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한국 동시대 예술계에서 ‘다원예술’이라는 용어가 정책적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후, 예술 장르 간 경계를 실험하는 다원예술은 끊임없는 자기부정과 자기비판 속에서 발전해나갔다. 춤, 연극, 미술의 경계를 넘나든다는 표현은 더 이상 새롭지 않은 지금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세영 안무가를 설명할 때 예술 장르적 경계를 도전하는 창작자라는 표현을 빼놓고 말하기란 어렵다. 다양한 공연예술 매체를 사용하면서도 개별 장르가 추구하는 매체적 접근을 의도적으로 벗어나는 태도를 견지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연극, 모나코에서 조형예술 및 무대미술, 프랑스에서 안무 및 퍼포먼스를 전공한 정세영 작가는 서울무용센터, 국립현대무용단, 국립현대미술관, 남산예술센터, 국립극장(2025년 예정) 등 말그대로 공연예술과 시각예술 분야를 넘나들며 활발하게 작업해왔다.
한국 춤계에서 안무가로서 이름을 알린 것은 2016년 댄스엘라지(제 4회 현대무용 경연대회)에서 1등상을 수상하고 이듬해 국립현대무용단 기획공연에서 선보인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를 선보이면서였다. 절대적 힘을 통해 문제적 상황을 해결하는 극적 장치를 의미하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 연작은 무대에서 전통적으로 사용되는 기승전결의 서사를 연극 또는 춤 문법으로부터 벗어난 방식으로 작동시켰다. 오브제를 활용하여 물리적 상승과 하강이라는 물리적 환경을 만들어 서사 구조를 펼쳐나갔다. 정세영 작가는 연극에서의 언어적 표현이 지니는 직접성, 확정성 없이 서사를 만들기를 원했고1), 춤에서 전체적 구조를 만들고 시각화하는 방식이 흥미로웠다고 말했다2). 그는 연극적 서사를 안무적으로 구현함에 있어서 신체의 운동성이 아닌 사물의 운동성을 활용했다. 자신이 잘 움직이지 못해서라고 고백하지만3), 사실 그가 사물이 내재한 운동성을 사용하는 방식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연극 또는 춤에서 일반적으로 사물을 상징적인 표현이자 주제를 표현하는 도구로 활용하는 방식을 의도적으로 피하기 때문이다. 대신 시각예술에서의 레디 메이드 또는 파운드 오브제처럼 사물 그 자체가 중심이 되고 그것을 탈맥락화하여 의미를 발생시켰다4). 정세영 작업에서 무대 위 사물은 서사를 전개하는 주 매체로 이동했고 원래의 맥락에서 벗어나 사건을 발생시키곤 했다.
2024년 겨울, 정세영 작가는 두 편의 낭독 퍼포먼스 〈그중에 한 마리〉(2024.10.18-19, 공간서로)와 〈내일의 이웃〉(2024.11.30.-12.01, The WilloW)을 선보였고 그의 작업이 매체적 접근에 있어서 변곡점에 서 있음을 보여주었다. 무대 공간에 여러 개의 오브제가 설치되어 있고 퍼포머는 책상에 앉아 실재와 허구, 현실과 가상, 인간과 비인간, 생물과 무생물 간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SF소설을 낭독한다. 연극에서의 언어적 사용과 그 효과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작가는 다시 텍스트로 회귀한다. 이는 언어적 재현의 복귀일까? 아니면 다른 방식을 통한 언어적 재현의 부정일까?
사실 낭독 퍼포먼스는 정세영의 2019년작 〈다 타버리고 난 후에야〉(신촌극장)에서 이미 구현된 바 있다. 작품에서 어두운 무대 위 작은 조명 아래 서있는 한 명의 퍼포머는 40분간 1인칭 주인공 시점에서 이야기를 낭독했다. 방에서 불이 나고 추락 사고로 주인공이 사망한 사건이 시간의 역순으로 전개되었다. 작가가 한 인터뷰에서 말하길, 무대에서 시각적 재현이 불가능한,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을 법한 상황을 다루기 때문에 텍스트에 의존하게 되었으나 연극적 재현 방식을 원하지 않았다고 밝혔다5). 〈다 타버리고 난 후에야〉는 화자가 죽은 이후 자신의 썩어가는 몸을 감각하는 이야기였다면 2024년의 두 작품 〈그중의 한 마리〉와 〈내일의 이웃〉은 가상 세계로 들어가서 사라져버린 몸에 관한 이야기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세영의 낭독 퍼포먼스는 운동성을 보여주는 객체(인간이든 사물이든)는 무대 주변부로 이동하고 텍스트가 작품의 핵심이 되는데, 이 텍스트는 몸의 감각적 경험으로 가득차 있다. 오직 언어로만 재현 가능한 ‘비가시적 몸’의 존재를 이야기한다.
정세영 〈다 타버리고 난 후에야〉 ⓒ정세영 |
〈그중의 한 마리〉는 정세영 작가가 직접 무대에서 나와 TS 작가의 소설 속 에피소드를 원채리 배우가 낭독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시작된다. 화재 속 노부모 대신 섹스돌을 구한 40대 남성의 뉴스 기사를 보여주면서, 사건과 댓글 반응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쓴 소설이라고 설명한다. TS 작가가 실제 인물인지 뉴스 기사가 실제 사건인지 혼란스러워 질때쯤 정세영 작가는 한 관객에게 밸런스게임을 제안한다. 모든 것이 타버리기 전에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들이 계속된다. 고가 카메라 대 3년 된 컴퓨터, 직장 상사 대 5살 된 반려강아지 등 인간의 보편적 도덕 문제일 수 있지만 개인에 따라 다른 가치를 가질 수 있는 질문들이 이어지다가 이내 음악과 함께 낭독이 시작된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부부는 안드로이드 아기를 입양하게 되고 점차 단순한 기계가 아닌 가족으로서 받아들이게 된다. 집이 화마에 휩싸인 날 여성은 인간 아기 대신 안드로이드 아기를 선택한다. 여성과 안드로이드 아기는 화재 중 몸이 거의 소실되고 그녀는 둘의 의식을 컴퓨터에 업로드하여 가상세계에서 살기로 결정한다. 가상세계에서 외형은 무엇이든 선택 가능하기에 여성은 스피커로, 안드로이드 아이는 화분의 모습으로 변신한다. 가상공간은 인간과 비인간의 분리와 위계가 불가능한 세계이다. 안드로이드 아기의 폐기를 반대하는 운동이 일어나고 여성은 선구자로서 칭송받는다.
정세영 〈그중의 한 마리〉 ⓒ정세영 |
TS 작가의 두 번째 소설 〈내일의 이웃〉 출판기념회로 상정한 공연 〈내일의 이웃〉은 마광현 배우의 낭독으로 전개된다. 시한부 선고받은 남자는 연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가상현실로 이주하는 보험상품에 가입하고 의식의 업로드를 진행한다. 그 과정에서 기계적 오류가 발생하고 그는 가상현실에서 보이지 않으나 위치만 나타나는 상태가 된다. 8년이 지난 후 그의 좌표 마저도 사라지게 되나, 보험사는 그의 데이터를 복구했다는 소식을 연인에게 전한다. 기술적으로 가상세계로의 이주는 사실상 불가능하며 인공지능으로 만든 데이터일뿐이라는 의심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를 찾으러 가상세계로 들어간다. 다시 만난 두 사람은 잃어버린 기억과 추억을 되찾고 함께 시간을 보낸다.
SF소설에 가까운 내용을 다루는 〈그중의 한 마리〉와 〈내일의 이웃〉은 물리적 몸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가상현실에서 데이터화된 의식으로 살아가기로 결정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마치 『뉴로맨서』 의 저자 윌리엄 깁슨처럼 물리적 몸의 제약에서 벗어나 뇌신경을 컴퓨터와 연결하여 영혼이 자유로워지는 사이버세계를 그려내는 듯 하지만, 정세영의 가상세계는 몸의 존재가 사라진 상태가 아니다. 〈그중의 한 마리〉 속 가상현실에서 외형을 가지지 않으면 타인에 의해 인식되지 않기에 디지털 유령이나 다름 없는 상태로 간주한다. 〈내일의 이웃〉에서 가상현실 이주자 남성이 말하길 스스로 또는 타인에 의해 느낄 수 없는 상태는 말 그대로 몸이 사라지는, 죽음과도 같은 것이다. 존재를 알 수 있는 방법은 피부결에 닿는 촉감, 온도, 희미한 빛 등과 같은 감각을 느낄 때라고 말한다. 즉 가상공간에서도 여전히 몸의 감각은 인간 존재의 근거가 된다.
두 작품 속 가상현실에서 비가시적으로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몸을 다루는 데에 있어서 정세영 작가는 서사의 구체성을 담아내길 원했기에 불확정적인 감각이 아닌 확정적 언어를 사용하였다. 하지만 동시에 연극적 재현을 하지 않으면서도 공연으로서의 형식을 담아내기 위한 구조적, 매체적 실험을 동반하였다. 재현 불가능한 상황을 담은 서사는 낭독 형식으로 전달하고 시각적인 요소를 제거함으로써 오히려 가상세계 속 감각적 경험에 대한 관객의 상상을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또다른 중요한 공연적 구조는 허구와 실제 상황의 중첩이다. TS 작가의 출판기념회 행사로서 낭독극이 실제 공연의 상황이 되고(내일의 이웃), TS 작가의 소설 속에서 개최된 출판 기념회의 공간적, 청각적 상황이 실제 공연장의 무대와 일치하는 상황(그중의 한 마리)을 통해 실재와 허구를 전략적으로 교란시킨다.
〈그중의 하나〉와 〈내일의 이웃〉은 SF 장르적 서사를 낭독회 형식으로 전달한다는 점에서 유사하나 그 방식에 있어서 차이를 지닌다. 〈그중의 하나〉는 실재와 허구, 현존과 재현을 넘나들며 적극적으로 낭독극에 공연적 구조를 부여하지만, 〈내일의 이웃〉은 낭독극 형식을 대체적으로 따르고 있다. 오브제의 사용에 있어서도 이 점은 부각된다. 〈그중의 하나〉의 무대 위 설치된 스피커와 작은 화분의 등장은 실제 공간을 서사 속 낭독회의 공간으로 변모시키고, 스피커와 작은 화분은 가상세계 속 여성과 안드로이드 아기로, 관객은 여성 주인공의 지지자의 역할을 부여받는다. 〈내일의 이웃〉에서 설치된 트리, 파란 공, 전기포트, 스피커 등은 그의 전작에서 사용되었던 오브제들이다. 전작에서 그랬듯, 서사 속 특별한 의미를 가진 오브제로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의 작동이 만들어내는 효과를 활용한다. 예를 들어, 긴장감이 고조되는 시점에 전기포트가 켜지고 갈등이 형성되면서 물이 끓기 시작하고 하얀 김이 올라온다. 〈내일의 이웃〉은 정세영의 전작에서 오브제를 사용하는 방식을 동일하게 가져오지만, 서사와 연관성을 거의 갖지 못한 채 부차적인 요소로서만 작동했다. 〈내일의 이웃〉은 낭독극 형식 내에서 서사의 언어적 전달에만 집중하고 있다는 점에서 작가 특유의 탈관습적이고 해체적 접근이 잘 드러나지 않아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정세영 〈내일의 이웃〉 ⓒ한석진 |
정세영 작가는 확정적 언어가 아닌 감각적 경험으로 연극적 서사를 펼쳐내고 신체가 아닌 오브제를 사용하여 안무적 구조를 형성하는 등 기존 예술 형식과 매체가 작동하는 방식을 의도적으로 탈주해왔다. 〈그중의 한 마리〉와 〈내일의 이웃〉에서 그는 다시 언어로 돌아와 낭독극을 펼친다. 하지만 이 낭독극은 몸이 없는 가상현실 이야기를 다루지만 몸의 감각이 어느 때보다 현전하는 퍼포먼스이며 낭독극 자체가 실재와 허구로 뒤섞인 공연의 구조를 취한다는 점에서 그의 작업은 여전히 탈매체적이고 탈장르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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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상현(2024. 12. 6). 정세영 작가 인터뷰: 도구로서 서사성과 서사장치.에디토리얼 콜렉티브 널. https://collectivenull.com/020-2/.
2) 한석진(2019). 한국 컨템포러리 코레오그라피 재현에 반하다_1차 세미나 ”한국 컨템포러리_무용에서의 언어적 안무 전략“. 댄스&미디어연구소. https://cafe.naver.com/danceamedia/253.
3) 양은혜(2022). 사물, 공간, 퍼포머, 관객 - 윤푸름, 정세영, 뭎과의 대화. 춤in. http://choomin.sfac.or.kr/zoom/zoom_view.asp?type=IN&div=&zom_idx=769.
4) 정세영(2019). [무용인을 위한 렉처 시리즈]The Object in Use : 사물_Thing, Object, Matter. 춤in. http://choomin.sfac.or.kr/zoom/zoom_view.asp?type=IN&zom_idx=464&div.
5) 하상현(2024). 앞의글.
한석진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에서 무용이론 전공 예술사 과정 후 영국 서리대학교에서 무용학 박사 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이론과 조교수로 재직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