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진 <봄의 제전>
올 봄이 우리 모두에게, 특히 예술가들에게 특히 견디기 힘든 봄이었다는 건 특별한 일은 아니다. 아직까지도 사람들의 가슴 어딘가에 매달린 노란 리본이 눈에 뜨일 정도로 이 사건은 아직도 아물지 못하고 그대로 벌어져 있는 상처처럼 피 빛 그대로다.
많은 예술가들은 수많은 공연취소 사태로 이 사건의 멀지 않은 당사자가 되었으며, 뭐라 생각하기 이전에 자동반사적으로 그 아픔에 마음을 다치고, 그 아픔 한자락에라도 자신을 연결시키기 위해 자신만의 퍼포먼스를 이어가고 있다.
초기에 무용가들의 퍼포먼스가 자발적이면서 사회적인 행위로 나타났다면 시간이 지나 작품으로 나타나는 이 상처의 흔적은 조금 더 작품 안으로 스민 것으로 보인다.
2014 SPAF에 신작 초연으로 올려진 댄스씨어터 창의 <봄의 제전>(10월 10-11일, 대학로 예술극장소극장)은 세월호의 봄을 위한 안무가의 살풀이가 되어 그 원래의 의미와 정확하게 맞아 떨어진 작품이었다.
무대의 중앙에 북이 놓여 있고 다운증후군으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하얀 천사복장을 하고 북을 치고 있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여자 아이가 등장해 쌍을 이루며 시를 읊조린다. “예쁘다, 참 예쁘다..” 그들의 복장, 그들이 바라보는 마론 인형, 그들의 어투, 그리고 맥락없는 시적인 문장이 조합되면서 이 프롤로그의 비일상성은 제의의 시작이 되기에 충분했다.
얇고 베빛이 나는 광목으로 옷을 입은 무용수들이 ‘베 가르기’를 하면서 시작된 본론은 끊임없이 물과 관련된 이미지로 채워져 있다. 갈라지는 광목의 아래, 위를 오르락 거리는 여자무용수의 몸짓은 마치 물속과 물 위를 오가며 생사를 오가는 모습에서 시작해 작품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후반부는 무대 바닥에 물을 채우고 그 속에서 무용수들이 물속에서의 치열한 사투를 연상시키는 격렬함을 보여준다.
특히 이 작품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잔잔하게 시작해 점차 긴장스러울 수 밖에 없는 ‘제의’의 형태를 가져가면서도 중간에 가면을 쓰고 이 사태를 에워싸고 있는 사회의 모순과 그 당사자들의 얼굴을 사진화한 가면을 쓰고 희화화한 장면이다. 마당극에서 그대로 가져왔다 해도 무리가 없을 이 장면은 각 종교인들의 틀에 박힌 언사들과 맞물려 오바마, 브레드 피트, 안젤리나 졸리(왜 선택됐는지는 모르겠지만..) 등으로 분한 이들이 길지 않게 웃음으로 훑고 가는 미덕을 발휘했다. 이 부분은 문제의 원인이라 할 만한 것에 대한 풍자와 구체적인 지적이 되면서 무거울 수 밖에 없는 흐름에 이질성으로 긍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격렬한 물속에서의 한 바탕이 끝나고 다시 잔잔해진 바다에 던져진 비탄의 싯구와 그렇게 텅빈 바다에 남은 작은 일렁임과 거기에 놓여진 마론 인형, 그리고 그 위를 스치는 서치라이트의 움직임의 여운은 생각보다 강렬하고 길었다.
격렬했던 춤보다는 그 춤이 지나간 여운이 느껴지게끔 충분히 비워둔 시간과 공간의 힘은 그리 계산된 거 같아 보이지는 않았으나 그 폭발성에서 가히 비교할만한 장면이 생각나지 않는다. 이는 아마 우리 모두가 함께 겪은 공동의 상흔에 바탕을 둔 것이기 때문일텐데 그것을 포착해낸 안무가의 감각이 놀랍고 훌륭하다.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을 그대로 사용한 부분의 춤은 그리 복잡하지 않게 음악의 리듬과 힘을 충실하게 실어냈다. 몸을 물속에 던져 넣고, 미끄러지고, 머리를 제끼며 물을 튕기는 동작들은 그리 새롭진 않았으나 배경으로 하는 사건의 사실적 중심과 그것에 대한 제의임을 잊지 않게 하는 정도로 적절했다.
이 작품이 세월호 사건에서 우리가 느끼는 치유될 거 같지 않은 어이없는 충격과 그 파장에 대해 속수무책인 우리의 마음을 어느 정도는 위로하는 데 성공했다고 본다. 우리의 상황에 대해 우리의 예술가가 그것을 만들고, 우리가 그것을 보고 함께 느끼는 작품을 공연했다는 것은 공연과 제의, 예술과 제의를 하나로 연결시켜 공연이 하나의 제의가 되도록 했다는 것에, ‘봄의 제전’을 ‘봄에 일어난 그 일에 대한 제의’로 부활시켰다는 데 그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쉬움이 있다면, 관념으로 주제와 그 의미에 대한 것은 손색이 없도록 아귀가 맞아 떨어졌으나 하나의 작품으로서 그것이 얼마나 육화되고 체화되어 있느냐는 물음에는 답이 없었다. 그것은 작품을 가슴에 품고 버무리는 시간의 절대부족에 그 원인이 있을 수 도 있으며, 육화시키는 것을 최종의 목표로 두느냐 아니냐에 대한 안무가의 인식에 그 원인이 있을 수 있다.
안무가 김남진이 주제를 사회적인 것에서 포착해내는 힘과 그 조준력은 상당히 뛰어나지만 그것을 작품화하는 것에 대한 고민으로까지는 그 호흡이 아직 내려가지 않은 것 같다. 이는 특히 춤과 작품이 겉도는 것으로 나타나고, 작품이 하나로 흘러가며 역동성을 갖기에는 매끄럽지 못하다는 것으로 나타난다.
춤이 가진 힘은 그 타고난 제의성으로 인하여 춤만으로도 충분히 그 모든 것을 압축해서 담아낼 수 있다는 것일 것이다. 그럴 때에야 춤은 제의에 바쳐져도 좋을 그런 춤, 제의와 예술의 접점에서 두 가지를 충족시키는 춤이 되지 않을까?
이민경 & Joao Martins <봄의 제전 (2013)>
국립현대무용단의 2014년 주제는 ‘역사와 기억’이다. 공간사랑 컨템포러리 프로젝트 3부작의 마지막인 <결정적 순간들> 속에 퍼포먼스의 하나로 몽펠리에서 안무학 석사를 마친 이민경과 조아오의 <봄의 제전 (2013)> 공연이 2014년 10월 18일 국립현대무용단 스튜디오에서 열렸다.
작년에 만들어진 이 작품은 니진스키의 <봄의 제전> 100주년을 맞아 몇 개의 레지던스와 축제의 지원 속에서 제작되었으며 포르투갈에서 초연된 이래 두번째 공연이다. 그들의 공연 북클릿(상당한 양으로 리서치 과정과 자료가 포함되어 있어 소책자에 가깝다)에 의하면 현재까지 100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 작품은 300여명의 안무가들에 의해 재안무 되었으며 현재에도 안무되기로 예정된 작품도 많다. 이 작품을 구상하고 만들고, 춤을 추는 두명의 안무가는 ‘봄의 제전’에 대한 공연의 역사적 흐름을 조사하고 이 작품에서 마지막 죽음에 이르는 4분여의 안무에 주목하였다.
그들이 제의를 받아들이는 초점은 ‘죽을 때 까지 춤추기’이다. 원래의 뢰리히(Loerich)의 대본에서 집단을 위해 희생되는 처녀는 희생의 순간까지 춤을 추는 것으로 되어 있고 그 이후의 대부분의 작품에서도 장렬한 마지막 4분은 ‘죽음에 이르는 춤’으로 되어있는 작품들이 많다. 특히 이민경은 이 부분에 관심을 가지며 그들의 작품을 많은 안무가들의 작품 중 마지막 4분을 모아 놓는 것으로 구성하기로 한다.
이는 그들의 개념에 의하면 ‘도용’(appropriated)이나 ‘인용’(quoted)인데 남의 작품의 부분을 그대로 가져다 놓는다는 의미에서 그것을 표방하고 안무가들에게 편지를 보내 작품을 자신들의 안무작에서 사용해도 되는지에 대한 허락을 구했다고 한다.
대부분의 안무가들은 부분적으로 도용되는 것에 대해 거절하였고, 그들은 이미 공개된 작품들과 허락을 해준 작품들 10편 정도를 모아서 자신들의 <봄의 제전>을 구성하였다. 양측에 객석을 자리하고 이 남녀 무용수 둘은 번갈아 가며, 또는 한 무대에서 같은 순서를 추거나 듀엣을 추며 죽음에 이르는 4분의 향연을 1시간 30분 동안 펼친다. 그들이 반복해 가는 같은 음악의 다른 작품들의 연결을 위해 2명의 해설자가 무대의 측면에서 작품의 흐름을 돕고 작품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덧붙인다.
이민경과 조아오의 <봄의 제전 (2013)>은 봄의 제전에 대한 아카이브적 접근을 통하면서도 안무가의 자신만의 초점 – ‘죽음’과 ‘도용’-을 뚜렷이 하는 것으로 참신한 발상과 독특한 구성으로 봄의 제전을 현재에 살려내는 것에 성공하였다.
새로운 작품이 다른 작품을 텍스트로 하여 생성되는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의 좋은 모델로서 이 작품은 관객과의 관계에서도 고정적이고 규범적인 작품-관객, 작가-독자의 관계를 벗어난다.
관객은 이 작품 안에 숨은 10개의 봄의 제전을 만나고 해설이라는 장치를 통해 이 작품 전체를 또 다른 텍스트로서 만나게 됨으로써 작품과의 최대한의 접면을 갖는 새로운 관객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바야흐로 작가의 시선에만 의지한 채 작품의 환상성 속에 빠지는 분리된 독자의 시대는 확실하게 마감되고 그 모든 것을 거리감을 두고 본질로 다가갈 수 있도록 하는 공연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