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독창성이 불가능한 시대이다. 이 시대에 고유한 것이란 게 존재할까. 낭패감과 지루함, 빛남이 뒤섞인 무대였다. 대구시립무용단(예술감독 홍승엽)의 70회 정기공연 〈소가 너머 간다〉(6월2-3일, 대구문화예술회관 팔공홀). 홍승엽 감독의 두 번째(대구시립무용단에서) 신작.
무대 배경으로 서 있는 이중섭의 작품 〈판잣집 화실〉. 그림 속 이중섭이 덮고 있는 것과 닮은 구멍 난 이불. 무용수들 행진곡에 맞춰 구멍으로 팔 다리를 뻗고 접고, 일어났다 눕기를 반복. 여자는(김분선) 이불을 뒤집어 쓴 남자들의 등을 (길인 듯)놀이하듯 위태롭게 걷는다. 의상에 보이는 이중섭의 연필화 선, 무용수들이 그림 속 아이들처럼 구슬을 굴리고 피리를 분다고 ‘중섭이’ 무대로 불려나올까만.
팔을 펼쳐든 날개 짓, 바다 물속 지나 공중에 한 줄로 가라앉아 서로의 어깨에 손을 얹으니 가만히 번지는 슬픔, 이불을 찢어 하나씩 뒤집어 쓴, 8마리의 황소(?). 마치 기억이 사라지듯, 뒤돌아 천천히 걸어 들어가는 씬 등은 이중섭에게 건네는 홍승엽의 위트 있는 인사였다.
(즉흥)움직임의 질이란 것이 있다. 춤의 집합, 규정되지 않은 힘, 더 크게는 우주적 힘. 이 모든 것이 반복적인 구조 안에서 서로 섞이고 대응하면서 표현적인 요소의 조직으로 어떤 차원이 생기는 것.
차,수석 무용수들의 (최상열, 김동욱, 김동석, 문진학, 신승민, 김분선) 즉흥, 난감했다. 비스듬히 눕거나 웅크린 채 사이를 두고 서로의 소리와 몸짓으로 반응하는 움직임. 이들은 이중섭 그림 속 순박한 삶을 몽매함으로, 명랑한 활기와 천진함을 경박함으로 간단하게 바꾸어놓는다. 무용수의 춤(지적) 수준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 즉흥이다. 간혹 뜻하지 않게 어떤 은유를 얻을 수도 있지만. 공부 없는 즉흥, 위험하다.
잘 익은 복숭아색(그림 속 남자 아이 형상) 의상을 입은 6명의 여자 무용수. 이중섭 그림 특유의 단순한 형태의 의상과 움직임, 따뜻한 정서와 해학미가 스민 장. 닭, 돼지, 고양이 소리와 함께 아이들이 놀고 있는 무대 가운데 직사각형의 흰색 매트 두 장을 까는 작업을 그대로 보여주는 감각적인 춤의 배치.
두 장의 매트, 그 가운데 놓인 통나무. 양복을 입은 남자(지식인?)가 도끼로 내리쳐 통나무를 둘로 가른다. 명민한 발상이다. 가벼우면서도 묵직한.
사랑하는 이들이 곁에 없다는 것, 더구나 언제 만날지 기약이 없다는 것은 그 자체로 견딜 수 없는 고통. 삶을 산다기보다 견뎌내는 사람들의 마음을 춤으로 풀어낸다. 선율과 리듬을 고정시켜 놓은 채 진행되는 라벨의 음악 ‘볼레로’.
이국적이고 에로틱한 선율을 닮은 붉은색 민소매 레오타드와 검정색 타이즈를 입은 여성무용수 둘(이광진과 강주경). 같은 의상의 무용수 둘이 이 둘을 잠시 껴안았다가 풀어주면서 시작. 고통이 반복되는 삶에 접목한 듯. 리듬이 리드, 감정 내지 움직임으로 변주되는 춤이 계속 따라붙는다. 같은 듯 다르다. 크지 않은 체구에서 뿜어 나오는 에너지, 그리고 절제된 움직임. 이광진과 강주경의 춤, 훌륭했다.
춤에 있어서 반복이란 것은 그 자체로 이미 차이를 포함하고 있다는 말과 같다. 춤의 주된 움직임은 반복적인 모티브에 끊임없이 차이로 변주되는 또 다른 움직임의 요소가 있다는 것. ‘볼레로-이별의 슬픔’에서 춤의 주된 움직임은 그 자체로 이미 변주이며 똑같은 동작을 그대로 반복하는 경우는 없다. 차이 없는 춤의 반복이란 불가능하다.
아쉬운 점은 ‘20세기 발레단’의 조르주 동이 춘 〈볼레로〉(작은 변주가 있는 반복된 움직임의 춤 형식)와 여성무용수가 춘 〈볼레로〉에서의 의상의(붉은 색 레오타드와 검정색 타이즈) 이미지가 작품에 뒤섞이면서 일부 (독창성) 빛을 잃었다는 것.
어떤 춤이든 춤의 스타일은 안무가의 영혼이다. 춤은 무언가에 관한 것만이 아닌, 그 자체로 무언가이기도 하다는 것. 몸으로 전해지는 어떤 에너지에 아름답구나, 라는 말을 되뇌며 지루한 시간을 통과하게 하는 힘을 보여준 ‘볼레로-이별의 슬픔’의 장. 춤의 존재이유에 대한 답을 보여준 무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