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새로운 경험’ 만끽?
“국립현대무용단은 동시대적인 춤을 통해 역사적, 사회적, 일상적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계층과 지역, 세대를 아울러 모두가 함께 참여하고 즐기는 현대무용의 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합니다.” 프로그램 2쪽에서 나온 이사장 인사말의 첫 마디이다. “기존의 서있던 자리를 다른 각도에서 낯설게 바라보기,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일. 이는 국립현대무용단에서 추진하는 해외안무가 교류 프로젝트의 의의이기도 하거니와 예술이 우리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는 방식의 한 가지이기도 할 것입니다... (중략)... 안과 밖, 여기와 저기가 치열한 과정을 거쳐 이룩한 대화의 현장에서 겪게 될 유일하고도 새로운 경험을 마음껏 만끽하시길 바랍니다” 3쪽에 나와 있는 안애순 예술감독의 인사말이다.
상식적 수준의 겉치레 인사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망스러운 공연을 보고난 후 도대체 왜 이런 공연이 무대에 올려지게 되었는지를 궁금해 하면서 프로그램북을 들춰보았을 때, 발췌한 문장에서 무책임과 불분명한 방향성의 포장지들을 발견하였고 어느 정도 의아함이 풀렸다. 이 단체의 예술감독과 이사진은 많은 걸 갖추지 못했거나 놓치고 국립현대무용단이라는 배를 몰고 있다는 것이다.
국립현대무용단의 성격 상 해외안무가 초청 프로젝트는 2010년 창단 때부터 논란의 중심이었다. 이미 국립무용단이나 발레단에서 유수한 안무가들을 초청하여 한국적인 콘텐츠를 그들의 능력을 통해 생산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현대무용단은 상대적으로 많은 기대를 하게 해서인지 그간의 초청사례는 초청안무가의 국제적 위상과 능력의 적합성 문제나 교류의 의의와 목적의 측면에서 득보다는 실이 많은 일회적이고 소모적인 국고의 낭비라는 비난을 면치 못해왔었다.
그런 징크스 때문인지 두번째 감독을 맞아 많은 부분 안정화에 접어들고 있다는 안도감 속에서 이번 ‘바깥-레지던시’는 그야말로 그간 어느 초청 안무가보다도 공연 결과에서 실패하였고 그 실패의 원인을 짚어보게 만들었다.
벌거벗은 임금님 놀이, 언제까지 할 것인가?
한 작품 당 50여분 정도의 공연시간과 중간 휴식시간을 포함하여 2시간에 달하는 공연은 아무리 훌륭해도 그리 즐거울 수 만은 없는 길이였다. 예술감독이 제시한 명분을 수용해서라도 성실하게 즐기고자 했던 일반 관객이 얼마나 있었을까 싶지만, 객석에서 느낀 공연은 무참하게 지루하고 생기가 없었다.
벤 리페의 <오프닝-태도의 전시>는 흰 티에 청바지를 경쾌하게 입은 무용수들이 흰 테이프를 들고 플로어 위에 사선으로 교차적으로 구획선을 바닥에 붙이면서 시작된다. 이 작품은 제목에서 그대로 드러나듯이 무대 위에 존재하는 것들의 모습과 관계, 태도를 그대로 전시하겠다는 의도를 분명히 하고 그 초점을 견지해 나가는 깔끔함을 보인다. 특히 벤 리페는 공간, 의상, 음악, 무용수의 몸, 움직임, 조명 등의 (순수)예술의 장르와 범주의 다른 질감들이 교차하고 공존하는데 관심이 있다. 그의 이런 초점은 예술에 대한 역사적, 개념적 인식을 균형적으로 갖고 있으며, 그 위에 자신의 의도를 덧붙이는 안정적인 방법으로 구사된다. 무대를 실험실로 보고 그 위해서 서로 작용이 일어나는 현장을 보이겠다는 의도가 읽힌다. 그리고 어느 정도 그 의도는 실현되었고 관객은 그 작용이 일어나는 현장에서 공연과 전시의 두 방식이 교차하고 공존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문제는 그 실험이 현장적이어서 살아있는 것이긴 했지만 그리 새로울 것도, 특이 할 것도 없었다는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선보이는 똘똘한 신인안무가의 수준 정도랄까? 개념과 입장은 분명하나 무대 위에서 재료들을 감당하지 못하여 의도적이고 솜씨있는 충돌과 공존의 다양한 방식을 보여주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실력이었다. 말하자면 예술 장르를 재료로 하는 ‘기본 실험’ 정도의 수준이었고, 장르 충돌이 이미 익숙한 가운데 그 정도의 소극적 실험을 통해 새로운 가치나 진리가 탄생할 리 없는 실험일 뿐이었다. 게다가 춤이나 몸에 대한 어떤 새로운 통찰이나 실력을 찾아 볼 수 없어서 굳이 ‘국립현대무용단’의 관객에게 새로운 경험을 주기 위한 명목에는 적합지 않는 수준의 안무가였다.
중세 의상의 특징과 한복의 특징이 혼성되어 새로운 디자인을 만들어 내는 것이 그것을 주제로 한 패션쇼보다 새로울 게 뭐가 있으며, 여러 소품과 오브제가 우리 무용수의 몸들을 살아 있는 마네킹 정도로 사용하여 걸쳐진 들 그 교차와 혼성이 우리에게 새로울 게 뭐가 있으며, 무용수들의 몸을 보이게 하겠다고 얼굴에 테이프를 붙이고 머리를 뒤집어 얼굴을 가린 들 그 몸에서 우린 무슨 새로움을 느낀단 말인가? 정돈되지 못해 쩔쩔매는 작품을 50분 동안 마치 가격에 맞는 시간을 채워야 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예술가에게나 관객에게 전혀 즐겁지 않은 시간을 전시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 공연에 대해 어떤 멋진 작품 제작노트가 있건, 어떤 언술로 폼을 잡고 안무가와의 대화를 하던 그건 임금님이 벌거벗고 흉측한 살과 몸매를 드러낸 장면의 진실을 숨길 수는 없는 법이다.
두 번 째 공연은 요헨 롤러의 <그림문자> 라는 작품이었다. 무용수들이 움직임으로 그림을 그리는 개념으로 “안무적 쓰고 지우기(choreographical palimpsest)”란 설명을 붙여 “골드 의상을 입은 무용수들의 신체는 무대의 하얀 배경 막에 대비되어 연금술적 상상력을 구현해내는 유체물질처럼 보이도록 했다”고 한다. 이 작품에 대한 비평을 위해 또다시 지면과 시간을 할애한다는 것이 새삼 아깝다. 한마디로 언급할 가치도 없이 실패한 작품이었다는 말이다.
연금술적 신비(Alchemic mistery)는 아무나 만들어내나? 금색 크레파스가 뿌러질 때까지 도화지에 금색으로 떡칠을 해놓은 초등학생이 몽환적인 눈빛으로 “엄마가 금이 갖고 싶데요. 엄마를 위해 그렸어요. 금이 튀어나올 것만 같아요” 라고 하면 감동스럽고 귀엽기라도 할 거 같다. 시골 장날 가판에서 다방 언니들이 특별한 날 입을 것만 같은 옷들만을 모아서 체격에 대한 어떤 고려도 없이 무용수들 한테 입혀 놓고는, 무용수들이 할 수 있는 동작들만 풀어내서 어떤 형식적 변주 없이 무한 반복시키는 작품에서 문자에 대한 어떤 연구와 예술적 통찰이 있었는지, "안무적 쓰고 지우기"가 이 춤 작품에서만 왜 새로운 일이 되는지, 금색과 연금술은 어떤 관계인지 묻고 싶어진다.
게다가 그는 마지막 공연이 끝나기도 전에, 관객과의 대화도 피한 채 벌써 출국을 해버렸다. 물론 그런 작품을 올려놓고 그 장면을 보고 있는 것이 고육지책(苦肉之策)의 심정이었을 것임은 이해할 수 있으나 이유야 어떻든 최소한의 예의도 갖추지 못한 처사에 또 한 번 놀랐다. 그가 공연에 나온 금색의상을 입고 혼자 솔로를 추는 상상을 해본다.
현대의 공연은 공연과 공연 외의 것이 닫힌 구조가 아니어서 공연 이외의 것들을 참조하는 것에서 자유롭다. 그래서 공연 앞뒤에 여타의 장치들이 공연에 들락날락 한다. 즉 프로그램 북에 공연 주최 측의 의도가 공연이해의 틀을 제공하며, 안무가의 작업노트도 공연에 매력을 느끼고 접근하게 해준다. 그리고 공연 후 예술가와의 대화를 통해 직접 예술가의 육성을 들으면서 작품 이해에 깊이를 더해간다.
그러나 이날 공연의 ‘관객과의 대화’ 역시 준비되지 않은 여러 모습으로 실망을 안겨주었다. 패널(공연학자 손옥주)의 질문이 벤 리페와의 소통에 장애를 일으켰고 그는 패널의 자의적인 규정과 정확치 않은 언급에 꼼꼼히 수정을 가했다. 벤 리페가 인내심 있고 성실한 자세를 견지했음에도 관객입장에서 뭔가가 불편했다. 국립현대무용단이 왜 지금 이런 류의 독일안무가를 데려와 공연하는 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설명을 덧붙이면서 관객과 소통했다면 현대예술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교육적 측면에서 충분히 의의가 있는 대화였을 것이다. 그러나 ‘관객과의 대화’ 역시 그런 기능을 할 만큼 설정되거나 준비되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왜 이런 일이?, 누가 어떻게 책임 질 것인가?
단체나 축제의 예술감독은 예술적 식견과 감식안, 예술적 가치관에 대한 신뢰로 인정받고 생존하는 지위이다. 예술감독의 식견, 안목, 판단에 대한 인정과 믿음이 관객에게는 공연을 믿고 갈 수 있도록 작용하고, 예술가에게는 자신을 바쳐 그 곳에 가서 기쁘게 공연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말하자면 공연이 훌륭해서 관객이 만족했다면 그 예술감독의 감각과 판단이 훌륭하다고 인정을 받고 신뢰를 얻게 되는 것이고, 아니라면 감독의 능력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수준이하의 공연 폭탄을 맞게 되었을까에 대한 답은 자명해 진다.
공공성을 근간으로 하는 국립단체에서 적지 않은 세금으로 해외 안무가에게 투자할 경우 우리가 얻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 최상의 시나리오는 그렇게 제작된 작품이 해외에 지속적으로 팔려 우리의 크레딧이 알려지고 우리 무용수들과 제작진이 많은 경험을 하게 되는 상황일 것이고, 최악의 시나리오는 작품이 실패하여 단지 국내외에서 몇 회의 공연만 되고 끝나 본전 생각이 나게 될 경우일 것이다. 국내 안무가라면 공부의 기회에 투자를 했다는 위안이라도 되지만 해외 안무가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번 ‘바깥-레지던시’의 부족함은 국립현대무용단의 공공성을 되돌아보고, 자국의 입장에서 비전과 미션을 갖고 있는지 확인하는 기회로 삼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과정을 되돌아보아 안무가 선정과 제작과정에 대해 예술감독과 선정 책임을 나눠 갖는 이사회, 현대무용단이라는 거대한 배를 움직이는 사무국, 경영팀, 기획팀, 제작팀, 교육 및 리서치 등(총 26명)도 함께 문제를 분석하고 해결하려는 노력을 다음 기회에 보여주는 게 필요할 것이다.
창의적 작업이 마치 신비의 영역이어서 오묘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제작과정은 사람들이 깨어있는 동안 행하는 활동의 보편성을 피해가지 못한다. 국립현대무용단의 업무는 한국적 현 상황에 대한 분석과 탐구, 자체 역량에 대한 객관적 판단, 그에 맞는 기한과 목표를 정하고 프로젝트의 내용과 창작자를 선정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의 프로젝트마다 냉정하고 객관적인 평가를 하여 피드백하고, 다음 과정을 다시 조정하고 재구성하는 상승 순환하는 업무의 모형을 갖추는 것과 ‘제작 매뉴얼’을 구체화시키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래야 어디서 문제가 발생하는 지, 자체 약점은 무엇이고 강점은 무엇인지가 드러날 것이며 책임의 분명한 소재와 건강한 해결지점, 예술가에게만 휘둘릴 위험성 등이 조정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4월 한국춤비평가협회 신춘포럼에서 발제를 맡아 <2015년 공공직업무용단 어디로 갈 것인가? - 공공성의 나침반 꺼내기>라는 제호로 발제를 한 적이 있다. 자료조사를 위해 현재 우리나라 국공립 무용단의 홈페이지를 방문하여 단체의 연혁을 살피던 중 의아한 사실을 발견했다. 국립현대무용단 홈페이지에서 단체의 연혁을 발견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최소한 국립현대무용단이 몇 년도에 어떤 과정을 거쳐 설립되었으며 초대 예술감독과 이사진은 누구였으며 그들의 책임 하에 어떤 작품들이 제작되고 공연되었는지가 드러나야 하는 건 당연한 일 일진데 그걸 전혀 찾을 수 없었다. 단체의 누군가에게 전달했지만 이 글을 쓰는 현재에도 아직 보완되지 않고 있다. 국립현대무용단은 소녀스러운 동화쓰기에서 깨어나 “계층과 지역, 세대를 아울러 모두가 함께 참여하고 즐기는 현대무용의 환경을 만들기 위”한 공공성 담긴 비전과 미션에 대해 고민하고 공표하고 공론화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