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차세대 안무가 육성을 위해 한국공연예술센터가 해마다 마련하는 ‘한팩 라이징 스타’는 올해로 3년째이다(3. 29~30., 4. 5~6. 아르코예술극장). 안무가 육성을 지향하는 프로그램은 안무 초년생(初年生)들에게 작가정신을 고취하는 목적을 전제하기 마련이다. 작가정신은 결과물인 작품에서 다각적으로 짚어져야 하므로 물론 단순치 않은 개념이다. 작가정신의 최종 지점을 염두에 두고 지적하자면, 안무 초년생일지라도 관객이 극장 바깥으로 나갈 때 무엇을 안고(얻고) 나가는지 하는 점은 존중해야 한다. 안무는 안무자 자신과의 대화이자 관객과의 소통인 것이다.
‘한팩 라이징 스타’는 전체 안무가를 두 팀으로 나누어 각자 결과물을 올리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같은 팀을 이루는 작품들 사이에 유기적 연관성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올해는 첫 팀에서 이변이 있었다. 첫 팀은 아르코예술극장의 객석을 비우고 무대로 옮겼다. 프로시니엄 무대에서 무대에 객석을 설치하려면 객석을 완전히 비워야 한다. 무대가 객석과 무대를 겸하도록 하는 이런 일은 과거 같으면 극장을 전복시킨다는 의식을 상징하는 사건쯤으로 비춰질 법했고, 아직은 신선하게 받아들여지기는 마찬가지다. 익숙한 공간을 낯설게 하는 이러한 공간 변경에서는 또 다른 개성적인 안무 발상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관객 입장에서 유별난 체험을 겪어볼 만한 계기로서 공간 변경은 주목을 끈다. 여기서 단도직입적으로 묻자면, 변경된 공간이 작품에서 제대로 활용되었는가? 첫 팀의 세 작품 가운데 <당신은 어떻게 움직이고 있습니까>(안무: 정정아)가 이 공간에서 스탠딩 공연을 진행한 것을 제외하면 두 작품(임지애, 최승윤)의 공간 변경 활용도는 낮았다. 굳이 이런 무대를 택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보다는 변경된 무대를 활용하는 발상이 옅었던 점이 재고되어야 한다.
누구나 느끼듯이, 현대춤(컨템퍼러리 댄스)의 세계는 끝을 모른 채 열려 있다. 임지애 안무작 <뉴 몬스터>는 그런 점에서 관심작이다. ‘뉴 몬스터’의 도입부에서부터 하얀 바닥에서 하얀 일상복(바지와 티셔츠)의 세 무용수가 무음 상태에서 조용히 전개하는 동작들은 막연한 느낌만 줄 뿐 그 구체적인 의미를 좀체 드러내지 않는다. 작품 중반부에 산, 구름, 동물, 선녀 같은 모양을 담은 그림판이 자그만 입간판들처럼 세워진 다음부터 앞서의 그런 동작들은 고스란히 재연된다. 동시에 배경에는 붉은 해가 비치고 새롭게 설정된 공간 속에서 무용수들은 깊은 산에서 동물들과 더불어 노니는 선녀 같은 어떤 남녀들로 다가온다. 이와 같이 <뉴 몬스터>는 의미를 드러내지 않던 움직임이 의미를 갖추도록 진전하는 흐름으로 구성되었다. 여기서 무의미와 유의미를 가르는 경계선이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이 작품의 중반 이후 설정된 공간을 안무자는 신화와 연결 짓는다. 막연한 동작들이 행해지는 세계에서 신화의 세계로 이전함으로써 <뉴 몬스터>는 우리를 신화의 세계로 데려다 놓는다. 선녀와 산, 구름의 그림판뿐 아니라 고구려 시대 무용총 벽화에서 본 듯한 화살, 호랑이, 단군을 연상시키는 긴 수염 그리고 토끼와 선녀를 나타내는 머리장식 등에서 어떤 신화나 전설의 세계가 좀 뚜렷이 감지된다.
그런데 호랑이 그림은 얼룩말-코뿔소의 형상도 하고 있어서 그 세계가 어떤 신화의 세계인지 특정하기가 어려워진다. 또한 뉴 몬스터에서 새로운 괴물이 그들 세 무용수인지 아니면 그들이 노니는 세계인지 단정하기도 어렵다. 그렇더라도 <뉴 몬스터>에서는 신화를 경계로 무의미와 유의미가 나눠지고, 작품 전반부의 신화가 암시되지 않은 세계에서건 작품 중반 이후의 신화 속의 세계에서건 움직임이 마치 닮은꼴인 듯이 동일하므로, 결국 우리는 신화 속의 세계를 살아가고 있고 또 신화가 신화를 낳는 세계가 이어질 것이라는 안무자의 무언의 메시지를 읽게 된다.
이처럼, 어떤 특정한 신화의 세계를 재현하는 것이 이 작품의 주제는 아니다. 여기서 초점은 신화 없는 세계와 신화의 세계를 잇는 연결 고리이며 이는 반복 재연되는 움직임으로 처리되었다. 움직임이 무의미에서 유의미로 전도되는 계기를 보여준 점에서 <뉴 몬스터>의 방법은 상당히 참신하다. 다만 그 경계선으로 등장한 신화가 일반적이며 모호한 신화의 이미지에 머물음으로써 이 작품은 안무의 실험을 넘어 함께 즐기는 선으로 진전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최승윤의 <사라지기 위한 시간>은 지우기가 주도하는 공연이다. 시간뿐 아니라 춤과 공연을 지우기 위한 공연으로 해석된다. 그런 점을 납득하자면 우선 작품 속으로 쫓아가볼 필요가 있다.
최승윤의 단독 출연으로 진행된 이 공연은 다음 같은 이미지들로 시작한다. 텔레비전에 조정 화면, 아파트의 무미건조한 모양, 사람의 손, 얼굴, 안무자 얼굴 모습을 변조한 창백한 영상, 앙상한 나뭇가지에 매달려 흩날리는 비닐 봉지 쓰레기 장면이 비치고 부르짖는 테너의 노랫가락이 들린다. 이어서 안무자가 출연하여 머리에 꽃밴드를 두르는 성장(盛裝) 의례를 하고 마른 북어 세 마리를 던지며, 위치를 이동하여 함에서 꺼낸 옷감을 바닥에 깔고 양초 여러 자루를 배열해서 불붙이고 은쟁반을 놓는다. 그리고 혼례의 합환주 같은 것을 마시며 박스에서 꺼낸 마이크 받침대에 마이크를 끼워 설치하고 가슴에서 집어낸 편지 같은 종이를 읽는 모습을 보인다.
이어 들리는 굉음을 따라 서서히 슬로모션 하듯 배회하며 던져진 북어들 옆에 누어 꿈틀댄다. 엎드려 조금씩 꿈틀대다 단조로운 아코디언 멜로디가 섞인 굉음 소리에 따라 몸을 점차 격하게 꿈틀댄다. 이어 공간의 가장자리를 배회하기를 반복하며 권투와 달리기 자세를 취하다가 점차 걷기로 전환한다. 그러다 제풀에 앉아 망연히 주위를 돌아보고 상의를 벗고 붉은색 브래지어 차림이 된다. 퇴장하여 빨랫줄을 가져와 무대 좌우로 길게 설치해서 형형색색의 옷가지들을 주섬주섬 빨랫줄에 건다. 위치를 옮겨 새 옷(반팔 티셔츠)을 입고 오렌지를 씹는다. 이어 카트를 끌어 이동하면서 관객들에게 오렌지, 홍당무를 건네고 퇴장한다.
여기서 시사되는 것은 가슴 설레었던 혼례가 이제 기억이나 꿈으로만 남은 상황이다. 한 개인의 내면을 드러내는 의식(儀式)으로 진행된 이 공연은 퍼포먼스와 같은 흐름을 갖되 정교한 편이어서 관객을 끌어들이는 효과를 갖는다. 성장 차림과 개인적 기원(祈願) 행위 다음에 진행된 빨랫줄에 옷가지 내걸기 부분에서는 감정이 메말라가는 추이를 상상하게 된다. 새 옷을 입는 행동이나 관객과 먹을거리를 나누는 의식은 과거 지우기로 해석될 부분이다. <사라지기 위한 시간>이 춤이냐 아니냐 묻는 것은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그렇더라도 전체 진행에서 일테면 춤이 삽입되어 작품의 전체 여운을 더 짙게 하는, 말하자면 춤을 지우기 위해 춤이 더 필요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정정아의 <당신은 어떻게 움직이고 있습니까>처럼 프로시니엄 무대에서의 스탠딩 공연에서 객석은 무기력해진다. 여기서 관객 참여형의 공연으로서 무대와 객석을 전도시킨 것은 적절하다 하겠다. 이 공연은 무대로 집결한 관객들에게 안무자가 등장하여 춤이 표현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묻는 질문에서 시작하고, 이를 통해 작품을 열어갈 단서를 구한다. 춤이 사상과 감정을 표현한다는 상투적인 생각을 소개한 다음에 공연은 사랑을 표현하는 춤을 관객과 생각해보자는 뜻을 밝히며 진행되었다. 안무자가 열어둔 춤과 사상 및 감정 간의 관계를 아무런 해명 없이 미뤄놓고 곧장 사랑을 춤으로 표현해보는 과정으로 직행함으로써 이 공연은 정곡을 벗어나 일관성을 잃은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 공연의 애당초 초점은 사랑을 춤으로 표현하는 데 있지 않고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맞춰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부분들에서 무용수들이 사랑을 표현하는 춤을 시범으로 보이거나 관객을 선도하며 그들과 함께 어울리는 과정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춤에 주안점을 두고 관객과 놀이하는 공연이 되었다. 이 부분은 상당히 주요한 단서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관객에게 움직임에 관해 자유스런 발상을 고취하려는 취지가 관객의 관심사로서도 지속되었어야 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물론 사랑을 표현하는 춤에서도 관객이 어떻게 움직이는지(움직일 필요가 있는지)가 환기됨 직하다. 그렇지만 전문 무용수들의 움직임 부분이 과도해 보였고 춤과 사상과 감정 및 사랑을 매개할 담론 구조가 누락된 탓에 일반적인 춤 공연과 비교하여 이 작품의 차별성은 희석되었다.
지금은 춤의 강점이 어떻다는 것을 말할 나위도 없이 잘 받아들이는 시대이다. 최수진의 <아웃 오브 마인드>는 춤의 시청각적 효과를 토대로 인간의 감정적 성숙을 재촉한다. 옆으로 나란히 도열한 여섯 무용수들이 경쾌한 소리를 따라 다양한 형태의 몸짓으로 감정의 변화를 표현하는 모습으로 이 작품은 시작한다. 좀 길게 이어지는 이 부분을 비롯하여 <아웃 오브 마인드>에서 매우 유연하며 매끈한 춤들이 시각에 와 닿고 관객은 몸 움직임과 음향이 연출하는 조화를 간간이 음미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여기서 춤들이 시청각적 효과를 발휘하였더라도 단편적으로 그러하였지 작품의 맥락에서는 상투적이었으며, 세련된 움직임이 두드러진 반면에 작품의 알맹이는 부실하였다. 이 작품의 안무 구조에서 부분들 간의 연계는 자연스럽지 않거나 매우 급작스러웠으며, 무리를 지은 무용수들 간의 관계도 사실상 불투명하여 감성을 자극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한 마디로 작품 흐름에서 필연성을 감지하기 어려웠다. 춤을 추는 것(dancing)과 춤을 조직해서 구성하는 것(composing)이 다르다는 것은 상식이다. 춤을 잘 춰야 한다는 고정 관념을 과감히 벗어나 안무자는 관객이 전달받을 의미와 느낌이 무엇일지 고심해야 할 것으로 본다.
춤계에 7080세대가 다수이지만 7080세대의 것을 춤으로 표현하기를 의도한 경우는 흔치 않다. 그 시대를 표현하더라도 대개는 그 시대를 살아온 개인의 표현에 치중한 작품들이다. 안수영의 안무작 <타임 트래블 7080>은 그 이후 세대가 7080세대를 표현한 작품이다. 작품 도입부에서 모바일 앱으로 70년대 팝송을 연주하는 모습은 이런 사실을 상징한다. 이 작품은 70년대 이후 청년이고 지금은 장년에 이른 세대의 정서를 조명한 작품으로서 공감을 살 부분들이 눈에 띈다.
이장희, 조용필, 양희은, 윤형주, 전인권의 가요에 맞춰 진행되듯이 당대의 가요와 팝송으로 시대 정서를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이를 움직임으로 뒷받침하였다. 작품에서는 ‘아침이슬’과 애국가가 겹쳐지는 음악과 같이 경직된 사회 분위기도 짐작되고 사람들의 응어리가 비교적 다양하게 묘파된다. 그 가운데서도 ‘하얀 손수건’을 형상화한 남성 2인무는 어느 부분보다 호소력이 컸다. 국내에서 트윈폴리오의 ‘하얀 손수건’은 떠나버린 사랑을 매우 감성적으로 노래한 곡으로 알려져 있다. 안수영은 이 같은 통념에서 조금 빗겨 서서 이 부분을 남성 2인무로 처리하였다. 캐주얼 차림의 두 남성은 이 2인무를 대체로 굳세고 둔탁하게 펼치는데, 접촉즉흥에서의 대거리나 심지어 땅재주 같은 것을 연상시키는 격한 대목을 담았다. 노래의 일반적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는 이런 춤 구성에서 두 상대는 때로는 한 몸으로, 때로는 대적하듯 서로를 대함으로써 그 시대의 쓰라림과 감성을 여러 겹으로 노출하였으며, 지나간 그 시대를 세대를 넘어 모두 함께 하는 시대로 재탄생시켰다. 이후 이어지는 대목에서 <타임 트래블 7080>이 다소 처지고 가볍게 처리한 부분은 정돈되어야 할 점으로 보인다.
곽고은 안무작 <도시 미생물: 판매를 위한 춤>은 한마디로 상품화 현상을 비판하는 춤이며, 그 의도는 매우 선명하게 드러났었다. ‘For Sale’ 같이 상품화를 상징하는 이미지가 영상으로 여럿 비춰지고 원반 회전무대 위의 세 남녀는 마네킹 같은 모습으로 서 있다. 익명의 사람들이 꼼지락거리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이미지도 곁들여진다. 탭, 멀티 패드, 아트... 여러 가지 광고 문구 소리가 또박 또박 여성 발음으로 들리고 과장된 공연 광고 문구까지 음성으로 들린다. 회전 무대 주변에 설치되어 명멸하는 형광등들은 이 시대의 허황됨을 시사한다. 마네킹들이 그에 맞춰 재현해내는 움직임들은 좀 건조하고 단편적이다.
<도시 미생물>에서 비춰지는 영상 이미지는 약하고 다양하지 못하다. 작품의 몇 단락에서 마네킹 같은 세 사람이 포즈를 지어 보임으로써 이미지의 취약한 점은 보완된다. 광고 문구를 포즈와 춤으로 재현하는 것, 광고 문구 녹음 소리를 이지러뜨리며 음향 효과를 내면서 인간들이 마비되고 경련 증세에 이르게 되는 부분들은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다. 반면에 전체적으로 관객에게 전달될 호소력은 높지 않아 보였는데, 작품 구성이 매우 간략하고 움직임 역시 그러하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