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안애순무용단 〈In 굿 Out〉
아련한 추억만이 전시된 무대
김혜라_춤비평가

 제2회 강동스프링댄스 페스티벌 폐막작으로 안애순 무용단의 <In 굿 Out>(5월 18~19일, 강동아트센터 대극장 한강)이 무대에 올랐다. 안무가 안애순은 근대화의 기치 아래 상실된 개인의 아픔, 다시 말해 역사적 상황에서 사회적 통제의 대상으로 도구화 된 몸에 주목하여 이를 굿판의 형식을 빌려 해원하고자 한 의도로 보인다.
 청신(請神), 굿판의 극적 구조를 주도하는 주된 매체로는 70~80년대 추억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대중음악들이 사용되었다. 소위 7080세대의 추억과 끈끈한 동질감을 느낄 수 있는 대중가요를 배경으로 로봇 태권V 몸놀림, 국민체조, 카바레 댄스 같은 주요 키워드는 관객에게 그 당시 문화를 회상하기에 충분하였다. 더불어 흑백 TV속에 비춰진 남북이산 가족 상봉 같은 스틸 컷 영상들로 인해 무대는 아련한 시대적 상황을 상기시켜주는 역할을 하였다.




 안무가는 근대 대중문화의 변천사를 전시하는 방식을 취하면서 그 곳에 침전된 자율적 몸의 부재를 동시적으로 항변하고 있는 듯했다. 구체적으로 보면, 로봇 태권V를 재현하는 춤꾼들의 움직임들은 앞만 향해 달려왔던 산업화의 중심에 있었던 생산화된 몸과 군대식의 국민체조를 통해 군중 속에 강요되고 획일화된 몸을 보여준다. 춤꾼들은 엉성하게 상대의 몸과 무대를 두드리며 구성해내는 리듬과 온몸을 미친듯이 흔들고 찌르는 디스코를 추며 은밀한 몸의 욕망을 해소하고자 하였다. 전체 흐름에서 시시때때로 춤꾼들은 목청을 높여 ‘동백아가씨’, ‘고래사냥’, ‘아침이슬’ 같은 노래를 연속적으로 부르는데, 이것은 당시 대중들의 흥을 돋우는 대중가요마저도 금지되고 통제 당했던 억압된 시대적 아픔과 자유상실의 현실을 보여주려는 의도로 생각되었다. 이와 같이 상처받은 몸들을 불러 모아 기억하고 위로하여 무대에서 한 판 놀아 보자는 것이 핵심으로 여겨졌다.

 


 


그늘진 몸을 치유하는 굿판은 어디에 있는가?

 탈근대로 접어든 현재 시점에서 근대적 성과 이면에 매몰되고 소외되었던 개개인의 자율적 정서 문제를 사회차원으로 끌어올려 이를 개인에서 공동체의 관계로 진단하고 문화적 에너지로 치유(healing)하고자 한 굿판은 유의미한 작업이라 생각된다. 더구나 자신을 오롯이되돌아볼 시간이 없었던 7080세대에게 지난날의 잃어버린 시간과 현재와의 감성적 소통을 통해 오늘을 새롭게 연대하는 판을 벌이는 일은 반갑고 또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본 공연의 무대는 해원을 시도한 오신(娛神)과 질서를 찾아가는 송신(送神)과 유희적 난장(亂場)을 의도한 각 장면이 모호하게 보인다.




 <In 굿 Out>
에서 질서를 찾을 수 없었던 모호했던 근본적 이유를 생각해보면 다음과 같은 정리할 수 있다고 본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먼저 형상화의 문제로서 전반부에 머리채를 잡힌 여자 춤꾼이 남자 춤꾼에게 조정되고 거래되는 상황에서 관객에게 감지되는 억압된 몸의 형상은 의미 심장 했고 또한 박소정이 영상과 무대를 마주하여 시간의 접점을 통해 접신(接神)하려는 장면은 놓쳤던 과거와 이를 품으려는 현재의 시도를 인지시키는 설득력 있는 형상화였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근대화에 이면에 짓눌린 그늘진 몸의 형상이 두드러지지는 않았다는 생각이며, 특히 대중적 몸짓을 주로 사용하는 춤작품에서 움직임의 형상화 작업과 적절한 배치에 대한 선택이 필요해 보인다. 한시간이 넘게 끊임없이 움직인 좋은 기량의 춤꾼들과 탄탄한 스토리를 갖춘 음악들에도 불구하고 울림이 부재된 무대는 산만함으로 관객에게 전달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연장선상에 있는 본 공연도 대중음악과 몸짓 코드들이 병렬적으로 과잉되어 마치 추억의 전시무대 혹은 리서치 현장에 온 듯한 산만함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관객은 무당인 박소정의 역할에 집중하기 어려웠고 따라서 아픔을 음미할 시간적 여유 없이 그저 회복과 난장의 장만이 난무한 인상을 주었다. 아울러 이러한 상황에서 객석에서 나미의 노래를 부른 연출은 자연스레 관객과의 교감을 유도하기에는 갑작스럽고 식상한 감이 있었고 자연스런 실존자체를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날것 그대로 춤꾼들의 노랫소리나 말의 효용적인 전달력에 대한 리듬감 문제도 재고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결론적으로 내가 아닌 우리라는 공동체적 연대감으로 끌어올리고자 굿판으로 접근한 <In 굿 Out>의 공연은 안무자의 의도만큼 관객에게 전달되는 교감은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것 같다. 그동안 안무자가 보인 성과와 창의력 있는 작업들 게다가 극장 상주단체로서 어떻게 보면 춤계에서 주류의 안정성을 수반한 그녀에게 깊이와 집중력을 기대하는 것이 무리한 것일까? 싸이가 주장하는 ‘B급문화’나 장기하식의 ‘루저 스피릿’을 많은 대중은 결코 경박한 것이라 속단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무대에서 잘 노는 것과 막 추는 것의 간극을 넘어야 <In 굿 Out>이 호모루덴스(Homo Ludens)의 유희의 몸짓이라 호칭받지 않을까?

2013. 06.
사진제공_안애순무용단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