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김남진 〈기다리는 사람들2〉 , 정연수 〈죽음의 조건〉
지배-피지배 관계에 접근하는 대중성
김채현_춤비평가

세상에서 지배-피지배 관계는 필요악인가. 인간이 군집을 이루어 살아야 할 존재라면 집단에서도 어차피 질서가 요구되기 마련이고, 이런 질서는 권력을 타고 지배-피지배의 관계로 이전한다. 너무나 익숙한 탓에 오히려 없으면 불안해질 것 같은 지배-피지배 구조는, 역으로 자유로움을 생명으로 살아가는 예술 그리고 춤에서는 있으면 불편하다. 그러한 구조를 혼쭐내는 예술과 춤이 자주 사랑받듯이, 그것은 춤과 예술에 꽤 괜찮은 영감을 제공한다.

예술의 영원한 대상인 권력 문제를 근자에 김남진과 정연수는 각자 한국전쟁 상황과 오늘의 삶에 비추어 재조명하였다. 김남진과 정연수의 춤은 현실의 현상에 대해 정면 진단을 시도하였고, 그런 때문에 우리 춤이 권력 문제를 한동안 젖혀두었던 것은 아닌가고 되물어 볼 만큼 강세를 띠었다. 두 사람의 춤은 대중을 향한 흡인력 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작지 않다.

김남진의 ‘기다리는 사람들 2’(1. 7~8. 열린극장 창동)에서는 여러 다양한 이야기가 가능하다. 전쟁으로 스러진 잡동사니들이 무대 모퉁이 한 켠에 쌓여 있다가 내동댕이쳐지듯이 한국전쟁 시기가 작품의 주무대이긴 하지만 전쟁의 폭압을 그려내는 데 있어 한국전쟁은 큰 상징으로 기능한다. 제목의 기다리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고 무엇을 기다리는가? 6명의 여자들이 전쟁을 겪는 아녀자, 전쟁을 치루는 침략자, 전쟁에서 살아남은 아녀자와 보통사람의 역할을 계속 바꿔 진행한다. 그래서 이 여자들은 전쟁 통에 잃고 헤어진 사람들을 기다리는 여자들에 머물지 않고, 전쟁 그리고 억압적 지배에 휘둘리는 사람들로 다가온다. 그 익명의 피지배 여성들을 구할 것은 물론 평화이며, 자기들이 기다리는 사람을 다시 만나는 것도 평화의 순간에나 가능한 일이다.

 


김남진 <기다리는 사람들 2>

 


38선을 넘지 말라는 영문 경고 표지판, 지뢰 지역 표지판과 철조망은 이 작품의 공간 배경이 삼팔선, 휴전선 언저리의 한 지역이라는 것을 매우 간결하게 나타낸다. 이와 더불어 작품의 시대 배경이 한국전쟁 또는 그즈음의 어느 시기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은 여섯 여자가 걸친 몽당치마저고리와 고쟁이이다. 자기들끼리 하는 귀신놀이(‘우리 집에 왜 왔니 왜 왔니’) 술래잡기와 고무줄놀이는 소녀들의 것이며, 그들이 놀이하며 부르는 애창곡은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이다. 소녀들이 이렇게 군가를 부르는 풍속은 한국전쟁 후에도 한참 지속되었고 아이들의 놀이 가운데 전쟁을 소재로 한 것은 흔하였다. 작품 후반에서 불러지는 ‘엉겅퀴꽃’ ‘해당화’ ‘산유화’ 노래들과 함께 소녀들은 이미 소녀가 아니라 미망인이나 유가족이 된다. ‘기다리는 사람들 2’는 한국전쟁 시기에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겪었을 많은 시각적․청각적 이미지를 상징 장치로 동원하였다.

‘기다리는 사람들 2’를 보면, 국내 현대춤에서 한국전쟁이나 향토색 짙은 이미지들이 소홀히 다뤄져온 경향을 새삼 돌이키게 된다. 이 작품이 독특하게 갖는 또 다른 특색은 한국전쟁과 당시의 향토색 짙은 상징 기제를 현대춤과 어울리게 구사한 점이며, 이는 ‘기다리는 사람들 2’의 양식적 특질을 대변하는 점이기도 하다. 특히 ‘전우의 시체를’ 노래와 반주에 맞춰 신나게 진행되는 고무줄놀이는 이 작품의 모든 것을 함축한 대목이었고, ‘검무’의 칼을 바닥에 뉘어 발로 끌고 가며 실성과 발작(전쟁 시기에 흔했던 증상), 맥없이 당하는 처형을 묘사한 부분들 역시 전쟁의 맥락을 인식하는 눈으로 공감하게 된다. 작품에서 전개되는 공습 등 전쟁 통의 아수라장 순간이나 집단 피격의 순간들이 직설적으로 그리고 성글게 처리되어 작품의 감도가 부분적으로 옅었던 데서는 손질이 필요하다.

소녀들의 전쟁놀이에서 전쟁에 대한 은유를 시작하기가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기다리는 사람들 2’는 이를 현대춤으로 역동성과 율동감을 기조로 풀이해내면서 대중성과 예술성의 조화를 기하여 오래 기억될 인상을 제공하였다. 그동안 김남진의 작품에서 일관되게 두드러졌던 몸의 정치성은 ‘기다리는 사람들 2’에 흡입되었고, 이번에는 구체적인 내러티브와 춤성이 강화됨으로써 많은 것이 말해질 수 있는 작품성을 갖게 되었다.

자본이 득세하는 세태를 빗대어 죽음에서마저 차별이 있다고 말하곤 한다. 죽음에도 조건이 있다면, 그것이 사실은 생존의 조건의 연장이라는 것은 오늘의 어두움이기도 하다. 정연수는 ‘죽음의 조건’에서 생존의 조건을 뒤집어 보인다(3. 12~13. 아르코 소극장).


 


정연수 <죽음의 조건>

 


‘죽음의 조건’이 펼쳐지는 조건은 조금은 특별하다. 소극장의 삼면 벽을 완전히 원목 무늬목으로 둘러 새로운 실내 공간으로 만들고 벽 여기저기에 전자레인지, 세면기, 서랍, 대형 냉장고, 철제 캐비닛을 돌출형으로 부착하였다. 이 이색적인 공간에서는 그러나 틈새가 거의 노출되지 않아 실내 공간은 지배-피지배 구조가 철저하게 똬리를 트는 갑갑한 곳으로 전환된다.

이 작품에서 지배 수단은 물이다. 물이 다 떨어져가는, 아니면 물이 어느 지배자에게 내맡겨진 상황 속에서 1인의 지배자와 3인의 피지배자는 대결 관계 속에서 움직였다. 물을 가진 지배자는 이 황량한 절대 공간 속에서 물잔을 갖고 놀며 자기가 삼킨 물을 물잔에 내뱉아서 피지배자에게 건네는 교만 혹은 탐욕을 감추지 않는다. 그리하여 물에 얽힌 의미는 점차 증폭되어가는데, 인간을 파멸로 이끄는 7가지 죄악, 즉 탐식, 탐욕, 교만, 성욕, 분노, 나태, 시기심으로 확대된다.

이 작품에서 보다 중요한 장치는 물과 함께 쓰일 수밖에 없는 투명 물잔이었다. 작품 초입부터 지배자는 물잔을 갖고 놀면서 그 무엇을 희롱하였고, 삼킨 물을 내뱉어 상대방이 마시도록 강요하였다. 때에 따라 물잔은 내팽개쳐지며 원망어린 분노를 담기도 한다. 이런 과정에서 류장현은 속도감 있는 유연성으로 테이블과 물잔으로 재주를 부리면서 작품을 끌어나갔다.

피지배자들이 걸핏하면 괴롭힘을 당하는 한참 후에, 피지배자인 안수영은 테이블 위에 놓인 빈 물잔을 두고 갈증과 사투(死鬪)를 벌였다. 그의 사투란 소란스럽게 펼쳐지는 그런 것이 아니라 극한의 갈증에 처한 인간의 그것을 연상시킨다. 테이블 위와 옆에서 반라(半裸)로 전개되는 안수영의 움직임은 갈증으로 야기될 인간의 고통과 감정을 매우 복합적으로 형상화하여 지배-피지배의 관계를 보다 은유적으로 표현하였다. 작품에서 이전 순간까지 대결 구도를 통해 조성된 지배-피지배 관계는 이 부분에서 매우 집약적으로 부각되며 ‘죽음의 조건’에 대해 동의를 구하는 방법으로서 설득력이 있다. 마찬가지로, 작품 말미에 무대 바닥에 넓게 물잔들이 규칙적으로 배열된 물잔의 밀림 가운데서 추어지는 집단 춤과 독무에서도 물잔과 춤의 유기적인 관계가 두드러진다.

‘죽음의 조건’은 지배-피지배의 관계가 점차 극한의 상황으로 치닫게 하면서 인간의 공격성에 접근하는 미덕이 있다. 이를 보다 다지는 차원에서 지적하자면, 안수영의 춤 부분에서 정서의 표출이 몸을 통하는 방식으로 예시되는 경우처럼 각 무용수들이 물과 유리잔을 대하는 개인적 태도가 개별적으로 보다 집중적으로 형상화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물에 얽힌 심층 심리 같은 것도 ‘죽음의 조건’을 위해 분석된다면 활용될 만한 가치가 없지 않다. ‘죽음의 조건’은 물과 같은 소재의 추상성을 넘어 인간의 7가지 죄악을 그려내는 모티브로 적절히 전용한 작품으로서 주목받을 것이다.

2011. 04.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