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봄에 올리는 춤 공연은 봄에 피는 꽃과 같다. 겨우내 꽃눈을 감춘 채 추위를 견디며 만개의 꿈을 키우듯이, 떠오른 춤의 영감을 구현하기 위해 머리 속에서 수없이 춤을 그렸다가 지우고, 또 몸으로 만든 장면들을 고르고 고른 후에 무대 위에 펼쳐낸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피어났다 바람결에 사라지는 봄꽃들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만 남아있듯, 무대 위에 피운 춤의 꽃들은 추어지는 순간 사라지며 관객의 기억 속에서 명멸(明滅)한다.
4월 한달 동안 국립국악원 풍류사랑방의 ‘수요춤전’, ‘고종대례의 - 대한의 하늘’(16-18일 국립국악원 예악당), 장현수의 ‘수정흥무(守丁興舞)’(17-18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여섯 번째 ‘배꽃춤판’(23일, 강동아트센터), 정신혜의 ‘세상을 춤추다’(25일, 예악당), 4회 ‘한국예인의 명작명무전’(26일, 예악당) 등이 서울 일원에서 올려진 전통춤 관련 공연들이었다.
이중 몇몇 공연들은 전통춤을 스승으로부터 배운 그대로 추지 않고, 재구성하거나 자신의 해석으로 춘 무대란 점에서 눈길을 끌었다.
국립국악원정악단(예술감독 정재국)과 무용단(예술감독 한명옥)이 상반기 정기공연으로 올린 ‘고종대례의(高宗大禮儀) - 대한의 하늘’은 가무악 뿐만이 아니라 배우들의 연기와 영상이 결합하여 2시간 가령 장엄하고 다채롭게 펼쳐졌다. 1897년 고종이 황제국임을 천명하며 대한제국의 황제로 등극했는데, 『고종대례의궤』의 기록을 근거로 이 과정을 작품화한 무대였다. 당시에 6일간 행한 23과정의 의례를 그대로 재현하기는 불가능하므로 핵심적인 5과정을 중심으로, 황제 등극 이전에 하늘에 알리는 ‘친사원구의(親祀圜丘儀)’, 원구제를 행한 후 이어지는 ‘황제등극의(皇帝登極儀)’, 경운궁의 태극전에서 백관의 축하와 표문을 받은 ‘수백관하표의(受百官賀表儀)’, 그리고 황후와 황태자를 책봉하는 의례인 ‘책황후의(冊皇后儀)’와 ‘책황태자의(冊皇太子儀)’가 진행되었고, 각 예식에 가무악이 연행되었다.
친사원구의에서는 일무 중에 <문무>가, 황제등극의에는 음악 <수제천>이, 수백관하표의에는 정재 <봉래의>가. 책봉의에 정재 <쌍육화대>가, 에필로그의 알현식에는 재구성 정재 <대한의 꿈>이 연행되었다. 이 정재들은 각 의례의 의미에 부합하게 설정되었고, 순조롭게 연행되었다.
그 중 마지막 장면 알현식 후에 이 작품의 주제이자 대미로 추어진 <대한의 꿈>은 새로운 제목의 재구성 정재였다. <대한의 꿈>은 국립국악원무용단 안무자 최경자가 재구성했다. 기존의 정재 <무고>, <가인전목단>, <헌선도>에서 춤 동작들과 무구, 여러 상징들을 가져왔다.
<가인전목단>을 가져온 것은 꽃 중의 꽃이며 부귀를 상징하는 모란꽃을 통해 부귀와 고귀함을 표현함으로서, 대한제국의 위상을 드높이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무고는 큰 북을 두 개 놓아 <쌍무고>로 성대함을 배가시켰고, 무대 좌우와 뒤 부분에 후대 무고 12개를 추가로 배치하였다. 후대무고는 기존의 정재에는 없는 장치이며 역할이다. 하지만 무대에 북을 둘러쳐서 무대를 채움과 동시에 북소리의 울림이 만천하에 웅장하게 울려 퍼지라는 의미를 보여주었다. 또 마지막에 <춘대옥촉>의 무구인 보등(寶燈)을 밝히며 <헌선도>의 신선의 복숭아(仙桃)를 고종황제에게 바치게 했으니, 이는 보등을 밝혀 대한제국의 앞날을 밝힘과 동시에 선도를 바치며 고종황제의 장수와 대한제국의 번영을 기원한 것이다.
<대한의 꿈>에는 창사도 불려졌다. “대한제국 대한지천 영원무궁하라 대한의 하늘”이라는 가사는 대한제국을 천명하고 그 감격을 담은 내용으로 무용수 전원이 노래했다. <대한의 꿈>은 이렇게 기존 정재의 춤사위와 창사 등으로 구성하고, 여러 상징과 장치들을 토대로 재구성하여 새롭게 선보인 정재였다.
국립국악원무용단은 궁중정재의 본원으로서 궁중무들을 전승했으며, 또한 국가 행사나 정기공연에서 재구성하거나 창작한 정재를 발표했었다. 무용극 장영실전에서 <화평지무(和平之舞)>(1991, 문일지 안무)를, 6차 정부혁신 세계포럼 개막식에서 <화고지무(花鼓之舞)>(2005)와 한글날 축하공연에서 <정음만무(正音漫舞)>(2009, 이상 하루미 안무)를 창작했고, 무용단 정기공연 ‘고을사 월하보’(2007)와 ‘전통의 경계를 넘어-궁중무용의 변주’(2012)에서 총 13개 작품을 창작했다. 이러한 성과들과 예술적 고민들은 기존 정재의 내용과 형식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대한의 꿈> 역시 재구성 안무한 정재였으며, 앞으로 만들어질 창작 정재의 선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국립무용단 단원인 장현수의 ‘수정흥무(守丁興舞)’도 흥미로운 공연이었다. 공연의 컨셉트를 처음부터 전통춤의 재해석으로 설정하고, 한영숙류 <태평무>, 조흥동류 <한량무>, 배정혜류 <흥풀이춤>, 국수호류 <입춤>에 자신의 색깔을 입혔다. 단순히 구성이나 춤사위의 재구성 뿐 만이 아니라, 춤 반주도 기존의 전통춤 반주 외에 정가나 민요, 첼로 반주 등을 새롭게 시도했다. 무대의 장치와 조명 등에도 스토리를 담으면서 현대적 감각으로 풀어냈다.
국수호류 입춤을 다르게 춘 <미학>의 경우 입춤을 교방무로 해석해 역사의 흐름 속에 삶의 질곡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여인의 고뇌를 표현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이 춤이 작품 의도를 충분히 표현했는지는 의문이지만, 그녀는 첼로 반주로 등장하여 춤추다가 거문고 반주로 바뀌며 이 춤의 몸통을 춤추었고, 후반에서 무대 상수 쪽에 펴놓았던 우리의 전통우산을 들어 춤의 도구로 사용했다. 조명은 특정한 이미지를 계속 무대 위에 뿌려주었다.
이 정도라면 국수호류 입춤을 다르게 춘 <미학>은 거의 창작춤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프로그램 중 창작의 요소가 가장 많았던 작품이었다. 그런데 이 공연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바는 전통춤 공연에 대한 장현수의 기획의도이다. 근래의 전통춤 공연이 일률적으로 행해지고 있다는 문제의식과 함께, 이를 벗어나기 위해 자기 고유의 색깔을 입혀 본인의 춤으로 추어보겠다는 예술적 발의(發意)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전통춤 공연에서 현재 극장 무대의 메카니즘을 총동원해서 전통춤을 다르게 추어내고자 했다.
이 같은 공연 양식은 전통춤 공연을 ‘춘하추동’이니, ‘매란국죽’이니, ‘희노애락’이니 하는 4부 내지는 3부 구성으로 틀을 잡고, 전통춤 프로그램들을 적당한 브릿지로 연결한 채, 그대로 보여주는 공연의 방식과는 다르다. 국립무용단 20년의 다양한 무대 경험이 이를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그런 중에도 그녀는 전통춤의 호흡을 능숙하게 구사하였고, 서양악이나 정가의 긴 소리가락에서도 춤의 속장단을 놓치지 않았다.
여섯 번째 ‘배꽃춤판’(예술감독 김은이)의 무대에서도 색다른 살풀이춤을 보았다. ‘배꽃춤판’의 프로그램은 임학선의 <문묘일무>, 김현숙의 <태평무>, 남수정의 이매방류 <장검무>, 정혜진의 <장고춤>, 김용복의 <산조춤>, 이경화의 <소고춤>, 장해숙의 <살풀이춤>, 서영님의 <진도북춤>으로 구성되었고, 춤꾼들의 완숙한 춤이 이어졌다. 이 중에 남수정은 이매방 안무의 <장검무> 전에 도입 부분을 창작하여 가미했다.
장해숙은 그간 여러 스승의 살풀이춤을 근간으로 자신의 <살풀이춤>을 추었다.
무대 상수 쪽에서 수건을 접어들고 사선의 뒷모습으로 춤을 시작했는데, 굿거리 끝 무렵에 수건을 떨구고 손춤을 추다가 자진모리가 시작하자 엎드리지 않고 수건을 그대로 걷어올려 추었으며, 한껏 자진모리를 끌어올린 후 수건을 바닥에 떨구어 놓은 채 사선의 뒷모습으로 걸어가며 조명이 아웃되었다. 이러한 구성은 기존의 <살풀이춤>과는 다르다. 기존의 방식대로 떨어뜨린 수건을 엎드려서 한참 어르다가 집어올리지 않았고, 수건을 펴들어 안으며 서있는 포즈로 마무리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장해숙의 <살풀이춤>에는 기교적인 수건 사위가 많지 않고 몸의 비틀림이 많지 않았으며, 미묘한 호흡을 구사하다가, 턱 내려놓는 숨으로 넘어가기도 했다. 두 팔을 올려 수건을 떠받든 춤사위나, 수건을 양손에 나뉘어 쥐어 짧아진 수건으로 담백한 수건사위를 놀았고, 자진모리에서는 긴 수건으로 뿌리며 풀어냈다. 그렇게 비워낸 <살풀이춤>을 추었다.
국립국악원무용단의 재구성 정재 <대한의 꿈>이나, ‘수정흥무’에서 보여준 극장 무대 메카니즘을 활용한 전통춤에 대한 적극적인 접근방식과 재해석, 그리고 기존 전통춤의 구성과는 다른 차별적인 의미부여와 비워낸 컨셉트의 <살풀이춤>은 전통춤이 관객과 어떻게 만날 것인가에 대한 예술적 고민을 고스란히 보여준 흥미진진한 무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