였다.
대나무 마당에선 최진욱과 9명의 남자 군무가 대금 두 대의 유장하고 굴곡 깊은 선율에 따라 관을 치켜쓰고 검은 철릭을 펄럭이며 3미터도 넘을 장대를 휘놀리면서 강인하면서도 유연하게 상하좌우 고저에 예각과 둔각으로 장대 군무를 박아넣었다.
서막과 종막에다 매, 란, 국, 죽의 네 장 등 이렇게 구성된 여섯 마당은 부분의 독자성으로 연산 구조를 이루었는데, 봄·여름·가을·겨울 등 보이는 구조 속에 보이지 않는 우주운행의 질서와 인간행로의 구극정신세계를 밑으로 한 맥락 속에 흐르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가운데 군자가 보여주는 세계, 또는 선비정신인 기품, 기개, 청초, 담백, 소담, 절개 등 문인화풍의 오래된 민족정서를 불러내었다.
그러나 홀춤과 뭇동춤의 교직이 평평하고, 궁궁을을의 선묘가 깊이를 더하지 못하여 한국춤이 지닌 꺾음새나 배김새에서 품어나오는 흥취와 신명의 에너지는 이 무대에선 숨어버렸다. 3미터가 넘는 장대의 예리한 뭇동춤조차 그 단아한 틀을 깨뜨리지 못했다.
결국 군자가 펼쳐보이는 세계는 조명과 영상과 음악의 명료하고도 고품격의 앙상블에다가 날렵하거나 묵중한 관, 옷고름을 없애고 (마치 신윤복의 <미인도>에서처럼) 짧은 저고리에 봉긋하고 풍만한 치마, 정갈하고 반듯한 버선발이 주는 개량한복의 현란한 색채감과 질감에 자칫 잠기어 버리게 되었다.(이 점에서 1980년대 초 한국춤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고 하는 창작한국춤에서는 저고리·치마·도포·쾌자는 지금처럼 새로운 디자인과 형상으로 만들어 입고서는, 유독 발동작에서는 구두나 버선을 벗고 맨발의 한국춤을 추었음을 새삼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한편으로 “패션에 춤이 가려졌다” 하겠지만, 허허로운 무대병풍을 딛고 그 위에서 가히 현대 한복이 춤추는 무대라고 할만큼 무대의상으로서 개량 한복은 간명한 무대구성과 함께 시지각적으로 강렬하였다. 그리해서 수묵화의 묵향이 던져주는 은근하면서도 그윽한 깊숙함보다는 정갈한 소반에 백김치와 함께 나온 화채처럼 담채화가 자아내는 화사한 담백함이 눈맛을 끌었다.
“한국전통이 동시대의 세계인과 호흡한다”는 이슈를 내세운 한국춤 <묵향>은 우리에게 전통의 무엇이 오늘날 어떤 방식으로 세계인과 소통할 수 있는지를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 무대춤은 새로운 춤창작에서 안무 외에 연출과 디자인과 드라마투르기의 힘이 과연 어떠한가를 곱씹어 다시 생각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