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한국발레협회 주최 K발레월드가 제8회 행사를 마쳤다. 8월 15일부터 28일까지, 청소년발레와 야외무대 등을 포함시킨 2주 일정이지만 기량을 평가할만한 주요 공연은 모두 아르코예술극장에서 진행되었다. 개•폐막 프로그램이 각 이틀씩, 중간에 신인 안무가전이 하루 배정되어 총 3일간 관람했다.
8월 22일과 23일의 갈라 공연에는 전문 단체들이 고루 초청되었다. 개막 첫 순서로 화려하게 등장한 국립발레단의 김지영과 김현웅은 ‘흑조 그랑 파드되’로 한국 최고 스타들의 면모를 가늠하게 했다. 두 번째 커플은 볼쇼이 발레단 아나스타샤 스타쉬케비치와 바체슬라브 로빠틴으로 <마쉬코브스키의 왈츠>와 <돈키호테> 그랑 파드되를 공연했다.
<마쉬코브스키의 왈츠>는 특히 안무자가 <호두까기 인형>의 기틀을 1934년부터 지속적으로 정돈한 바실리 바이노넨이라니 보다 주목받아 마땅하다. 공원에서 만난 연인들의 감성을 화려한 춤 기교에 담은 소품으로 흰색 바지와 셔츠를 입은 남성과 긴 튜닉을 입은 발레리나는 고조되는 멜로디를 즐긴다. 바닥에서의 포즈를 시도한 점이나 공중 2회전, 왈츠 리듬을 시각적으로 극대화해 밀고 당기는 포즈를 보면 현재의 고난도 파드되 기교가 이미 오래 전에 고안된 사실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작품의 1940년도 공연 영상을 보면 바이노넨의 기교가 60년대에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으로 이입된 연결성을 발견할 수 있다.
<돈키호테> 그랑 파드되는 ‘왈츠’보다 더욱 흥겨웠다. 두 사람의 타고난 조건이 탁월하지는 않았지만 발레는 춤이고, 춤은 추는 이가 우선 즐긴다는 당연하지만 막상 구경하기 어려운 광경을 만들었다. 편안하게 이완된 전문가의 여유는 볼쇼이의 권위와 명성을 표출하는 또 다른 방법 같다. 매우 빠른 버전의 여성 솔로는 발레리나의 귀엽고 밝은 개성을 가장 잘 살린 앙센느망(동작연결)으로 인상 깊다. 남자의 가벼운 도약, 곧게 펴진 발끝, 회전기의 속도감이 고루 관객의 환호를 유도했다.
슈투트가르트 발레단 엘리사 바데네스와 콘스탄틴 알렌은 <물다(Bite)>와 <전설(Legend)>을 공연했다. 1975년 생 가브리엘 프로코피에프 음악에 카타르지나 코치엘스카가 안무한 <물다>는 2014년 초연작이다. 폴란드 출신 안무자는 슈투트가르트발레단에서 드미 솔리스트로 활동한, 동 발레단 ‘젊은 안무가전’ 프로그램을 통해 새로운 영역에 발을 들인 유망주로 알려져 있다. 음악과 동작의 교감이 윌리엄 포사이드 이상이라고 느낀 이유도 결국 전통을 흡수한 신세대의 풍족함이라 설명할 수 있겠다. 끊임없는 접촉, 희한한 포즈는 춤의 고수라 할 특수 직업군의 묘기로 손색이 없다. 특히 여성 출연자는 탄탄한 기량이 베인 발레에 적합한 신체로도 눈길을 끌었다.
<전설>은 ‘독일 발레의 기적’을 이룬 전설 같은 안무자 존 크랑코의 1972년 작품이다. 안무자에게 전설은 “러시아 발레리나 갈리나 울라노바와의 만남… 소련 스타일 발레에 대한 오마주”였다고 한다. 헨리크 비에니아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 ‘전설’에 맞춘 2인무에는 러시안 아크로바틱 발레가 군데군데 들어있다. 여자가 남자의 한 손에 들려 앉아 공중에 머무는 동작, 남자가 여자의 골반을 한 손으로 들어 올리면 여자가 공중에서 누운 자세를 유지하는 포즈는 유리 그리가로비치의 1967년 작 <스파르타쿠스>를 성공 시킨 요인들 중 하나다. 최고의 기량을 자랑하는 동시에 작품 스스로가 역사를 증명하는 자료가 되니 또 다른 개념의 명작이 아닐 수 없다
(이 작품은 2009년 4월 성남국제무용제에서 강수진과 제이슨 레일리가 국내 초연을 했었다).
기교의 절정을 보인 클래식 유파에 상반된 작품으로는 페리댄스 컨템퍼러리 댄스컴퍼니(이하 페리댄스)의 2005년 작 <황혼> 중 2인무와 서울발레시어터의 <발레를 위한 탱고>를 꼽을 수 있다. 쇼팽의 ‘야상곡’에 등장한 페리댄스의 리조이 레이와 디오네 크랙은 발레와 현대무용의 중간 지점이라 할 유연한 동작으로 이별의 느낌을 전했다. <발레를 위한 탱고>는 피아졸라의 ‘탱고 발레’에 맞춰 제임스 전이 2011년 안무했다. 격정과 차가운 분위기를 오가는 극적 멜로디에 열 명의 출연자가 치마와 어깨를 흔들고 몸을 출렁이며 다양한 배열로 무대를 채운다.
그러나 이 두 작품은 기교와 2인무 중심인 이번 갈라 공연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서울발레시어터에는 보다 적합한 레퍼토리가 많다고 생각되며, 폐막 공연을 거의 다 채운 페리댄스 팀이 구태여 개막 갈라에 동원될 이유가 없어 보인다. 또한, 네 발레리나가 경쟁한 <파드 캬트르>의 영향 때문인지 발레 갈라에서는 나이 어린 사람이 먼저 출연해 작품의 강도가 끝으로 갈수록 강화되는 것이 관례인데, 이번 무대는 작품 성향과 출연자 수를 우선시 한 듯하다. 그렇더라도, 국립발레단의 ‘흑조 그랑 파드되’보다는 유니버설발레단의 ‘로즈 아다지오’가 앞으로 가는 순서가 옳다고 생각된다. 반면, 2015년 개막공연은 작년에 비해 수준을 높였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 할 수 있다. 전문가와 아마추어를 섞지 않았고, 외국 초청단체들의 기량이 월등했으며, 한국을 대표하는 직업단체들이 거의 모두 초청되었고, 세계 발레시장에 진출해야 할 한국 발레의 과제를 인식시켰다는 점 등이 큰 성과다.
8월 25일에 열린 창작발레 신인안무가전에는 모두 다섯 명이 참가했다. 화려한 개·폐막공연 중간에 낀 신인들의 소품이 결코 돋보이기 어려웠으나 안무에 대한 개념이 구체화된 변화는 기록할만한 가치를 지녔다.
단국대 강사 신현지의 <이방인>은 카뮈의 동명 소설 주인공의 심리를 다뤘다.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태연한 주인공, 그 이후의 살인과 함께 장례식 즈음의 행동이 크게 왜곡되어 재판에 영향을 미친다. 안무자는 벨라 바르톡의 불협화음과 붉은 카펫으로 한계를 설정해 갑갑한 소설 분위기를 춤 무대로 옮겼다.
전 국립발레단 수석 이원철의 <클립(Clip)>도 상당한 완성도를 지녔다. 조지 거쉰의 ‘파리의 미국인’으로 음악을 통일해 그 안에 인생의 춤들을 묶었다. 네 여인의 원피스 색깔이 다르고, 주인공 남성은 그녀들과 인연을 만든다. 동작 구성력이 좋고 전반적인 통일감을 잘 유지했다.
외국 발레단에서 오래 활동한 전은선은 토마소 알비노니 음악이 지닌 색채를 춤으로 나타낸 <컬러스(Colors)>를 공연했다. 이 작품을 소극장에서 본 기억이 있는데, 대극장으로 옮기니 춤과 구성 형태가 비로소 빛을 발했다. 음악에 어울리는 바로크 시대 페티코트가 소품처럼 특징적이고, 동작 배열의 섬세한 감각이 돋보인다.
8월 27일과 28일의 창작발레공연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조주현발레단과 미국에서 활동 중인 이스라엘 출신 이갈 페리가 이끄는 페리댄스가 맡았다. 이갈 페리의 2015년 작 <우레 같은 침묵>은 슈베르트 추종자인 블라디미르 마티노프의 음악이 분위기를 끌어간다. 그러나 안무자는 음악에 짜 맞추고 새로운 기교를 보였던 기존의 방식을 의도적으로 배제했다고 말한다. 그 때문인지 10여 명 군무가 만들어내는 공간은 편안하고 자유롭다. 몸의 움직임을 다루는 솜씨가 노련하고, 동작 연결의 당위성, 동작 활용도가 몰입을 유도한다. 평화로움에서 불협화로, 다시 서정적으로 끌어가며 “침묵 속에 감춰진” 감정의 변화를 그려냈다.
조주현의 <그들이 사는 세상>은 인간의 위선을 풍자하는 작업이다.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에 맞춰 걷는 백조들이 우아하나 게걸스런 식사, 뚱보 아가씨, 빨간 드레스를 입은 미인, 몸 자랑에 들뜬 남자들의 장난기가 우세하다. 뚱보와 마른 남자의 우스꽝스러운 사랑 이야기, 남자 군무의 활력 넘치는 도약, 심지어 공룡 모형까지 등장한다. 의미 교감이 충분한 희극발레로 손질하면 더욱 좋겠다.
마지막 작품 <언제나(Evermore)>는 페리댄스의 초청 안무가 드와잇 로든이 만든 8인무로 재즈 가수 냇 킹 콜의 노래와 발레 기교를 결합시켰다. ‘사랑’, ‘미소’를 강조하는 노래 가사를 음미하듯 리듬을 타며 ‘안무는 쉽다’고 말하는 듯하다. 하지만 한 동작도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는 꼼꼼함이 보이고, 동작 선별 능력도 뛰어났다.
‘창작발레의 밤’ 역시 작년에 비해 공들인 흔적이 크다. 대규모 외국 단체 초청을 감당하며 “한국의 발레를 세계로! 세계의 발레를 한국으로!” 라는 축제 슬로건에 한발 더 다가갔다. 아직 생소한 명작들, 최근의 경향, 발레의 절정을 한 자리에서 살필 수 있는 알찬 무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