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유니버설발레단 〈그램 머피의 지젤〉
절반의 성공, 의미있는 창작 작업
방희망_춤비평가

 기대 이상의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유니버설발레단이 호주 안무가 그램 머피를 위촉하여 만든 네 번째 창작발레 〈그램 머피의 지젤〉(이하 〈지젤〉, 6월13-17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평자 16일 관람)은 〈지젤〉의 새로운 버전이 얼마나 다를까 싶은 선입견을 기분 좋게 깼다.
 




 그램 머피는 〈호두까기 인형〉을 소녀 클라라에 대한 동화에서 탈피하여 정반대로 늙은 발레리나의 회고로부터 출발하는 〈클라라의 이야기〉(1992)로 꾸며낸 바 있으며, 〈백조의 호수〉(2002) 역시 영국 왕실 이야기를 소재로 끌어와 재해석한 바 있는 스토리 텔러다. 발레 쪽에서 고전 해석에 새로운 시각으로 도전하는 재능있는 안무가들이 제법 되므로 어떤 면에서는 새삼스러울 것이 없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번 그램 머피와 유니버설발레단의 협업은 특히 ‘한국적인 지젤’을 창조해낸다는데 공감대가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그간 이 단체의 창작 작업- 발레 〈심청〉, 발레 〈춘향〉, 발레뮤지컬 〈심청〉-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물론 ‘한국적인 지젤’이라는 목표가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는 세부적으로 좀 더 진지하게 고민해 볼 문제다. 주요 캐릭터들에 ‘한국적’이라 부를 만한 감성이 배어들어 있는지, 아니면 작품의 외형적 특히 시·청각적 요소에 ‘한국적’ 색채가 담겨 나오는 것을 두고 그냥 ‘한국적’이라 부르는 것인지 말이다. 아직은 후자에 가깝다. 1막의 무대 배경에서 먼 산의 그림자가 겹쳐지는 것이 수묵화의 농담을 연상시키고, 알브레히트가 등장하는 바위산은 마치 자개를 납작하게 떠서 붙인 듯 친근한 질감이었다. 또 빌리들이 활동하는 2막의 중심에 자리한 거대한 나무는 마을마다 신성시했던 당(산)나무 같기도 했다.
 한편 이번 작품을 위해 완전히 새롭게 작곡된 크리스토퍼 고든의 음악에 장구, 꽹과리, 징, 목어, 가야금 등의 국악기가 별 위화감 없이 어울렸던 점이나 지젤 마을 사람들의 의상이 천연염색을 한 것처럼 자연스러운 색감과 넉넉한 실루엣을 통해 한복을 떠올리게 했던 점도 꼽을 수 있겠다.




 캐릭터가 한국적이라고까지 하기는 어렵지만, 그램 머피의 시도는 우선 낭만주의의 집약체라고 부를 만한 원작의 틀을 뒤틀어 인물들이 전면에 튀어나오게 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지난 3월에 국립발레단이 공연했던 파트리스 바르 버전의 〈지젤〉도 바틸드와 지젤이 이복자매라는 설정을 양념처럼 살짝 얹기는 했지만, 재해석이라고 부를 만한 수준이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공작 부녀가 지젤의 집을 방문하는 장면에서 주의 깊게 지켜봐야 알 수 있는 두 세 번의 마임으로 그 설정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작품의 시작부분부터 지젤의 부모인 울탄과 베르트, 울탄을 사랑했으나 배신당한 미르트의 삼각관계를 돌출시켜 업이 대물림되고, 원한으로 바뀐 정념이 인간의 운명을 지배한다는 비극적 면모를 차곡차곡 쌓아나갔다. 전사(前史)를 보여준 덕분에 새로운 지젤은 아버지가 희생하여 지킨, 활달하고 건강한 매력을 지닌 아가씨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원작의 지젤이 수동적으로 남자에게 빠져드는 순진무구한 처녀라면, 여기서는 알브레히트와의 첫 만남에서 먼저 관계를 맺어나가려는 적극성이 엿보인다. 그리하여 몹쓸 병에 걸려 나약하고 남자에게 버림받았다 하여 광란에 빠져 죽는 낭만주의의 전형적인 여주인공상은 폐기될 수 있었다(수없이 많은 이별을 경험하고도 씩씩하게 살아가는 현대의 여성들은 지고지순으로 추앙받는 지젤을 보며 더 이상 주눅 들지 않아도 된다).
 원작의 지젤이 죽어서 빌리의 세계에 자동으로 편입되는 것이었다면 새로운 해석에서는 부모 대의 악연으로부터 지젤과 미르트의 만남이 필연이 된다. 미르트는 보다 강력한 힘을 가진 빌리들의 여왕으로서 가공할 만한 분노의 위력을 보여주는데, 도망가는 힐라리온에게 몸을 던져 올라타 두 다리로 압박하는 장면은 실시간으로 펼쳐지는 공연예술에서만 맛볼 수 있는 생생함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힐라리온이나 바틸드까지, 배회하는 주변 인물들의 존재감을 골고루 끌어올린 노력에도 불구하고, 절대적 힘을 가진 물질인 크리스탈에 의존한 구원은 결과적으로 새로운 캐릭터들이 갖춘 미덕을 약화시키고 말았다. 인물들의 속사정은 파헤쳐졌으되 어느 하나 제대로 화해를 이루지 못하고 서둘러 수습한 셈이다. 남자들의 생명을 앗는 처녀귀신들의 분노에 정당함을 부여할 정도로 연민을 가진 시각이라면, 그들이 말 못할 내면의 아픔을 토로하는 자기성찰적인 장면도 넣는 것이 균형이 맞을 것 같다.
 예전에 〈전설의 고향〉 같은 드라마를 보면, 귀신들도 사람을 해쳐서는 안 되는 것을 알지만 깊게 장착된 원념(怨念)이 제어가 되지 않아 반복하여 죄를 짓는데, 그 억울한 사연을 알아주고 해결해주는 현명한 사람이 등장하면 스스로 풀고 물러나곤 했다. 귀신과 사람의 차이는 영육(靈肉)의 분리에 있을 뿐 인지상정에는 경계가 없다는 우리식의 관점이 어쩌면 ‘한국적인 지젤’로 나아가는 키워드가 되지 않을까 싶다.




 한편 원작의 2막에서 빌리들이 두 발을 뒤로 들어 올려 겅중겅중 콩콩 뛰어오르는 특징적인 동작을 이번 1막 지젤의 부족 사람들의 동작으로 이어받은 것은 두 작품 간의 연결고리를 남겨 둔 안무가의 센스로 읽혔다. 울탄-베르트, 지젤-알브레히트-힐라리온의 춤에서 아라베스크 상태에서 발목을 잡아 끌어당기는 구애의 동작이 이어진 것도 인생유전(人生流轉)을 떠올리게 하는 쓸쓸함이 있었다. 알브레히트가 바위산 속에서 등장한 순간 장엄하고 화려하게 빛났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풍의 음악이라던가, 죽은 지젤을 자동으로 일으켜 세운 무대 장치나 와이어의 적극적인 사용 등은 특히 인상적으로 기억된다. 서로를 얽어 대형 스크럼을 짠 군무는 1막과 2막에 공히 등장했다. 가느다란 여성무용수들의 팔이 차곡차곡 얽혀 아름다웠던 2막의 것에 비해 1막의 것은 덩어리만 큰 채 둔한 움직임으로 답답한 느낌을 주어 그 노력에 비해 효과적이지 못했던 듯하다. 알브레히트 부족과 지젤 부족이 마주쳤을 때, 지젤 부족민들이 춘 강렬한 군무는 〈스파르타쿠스〉 2막 노예들의 봉기 장면을 연상시키는 바가 있었는데 위세를 과시하고도 곧 친선무드로 이어지는 과정이 급작스러워 개연성이 부족해보였다. 이질성 자체만 목적으로 둔다면 성공적이라 하겠으나, 지나치게 번쩍거린 알브레히트 부족의 금속성 복장도 부자연스럽고 과한 느낌이었다.




 평자가 관람한 16일 공연의 지젤은 황혜민이, 알브레히트는 콘스탄틴 노보셀로프가 맡았다. 가냘픈 부피감으로 처연하고 가련한 여주인공역에 단골인 황혜민은 귀엽고 사랑스러운 면모를 드러내며 보다 밝고 자유로워보였다. 작품의 외적인 성공 여부를 떠나 인물에 대한 새로운 해석들을 자주 접하면서 무용수들의 연기에 다양한 측면이 배가되는 것만으로도, 이런 창작 작업이 뛰어난 자질을 갖춘 무용수들을 보유하기 위해 발레단으로서 충분히 시도할 만한 가치가 있는 작업이라고 느끼게 된 부분이다. 반면 노보셀로프는 해석의 정착점을 찾지 못하고 부유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다른 인물들에 공들이느라 상대적으로 알브레히트가 밀려난 이번 버전의 문제인지, 인물에 파고들지 못하는 무용수의 문제인지는 단언하기 어렵다. 공연이 막을 내릴 때, 절대 힘을 지닌 크리스탈이 일방적으로 선사한 구원 속에서 알브레히트가 과연 헌신하는 사랑을 제대로 배웠을까 의문이 남았다. 그리고 힐라리온과 미르트 역을 말 그대로 몸을 던져 열연한 리앙 시후아이와 예 페이페이를 발견하게 된 것은 새로운 수확이었다.




 ‘제대로 한국적인’ 〈지젤〉은 후속 작업으로 더욱 농밀함을 더할 때 가능한 이야기이겠지만, 적어도 안무가를 비롯하여 작곡가, 무대 디자이너, 의상 디자이너 등 호주 스태프들이 유니버설발레단 측이 원한 부분을 적극 수용하고 반영하려 애쓴 흔적이 보여 협업 자체는 긍정적인 성과를 낳았다고 생각한다. 한국형 창작 발레의 탄생을 위한 유니버설발레단의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

2015. 07.
사진제공_유니버설발레단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