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춤에 관심을 갖고 춤 공연을 쫓아다니다 보니 영화 볼 겨를이 없다. 한동안 영화와 멀어졌으나 근래 두 편의 영화를 봤다.
<블랙 스완>(Black Swan: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 2010)은 발레 소재 영화이고 <댄싱 드림즈>(Dancing Dreams: 라이너 호프만, 안네 린젤 감독; 2009)는 피나 바우쉬를 내세웠지만 일종의 커뮤니티 댄스의 기록영화(documentary film)였다. 두 편의 영화를 영화 관점에서가 아니라 춤이라는 관점에서 이야기한다.
영화를 얘기함에 있어 크게 서사(敍事)와 묘사(描寫)라는 부분이 있다고 할 때 필자 나름으로 서사는 줄거리의 큰 줄기들과 그 함의(含意)로, 묘사는 만든 방법, 테크놀로지, 배우의 연기 등 나머지 모두를 아우르는 개념으로 정의해 본다. <블랙 스완>은 묘사에서 뛰어난 영화였지만 나로 하여금 서사라는 측면에서 많은 것을 생각케 한 영화였다.
<블랙 스완>에는 잔인하고 끔찍한 장면들이 많아 도중 뛰쳐나오고 싶었다. 그러나 끝까지 보고 나니 참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비평가들은 이 영화를 사이코 섹슈얼 스릴러물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영화에는 실제와 환각이 반복되는데 그 둘을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그 같은 구별이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공연예술에 있어서는 완성도가 중요하게 거론된다. 공연예술은 조금이라도 더 완성도를 높이려는 치열한 노력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영화의 끝 장면에서 성공적인 춤을 춘 후, 죽어가는(?) 프리마 발레리나 니나(나탈리 포트만 분)는 "나는 느꼈다-완벽을-나는 완벽했다(I felt it-Perfect-I was perfect)"라고 중얼거린다. 이는 예술에 있어서 완성도란 목숨조차 걸 수 있어야 할 정도의 절체절명 과제임을 암시한다.
영화제목이 <블랙 스완>으로 영화는 청순한 백조보다 요염하고 사악한 흑조에 더 비중을 두는 것을 강조하지만 본래 고전적인 <백조의 호수> 버전에서도 지그프리트 왕자와 마왕 로트바르트의 딸인 흑조, 오딜이 추는 파드되(2인무)를 가장 중요한 춤으로 친다. 이 영화에서 착한 백조와 그와 대조되는 악한 흑조를 니나 한 사람이 추는 것이 새로운 설정인 것처럼 선전하나 이미 기존의 많은 <백조의 호수> 공연에서 백조와 흑조의 역을 한 사람이 췄다. 이제는 전설이 되어 버린 발레리나, 마고 폰테인이 영국왕립발레단의 백조의 호수 공연의 프리마 발레리나 역을 할 때도 늘 두 역을 췄었다.
영화 <블랙 스완>은 여태까지 막연하게 생각하던 백조와 흑조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했다. 마지막에 흑조를 완벽하게 연기하는 니나를 보면서 백조와 흑조는 한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양면성, ‘제킬 박사와 하이드’의 또 다른 양상이 아닐까를 떠올렸다. 누구에게나 내면에는 선과 악이라는 요소가 공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영화에는 니나와 상반되는 성격의 발레리나인 릴리(밀라 쿠니스 분)가 흑조의 화신으로 니나의 라이벌 역을 연기하나 릴리는 니나의 내면에 존재하는 도플 갱어(본래 독어로 분신, 또 하나의 나)인지도 모른다.
영화의 처음, 청순한 니나는 완벽을 추구하는 발레리나로 생각과 생활의 모든 것이 발레이고 늘 완벽한 발레를 추기 위해 강박관념에 시달린다. 카리스마를 갖고 있는 발레단 예술감독인 토마스(뱅상 카슬 분)는 착한 백조는 잘 추지만 요염하고 사악한 백조를 추는 데는 관능성과 여성으로서의 농염성에 문제가 있는 니나를 여지없이 몰아친다. 흑조의 춤을 잘 소화할 때 진정한 발레리나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소녀 수준을 벗어나 성적인 자극을 위해 여자로서 과감한 경험에 몸을 던지기도 하고 자위행위도 서슴지 말 것을 요구한다. 백조의 상징과 닿아 있는 것은 어머니, 에리카(바바라 허쉬 분)이고 흑조와 연결되어 있는 것은 릴리다. 니나는 어머니를 벗어나 스스로 성적인 자극을 찾고 릴리와 어울리며 음주와 만취, 동성애적인 짙은 성행위를 체험하며 차츰 흑조로 변한다. 좋은 춤을 추려면 연기가 그렇듯 인생의 다양한 체험과 고뇌를 맛보아야 한다는 걸까?
예술은 많은 경우 사랑과 섹스가 주제를 이루기도 하고 다른 주제를 다루었다고 하더라도 성공적인 작품이 되려면 섹스가 양념처럼 들어 있어야 한다고 한다. 또 항용 여자 무용수나 배우는 무대에 섰을 때 성적 매력이 뿜어져 나와야 한다고 한다. 시쳇말로 섹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양 문명의 큰 두 줄기를 종교성인 헤브라이즘과 인간성인 헬레니즘으로 가를 때 공연예술은 헬레니즘에 닿아 있다. 헬레니즘은 육체의 아름다움과 관능을 추구한다. <블랙 스완>에선 예술에 있어 관능과 성적 농염의 중요함이 강조된다. 한국에서 상영된 <블랙 스완>은 가위질에도 불구하고 옛날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는 외설이라고 할 만한 과감한 장면들이 많이 나온다. 시대를 따라 변하는 예술과 외설의 한계를 구분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영화는 그밖에도 우리가 늘 접하는 인생의 사안들을 다룬다. 니나의 어머니 에리카는 실패한 발레리나이다. 그는 딸을 통해 자기의 좌절된 꿈을 실현하려 하고 그 양상은 자식을 언제까지나 어린 아이로 보며 보호해야 하는 과보호로 나타난다. 단장이며 예술감독인 토마스는 여자 발레리나들에게 지분거린다. 역으로 발레리나가 중요한 역을 따내기 위해 토마스에게 접근하고 성상납을 시도한다. 물론 일부의 문제이겠지만 늘 막 뒤에서 벌어지고 있는 선택권을 갖고 있는 감독 또는 연출과 여성 연기자 사이의 영원한 미스터리를 보여준다. 정상에 있던 예술가가 어느 날 추락했을 때의 절망을 니나 전의 프리마 발레리나였던 베스(위노나 라이더 분)의 자해적인 교통사고로 보여 준다. 발레리나에게 있어서는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베스의 으스러진 다리를 보고 니나는 섬뜩하고 불확실한 미래를 떠올린다. 예술가에게는, 인생에는 올라가는 때가 있는가 하면 내려오는 순간도 있다. 그때의 좌절과 공허를 과연 우리는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생각케 한다.
나탈리 포트만은 본래 어렸을 적에 발레를 배웠었고 이 영화를 위해 하루 5 시간씩 발레 연습을 했다. 그녀는 이 작품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탔다. 그런 한 달 후, 영화에서 나탈리 포트만의 발레 부분 대역을 한 사라 레인이 니나의 많은 발레 장면이 자기의 것이었다고 폭로했다. 그러자 이 영화를 위해 나탈리 포트만의 발레를 지도했고 영화에서도 지그프리트로 그녀의 상대역을 추어 결국 나탈리 포트만의 실제 약혼자가 된 뉴욕 시티 발레단의 수석 발레리노인 벤자민 밀피에가 반박했다. “발동작, 푸에테(fouettes), 다이어고널(diagonal) 정도 일부는 사라 레인의 것이지만 발레 동작의 85%는 실제로 나탈리 포트만이 연기했다”고. 하지만 그런 진위 논쟁은 별 의미가 없다. 하버드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했다는 나탈리 포트만은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젊은 춤꾼의 예술적인 고뇌를 훌륭하게 연기했다.
아로노프스키 감독은 뱅상 카슬의 몸 움직임이 워낙 아름답기에 영화 속 뉴욕시티발레단의 예술감독역에 그를 캐스팅했다고 말했다. 세자르 상을 받은 바 있는 뱅상 카슬은 발레 예술 감독의 카리스마를 연기하기 위해 발란신에서부터 바리시니코프 등 세계적인 발레 예술감독을 연구하고 이 영화에 출연한 벤자민 밀피에를 관찰하며 자기의 연기를 설정했다고 한다. 그의 연기가 압권이다.
영화에서 들려나오는 배경음악이 우리의 귀에 익은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와 달라 의아하다. 작곡가 클린트 멘셀이 차이코프스키의 곡을 해체한 후 그 바탕 위에서 사이코스릴러 물에 맞게 다시 작곡한 것이었다. 하긴 예술이 늘 똑같기만 하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새로운 실험과 신선한 변화가 예술의 재미다.
피나 바우쉬의 <댄싱 드림즈>는 춤과 전혀 상관없던 다양한 출신 배경의 10대 남녀 청소년들의 1년여에 걸친 춤 공연 연습과정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이 영화를 위해 실제로 독일 부퍼탈 시의 인근 12개 학교에서 14세-17세 까지의 10대 청소년 46명을 선발했다.
이 춤 작품의 이름은 본래 콘탁트호프(Kontakthof)로 1978년부터 공연하기 시작했고 2001년에는 65세 이상의 평범한 남녀로 공연을 하는 실험적 시도로 성공을 거둔 바 있다. 2007년, 이번에는 10대 청소년들로 작품을 만들기로 구상한 것이다.
피나 바우쉬의 영화라고는 하지만 영화에서는 그녀가 극히 적은 장면에만 나와 의구심을 갖게 되지만 그녀는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처음엔 춤 연습장에 가끔씩 참석했으나 나중엔 매번 참석했다고 한다.
평범한 10대들이 마침내 춤 공연을 무대에 올리는 것도 감동적이지만 영화는 오히려 연습 과정에 초점을 맞췄다. 인간의 외로움, 남녀의 첫 만남의 어색함, 의심과 다정함, 춤을 매개로한 인간 소통의 발전을 다룬다. “나는 인간이 어떻게 움직이는가보다는 무엇이 인간을 움직이는가에 더 흥미를 느낀다”라고 주장하는 피나 바우쉬의 영화답다. <댄싱 드림즈>는 요즘 논의되고 있는 커뮤니티 댄스의 전형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