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쥴렝 프렐조카주의 〈Snow White〉(11월 14-16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내한 공연은 구스타프 말러의 음악과 장 폴 고티에라는 거장들과 함께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문화계의 이목을 끌었다. 여기에 2009년 프랑스 언론(글로브 드 크리스탈)에서 최고상을 받기도 하였거니와 세계 여러 극장에서 러브콜을 받는 작품에 국내 굵직한 카드회사 초청으로 이뤄진 행사 마켓팅도 한 몫 한 듯하다.
국내 관객들에게 고전발레의 입지는 어느 정도 단단해졌기에 이제는 컨템포러리 발레를 수용할 수 있다는 기획적 판단은 시의적절하다는 생각이다.
‘백설공주’ 동화를 발레로 만들고자 한 시도는 1902년 마리우스 프티파의 시도가 실패한 이후 성공한 사례가 없었다고 한다. 유일무이하게 프렐조카주가 백설공주의 전형적인 이미지를 벗어나게 한 시도라고 해도 무리가 없겠다. 그가 재해석한 〈Snow White〉는 공주를 향한 왕비의 자아도취적인 욕망(아동심학자 베텔하임의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백설공주에게로 투영)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며,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디즈니 동화가 아니라 그림 형제의 원작을 기초로 프렐조카주의 현대적인 코드로 해석한 것이다.
프렐조카주는 공주의 성격을 재해석하였는데, 전통적인 여성상인 수동적인 사랑을 기다리는 소극적인 성격이 아니라 여자가 봐도 관능미 넘치는 육체를 소유하였고 왕자에게 적극적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거침없는 인물로 묘사되었다. 여기에 하얀 훈도시를 입은 공주의 파격적인 드레스는 성적인 매력을 적극적으로 과시하는 모습으로 보인다. 게다가 자신을 위협했던 왕비에게는 쇠로 달군 구두를 신겨 죽을 때 까지 춤추게 하는 책임을 묻는 착한 공주만이 아닌 야무진 캐릭터이다.
또 다른 주요 인물인 왕비의 성격은 에로티시즘에 집착한 아이콘으로 현대인의 억압된 욕망과 집착을 대변하고 있다. 압박감을 상징하는 꽉 조인 검정 수영복과 하이힐, 과장된 어깨 망토와 벨트는 공격적인 느낌과 위협감을 주는 모습이다. 강렬한 대비를 이루는 공주와 왕비에 비하여 왕자의 캐릭터는 상대적으로 크게 부각되지는 않지만 순애보의 캐릭터로 무난한 설정이다. 재미있는 것은 훤칠하고 귀족적인 자태가 아니라 군무진의 한 사람이라고 해도 무색할 정도로 평범한 모습의 인물이라 할 것이다.
전반적으로 어두운 분위기를 연출한 〈Snow White〉는 한마디로 현대무용에 익숙하지 않은 대중들에게 공감되는 현실적인 캐릭터 해석과 연출적인 볼거리를 무난하게 펼친 어른을 위한 동화이다.
특히 인상적인 장면은 왕비가 독사과를 공주에게 위협하며 강제로 먹이는 그로테스크한 부분이다. 일말의 갈등도 없어 보이는 과감한 동작은 냉정함과 비정함이 동시에 보였고, 원작과는 달리 먹음직스런 사과를 선택할 시간도 주지 않고 가히 폭력적인 힘을 과시한 것이다. 이러한 왕비의 발작적 증세는 쇠로 달군 구두를 신고 무대 막이 내려올 때까지 점프를 뛰어대는 모습과도 일관되게 연결된다.
매 장면마다 볼거리도 쏠쏠하였다. 난쟁이들을 암벽 배경 구멍 속에서 등장시켜 자유자재로 벽을 타는 장면은 헤리포터 이야기에 등장할 법한 신화적 상상력을 발휘하였고, 숲 영상이 주는 환영적 이미지도 볼 만 하였다.
특히 죽은 백설공주를 와이어로 부양시켜 강조한다거나 시체와 춤추는 왕자와의 파드되는 살아있는 몸과 죽은 몸이 대비되며 스산하면서도 절절한 마음도 전달되는 영리한 설정이라 생각된다. 백설공주의 응징을 받아 왕비가 미쳐 날뛰는 마지막 장면도 중세시대 무도병이 연상되며 광적인 욕망의 결말을 강렬하게 각인시키는데 효과적이었다.
프렐조카주의 많은 작품들은 현대인의 실존성에 화두를 던진다. 춤의 주제로 다루기 녹록치 않은 충동적 본성에서부터 종교적 이념까지 아우르는 그의 통찰력은 춤과 몸으로 드러낼 수 있는 특성을 포착하여 효과적으로 증명해 내는 안무가임을 입증한다.
특히 그의 놀라운 능력은 인간의 본성을 파헤쳐 놓으면서도 자정(自淨)적인 여지를 열어놓는 깊은 사유라 할 것이다. 한국에서 선보였던 <봄의 제전>(2003년)과 <그리고, 천 년의 평화>(2012년)가 대표적인 작품이다. <봄의 제전>에서는 인간의 폭력적 본성의 극단을 벌거벗은 몸으로 제단 하였고, <그리고, 천 년의 평화>에서는 성경의 재앙적 징후를 빗대어 휴머니즘적 인간성의 복원을 제시하였다.
변칙적이며 이중적인 의미의 오브제 사용, 자극적인 설정 속에 숨어 있는 생성적인 에너지를 발산하는 움직임 그리고 이를 포용한 함의 가득한 표현과 진지한 삶에 대한 해석력을 그의 작품에서 기대하는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니다.
이러한 전작에 비추어볼 때, 프렐조카주가 설정한 〈Snow White〉 해석은 전반적으로 디즈니 동화에 등장하는 공주, 왕자, 왕비라는 선악구도와 사랑의 힘이 승리하는 서정적인 결말이라는 큰 틀에서 벗어나 있지는 않다.
이런 점 때문에 그를 앙망하는 전문 팬들에게는 내러티브 해석이 싱겁게 보일 수도 있으며, 파격적인 전위성이 의상 외에 춤과 오브제에서 약해보였던 것도 사실이다. 물론 클래식 발레에 기초한 고른 기량, 와이어를 이용한 기술력, 여러 번뜩이는 아이디어는 흥미로웠고 유연한 장면의 전환은 부족함이 없었다.
또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은 물론 디아길레프가 피가소나 코코 샤넬과 이미 오래전부터 협업한 예가 있지만, 최근 각 장르의 유명 인사들과의 협업은 불황인 춤계에 어떤 긍정적인 효과를 줄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국립무용단의 <토너먼트>의 경우도 환상적인 의상과 과도한 신화적 이미지가 강렬하여 춤꾼들의 기량이 빛을 발하지 못했고, 벵자멩 밀피예의 <리플렉션>도 개념주의 미술가 바바라 크루거와 데이비드 랭의 곡을 선택한 대대적인 홍보에 비해 발레의 바리에이션의 유연한 연결성 이상의 무엇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각 장르에서 내로라하는 인사들과의 협업은 다수 대중들의 호기심을 일으킬 수는 있으나 그 작품에서 춤으로 이끌어내는 시너지 없이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결론으로 돌아오게 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프렐조카주가 2000년대 이후 추상발레인 <엠티 무브즈> 및 <엘도라도>에 주력하다가 환상적인 작품을 하고 싶은 충동으로 2008년 만든 〈Snow White〉는 내러티브상으론 환상적인 서정성을 갖추고 있다. 또한, 성적과시와 우월감을 유지시키기 위한 왕비의 극단적 정서와 응징당하는 결말도 현실감이 있다.
다만, 왕비의 시선에 초점이 맞춰져 관능적인 면이 과도하게 부각되어, 그가 의도했던 환상적인 공주와 왕자의 서정적인 정서가 덜 조명된 부분은 아쉬움이 있다. 물론 원작의 기조와 크게 다르지 않은 구조가 주요 원인이기는 하지만 (이 부분은 안무가의 자유로운 영역이기는 하다) 전체적인 작품에서 명망 있는 예술가들과 협업으로 일궈낸 총제적인 아우라가 느껴지지 않았던 것은 프렐조카주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필자의 기대가 너무 컷던 탓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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