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현대무용단 ‘자유’의 정기공연. 박근태의 〈Justice〉, 안선희의 〈new zone〉의 작품이 무대에 올랐다.
박근태의 〈Justice〉
까뮈의 <이방인>, 법정장면을 가져와서 풀었다. 기이하고 부조리하고 위협적인 감정, 불안과 소회를 연극적 언어를 빌어 독창적으로 조명한 무대였다.
사각 조명의 배열, 조명이 만들어 낸 공간에 서 있는 4명의 무용수(남1. 여3). 각자 자신만의 이야기를 한다. 자신의 말이 진실이라고. 다시 재배열되는 무대. 재판정이 생긴다. 세 명의 여자무용수는 변호사 검사 판사로. 한 명의 남자는 피고(뫼르소)다. 한 공간에서 서로 다르게 추는 변호사 검사, 피고의 춤. 서로가 말하고 있는 진실이란 것의 길이를 재보는 것 같은 움직임. 변호사가 남자(피고)의 다리를 잡아 거꾸로 들고는 털어내듯 흔들어댄다. (진실)속에 든 것을 (말)털어놓으라는 듯. 소득이 없다. 판사의 솔로. 재판이 이루어지는 시간 속에서 싸움의 깊이를 뚫고 있는 듯, 화드득거리는 춤.
‘진실’을 말하라니, 이런!
피고를 취조하는 검사(안선희)의 춤 씬. 흥미롭다. 분명한 어조로 취조를 하면서 추는 춤이 나른하기 짝이 없다. 테이블위에 선정적인 자세로 걸터앉는가 하면 드러누운 채 대사를 한다. 마치(속마음) ‘진실은 개뿔, 난 이 사건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네. 더욱이 너란 인물에 대해서는 아무런 흥미도, 인간적 연민도 그 무엇도 느끼지 않는다네. 지루한 이 사건이 빨리 끝나기만 바랄 뿐.’ 이라고 말하는 춤. 집중력과 춤의 에너지가 선명하고 단단하다.
증인으로 나온 박근태의 춤. 스스로 목을 조르면서 ‘난 아무 것도’ 모르며, 영문을 모르겠지만 아무튼 ‘사건과는 관련이 없다’고 항변하는 춤이 아프다. 불쑥 ‘태양’이라는 단어를 뱉는다. 그래! 태양. 뫼르소, 엄마의 장례식 날, 머리 위로 찌르듯 쏟아지던 정오의 그 ‘태양’ 빛. 기록원이 앉은 테이블 만을 비추는 조명, 누군가 말한다. “당신을 수정하라.”
타자와 세상에 확인 받고자 하는 것이 반항이다. 어쩌면 세상이 안무자에게 끊임없이 ‘명백한 태도’를 요구했을지도. 박근태는 분명한 신념에 있어, 내 삶에서조차 나 아닌 다른 이들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현실을 어느 순간 인식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내 삶에서 내가 빠졌다는 것을 어느 순간 깨달았을지 모를 일. 혼란스럽고 무서웠을 것이다. 갑자기 무대 위 동작들이 이해할 수 있는 생각의 조각들로 바뀐다.
까뮈에게 있어 부조리는 철학적인 개념이다. 형체가 없는 생각을 불확실한 춤의 언어로 표현해낸다는 것, 그것도 명확하게라는 단서가 붙으면 그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 된다. 더구나 몸은 불분명하고 불안정하다. 불가능을 가능에 가깝게 하기 위한 과정을 고민하고 있는 안무가는 어쩌면 부조리한 사람일지도. 박근태가 하고 있는 ‘진실’이나 ‘춤’에 대한 고민. 무엇을 이해한다는 것은 예술적이건 과학적이건, 그것을 일관된 틀 안에서 파악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말인데, 안무자가 진실(진리)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것에 대한 어려움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낯선 진실의 출발점이 벌써 안무자의 춤에 깊이 닿아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안선희의 〈new zone〉
무대와 객석을 울리는 우르릉거리는 기계음 소리와 함께 큰 직육면체 조명이 무대 가운데로 이동한다. 모서리 쪽에 앉아 있는 무용수, 자신의 공간이라는 의미. 움직임이 시작되면 위로 떠오르는 조명. 다른 공간으로의 이동. 감각적인 무대연출이다.
붉은 색 원피스의 무용수, 느린 춤. 군무진이(10명) 입은 컬러풀한 의상. 발을 끌며 무대를 몰려다니다가 ‘하아’하고 내뱉는 호흡. 마기 마랭의 〈may be〉 움직임이 연상된다. 한 무용수를 공중으로 띄웠다가 바닥에 내팽개치는가 하면, 영문도 모른 채 미친 듯이 모이고 흩어지기를 거듭한다. 세상의 풍경이다.
하얀색의 짧은 원피스를 입은 무용수 등장. 등에 뿔이 달렸다. 마치 공중에서 부유하는 듯한 걸음으로 천천히 무대 가운데로 이동. 이어 어두운 무대에 스미듯 등장하는 긴 검정원피스를 입은 가수(문수경)의 구음. 등에 뿔이 달린 짧은 흰색원피스를 입은 안무자(안선희)의 춤이 독특하고 이채롭다. ‘뿔’은 타인과의 거리를 두기 위한 장치. 혹은 혼자서 가겠다는 의지의 뿔? 세 명의 춤. 짐승이 내는 것 같은 울부짖음. 한 명의 무용수 위에 올라 탄 두 무용수. 거리를 두기 위한 뿔, 소용없다. 실패를 일찌감치 예감하고 있었는지도. 둘이 이내 껴안고 추는 갈등의 춤. 강박증을 가진 이. 무용수 하나가 둘 사이에 끼어들기도. 몸이 깨어지고 마음이 부서진 다음에도 어떻게 온전하게 남을 것인가를 말하고 있는 춤.
사각 조명이 다시 내려온다. 군무진이 나가고 흰색원피스를 입은 가수, 노래하며 조명 가장자리에 선다. 자아와 희망의 간극이 해소되는 자리. 라이브 음악(전자기타 한 대와 목소리가 좋은 여자가수)에 모든 춤을 풀어놓는 감각적인 무대연출이 돋보이는 무대였다.
서른일곱 살, 춤도 잘 추는. 안무자(안선희)의 애끓는 춤의 열정을 읽을 수 있는 무대. 이상한 피로감. 아직 튼튼하지 않은 형식에 감당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으면 그것을 담아내기보다 그 속에 묻혀버리기 쉽다. 하고 싶은 춤의 말을 절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균형을 잃지 않는다. 새로운 젊은 작가의 등장이 반갑다.
(부산대교수의 투신)시대는 변했으나 우리는 여전히 불행하다. 하나의 가치를 이 세상에 피우기 위해 몸 바쳐 싸우고, 가치 있는 삶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 자존심을 곧추 세운 그들의 삶과 정신이 서려있는 공간에 가까이 있다는 것. 창작 작업을 하는 (부산대)‘자유’무용단이 가지고 있는 큰 (정신)재산이다.
유연아의 <봄의 제전>
20세기 ‘발레 뤼스’ 시대, 스트라빈스키 작곡, 니진스키의 안무의 <봄의 제전>이 초연(1913년)된다. 이후 불협화음과 불규칙한 리듬의 이 난해한 곡을 재해석, 바실리예프, 마신, 모리스 베자르, 피나 바우쉬 등 많은 안무가들이 <봄의 제전>을 안무. 모리스 베자르의 이름을 세계적으로 만든 것도, 피나 바우쉬가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 작품도 <봄의 제전>이다. 그 중에서도 피나 바우쉬의 예술적 자질과 춤의 성격을 명확히 굳힌 <봄이 제전>은 독일 전통과 미국의 모더니즘을 독창적으로 혼합한, 그녀만이 만들 수 있는 충격적이고 아름다운 작품.
유연아의 <봄의 제전>(9월 10일, 대구문화예술회관 팔공홀). ‘광복 70주년’ 기획공연.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을 재해석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궁금한 무대.
1층 중앙 열 객석의 반을 덮은 흰색의 대형 천, 천위에 꽃분홍색의 연등이 몇 개 놓여있다. 자리를 찾지 못한 관객들을 세워 놓은 채, 의자를 덮고 있던 천을 걷어낸다. 꽃분홍색의 연등은 ‘염원’으로, 객석을 덮은 흰색천은 ‘땅’으로, 되찾아 ‘하나로 된 땅’으로 해석된다. 감각적인 연출이었을 시작무대가 자리를 찾으며 웅성대는 관객들로 인해 제대로 부각되지 못하고 마무리된 것이 아쉬웠다. 이어 흰 셔츠에 폭이 좁은 검정색 바지를 입은 네 명의 여자무용수가 음악 없이 추는 한국 춤. ‘분단국가로 기약 없는 이별에 처한’ 역사는커녕 한국 춤의 정서조차 담아내지 못한다. ‘땅’의 기운을 ‘예찬’함과 동시에 희망적 메시지를 전하겠다는 안무의도, 오류다. 기본무로 짜인, 성의 없는 춤의 구성과 기량으로는 가능한 일이 아니다.
한국전통(춤)의 빈약한 해석으로 무겁고 어두운, 죽음의 땅을 예찬(?)하는 무대가 되고 말았다.
2장, ‘희생’ 무대를 가로 지르며 달리는 세 쌍의 남녀. 스트라빈스키의 음악 <봄의 제전>, 불협화음과 불규칙한 리듬이 주는 주제의 분명함. 여자 무용수가 입은 흰색 원피스, 허리와 어깨 한 쪽이 핑크색 끈에 묶여있다. 이리저리 휘둘리며 벗어나지 못하는 고통의 춤, 진부하다. 남자들은 여자들에게 고통을 주는 존재로 설정, 애증의 관계로 발전하기도. 인물의 설정과 감정구조의 선이 일관적이지 않다. ‘고난과 고통으로 얼룩진 우리역사의 운명적 상황’을 나타냈다는 안무의도에 균열이 생기는 부분이다. 춤의 배치와 이동을 감각적으로 만들어주는 조명(김성원, 박성봉), 느슨한 춤에 긴장을 준다.
무대에 나란히 놓인 세 장의 매트리스(어쩌면 여자무용수에게 할당된 공간일수도) 세 명의 남자무용수, 여자를 넘어뜨리고, 다리를 잡아끌고, 일으키고 쓰러뜨리기를 반복한다. 성노예의 상황? 여자가 남자를 밟고 올라선다. 여자 무용수의 충격이 몸으로 번지는 춤. 영화 <데인저러스 메소드>의 키이라 나이틀리 연기와 흡사하다. 여자를 던지면 쓰러지고 서로 엉키는 춤의 반복이 남자들이 여자들을 오케스트라 피트에 밀어 넣으며 끝난다.
무대 위 고통의 춤이 우리 역사의 ‘기구한 운명적 상황’을 ‘역설적으로 떠올리게’ 해줄 것이며 그 ‘고통이 치유와 화해’의 춤이 되어 ‘평화통일’을 염원하고, 급기야 ‘광복 70년의 의미를 되새기게 될 것’이라고 밝힌 안무자의 안무 의도. 유연아는 남자(일본)에게 (성노예의 상황)당하는 고통을 나열한 뒤, 그것이 ‘치유와 화해’의 춤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거창한 ‘평화통일의 염원’과 ‘광복 70년의 의미’까지 담았다고. 남자가 여자무용수를 넝마처럼 흔들어대다가 오케스트라 피트 안으로 던져 넣는 무대에 이 모든 의미를 담았다니. 난감한 무대였다.
<봄의 제전>으로 안무가들이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이유는 치밀한 곡의 해석과 자신만의 독창적이고 독특한 춤의 세계(철학)를 담아냈기 때문이다. 안무자만의 독창성, 창조적인 춤의 구성, (춤)철학이 없이는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재해석은 가능한 작업이 아니다. 적어도 고통을 매혹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춤, 자신만의 춤의 언어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했다. 안무가의 삶은 작품으로 나타난다. 삶을 삶의 절대적 형식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그 삶을 내적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것과 같다. (절대적인)작품이든 안무가의 삶이든 안에서 냉정하게 바라보지 못하는 눈은 결국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